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변화는 분심分心에서 비롯된다
우주 자연은 결코 생성, 소멸하지 않는다는 나의 '우주불생불멸론宇宙不生不滅論'에 여러분(특히 기독교인들) 모두 거부감을 느끼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거부감이 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유무有無는 하나이고, 시종始終은 하나이고, 청탁淸濁은 하나이고, 고저高低는 하나이고 등등 이제까지 우리가 상대적인 것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진실로 하나임을 깨달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인식 단계에서는 불가능하다. 혹시 여러분이 "음양陰陽은 하나이다."라는 말을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이는 음양陰陽이 하나임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보아온 책들이나 주위 말씀에 세뇌된 까닭임을 알아야 한다.
이점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너무 인간적이기에 깨달을 수 없다는 견해는 나의 '분심론分心論'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대상을 둘로 쪼개어 그것을 나 자신과 분리시키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마음 때문에
음양陰陽이 나뉘고, 유무有無가 나뉘고, 시종始終이 나뉜다는 것이 '분심론分心論'의 핵심이다.
분심分心을 가진 우리 인간만이 음양陰陽, 유무有無, 시종始終으로 나누어 인식 할 뿐 우주자연에는 그러한 나뉨이 없다. 예컨대 인간의 칠정七情 또한 분심分心에서 비롯되니 분심分心이 없는 천지天地에는 칠정七情이 없다. 그렇기에 노자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천지天地에 칠정七情이 없어 불인不仁하다는 말에 있어서 그 없음은 절대의 무無가 아니라 천지天地에 칠정七情이 모두 있어 이것이 하나됨으로 인한 없음, 있음을 승乘한 없음이다는 것이다. 프리즘에 햇빛을 비추면 칠색七色의 무지개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 무지개빛은 칠정七情, 프리즘은 인간의 분심分心, 햇빛은 천지天地의 불인지심不仁之心으로 비유 할 수 있으니 햇빛의 무색無色 투명함은 본래 칠색七色이 없어서가 아니라 칠색七色이 편벽됨 없이 고루 갖춰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분심分心이라는 프리즘에 비춰지면 본래 하나인 것이 나뉘어지는 바 음양陰陽, 유무有無, 청탁淸濁, 고저高低 등의 상대적인 나뉨은 분심分心을 가진 인간에겐 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종始終의 유무有無를 물어보는 앞 단락에 있어서 원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찍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분심分心이 일어나는 시점이다. 그 순간 태허太虛가 태극太極으로 변함과 동시에 태극太極 위에 음양陰陽이 올라 타고, 또 그 위에 사상四象이 올라탄다. 따라서 태극太虛, 태허太極, 음양陰陽, 사상四象, 오행五行 모두 분심分心에서 비롯된 것이니 진리의 자리에서는 결국 모두가 하나의 원일 뿐이다.
분심分心에 대한 나의 철학은 본삼本三때 큰 고통을 겪으면서 완성되었다. 나의 아픔이 분심分心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병病이 분심分心의 자리에서 나왔음을....
'병病'이라는 문자를 살펴보면 화火를 취상取象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병病 안의 '병丙'이 바로 형제오행兄弟五行에 있어서 화火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 '화火'를 취상取象해보면 인간(人)이 하나를 둘(/)로 나누어 인간 밖으로 분리시킴(火)을 알 수 있다. 이처럼 火는 분심分心의 대표적인 상象이니 모든 병病은 이와 같은 화火에서 생긴다.
그렇다면 병病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태太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음양陰陽을 나누는 분심分心에서 떠나 태극太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火에 있어서 둘로 나뉜것(/)을 하나로 이어주고(-) 그 하나(·)를 인간 안으로 회복시키는 것(太)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인간 안이니 밖이니 하는 표현은 종교적이다. 즉 하나됨(神)을 인간 안에서 찾는
것은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불교의 교리와 상통한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이 내안에 있음을 올바로
깨달을 때 우리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다. 이에 나는 우리가 어떤 주인 밑에서 복종하는 죄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주인됨을 믿고 싶다.
화火에서 벗어나 태太로 돌아가는 것은 평범한 인간으로선 쉽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의 길,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병病이 화火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으나 화火의 자리만 제대로 지켜도 큰 병病없이 오래 살 수 있다. 하나를 둘로 쪼갬에 있어서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는 화火의 자리에선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우리 인간은 이러한 火의 자리도 지키기 힘들다. 태어나면서 이미 우리 마음은 한편으로 치우치기 때문이다. '심心'에서 취상取象해 보면 火에 있어서의 둘로 쪼갬(/)이 중용中庸을 지키지 못하고 한편으로 치우쳐 있음(人'')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겐 바로 이것이 문제다. 분심分心을 일으켜 기뻐하고, 슬퍼함에 과過, 부족不足이 없으면 괜찮으나 지나치게 기뻐하고, 쉽게 슬퍼하면 이것이 곧 문제이기 마련이다. 한의대생이라면 한 번쯤 접하는 <중용中庸>은 이러한 火의 자리를 논한다.
이제까지 말한 분심分心이 어쩌면 여러분에겐 경계의 대상으로만 보일지 모른다. 모든 병病의 근원, 고해苦海의 원천이라 하였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심分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비록 모든 병病이 분심分心에서 비롯되지만 우주 자연이 변화하는 근본, 원圓을 이루며 끝없이 순환하는 원동력 또한 분심分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있어서 합심合心은 순리順理, 분심分心은역리逆理이기에 이 분심分心을 반드시 없애야할 대상으로 보면 안된다. 이는 진리의 원圓이 순리順理가 아닌 역리逆理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니 노자가 말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과 뜻이 상통한다. 예컨데 남녀의 만남에 있어서 두사람이 분심分心을 일으켜 서로를 음陰(女), 양陽(男)으로 보지 않고 음양陰陽이 합쳐지는 하나의 자리, 즉 태극太極(人間)으로만 본다면 어찌 새생명의 탄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모두가 분심分心에서 벗어나 합심合心, 즉 태太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이는 곧 진리의 수레바퀴가 멈춤을 의미한다. 우매한 중생이 있기에 부처가 있고, 유급당
하는 제자가 있기에 스승이 있고, 평범한 다수가 있기에 한사람의 수재가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열심히 그를 실천할려고 노력할 것이다.
중간치기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긴가민가 할 것이다.
그런데
하치리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길을 들으면
깔깔낄낄대고 웃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치리들이 웃지 않으면
내 길은 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이처럼 변화의 시작과 끝은 분심分心을 통해서 이루어지니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분심分心이 없다면 시작과 끝이라는 용어 자체를 이 자리에서 쓸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여러분 중에 몇몇 똑똑하신 분들은 다음의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앞서 분심分心은 사람에게만 있다고 했는데 어찌 우주 자연의 변화가 분심分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십니까? 이것은 논리적 모순 아닙니까?
우주 자연의 변화가 분심分心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표현보다는 우주 자연의 변화가 '인간의 분심分心'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표현이 타당하다. 이러한 나의 견해는 천지인天地人 관계에 있어서 天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동양사상東洋思想과 다르니 나는 인간을 천지天地 변화의 중심으로 생각한다. 강효신 선생님의 말씀대로 숨쉼으로 인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이 天이다. 따라서 天地는 인간의 분심分心으로 돌아가는 바 나의 한 마음으로 태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지며 몇 겁이 지나도록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불교의 인연설이 등장하는데 나는 더이상 이 자리에서 인연설을 논할 수 없으니 그 까닭은 내가 함부로 내뱉는 몇마디로 인해 생기는 인연의 끈, 業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