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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상학 Topologie
위상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서로 다른 것 내에서 상응하는 것들을 묘사하거나 서로 유사한 구조들을 확인하는 것이다.[1] 지형학적-비판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질문이 한 지도가 „단지 재현만 할 뿐“이라고 내세울 때 공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면, 위상학적 관점 하에서는 한 관찰자가 무엇인가 변했다고 여길 때 변하지않고 남아있는 게 무엇인가가 물어진다. 이런 위상학적 흐름의 기원은 기하학의 대수화, 말하자면 공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 Raumkörper에 대한 시각적 재현이 계산이나 연산만 가능한 비 시각적 공간으로 이행하는 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715/16년 뉴튼 옹호자였던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와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찌Gottfried Wilhelm Leibniz 사이에서 이루어진 편지 논쟁이다. 라이프니찌는 공간을 묘사하려면 물질의 동력Kräftespiel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물체들의 관계나 그들 사이의 연관 지점들을 규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2] 라이프니찌는 자신의 이론을 당시 물리학의 의인주의Anthropomorphismus 에 반대하는 논거를 통해 근거지웠다. 물체들의 비교 기준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리학의 근본 개념들 (예를들어 ‚운동’)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수학적 견지에서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3] 라이프니찌에 의해 ‚Analysis situs’라고 지칭되고는 완성되지 못한 채 남겨진 이 생각은 레온하르트 오이러Leonhard Euler의 그래프 이론을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된다. 이 그래프 이론은 쾨니스베르크 시의 다리 7개를 한번 씩만 건너서 최종적으로 다시 출발점에 돌아올 수 있는가라는 당시의 수수께끼 과제를 해결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오일러는 물리적 공간의 관계들을 추상화시켜서 그 곳에 가보지 않고서도 원리적으로 이 문제를 해명하였다. 다리들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연결들, 곧 한 ‚접합점’에 연결되어 있는 각 „변“ 들의 숫자다.
수학에서 위상학은19세기 말에서야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Johann Benedict Listing이 1847년 도입한 „공간 형체들의 양상적 관계 modaler Verhältnisse“[4]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확립되게 된다. 이 새로운 대수학에 영향을 끼친 것은 라이프니찌의 위상분석Lageanalysis 과 더불어 그 이후의 소위 ‚비 유클리드적’ 기하학 흐름이었는데, 그 선구자에 속하는 인물이 리스팅의 스승이던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였다. 여기에서는 무한한 평면에서 분절되지 않는 직선이라는 가정이 포기되고, 평면 기하학의 공리론Axiomatik을 하나의 특별한 케이스로 다룰 수 있게 하는 대안적이고 더 일반적인 공리론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고정된 속성을 갖는 공간이라는 가정이 포기됨으로써 위상학은 3차원적인 것에 있어서도 뉴튼의 컨테이너적 표상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건 위상학이 위치관계의 묘사를 그 관계의 물리적 존재나 물질성으로부터 떼어놓기 때문이다. – 이는 관계맺는 점들 사이의 선분이 그 특정한 연관성은 상실하지 않으면서 모든 가능한 형태를 띨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에 따르면 그 결과 이제 공간도 휘어지고, 늘어나거나 찌그러질 수 있게된다. [5] 이런 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지우는 점들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0세기 이런 위상학적 지식이 문화학과 사회과학에 전이되면서도 수학적 요구는 남아있게 된다. 곧, 현상 공간성 Erscheinungsräumlichkeit에 대한 묘사나 지형학적 우연성에 대한 묘사로만 한정된다면 그 공간묘사는 불안전하거나 아마도 잘못된 것이라는 요구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이런 종류의 위상학이 현상학과 구조주의 대변자들에 의해 수용된다.[6] 위상학적 구조가 조건없이 공간에 선행한다고 보는 구조주의가 그 점에서 원래의 수학적 개념에 더 강하게 의거하고 있는데 반해, 현상학적 흐름은 공간 묘사 시에 먼저 경험 공간성Erfahrungsräumlichkeit에서 출발, 이 경험의 특별한 양상을 특징지우는 요소들을 규정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학에는 다시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논리“에 더 중점을 두는 형태의 위상학이고 다른 하나는 „토포스“에 강세를 두는 형태의 위상학이다. – 첫번째 그룹을 대표하는 자가 행동학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다. 1917년 전쟁풍경 Kriegslandschaft 에 대한 초기 현상학적 에세이에서 그는 전쟁상황의 육체적 경험을 특징지우는 위험지역과 주변지역을 규정함으로써 이 ‚장 (場) ’의 구조를 묘사하려고 하였다.[7] 이러한 시도를 통해 레빈은 초창기 환경 심리학자로 자리잡게 되었고 „호도로지적 공간 hodologischen Raum“[8]이라는 개념을 내놓게 된다. 레빈은 이를 그때마다의 길 공간 Wegraum (그리이스 어로 hodos, 길)이라고 파악하는데, 그것은 개인이나 그룹의 운동과 행위의 결과로써 생겨나며 그 안에서 결정 가능성들이 공간 논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하나의 채널 시스템 Kanalsystem으로 묘사될 수 있다. [9]
두번째 그룹을 대표하는 이는 „위상학“ [10]을 „기초 존재론“이라는 의미에서 파악하는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다. 이 기초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초기 저작에서는 „현 존재“ 혹은 „세계 내 존재“의 실존 가능성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학문으로 구상되었다. 후기 저작에서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존 조건들의 공간적-구조적 전제들에 대해 사유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 이론을 끌어들인다.[11]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장소 Ort“는 일종의 대상들의 거푸집 같은 형태이거나 그 대상들의 표면의 대응물이다. 그에따라 공간성은 사물들의 부대현상이거나 전범적인 ‚장소들 Ortschaften’의 효과라고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가 „전회 Kehre“[12]라고 지칭한 이러한 관점 변경을 통해 결국엔 직관의 형식성이라는 칸트의 공간 규정에 생활세계적 기초를 부여하려 한다. 거기서 포괄적으로 공간을 규정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존재 Seyns“ 의 비밀Chiffre 하에 모여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다른 곳에서는 „대지 Erde“[13] 라고도 이야기 된다.
프랑스 이론가들에게서 위상학적 사유는 수학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발전되었다. 이러한 구조주의에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순수한 내포공간 reines spatium“[14]이라고 개념화한 공간 이해가 근거로 놓여있다. 독일어 단어 „공간 Raum“이 용적 혹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것 Platzschaffende“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이 로만어 용어는, 여기서 기원한 독일어 단어 „산책하다 Spazieren“ 에도 함축되어 있듯, 어떤 펼침 혹은 관계성을 드러낸다.[15] 들뢰즈가 말하는 „순수한 내포공간“은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추상화된 구조다. 이 생각이 구조주의적 공간이해와 현상학의 위상학적 공간이해를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현상학이 경험 공간성과의 관련을 유지하려는 반면에 구조주의에서 이것은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관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수학적인 것에 주목하게 한 것이었다.
구조주의 내에서 위상학을 대변하는 인물로는 누구보다 미셀 셰르Michel Serres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16]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직접 수학과의 교류를 통해 위상학적 구조분석을 한층 발전시켰다. 이는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조종/제어“의 문제, 그에따라 접속과 그 관계들의 문제를 다루는 사이버네틱스의 컨텍스트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이는 정신 분석학의 컨텍스트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정신 분석학은 심리적인 것을 구성하는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다양한 형태들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위상학적 질서를 동원한다. 라캉은 자아, 초 자아, 그리고 Es의 삼원적 관계로 이루어진 프로이드의 심리적 „토픽 Topik“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를 „실재적인 것“, „상상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인 것“의 심급이라고 확인하였다. 라캉은 („보로미안 매듭“에서 ) 이들의 구조 계기들을 서로 얽혀 있임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유지를 보장하고 있는 세 가닥의 끈으로 묘사하였다. 사이버네틱스의 입장에서는, 위상학이 관계성을 창출해 낸다는 점에서 ‚공간 효과적raumeffektiv’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정신 분석학에서 위상학적 모델은 무엇보다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복합성을 테마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17] – 위상학적 묘사에서도 적지않은 발전이 있다. 위상변환 Transformationen 을 활용하는 건축물들[18]에서처럼 위상학적 묘사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공간 형성 가능성에 주목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들의 동일성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위상들의 차이에도, 나아가 „균열 Riss“ 처럼 위상 구조를 파괴하고 심지어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도 시선을 돌리게 하였다.
현재 현상학과 구조주의에서 행해지고 있는 묘사들은 무엇보다 정치적이고 매체적인 질서의 위상학에 주목하고 있다. 구조주의적 입장에서는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푸코의 „감금 Lagerung“[19] 개념을 20세기의 핵심적인 공간 구조로 수용하면서, 이를 집합론적 공리에 의거해 „편입시키면서 배제하는“[20] 형태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네이션 국가 내부에 수용소 Internierungslagern를 통해 법의 유효성이 지양되어버린 구역이 자리잡게 된다. 그 곳에 수용된 사람들에게는 자의적 권력이라는 현실이나 내용없는 법 만이 통용될 뿐이다. 나아가 아감벤은, 이를 사적인 내적 공간과 공공적인 외적 공간의 분리가 지양된 상태라고 묘사하는 한나 아렌트에게도 의거하고 있다.[21] 아감벤에 따르면, 권력 심급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힘으로 등장함으로써 자신이 벌이는 조처를 더 이상 정당화시킬 필요가 없어진다면[22] 이는 공공적 공간이 사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학적 입장에서는 최근에 보리스 그로이스 Boris Groys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 대한 공간학적 해석을 제안하였다. 예술작품에 대한 벤야민의 규정은, 벤야민이 오리지널과 복제 사이의 (기술적 재생산을 통해 생겨난) 구분 불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우라의 위상학“[23]을 함축하고 있다. 한 인공물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물질적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다. (미술관에 있는) 레디 메이드는 그와 같은 종류의 물건이 미술관 밖에 얼마나 많이있건 상관없이 오리지널이다. 그를 오리지널로 만들어주는 데 결정적인 것은 그 물질성과는 독립적인 그것의 장소 귀속Lokalisierung인 것이다. 그로이스는 예술 작품과 관련된 해석을 전개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논의는, 사용자들에게 내용을 그 내용 담지체와 구분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제공하는 미디어 일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24]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술 복제 가능성 시대에는 담지체는 오리지널이 아니더라도 복제를 통해 확산되는 내용은 오리지널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도 미디어 발전의 중간 단계일 뿐이다. 디지탈 데이터 교환에서는 복제 자체도 불필요하다. 여기서는 복제된 담지체 Trägerkopie가 수용자에게 전달될 필요도 없다. 수용자가 정보가 있는 장소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이를통해 „무엇을 통해 Womit“ 정보가 전달되는가라는 질문은 후퇴하고 대신 정보가 „어디에 있는가 Woher“라는, 정보의 „주소 Adresse“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구조주의와 현상학,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 이루어진 과거와 현재의 위상학들은 학문적 기원에 따라 상이하기는 하지만, 공간성에 대해 변화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공통적이다. 실체적 공간 개념과 우연 공간 Kontingenzraum 개념에 비해 위상학적 비교가 갖는 강점으로 인해 이 방법은 문화학과 매체학이 추구하는 것을 제대로 이루기에 적합한 중도로 파악될 수 있다. 공간 묘사에 있어서의 공간적 전회와 지형학적 전회의 귀결들도 이 관점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차례의 ‚공간전회 Raumkehren’를 통해 밝혀지게 된 것은 관계 묘사나 구성 묘사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 따라서 공간적 전회를 자연공간 묘사로의 회귀라고 오해하는 것은, 지형학적 전회를 문화 공간의 지도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 만큼이나 잘못된 것일 것이다.
4.여기실린 논문들에 대해서
이 논문집에 실린 논문들은 모두, 최근에 문화학과 매체학에서 이루어진 공간성에 대한 논의를 특별히 포착하고 그를통해 위상학적 묘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1부 („공간에서 위상학으로“)에 실린 논문들은 현재의 공간 개념과 공간묘사 방법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위상학적 접근 방식을 소개한다. 역사가인 칼 슈뢰겔Karl Schlögel은 역사적인 장소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페테스부르크 시의 묘사를 통해 실제로 보여준다. 문화 지리학자 율리아 로싸우Julia Lossau는 본질주의적 묘사에 비판적이면서 공간성의 생산을 포착하는 공간 묘사를 주창한다. 철학자 베른하르트 발덴펠스Bernhard Wldenfels는 공간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세계 분석의 전제들을 탐구하면서 헤테로토피에 대한 현상학적 묘사를 제시한다. 매체학자 우테 홀Ute Holl은 특히 극장 Kino에서의 지각 이론적 접근의 기술적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현상학적 공간 묘사를 컨텍스트화한다. 세번째로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톨렌Georg Christoph Tholen은 칸트의 공간적 직관 개념을 매체적 조건을 고려해 재서술 Transformation해야 할 필연성을 역설한다. 카트린 부쉬Kathrin Busch는 하이데거에서 출발, 공간성을 창출해 내는 예술작품에 대한 묘사를 염두에 두고 그러한 재서술을 수행한다.
2부 („초기 위상학“)은 수학적 위상학의 발생을 소개한다. 미술사가인 카린 레온하르트Karin Leonhard는 근세, 특히 바로크 시대에 달팽이 집을 그리기 위해 중요했던 회전 방향과 대칭 문제들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본다. 페터 브론슈레겔Peter Bronschlegell은 가우스와 비 유클리드 기하학과 관련된 위상학의 전제들을 다룬다. 블라디미르 벨민스키Wladimir Velminski는 „쾨니스베르크 다리 문제“에 대한 오일러Euler의 해법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수학적 사유와 시적 사유의 공통성을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사가 마리 루이제 호이서 Marie-Luise Heuser는 라이프니찌의 „위상 분석’을 리스팅Listing의 위상학 개념과 비교하면서 역동적 자연 철학이 근대 위상학의 개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본 논문집 3부 („위상학의 적용분야“)에서는 수학 외에 위상학적 묘사의 방법이 확립되어 있는 다른 분야들이 소개된다. 첫번째 논문에서 요아힘 후버Joachim Huber는 10가지 논점을 통해 건축과 도시 계획 분야에서 이루어졌던 위상학으로의 전회를 소개하면서 다른 분야에도 이를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학자이자 매체학자인 페터 벡스테Peter Bexte는 쎄르Serre와 사이버네틱스의 문제 설정에서 출발, 중간 공간성 Zwischenräumlichkeit의 논리에 근거하는 구조주의적 위상학 개념을 소개한다. 그를 이어 정신분석학자 마이 베게너Mai Wegener는 라캉의 위상학적 모델이 무의식적 구조들에 대한 표면 묘사Oberflächenbeschreibung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치료적 실행에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헬무트 뤽Helmut Lück은 레빈Lewin의 저작에 근거, 심리학에서 위상학적 흐름을 서술하면서, 나아가 장 이론이 기능적 사고에 속한다는 것과 그 이론의 오늘날의 적용 가능성을 제시한다. 로란트 립푸너Roland Lippuner는 부르디외 Bourdieu의 사회학과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행위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에서의 위상학적 개념들을 소개하고, 이를 일상적인 공간적 실천에 대한 묘사와 관련시킨다. 로만어 학자 비토리아 보르소Vittoria Borso는 보르헤스의 작품 분석에서 출발, 문학에서의 위상학적 흐름을 소개하고 7개의 테제로 그에 내재하는 과제범위를 제시한다. 예술 이론가이자 매체 이론가인 마크 리스Marc Ries는 극장에 대한 분석에 근거해 지형학적 묘사와는 구분되는 매체 미학에서의 위상학적 흐름을 소개한다. 크누트 에베링Knut Ebeling은 블랑쇼와 벤야민에 의거해, 장소 특정적 ortsspezifisch으로 논의를 펼치며 구체적인 배치Konfiguration에 기여하는 미학 이론을 주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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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학적 위상학 (위상수학)은 평면에서의 문제들과 관계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펼친 다면체 Netze“를 대상으로 삼는다. 위상 수학은 3차원 ‚공간’에서의 등가물들과 관계하며 공간적 구성물들을 서로 비교한다. 위상수학은 나아가 집합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원소들“의 그룹이나 n 차원적 묘사로써 „다양체“를 규정할 수 있다. – 특히 이 후자에서는 특정한 원소들의 집합에 대한 구조의 각인이 문제가 된다. (이에대한 개괄 Bradford H. Arnold, Elementare Topologie. Anschauliche Probleme und grundlegende Begriffe, Göttingen; Vandenhoeck Ruprecht 1974 [1964].)
[2] Gottfried Wilhlem Leibniz, „Briefwechsel mit Samuel Clarke (Auswahl), in Raumtheorie, S.58-73 [1717].
[3] 라이프니찌에 따르면 무엇보다 „관찰자의 육체“가 공간적 „비 동일성“을 조건지운다. „관찰자가 단 하나의 정신적 눈만 소유하고 있다면, 말하자면 그가 단 하나의 점에만 집중하고, 실제에서도 그의 감각적 표상에서도 아무 수준기표 (水準基標)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 아무런 차이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Gottfried Wilhelm Leibniz, „Zur Analyse der Lage (1693)“, in Philosophiesche Werke in vier Bänden, Bd. 1, hg. Ernst Cassirer, Neuausgabe, Meiner : Hamburg 1996 [1904], S.49-55 [1858], S.52.
[4] Johann Benedict Listing, „Vorstudien zur Topologie“, in Göttinger Studien 2 (1847), S.811-875, S.814.
[5] Bernhard Riemann, Ueber die Hypothese, welche der Geometrie zu Grunde liegen (1854), in Bernhard Riemann’s gesammelte mathematische Werke und wissenschaftliche Nachlass, hg. Richard Dedekind Heinrich Weber, Leipzig, Teubner 1876, S.255-269 [1867].
[6] 라이프니찌의 공간 표상을 문화학적 문제설정에 끌어들인 중요한 인물은 Ernst Cassirer이다. 그는 현상학적 사유에 근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Claude Levi-Strauss를 통해 구조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서는 Ernst Cassirer의 공간 질서에 대한 텍스트를 참조하라. „Mythischer, ästhetischer und theoretischer Raum“, in Raumtheorie, S.485-500 [1931]
[7] Kurt Lewin, „Kriegslandschaft“, in Raumtheorie, S.129-149 [1917]
[8] Kurt Lewin, „Der Richtungsbegriff in der Psychologie. Der spezielle und allgemeine hodologische Raum“, in Psychologiesche Forschung 19 (1934), S.249-299.
[9] 심리학 분야의 외부에서 Jean- Paul Sartre도 이 관점을 수용해 상호 주관성을 그를통해 공간성이 구조지워지는 서로간의 인정과 무화 Nichtung로 묘사한다. (Jean-Paul Sartre, Das Sein und das Nichts. Versuch einer phänomenologischen Ontologie, Reinbek bei Hamburg: Rowohlt 2004 [1943], S.547). Merleau-Ponty는 이 묘사를 존재론적으로 전환시켜 „존재의 모델로서의 위상학적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Maurice Merleau-Ponty, Das Sichtbare und das Unsichtbare gefolgt von Arbeitsnotizen, München: Fink 2004 [1964], S.271.)
[10] Martin Heidegger, „Zur Seinsfrage“, in Wegmarken, Frankfurt a.M.: Klostermann 1996 [1967], S.379-419 [1955], S.406.
[11] 하이데거를 수학적 위상학과 직접 관련시키려는 시도는 Beatrice Nunold, Her-vor-bringungen. Ästhetische Erfahrungen zwischen Bense und Heidegger, Wiesbaden: DUV 2003, S.153-161.
[12] Martin Heidegger, „Die Kehre“ [1949], in Die Technik und die Kehre, Stuttgart: Klett-Cotta 2002 [1962], S.37-47.
[13]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1935/36)“, in Holzwege, Frankfurt a.M.: Klostermann 2003 [1950], S.1-74. S.32.
[14] „구조적인 것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장된 것이 아닌, 선-연장적 prä-extensiver 공간이자 순수한 내포 공간 Spatium으로, 이웃 Nachbarschaft의 질서로써 조금씩 형성된다. 거기서 이웃 개념은 무엇보다 서수(序數)적 의미 Sinn를 가지며, 연장이라는 의미 Bedeutung를 갖지 않는다.“ Gilles Deleuze, „Woran erkennt man den Strukturalismus?“, in Die einsame Insel. Texte und Gespräche von 1953 bis 1974, hg. David Lapoujade, Frankfurt a. M.: Shurkamp 2003 [2002], S.248-282. [1973], S.253.
[15] 사회학자 Michel de Certeau는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 „장소 Orte“의 위상학적 관계를 „주위를 둘러보는 spatiirender“ 실천의 결과로 묘사한다. (Michel de Certeau, „Praktiken im Raum“, in Raumtheorie, S.343-353 [1980])
[16] 구조주의 기호론에서도 최근 텍스트 분석에 있어 위상학적 이해가 생겨났다. (Jurij M. Lotman, „Zur Metasprache typologischer Kultur-Beschreibung“, in Aufsätze zur Theorie und Methodologie der Literatur und Kultur, hg. Karl Eimermacher, Kronenberg Ts: Scriptor 1974, S.338-377. [1969].
[17] 라캉이 위상학에서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를 고려해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한 번 꼬여 있어서 안과 바깥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라캉은 ,말하기를 통해 언어를 넘어있는 지시체에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시각화’ 되어 있다고 본다. 그에게 이런 형상물들은 무엇보다 시각화들이며 그 유비적 가치로 인해 관심의 대상이 된다. – 위상학적 형상화의 매력에 대해서는 논문집 Verkehrte Symmetrien. Zur topologischen Imagination in Kunst und Theorie, hg. Wolfram Pichler, Ralph Ubi, Wien : Turia + Kant 2007.
[18] 이에 대해선 Hajo Berressem, „Architekturen. Überlegungen zu einer Topologie der Torison“, in Dis Positionen. Beiträge zur Dekonstruktion von Raum und Zeit, hg. Michael Scholl Georg Christoph Tholen, Kassel: Gesamthochschule 1996, S.51-79.
[19] Michel Foucault, „Von anderen Räumen“ (1967), in Raumtheorie, S.317-329 [1984], S.318.
[20] Giorgio Agamben, Homo sacer. Die souveräne Macht und das nackte Leben, Frankfurt a.M., Shurkamp 2006 [1995], Kap. I, „Das Paradox der Souveränität“, S.30-40.
[21] Hannah Arendt, „Der Raum des Öffentlichen und der Bereich des Privaten“, in Raumtheorie, S.420-433 [1958]
[22] 칼 슈미트에 따르면 이는 „예외상황을 결정하는“ 자라고 정의된 주권자가 벌이는 조처이다. (Carl Shmitt, Politische Theologie. Vier Kapi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 Berlin, Dunkcer Humblot 2004 [1922], S.11) 푸코와 아감벤이 이야기하는 공간 도식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집을 보라. Auszug aus dem Lager. Zur Überwindung des modernen Raumparadigmas in der politischen Philosophie, hg. Ludger Schwarte, Bilefeld, transcript 2007.
[23] Boris Groys, „Die Topologie der Aura“, in Topologie der Kunst, München/Wien: Hanser 2003, S.33-46.
[24] Lambert Wiesing, „Was sind Medien?“, in Artifizielle Präsenz. Studioen zur Philogophie des Bildes, Frankfurt a. M,, Shurkamp 2006 [2005], S.14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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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 컴에서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글이 덧쓰여져 각주 달린 부분은 읽기가 어렵습니다. 컴퓨터 화면이라는 것이 각기 다른 컴 상황에서의 읽혀짐인지라, 김남시님에게는 온전히 보이시겠지요? 카페 다른 분 눈에도 그럴지 모르고요. 암튼 지난번 글에서도, 좀 이상한 부분이 보였는데,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각주 달린 것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읽어보려고 했는데, 읽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에 말을 전합니다.
제 예상처럼 김남시님이 글을 보시는 데 아무런 이상없으시면, 고쳐진 글을 읽을 방법은 없겠지요?...
폭기님! 제 컴에서는 글이 덧쓰여지지는 않는데, 그래도 각주부분이 텍스트에서 '튀어' 도망가서 보기가 편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고쳐보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보일실런지..
아주, 잘 보입니다. 글씨기 길게 넓어진 것은 인쇄해서 읽으니 별 문제 없고요.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시공간(時空間)의 변화로 가능한 인식변화, 그 문제가 제겐 아주 커 보여요. 무슨 문제가 있을 때, 그렇게 접근해보고요. 그래서 시간이나 공간(공간, 지형학,위상학)에 관심이 있(많)습니다. 덕분에 제가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 연구하시는 분이 있고, 아,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그걸 언젠가는 읽게 될 날도 있겠구나 싶어서 기분좋네요. 인간 거주 조건인 공간도 공간이거니와, 전쟁이 바로 연상되는 지형학도 그렇지만, 위상학문제는 특히나 관심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번역, 감사합니다.
폭기님이 관심이 있으신 내용이라니, 기쁩니다. 소위 인문학의 '공간적 전회'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들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에대해 짤막한 글도 써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글이 덧씌어져 보이지는 않는데 비교적 촘촘한 편이며, 저 같은 경우에는 가로 스크롤바도 움직여서 봐야 해서 조금 불편합니다. 설정정보에서 설정변경하실 때 아바타를 넣어주시면 폭이 보기에 알맞게 되는 것 같아서 저는 일부러 아바타를 넣는 설정으로 변경한답니다.
어쩌다가 글이 이렇게 옆으로 길어져 버렸을까요? "도와줘 쨩가!"를 부르듯 아바타를 불러보았는데도 효과가 없네요....
“도와줘 짱가!”에서 잠깐 물러가는 듯싶더니 또 찾아든 감기 때문에 맹맹한 코로 ‘스스스’ 하고 웃습니다. 경순 씨 기억 속에는 ‘우리들의 짱가’가 훈이를 고이 내려놓고 블루스타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적과 함께 장렬히 자폭하는 장면을 본 이후로 밥도 안 먹고 울어대던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순 씨는 전원주 씨가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짱가를 외쳐대자 흠칫 놀라, 누군가가 어쩌고 있나 흘깃 쳐다보기도 했지요. 김남시님,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읽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촘촘한 것도 다시 수정하셨는지 이제 훨씬 보기 편합니다. ^^
루이차오님 글에 꼬리말을 달다 꺼내든 하인리이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원제가 ‘Und sagte kein einziges Wort’라는 것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제목과 같은지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전혜린도 이 제목을 소중히 여겼기에, 슈방빙의 추억이 담긴 책의 제목으로 달았겠지요.
뵐의 책 제목 "Und sagte kein einziges Wort"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실제 주어가 없다면 가짜 주어라도 만들어서 문장을 만드는 독일어의 문법적 특징에 비추어보면 분법적으로는 불완전한, 소설이나 시에서나 사용될 수 있을 문장이지요. 아시겠지만 한국어는 문장 내에 반드시 주어의 자리를 마련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주어가 없는 문장들이, 서구 언어의 문법적 기준으로 볼 때 혼동스럽고 틀린 문장들이, 버젓하게 자기 소임을 다하고 있지요. 뵐의 이 독일어 제목을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옮긴 걸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이 번역문 속에서 독일어와 한국어가 갖는 차이가 경이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건 뵐의 독일어 문장을 거의 '문자 그대로' 번역한 '번역문장'이면서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한국문장'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이 문장이, 전혜린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기억에 깊이 남게된 것도 이 덕분일 겁니다.
그렇군요.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군요. 오늘 만난 분 중에 마침 독어전공자가 있어서 안 그래도 하인리이 뵐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도 김남시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말씀하셨듯이 이 문장은 전혜린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기억에 더 깊이 각인된 것 같습니다. 뮌헨의 슈바빙도 그러하지요. 취재차 독일에 두 번이나 다녀온 분이라서 슈바빙에 대해 여쭈었더니 마치 하나의 감탄사처럼 “전혜린!” 하시더군요. 제에로오제 음식점도 찾아가려했는데 일정상 맞지 않아서 아쉬웠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되뇌셨지요. 남자분이었고 옆 좌석에 아내도 함께 앉아있었던 터라 뭔지 모를 묘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답니다. ^^
위상학은 앞으로 비판학문이 지향해야 할 패러다임의 영역이 아닌가 합니다. 제 학위논문의 주요한 장이 이 문제였었고 고진 이전에 시차적 관점의 중요성을 제시했던 제 스승 라이너 슈어만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였지요. 사실 하이데거 후기의 사상을 바로 토포스의 문제로 포착할 수 있지요. 가다머 역시 우리의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바로 토포스가 없는 "atopon"(the placeless)라고 신랄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이 문제를 John Sallis라는 철학자가 깊이 연구하고 있지요. 비현상학자들을 통해서 이 문제가 어찌 얘기 되는지 시간이 되면 다시 들러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