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에 다시, 산에 듦에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새들의 날갯죽지 소리, 풀벌레, 부엉이 소리 그리고 계곡 길 따라 이슬 내리는 소리에게 미안합니다. 아니, 지리산 모든 생명들과 영령들에게 소란을 피워드림에 머리를 숙입니다. 그저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만 남기고 지나가렵니다. 그렇군요. 땀도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갑니다. 왜 왔냐고 묻지 마세요. 산이 좋아서, 지리산이 좋아서 왔습죠. 짐을 많이 비우고 와선지 여느 때와 다르게 가볍습니다. 그래도 코재는 오르기 어렵습니다.
노고단 산장에 많은 산객들이 웅성거리더군요. 잠을 잊은 그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지리산에 들어왔네요. 소란스럽긴 하지만 저 혼자 외롭지 않아서 좋습니다.
아! 노고단 언덕에서 하늘을 봅니다. 랜턴을 끄니 별들이 쏟아집니다. 우주의 쇼 구경에 내가 중심인 것 같습니다. 머리를 제키고 한 바퀴 도니 우주 구경 다 했네요. 좀 어지럽지만. 티끌보다 못한 이 생명체가 우주를 올려다봄에 저절로 숙연해집니다. 감사합니다. 구름 안개 불러오지 않아 눈과 마음이 호강합니다. 저 별들이 점점 더 멀어진다고 하지요. 이 지구에서도 더욱 멀어지고 있다지요. 우리 인간들의 사이도 점점 멀어지기도 합니다. 이 황홀한 장관은 오늘의 목적을 이미 얻은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발걸음은 본격적인 능선길이라 내림과 오름의 연속입니다. 임걸령에서 물을 보충하니 여명이 천왕봉 쪽에서 붉게 달아오릅니다. 삼도봉에서 결국은 지리산의 일출을 맞이하게 됩니다. 발아래로는 불무장능 계곡 따라 운해가 넘실됩니다. 우측으로는 지나온 노고단 그리고 아득히 멀리 만복대도 조망이 되네요. 물론 좌측으로는 천왕봉이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반달도 희미해진 일출은 또 한 번 가슴 뭉클함을 선사해줍니다. 서서히 돌아오는 지리산의 짙푸른 품은 부드럽기만 합니다. 더 이상 가야 하나요. 허기진 배속에 김밥 한 덩이 넘어가지 않네요.
화개재로 내려가는 계단, 오늘도 백 몇 개 세다가 놓쳤네요. 돌아 오르려니 꾀가 납니다. 다음에 다시 세겠습니다. 토끼봉은 토끼 같이 오르지 못하네요. 연하천 넘어가는 철재 계단은 왜 그리 높아 보이는지 무리한 진행에 넓적다리에 쥐가 오릅니다.
산객들의 쉼터 연하천. 샘물 구멍에서 물을 채우니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어쩜 그리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높은지 오늘도 폭염의 연속입니다. 바람도 자네요. 에고, 미숫가루 한 잔 타먹고 벽소령으로 바로 진행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아니, 저는 왜 이곳에 왔을까요. 나이도 오십이 훌쩍 넘어 혼자서 발만 믿고 왔지요.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하지요. 55년생부터 63년생까지 우리나라 전후 세대들이라고 하고요. 얼 추 700만 명된다고 하니 저도 그 중간에 있네요. 산업화 시대, 공돌이 공순이, 열사 땅의 일꾼들, 예비고사 세대들, 1987년 서울의 봄 세대들. 마지막으로 부모를 모셔야 하는 세대들, 많은 기러기 아빠들. 서서히 퇴직 또는 퇴출되고 있는 세대들. 뭐 이 정도면 거의 이해되는 세대 속에 저도 존재합니다. 어느 교수가 쓴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편에 보면, 머리 희끗한 대리 운전기사와의 대화가 나오지요. 대기업을 명퇴한 대리운전수와 가는 길 멈추고 강남 어느 술집에 들어가 비슷한 또래의 슬픔에 같이 술잔을 비웠다나요. 저도 아직 직장에 남아있지만 위에서 치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옵니다. 정신없지요. 아직 늦둥이 딸이 내년에 대학에 가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그리고 아들 녀석 아직 대학 일 년 반이 남았고요. 궁상 그만 떨게요. 가는 길에 힘이 부쳐오네요. 벽소령에서 물 한 병 사서 매실을 탔습니다. 마눌이 지치면 먹으라고 싸 줬는데 이제 더 이상 목이 말라 못 참겠더라고요. 마눌이 준 정성으로 올라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덕평봉인가요. 오르는데 허기지고 다리에 쥐가 다시 오릅니다. 계속 추월당하고 양보하고 뭐 그렇게 올라갔지요. 예전 같으면 이 곳 쯤에서 힘이 생겨 세석을 비켜지나 장터목에서 숨 한번 고르고 천왕에 오르는데 아니더군요. 초반에 무리였는지 아니면 곡기가 없어서인지 식은 땀줄기와 오심이 흘러나옵니다. 더위도 먹었고요. 영신봉 오르는 계단에 서있고 말았습니다. 어느 숙박 남녀가 오르다가 걱정도 해줍니다. “허, 그래가지고 언제 천왕봉에 가지요?”하네요. 그 순간 저는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지요. 세석에서 접을 겁니다.”했지요. 그러자 맘이 편해지더군요. 12시 반까지 천왕에 가지 못하면 오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요. 그럴 바에야 여기서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야겠습니다. 체력도 준비도 없이 제 삼자에게 힘을 얻고 싶지 않네요.

세석 언덕에서 잠시 촛대봉과 천왕봉을 눈여겨봤습니다. 한 순간 오기를 부려 오르면 못 할 것 없겠지 하다가 그냥 거림 방향으로 발길을 내려놓았습니다. 기권도 다음을 기다리는 거지요. 더군다나 대원사까지는 너무 멀어요. 그래요. 지리산은 언제나 우리를 받아줍니다. 아무 조건 없이 넓은 품으로 우릴 감싸주지요. 그러나 나쁜 마음이나 허영으로 들어오면 가차 없이 거부하지요. 준비 없이 온 저에게 어서 내려가라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석 샘물에서 매실을 타 나눠 마시고 서울에서 참가한 한 사람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물론, 계곡에서 몰래 알 탕을 했고요. 지리산에 온갖 푸념을 하고 내려왔어요. 항상 그렇지만 거림 길 측정은 잘못된 것 같아요. 1.3킬로를 40분 넘게 걸었으니까요. 그래도 지리산은 말이 없어요. 언제든 다시 오라고 부드럽게 웃고 있네요. 오늘 저에게 짙푸른 시간을 내주어 감사합니다. 삶이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는 부족함이 있어요. 그 의미를 찾아 다시 또, 내년에 올께요. 안녕히 계세요. 지리산!
(2013지리산화대종주트레일런 46km, 372명중 제한시간 14시간 내 주파자 172명)
첫댓글 조본부장 삼도봉에서 보는 지리산 참 아름답네요! 화개재로 내려 가는 그 계단 올라갈 땐 죽음이죠!
지천명의 나이 중간에 자신의 나이에 맞게 산을 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요? 마음은 늘 20대 청년이지만
몸은 이미....그래서 나는 빨리 가는 것보다 늘 감사함을 느끼며 가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하고 있답니다. 티끌만큼도 안되는
미약한 인간이 영겁의 세월을 버텨온 자연을 이길 수는 없지요.
제 어찌 자연을 거슬리겠습니까? 단지, 세월 감에, 더 늦기 전에, 지리산에 저의 한계를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파란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가겠지만,
앞으로 형님 말씀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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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연이, 지리산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다른 것은 없건만
아직 내려놓을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수리산에서 뵙겠습니다. 큰형님!
지리산 품안에서는 산길 따로, 물길 따로,바람길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둘로 넷으로,열에서 하나로 .오고 가며
너 ,네 없이 하나 일 터인데, 지리산 숨결 같은 형님들의 넉넉함을 미둔선생 덕분에 새삼 돌아봅니다.
미둔선생의 맑은 눈으로 바라 본 지리산의 따뜻함이 보이는듯 합니다. 늘 미둔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삼천리는 곱기만 하구려. 감사............
와~~~우
사진으로만 봐도 앉아있는 제 다리에 쥐가 오르는것 같아요^^
저도 올 여름 가장 잘 한 일중 하나를 꼽자면...
해발 1950m의 한라산을 오른일입니다.
힘들었지만 성취감을 말로 표현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 이 맛에 산을 오르는 구나"
저도 내년엔
살좀 빼고 다리 근육만들어서...지리산 도전해 볼까요?
한라산 백록담을 갔다 왔다고? 대단한 일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