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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율곡서예대전
 
 
 
카페 게시글
좋은글 스크랩 김해자 시집
소담 추천 0 조회 47 08.05.20 20: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play     전수연 ... Memory Of Heart   
 




* 벼랑 위의 사랑 - 김해자
- 크림트의 그림 '키스'를 보다

꽃밭이다 찬란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빚어낸 바닥에서 꽃이 된
남자의 황금빛 가슴 속에 묻혀 시간을 잊은
여자의 몸에서도 황금 잎사귀가 돋고
찰나의 시간에도 덩굴은 자라는데
여자의 발끝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와 여자의 눈은 감겨 있고
벼랑 위의 키스는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
벼랑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사랑은 필사적이고 벼랑은 완강하다
살아가는 일이 벼랑이라면 모든
사랑은 벼랑 끝에서만 핀다 지금
안전한 자여 안전한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저 심연을 보아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벼랑 끝에서 벼랑을 잊은 채 우리는
이 순간 영원이다 말하는
저 백척간두의 사랑


* 아름다운 복수 - 김해자

뜨거운 숨결 가득한 바다
물밑 모래펄에 굴조개가 살았다
언젠가부터 굴조개는 뱉어내기 시작했다
입 안 가득한 모래 알갱이며 썩은 침전물
그럴수록 몸속 깊이 파고드는 잔해
토해내고 뱉어내다 축 늘어져
굴조개는 껍질을 닫아버렸다
더 이상 숨쉴 수조차 없어

이제 적은 안에 있다
도망갈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남은 것은 온살 켜켜이 파고든
이물질과의 싸움뿐
굴조개는 모래와 뒤섞여 몸부림치다
마침내 제 몸 헐어 진액 뿜어내었다
꿈틀대던 육질의 마지막 떨림과 함께
멈추어버린 시간
파돗소리도 영겁의 출렁임도 사라졌다
어두운 바다 밑
누군가 빛나고 있다
제 살 녹여 빚어낸 단단한 광채 하나


* 사랑은 - 김해자

잉태다
온몸이 자궁인 흙이
어둠속에서 싹을 키우듯
딸아, 모든 사랑은 잉태다
부디 순산하여라
밖에서 끄집어내는 제왕절개 말고
꽃도 못 피고 사그라질까 미리 얼굴 내미는
여름 코스모스같이 조산하지 말고
어찌할 수 없이 밀려나오는 불가항력으로
깊은 우물에서 솟아오른다 사랑은
수천의 어머니가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숨쉬는
우물 밑에 강물이 흐르고 그 아래
천 년 기다려 비상을 꿈꾸는 이무기가 숨쉰단다
사랑은 네 속의 이무기를 날게 하는 것
정녕 솟구치려무나 이무기 함께


* 넝쿨 장미 - 김해자

너를 기다리다 동글동글 뭉쳐놓은
주먹밥 같은 하얀 넝쿨 장미 본다
의료보험증 들고 상처 동여맨
종주먹 같은 붉은 넝쿨 장미 본다
미싱사 십오 년에 의료보험도 안 되는
마찌고마 지하공장 드륵드륵 미싱소리 듣다
누런 가시 바짝 세우고 철조망 기어오르는 너를 본다
회충약 털어넣은 것처럼 자꾸 어지러워,
갑작스레 쏟아지는 햇빛에 찡그리며
웃는 너를 본다

이 땅에 여자로 산다는 것
저리 하얀 눈물 방울방울 꽃 피우는 것이야
이 땅에 가난한 여자로 산다는 것
저리 붉은 상처 종주먹으로 꽃 틔우는 것이야
제 한몸 못 가누어 담벼락에 기대는 거 아냐
땅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여
봐, 올라서잖아 아무도 모르게
담벼락 넘어 하얀 송이 피워올리잖아
봐, 저렇게 넘어서잖아 한눈 파는 사이
철조망 넘어 붉은 송이 밀어올리잖아


* 송림동 카바레의 추억 - 김해자

어스름 송림동 로터리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이층 건물
카바레가 있던 자리 단란주점 네온이 반짝인다

춤을 추었던가 철 지난 겨울잠바를 걸친 채
온종일 신발 혓바닥을 박아대던 실밥을 달고
엉거주춤 스텝을 밟았던가 스물일곱 살의 여자는
카바레 무용담을 늘어놓던 노란 블라우스의 육담보다
신발 밑창을 붙여대던 본드 냄새가 더 진득했던가
미친 듯 춤을 추면 바람 든 남편 따윈 잊을 수 있다던
땀에 젖은 그이 얼굴이 본드처럼 번들거렸던가
송림동 언덕배기 살던 과부 정씨와 소주를 들이키며
게바라도 카바레에서 춤을 췄을까 생각하기도 했던가
술에 취해 막막하게 밀려드는 어둠 사이로
불빛 깜박깜박 돌아가고

낡은 필름 속 80년대식 카바레에서
이제는 그때 정씨만큼 세월을 살아버린
여자가 낯설게 서 있다
그래 외로웠던 게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춤출 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 無花果는 없다 - 김해자

장대비 속 후줄근한 시위는 끝나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고 피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부용산, 노래 같은 떨거지끼리
미라가 되어버린 생강이며 무화과
안주삼아 술을 마시다 문득
떠오른 남녘 땅 무화과 수

어릴 적 마당가 돌담에 단단히 서 있었지
크낙한 잎을 따면 하얀 수액 방울방울 흐르고
퍼렇다 못해 어두운 그늘 깊던,
산수유며 해당화 다 피고 지도록
벌 나비도 찾지 않아 늘 외로워 보이던,

꽃 없는 과실이 어디 있으리
조금 늦게 피는지 몰라 수술 그득 채우느라
꽃잎이며 꽃받침 밀어올릴 틈이 없는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라
꽉 찬 살이 터지며 꽃잎을 터트릴 때까지
과육의 껍질이 꽃을 숨기고 있었던 거라구
보아, 십자로 벌어진 과육이 터트린 네 잎의 꽃을
열린 꽃잎 사이로 반짝이는 수백의 꽃술을
그러니까 기다림이 꽃잎을 틔우는 거야
천천히 보아, 진한 자홍색의 향기를
裡花果의 속살을


* 연 - 김해자

진창에서 피어 아름답다 하는가
진창은 그저 진창일 뿐인데
어쩌다 핀 너 때문에 진창이 더러워지는 걸
넌 원치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진창은 부드럽고 따스하다고
그래서 네가 태어난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진창과의 연을 끊을 수 없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진창도 만만하진 않았다
부드러우나 무거운 진창과의 싸움은

때론 가벼운 연처럼 날고 싶었다
끈 떨어진 연이 되어서라도 비상하고 싶었다
사는 내내 치러야 할 진흙과의 싸움에
골다공증을 앓는 너의 뿌리
던져버리고 싶었던 나날이
정녕 너를 피웠다

진창에서 피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진창과의 싸움을 버리지 못해서일 거라고
혹 아름답기는 하다면 꼭 그렇게 말해다오


* 거북에 대한 명상 - 김해자

트라이아스기 화석 속의 너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2억 년 먹혀만 왔어도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만들지 않았다
제발 함부로 삼키지는 말라고
등에 철갑을 둘렀을 뿐
속도가 힘의 기준인 현생대를 살면서도
아직도 재빨리 움직일 줄 모른다
다만 쉬지 않고 움직일 뿐

안에서 꽉 차오르는 몸피 따라
한 겹 한 겹 육모의 허물 벗어내며
보이지 않게 자라는 너는
긴 겨울 명상에 잠긴다
밖을 향해 단 한 번 도끼눈 떠보지 않은
감은 듯 뜬 듯 반개한 눈으로
안팎으로 열려 있다
잠든 듯 깨인 듯

* 먼나라 - 김해자

그 나라엔 천둥 벼락이 치고 불기둥이 솟구쳤으나
가을 내내 나는 무사 안녕했다
총탄과 사이좋게 만나가 떨어지던 그 뜨거운 나라에
눈도 없이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와도
그리스도를 빼닮은 아라비아 남자들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그자가 천국에 들어갈 일순위로 정해준 아이들 또한
천국에 가기 위해 아주 일찌감치 죽어주었고,
배고파 울다 아멘도 없이 총 맞아 죽어갔으나
나는 안녕하다 못해 해피한 명년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지속적이고도 우호적으로 거기에서 눈길을 떼지는 않았다
몽둥이가 난무하는 조폭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울 미와
나라 국에 대한 제3자의 본분 내에서 진지하게 고찰하며
힘없는 나라의 죄와 힘없는 나라의 정의에 대해 명상했다
술에 취해 그 나라의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불을 지르는 꿈도 꾸며
어느 것 하나 실행하지 않은 채 양심을 지키는 법을 배웠으며
평화 없는 세상에 대해 새삼 깊이 애도하기도 했다
봄이 오면 여느 해처럼 아직 오지 않고 있는, 하지만
반드시 온다고 여겨지며, 확신되는, 그 먼 사랑의 나라를
다시 꿈꾸기 위해 딱 제3자만큼의 고통을 뒤척이며
내내 침묵의 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잤다


* 케미라이트 사랑법 - 김해자

사랑이 별 건가요 정신만 좇는 몸 빈 사람들 불멸이니 영원이니 해도 사랑도 화학반응일 뿐이지요 삼 년 지나면 밧데리가 떨어져 권태기가 오는 게 당연하지요, 주장한 어느 머리 좋은 과학자 말마따나

그깟 사랑이 별 건가요 허리를 뚝 분질러 주세요 그리곤 막 흔들어 주세요 파란 불꽃이 튀죠 내 이름은 케미라이트 내 몸은 스물네 시간짜리 화학물질 고까짓 것, 무시하진 마세요 사는 내내 불타는 사랑 그리 흔한가요 또 아슬한 찌 위에 매달려 있기는 쉬운 줄 아세요 물도 끌 수 없는 난 강력한 불꽃 당신을 환하게 밝혀 드리겠어요 입질이 있는 만큼 흔들리는 난 정직한 불꽃 펄떡이는 고기를 당신께 안겨 드리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스물네 시간은 꼭 써주셔야 해요 혹 그 전에 낚시 가방을 챙겨 달아나더라도 어쩔 순 없지만 난 혼자서라도 탈수밖에 없는 걸요 삼년이면 어디에요 하루살이가 천 번도 더 입 맞출 견고한 시간 아닌가요

어찌할 수 없는 빛의 힘으로 정직한 화학물질의 힘으로 난 당신께 타들어가고 있어요 그 후는,이라 했나요 난 몰라요 난 타는 동안만 살아 있으니깐요


* 여자, 강바닥 같은 - 김해자

1
무거운 옷 벗으려 새벽 강에 나갔더니
이미 물옷을 벗어던진 강이 알몸으로 누워
끊이지 않는 물로 오래 젖어온 맨몸뚱이
희뿌연 별빛에 말리고 있었다
물이 없이도 나일 수 있을까, 궁시렁거리며
한번 가면 그만인 물쯤이야 다 흘려버려, 호기도 부리면서

2
바람 한 줄금에도 깔깔대는 그녀의
치맛단을 헤치고 더듬어 더듬어
밑 모를 물이랑 때로 허우적거리다
허방을 짚기도 하던 날 지나
그녀가 숨쉬던 칠흑빛 땅을 디뎌보았나요

흐를 수 있는 건 저 흘러갈 데로 다 흐르게 한 뒤
더 이상 갈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끼리
부드럽게 반죽한 밑바닥에서
당신의 젖은 영혼도 한 올씩 펼쳐
그녀의 젖은 몸 덮어주며
바닥이 없이도 나일 수 있을까, 중얼대기도 하며
다시 밀려올 물도 잊고 누웠던 어느 한나절 있었나요

흐르게 한다는 것, 얼마나 무거웠으면
그리 단단하게 버텨야 했을까
여자, 강바닥 같은


* 이 좋은 봄날에 - 김해자
- 광화문에서

이 따스한 봄날에 나는 쑥을 캐고 싶다 한강 고수부지 양지 바른 곳에 주질러 앉아 추운 겨울을 이기고 돋아난 냉이도 덤으로 캐며 저만치 강물이 천천히 흘러가는 소리에도 귀기울이고 싶다 겨우내 얼어붙은 마음 녹이고 싶다
개나리 꽃망울 톡톡 터지는 이 좋은 봄날 밤에 나는 사소한 오해로 틀어져버린 오랜 친구와 만나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 괴롭고도 행복했던 작고도 위대한 우리의 생애, 건배하고 싶다굽이굽이 걸어온 생의 모퉁이마다 흘린 쓴 눈물 서로 닦아주며 사느라고 힘겹게 먹고사느라고 생겼던 그 사소한 오해까지 통째로 마셔버리고 싶다
이렇게 좋은 봄날에 돈뭉치와 빌딩과 고급차가 가득한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메크로폴리스 한가운데서 나는 잠시 잊고 싶다 거대함도 속도도 경쟁도 휴지통에 다 던져버리고 작고 사소한 것들과 함께 뒹굴고 싶다
이 지구상에 함께 사는 이름도 낯선 나라 작고도 작고도 더 작은 나라 가난한 나라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이 굶어죽고 위대한 제국이 만든 총칼과 폭탄과 화염병에 살점이 녹아 떨어져 주검조차 수습할 수 없는 그 작은 나라 백성들의, 아픈 심장을 향해 뜨겁게 손 내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쑥도 냉이도 친구도 캐지 못하고 나는 여기에 와 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누군가는 오늘도 굳게 닫힌 일터를 두드리다 왔고 누군가는 하루종일 서류더미에 묻혀 있다 황급히 왔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도 오지 않았다
당도 대통령도 우리의 절대희망이 아니다 나도 원한다. 대통령이 없는 세상을 아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대통령이 누구고 무슨 당이 있는지도 모른 채 평화롭게 밥 먹고 평화롭게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되는 세상이다
내가 사는 곳이 좋은 세상이라면 왜 알아야 하겠는가 공기처럼 바람처럼 빛처럼 내게 생명을 준 것들은 소리도 형체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있을 건 있어야 하고 없어도 될 것은 없어야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본드를 붙이고 밭을 갈아도 여전히 먹고살기 벅찬 가난한 백성들이 많은 세상이기에 우리는 원한다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우리는 여전히 이 작은 촛불을 켜든다 힘없는 자에게 힘있는 자 적이 되는 이 모든 억압을 불싸지르기 위하여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위하여 내가 자유로워 내 옆의 당신이 자유로와지고 만인이 만인에게 자유가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우유병 문 유모차도 오고 힘겹게 바퀴 굴리며 휠체어도 왔다
퀵서비스도 왔고 실업자도 잠시 실업을 잊고 왔고 중절모 쓴 할아버지도 왔고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연인도 왔다 한 사람이 촛불 밝혀 한 사람이 더 따뜻해지고 두 사람이 촛불 밝혀 두 사람이 따뜻해지고 천 사람 만 사람의 촛불로 우리 모두가 환해지도록 지금, 우리는 밝힌다 이 작고도 사소한 촛불 하나를 여기에서, 우리는 노래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람으로, 살 세상을 위하여 자유여 민주여 평화여 내 사랑이여


* 저는 기울어져도 - 김해자

강쪽으로 몸 비튼 포플라나무
반쯤 드러난 허연 가랑이 사이로
산뽕나무 몇 직립으로 푸르다

애초에 벼랑에 뿌리내리진 않았겠지
댐이 생기면서 강물은 불어오르고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발 닿을 길 없는
허공 중 허둥대다 바둥거리다
차츰 물가로 기울어졌겠지
알 수 없는 힘에 질질 끌려 산다는 건
때로 목까지 차오른 물살을 견디는 일
무량의 강물 위로 몸의 반쪽 엎어지며
수많은 낮과 밤을 홀로 견뎠겠지
그러던 어느날
산뽕나무 씨알 하나 날아왔을 테지
하고많은 땅 다 두고 바로 그곳에, 떨어져
산다는 건 때로 알 수 없는 운명에 이끌리어
제 몸을 내주는 일 제 가랑이를 벌려
저도 모르게 얽혀 한몸이 되기도 하는 일

앞으로만 흘러가는 강물 속
젖은 포플라나무 그림자
중도 직립의 산뽕나무를 품고 있다
좌경의 몸을 버티고 서 있다


* 씨방 - 김해자

흰 빛 환한 물속
어머니의 알몸은
주름진 씨방 같았다
나는 그의 활처럼 휘인 등
어두운 사타구니 구석구석
살뜰히 매만지며 고이 닦았다
그의 몸은 점점 부풀어오르더니
나비처럼 내 속으로 날아들었다
깨어보니 영정에 갇힌 어머니
꿈속마냥 웃으시는데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강가에서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내 육체를 잉태한 씨방이여
한때는 푸른 즙 밀어올려
붉은 꽃잎 피워주던
육체의 방이여 사라져
다시 내 안에 드셨구나
이승의 꽃잎 다 질 때까지
사그러들지 않을 내
영혼의 씨방이여


* 詩어머니 - 김해자

보지 않고는 훔칠 수 없는
시어머니의 아랫도리를 닦다
나는 눈을 돌렸다
두 번의 수술과 수 차례의 방사선으로
거웃마저 거의 사라져 숨을 곳 없는
생산도 사랑도 멈춘 채 배설기능만 남은
은밀한 그곳이 발가벗겨져
형광불빛 아래 무참했다

열다섯에 전쟁을 만나 고아원을 전전하다
남의 집 식모에 파출부 미싱질까지
한평생 끌고 다니던 몸뚱이 끝내
벗어나지 못한 지하 셋방에 뉘였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무심한 내게
고역이자 매번 치뤄야 할 돈뭉치인 당신은
잊을 만하면 새로운 고통을 수혈해주는 당신은
통증 저장소, 모르핀과 스테로이드 대신
몽상과 침묵으로 통증을 관리하는 나는
약에 버무려진 똥 앞에서 노란
개연꽃 흐드러진 연못을 떠올리다
황금빛 연못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는
媤자 앞에서 곰곰히 여자를 생각하다
울음밖에는 고통 알릴 길 없는 애기똥풀로
돌아간 당신에게로 엎어지며 다시
사랑할 힘을 얻는다

아무것도 못하는 가난한 시여
시를 낳는 여자여, 어머니여


* 세월의 꽃 - 김해자

고수동굴 거꾸로 매달린 종유석 속에서
물러터진 석회바위를 보았습니다
방울방울 제 몸 녹여 키워낸 주렁주렁한
자식들 튼실해 질수록 야위어가는

종유석 밑에 피어난 석순을 보았습니다
종유석이 떨군 젖을 먹고
지장보살로 십일면보살로 환생한 돌꽃
수만 년 녹아내려 야윈 석회석 받치고 선
거대한 돌기둥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천천히 흘러 종유석이 되었을까
얼마나 오랜 세월 녹아내려 돌꽃을 피웠을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이 순간에도 흘러내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석회석의 살을 떠올리다 나도 그만
흘러내리고 싶어졌습니다
기꺼이 녹아내리고 싶어졌습니다


* 세 여자 - 김해자

선암사 뜰 앞
저만치 두 여자가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두 여자 사이 상사화 몇 그루 잎 진
흔적도 없이 꼿꼿하게 서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여자의 등이 벼랑 같습니다 아파서
사랑을 버린 여자의 어깨가 바람에 들썩거립니다
동백 숲 푸른 잎 속에 들어 독경소리를 듣던 여자는 순간
상사화 속으로 들어가 잎이 되고 싶습니다
두 여자 속으로 들어가 꽃, 잎 만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홀로 피다 떨어지는 저마다의 생 앞에 농담처럼
농염 터트리는 배롱꽃 환한 여름이었습니다


* 배추 애벌레처럼 - 김해자

제 벗은 껍질 먹고
힘이 솟는 배추 애벌레처럼
푸른 배추 잎사귀 사각사각 갉아먹고
먹은 만큼 풀물 오르는 배추 애벌레처럼
내가 먹은 사랑이 내 빛깔이 될 순 없을까
깨뜨린 만큼 품은 만큼 힘이 솟는
배추 애벌레 일 수는 없을까
그러다 보면 날개가 돋는
배추흰나비는 안 될까


* 바다 - 김해자

넓어서인지만 알았습니다
깊어서인지만 알았습니다
억 겁 세월 늙지 않아 늘 푸른 당신
제 몸 부딪쳐 퍼렇게 멍든 줄이야
제 몸 부딪쳐 하얗게 빛나는 줄이야

흘러오는 건 모두 받아들이는
당신은 지금 이 순간도 멍듭니다
미워하지 마라, 다 받아들여라
생채기는 늘 나로부터 생긴다는 듯
생채기 없인 늘 푸를 수 없다는 듯

흐르고 흘러 더 낮아질 것 없는
당신은 오늘도 하얗게 피 흘립니다.
스스로 나누고 잘게 부수면
아무도 가를 수 없다는 듯
거대한 하나가 된다는 듯


* 母音 - 김해자

가슴에 쑥뜸을 피우다
나도 몰래 아아아 소리치다
문득 생각한다
모든 고통은 모음이구나,
신음 속엔 가사가 없구나,

그렇다 사랑의 소리도 모음
아니면 침묵이다 진짜 사랑은
모음만으로도 꽉 찬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랑의 웃음도 모음이고 당신 때문에
흘린 눈물에도 가사는 없었다

쑥뜸을 뜨면서 깨닫는다
우린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걸
하나하나 저마다의 고통과 하나 되면서
깨닫는다 하나가 되면 단순해진다는 걸
푸른 잎 소리없이 감싸는 흰빛처럼
저 찬란한 침묵 속의 하나처럼


* 맹목(盲目) - 김해자

".... 많이 힘들구나..."
전화기 속 그의 목소리엔 눈이 달린 것 같았다
수화기 밖으로 손이 튀어나와 금세라도
내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최루탄 파편이 박혀 차차 빛을 잃은
그의 빛나던 눈

먼 나라 절벽 밑 깊은
동굴에서 눈 먼 고기를 본 적 있지
붉은 인조등불 아래 유유히 헤엄치던
표지판에 맹목어라 쓰여 있건 말건
눈먼 놈이라 손가락질하건 말건
맹목인 그에겐 이미 상관없는 일
눈을 치뜨고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본들
어둠뿐이었겠지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수억 년이 흐르고
쓸데없는 눈자리엔 꺼풀이 내려앉았겠지
그에겐 소리가 빛이었을까
어둠의 끝에 부딪쳐 환한, 폭포
쉬지 않고 내리꽂히는 하얀 날개
그 칠흑같이 찬란한 소리

"... 걱정 마. 다 좋아질 거야..."
순간 침묵이 깨지고 동굴도 사라졌다
그의 칠흑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
빛으로 달궈진 듯 내 어둠은 뜨거워졌다


* 마흔 살 - 김해자

한몸인 줄 알았더니 한몸이 아니다
머리를 받친 목이 따로 놀고 늘
허리께 어디선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라고 생각하던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나라고 생각하던 내가 내가 아니다
언제인지 모르게 내 생은 삐긋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가슴을 따라주지 못하고
충직하던 손발도자주 가슴을 배반한다
빈둥대다 느닷없이 바빠지기도 하지만
무엇 때문에 허둥거리는지 까먹기 일쑤다
늘 가던 길인데 바로 이 길이라고
이 길밖에 없다고
나에게조차 주장하지 못한다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살갑고
미래조의 웅변보다 어눌한 현재형이 나를 흔든다
후배 앞에서는 말수가 줄고 선배 앞에서는
그가 견뎌온 나날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진다
반성은 늘고 실행은 더뎌지지만 그렇게 아프게 반성하지도 않는다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어딘가 모자란
나를 살뿐이다.


* 마음, 어찌할 수 없는 - 김해자

해 넘어가는 가을 들판
해바라기 몇 놈 고개 바짝 들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황금빛 후광 몇 잎 시들어지고
까맣게 그을려 타들어간 씨앗
촘촘히 박혀 있다

수많은 밤
어둡고
빈 들판에서
만날 희망도 없이 기다렸으리
뜨거운 빛에 눈멀어,
까맣게 탄 동공
그래도, 고개 들어
해 뜬 곳 향했으리
저도 모르게
부질없이


* 단순한 울림 - 김해자
- 휘파람새의 노래

새벽 강가에 나갔지요
밤새 들락거리던 소란한 마음 함께 서성이는데
고요한 강숲에서 누군가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호, 호, 호- 호, 호
끝을 살며시 올렸다 경쾌하게 찍어내리는 스타카토
휘파람 새였습니다 잠시 잠잠하더니
그는 더 멋드러지게 노래했습니다
후, 후, 후- 후, 후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소리에
잠시 소란한 마음이 멈췄지요
순간 하늘에 펼쳐진 시편 한 조각
"심중을 노래하라, 아니면 잠잠하라"
하, 하, 하- 하, 하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밤새 안고 뒹군 무거운 마음 강속으로
툭 떨어지고 나도 세상도 잠잠해졌습니다


* 내 사랑은 오류 - 김해자

밤새 방전된 핸드폰 속에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울음소리가 들어 있다
수신지를 잘못 찾은 울음 사이 토막난 채
찍힌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
암호 같다 접선을 잘못한,
SOS 타전 같다 사랑에로 가는 길은
잃어버린 자가 일부러 잘못 누른,
아니, 나에게 내민 간절한 손인지도 모른다
밤새 떨어진 포탄과 화염 속에서 흘린
머나먼 아라비아 남자의 울음소리인지 모른다
누군가 잘못 누른 번호는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랑은 이렇게 어긋난 부호라고
잘못 배달된 메시지는 말하는 것 같다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네 사랑이 오류라고


* 남아 있는 자 - 김해자

열다섯 살부터 미싱을 밟아
미싱에 앉았다 하면 손에 날개가 달리던 여자는
샘플만 보면 한나절도 안 되어 완성품을 내놓던 여자는
쌍둥이 동생과 십오 년 동안 모은 돈
상가분양에 속아 다 털린 여자는
그 돈 받으려 사기친 남자의 동생에게 시집간 여자는
미싱판에 배가 닿도록 미싱을 밟다
그 길로 아이를 낳은 여자는
십년 만에 찾아간 신현동 반지하 계단
아직 시집 안 간 쌍둥이 동생과
딸딸이 소리로 반기는 여자는
아기 손바닥만한 비조*를 줄줄이 매달고
미싱판에서 일어나는 여자는
쪽가위 들고 종이 오리듯 똑똑 실밥을 끊는 아이의
엄마가 된 여자는 솜뭉치 속에 자고 있는
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여자는
평생 딸딸이만 밟으라는 욕만 들으면
머리끄덩이를 놓지 않던 그 여자는
아직도 그 자리에

* 옷에 다는 부속 중의 하나


* 구겨진 생을 펴다 - 김해자

저마다 하루치의 수고를
닫아 건 캄캄한 골목길에
오늘도 우성세탁소 안이 환하다

열린 문 사이로 스팀다리미
뿌연 열기 줄지어 승천하고
세탁통은 둥글게 돌아가는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덮고
미싱은 구석에서 말없이 존다

문득 다림판 앞에 서서
구겨진 허물을 정성껏 펴는
아저씨의 얼굴이 성자 같다

그의 등 뒤로 활짝 펴진 생들이
천장 가득 하늘거리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펴는
그의 생은 누가 활짝 펴 줄까
오늘 하루 구겨진 마음
누가 펴 줄 것인가

하늘을 보니 별 몇 모여
세탁소 간판을 새로 걸었구나

"수고하고 구겨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활짝 펴 주리라"


* 걸레에 대하여 - 김해자
- 인연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과 진한 주황빛이 만나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 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을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온 이래
목욕한 내 딸의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젖은 만큼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다시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 쓰다 놓아 버릴 내 몸뚱이


* 가을엔 - 김해자

어둔 땅에서 숨죽여 자라난
두 알의 땅콩처럼 한 방에서
사이좋게 익어간 밤송이처럼
가을은 어둔 생들 빛 만나는 때

모과 못난 속울음 속에서
익혀간 향기 허공에 부려놓듯
무화과 참지 못해 속꽃 터트리듯
가을은 숨죽인 생들 드러나는 때

한 잎 지면 한 잎 피어
백날 붉은 배롱꽃잎처럼
감춰 둔 제 속의 붉은 빛
수줍게 토해내는 단풍처럼
가을은 앞다투어 핀 것들 다 지고
가장 나아종 된 것들 멍울 터트리는 때

가을엔 맘껏 피어나게 하소서
지리하고 오래 못났던 생
바스라진 상처를 뚫고
솟구치게 하소서 기쁨으로
제 안을 환하게 하소서 제 빛만큼
세상속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 배부른 여자 - 김해자

부른 배 미싱판에 대고 헉헉대는 여자
배는 만삭 월급은 초생달인데
안 먹어도 불룩한 배는 늘 고픈 여자
집들이 때 쌓인 슈퍼타이 슈퍼에 들고 가
우유와 콩나물로 바꿔먹는 여자
위층 상가 갈비집에서 솔솔 풍겨나오는
숯불갈비 냄새 킁킁거리다 깜박잠에 빠진 여자
블라우스 원단에 수놓은 꽃밭
손으로 밀고 발로 밟으며 가는 여자
밟아도 밟아도 늘 제자리
배로 미싱을 밀고 가는 여자


* 어머니의 밥상 - 김해자

산목련 그늘 옆에
어머니 누우셨네
天蓋 열어 흙삽 퍼부어도
어머니 눈도 뜨지 않으시네
사과 한쪽 갈아드려도
아이고 고마워라, 틀니로 웃으시던 어머니
오이 송송 썰어 된장에 무쳐드려도
아따 누가 이렇게 해줄끄나, 고마워하시던
어머니 입도 열지 않으시네
주소 없이 떠돌던 막내딸집 어쩌다 며칠
받아본 가난한 밥상머리 행복해하시던,
한평생 밥상만 차리신 어머니

다음 생엔 꼭 내 속으로 들어와 열 달 뱃속 품어 고이고이 길러 내 배 앓아 엄마를 낳아줄게 배탈나면 차조 메조 눈 많은 곡기 끓여 기저귀에 꾹 짜서 한 입 한 입 먹여줄게 한참 자랄 땐 새벽시장 콩물 받아다 노란 주전자 가득 머리맡에 놓아줄게 입맛 없을 적엔 산낙지 사다 식초 설탕 간장 넣어 염포탕도 해주고 석화 넣어 훌훌 넘어가는 매생이국도 끓여줄게 한평생 서서 밥상 고이 차려줄게 늘 앉아서 밥상만 받은 몸이

통곡도 없이 흙을 밟네
허공에 밥상을 차리며
어허 달고나를 부르네


* 나이테 - 김해자

영철이 손바닥은 가로세로 무늬목
손가락마다 옹이가 자라구요
고랑 파인 틈새마다 나이테가 자라지요
팽팽 돌아가는 면치기며
야근하다 잘못 내리친 망치며
힘에 부쳐 길을 잘못 든 대패가 밀어붙인
상처 위에 새살이 돋는데요
언젠가부터 영철이 몸은 그 손을 거쳐간
피나무 오리나무 박달나무로 작은 숲이 되었구요
얼굴엔 수염 대신 파란 잎이 돋아난다는데요
거북이 등가죽 같은 줄기 위로
여름 한철 매미 맘껏 노래 부르구요
집 없는 풀벌레 알 까느라 부산하다나 봐요
목공 생활 이십 년 내 친구 영철이는
동글동글 옹이만큼 나이테도 자라
결 고운 무늬목이 되었대요


* 大宇雨中 - 김해자

새벽 다섯 시 부평 인력시장
잿빛 작업복 너덧 옹송거리고 있다
오늘은 어디로 팔려갈까
계양구청 신축공사장일까 중동아파트 건설현장일까
철골 구조물 빼내는 터널 공사장이라도
자리만 있다면
하릴없는 기다림 끝 비는 내리고
젊은 작업복들 빠져나간 자리
늙수그레한 작업복들만 비에 젖는다

깎을 만큼 깎고 견딜 만큼 견뎠는데
기다리라 해서 기다려도 봤는데
돌아가다 말다 하던 콘베어벨트는 끝내 멈췄다
마이너스 통장도 깨서 쓸 적금도 이제 없다
누비라는 거리를 잘도 누비는데
낡은 작업복은 누비고 다닐 데가 없구나
봉투를 접어볼까 아내 앞에 꿇어앉아
한 판에 40원짜리 컴퓨터 키보드라도 끼워볼까
셔터 내려진 부평 거리 갈 곳 없는
사내 하나 부평초로 떠돈다


*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 김해자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이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 두 개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 - 젤소미나 기자(LCNET NEWS 기자단)
- 민예총의 일일문화정책동향에 보낸 칼럼 원고

6월 초, 김해자 시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김해자 시인이라고 아는 분들은 다들 아실터인데, 잘 모르시는 분들께 굳이 소개하자면, 80년대 초부터 현장에 들어가서 미싱을 타며 글을 썼고,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연극 전태일 극본의 공동 집필자이고, 실천문학사에서 ‘무화과는 없다’라는 시집을 냈다.
또 내가 속해 있는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의 준비위원이었고 조이삶넷이라는 방송국을 꾸릴 때에도 기꺼이 방향을 잡는데 참가하여 자신의 방송코너도 마련한 사업에 있어서도 너무나 고마운 분이다.
언제나 어디에서 만나도 한결같이 진심으로 사람을 반기고,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뭐라고 한마디를 건네면 두마디의 깊이로 가슴에 안는 그런 사람이다. 그뿐인가 봄날은 간다를 부를 때에 온 몸에 소름이 짝 돋을 정도로 곱고도 맑은 목소리를 가졌다.
10시간의 뇌수술을 거친 후, 약간의 마비증상이 있고 앞으로 운동을 하고 관리를 잘하면 괜찮아 진다더라는 소식을 받기까지 20여일이 걸렸다.
일반병동으로 옮긴 시인을 만나러 몇몇 동료들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오른쪽 눈이 사시가 되어버려서 한쪽 눈으로만 책을 봐야한다면서, 농담을 하는 시인에게 우리도 역시 평상시보다 더 과한 웃음으로 답했다.
“머리 뚜껑을 열었다 닫았더니 머리가 좋아진 것 같애. 단기 기억은 좀 없어졌지만, 유머가 더 생기고 하하하하...”

문병을 가던 날 아침, 그날도 역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김선일씨가 어이없는 희생을 당했다. 그소식을 시인도 들었는지 제일 먼저 꺼낸 얘기가 이라크 얘기였다.
시인이 쓰러지기 직전에 국회의원들이 파병철회안을 입안시킬 것을 요구하기 위한 시낭송회를 문학인들이 준비하고 있었고, 이 시낭송회를 위해 시를 썼다.(아무리 둘러봐도 시를 찾을 수는 없어서 소개할 수가 없지만)
“수술 끝난 후에야 물을 마실 수 있었는데, 물을 4일이나 못마셨잖아. 시 쓸때 팔루자에서 폭격을 피해서 한어머니가 두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쳤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사막으로 들어섰어.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목이 말라서 죽었다는 얘기를 계속 생각했었거든. 그랬더니 환영이 보이면서 내가 사막을 그렇게 힘겹게 걷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연신 파병을 막아야 하는데 라는 말을 하였다.

김해자 시인이 살았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했던가를 생각해보면, 김선일씨의 목숨은 그사람의 가족, 친구, 타인인 나에게 조차도 국가적인 자존심, 이익, 체면보다 훨씬 중요하다. 또한 미국의, 혹은 추가 파병될지도 모를 한국의 전투병들에 의해 죽어갈 이라크의 한 목숨 역시 너무나 소중하다.
미국(부시는 별로 신경도 안썼을 것이다. 자기나라 국민이 죽어도 눈깜짝 안하는데. 지지율 하락에 더 절망했겠지)이나 노무현에게는 그저 안타까운 죽음일 뿐인 한목숨일테지만.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김해자 시인의 생명이 꺼지지 않게 기도했던 그 간절함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터의 국민들이 살고자 하는 간절함, 김선일씨의 가족들이 가졌던 간절함과 더 다르지 않을 듯 싶다.
김해자 시인이 다시 건강을 회복해서 오늘의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상처입은 가슴을 달래줄 시를 보고 싶다. 더불어 더 이상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 파병은 또다른 죽음을 부른다.

마지막으로 많은 국민들이 보복성 파병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여론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오늘도 그들은 술자리에 앉아서 두입술과 혓바닥으로 수많은 이라크 국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을 것이다. 정부의 파병결정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 바로 술자리의 살인이다. 끔찍하다. 구호보다 브레히트의 짧은 시를 인용하여 글을 마무리 한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첫 번째 전쟁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었다.
지난번 전쟁이 끝났을 때
승전국과 패전국이 있었다.
패전국에서 하층서민들은
굶주렸다. 승전국에서도 역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1936/37년>
 
 
* 김해자

1961년 목포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 시작
제8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현재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발행인
시집 <무화과는 없다>(2001.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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