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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의 길, 그 지난(至難)한 여정
♣ 이승만의 환국(還國), 그 우여곡절
당시 미국에서 한국까지는 배로 한 달 정도 걸렸다. 이승만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귀국한 것은 해방되고 두 달 만이었다. 비행기를 탔는데도, 배타고 오는 것보다 두 배나 시간이 걸렸다. 이승만의 망명 생활이 파란만장했다면, 그의 귀국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승만을 골치 아프게 생각한 미국 국무부가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고 했다. 사실 그네들의 예상은 맞았다. 귀국한 이승만이 계속해서 미국 관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귀국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낙심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면서 이승만은 귀국길에 올랐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승만의 귀국에는 두 가지 우연이 겹쳤다. 하나는 하지와 윌리엄즈 중령의 만남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하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윌리엄즈 해군 중령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全無)했던 그는 반가워하며 그 자리에서 윌리엄즈를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서울의 중앙청에서 하지의 업무를 보좌했다.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책상에서 보고서나 만지작거린 것이 아니라, 직접 한국인들을 만나 민심(民心)을 파악하려고 했다. 쌍발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남한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국의 서민들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윌리엄즈는 한국인들에게 거듭거듭 똑같은 질문을 받아야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왜 데려오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윌리엄즈는 자신이 전해들은 민심을 하지에게 보고했다.
하지는 혼돈 상태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을 보내줄 것을 맥아더와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승만이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삼십여 년이 지난 후였다. 더군다나 나이 칠십 세의 고령이었다. 평균 연령이 사십여 세 전후였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이승만의 활약상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한국인들도 이승만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는 점은 무언가 특이하다. 어떻게 윌리엄즈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보내라고 요청했을까? 여기에 또 하나의 우연이 있다. 그 우연을 만들어낸 세력은 놀랍게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8.15 해방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는 10월 16일까지를 학계(學界)에서는 '좌익 득세기'라고 부른다. 해방 공간을 주도한 세력이 좌파였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온건 좌파 여운형이 주도한 조건 건국 준비위원회(건준)가 발족되었다.
다음날에는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풀려난 시국 사범들은 건준의 지방 조직을 차례로 건설해나갔다. 순식간에 건준은 162개의 지부로 확장되었다.
건준이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던 8월 20일, 광주의 벽돌 공장에 숨어 있던 인물이 서울로 올라왔다. 훗날 한반도에 파란을 몰고 온 공산주의자 박헌영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박헌영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는데, 석방 사유가 특이하다. 공산당에서 전향을 했거나 혐의가 없어서가 아니고 정신병자라는 이유였다.
박헌영은 몇 달씩이나 자신의 인분(人糞)을 먹어가며 정신병자 행세를 했다. 혁명 과업을 이해서 인분을, 그것도 몇 달씩이나 먹어낼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 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여운형의 건준에 참가해서 조직을 장악해버린다.
좌우 연합조직에 한 파트너로 참가했다가 결국 조직 전체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공산당의 수법을 발휘한 것이다. 박헌영이 장악한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산당이 선포한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은, 돌아오는 것 자체가 불투명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승만을 얼굴 마담으로 이용하려는 공산당의 전술이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던 김구를 내무부 장관으로 발표한 것도 같은 술책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장관에는 국내외의 명망가들을 앞세우고 차관에는 공산주의자들을 포진시켰다.
그럴듯하게 보여서 세력을 확장한 다음 자신들의 뜻대로 정국을 끌고 가고자 했다. 앞으로는 얼굴 마담을 내세우고 뒤에선 실세가 장악하는 것은 그자들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미군정은 당연히 인민공화국을 거부했다. 그것은 해방 정국의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인민공화국'에는 이처럼 복잡한 사연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깊숙한 사연을 알 리가 없었다. 대중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갔으니 당연히 우리나라 정부가 세워질 것으로 기대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그때까지 좌익도 없었고 우익도 없었다. 그저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는 뉴스가 보도되니, 그것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정부이고 이승만은 새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귀국을 재촉했던 것이다.
9월 13일자 하지의 일일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손문(孫文, 중국 혁명의 아버지)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10월 5일 뉴욕 공항에서 출발했다. 프란체스카는 동행하지 못하고 3월 뒤에야 시애틀에서 일본으로 가는 군 수송선을 탈 수 있었다. 공항에는 그녀와 미국인 친구들, 구미위원부 임원들이 나왔다. 역사적인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승만은 말했다. "나 한 사람은 오든지 가든지, 죽든지 살든지 일평생 지켜오는 한 가지 목적으로 끝까지 갈 것이다." 그 한 가지 목적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당연히 인민공화국 주석 제의를 거절했다. 6일 뒤인 10월 21일, 그는 올리버에게 편지를 썼다. "가소로운 부분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해서 정부를 조직한 일이오. 나는 그들에게 소련이 나를 반공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마당에 내가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으니 큰 영광이라고 말하였소 ... "
공산주의자들의 "가소로움" 때문에 그는 삽시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환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귀국을 가능케 한 두 가지 우연, 하지와 윌리엄즈의 만남과 인민공화국 명단 발표는 때로 드라마보다도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승만을 도와준 두 세력, 미군정과 공산당이 이승만으로 인해 숱한 고초를 겪게 되는 훗날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흥미롭다.
이런 것을 우연이라고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딱 들어맞는 성경구절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이승만의 귀국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스탈린의 분단 정책과 이승만의 대응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은 우리의 건국으로 분단이 확정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민족 분단을 대가로 지불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왔다.
그네들의 주장이 거짓임은 입증하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소련이 멸망한 다음에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공개된 소련 공산당의 기밀 문서들 가운데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이 있다. 내용은 한마디로 북한에 친소(親蘇) 정권을 수립하라는 명령이다.
9월 20일이면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이다.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으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 업무를 분담하기로 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었다. 통일 신라 이후로 1500년 통일 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이 분단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보 한 장으로 분단을 결정해 버렸다.
그 비극적이면서 중요한 전보에는 남한에 진주한 미군과의 합의나 한반도의 통합 또는 통일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스탈린에게는 미군과 협의해서 남북한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훗날 벌어지는 미소 공동회의 같은 것은 모두 "쑈"에 불과했다.
스탈린의 전보 내용은 지시를 받은 실무자의 보고서에서 또 한 번 확인된다. 9월 20일자 지령에 대한 응답으로 12월 25일에 슈킨 총사령관이 보고서를 보냈다. 당시 소련의 군 지휘 체계는 스탈린 대원수, 안토노프 원수, 정치국장 겸 대장 슈킨 총사령관 순이었다. 소련 군부 서열 3위의 실력자가 보낸 보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탈린의 9월 20일자 지령문에 따라서 한반도의 이북 지역에서 ... 소련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이익을 ... 영구히 지킬 인물들로 구성된 정권을 구축하기까지 ... 이런 정권 수립을 위해서 토지 개혁, 중앙 집권적 조직을 서둘러 구성해야 한다."
스탈린이 세우라는 정권은 "소련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이익을 영구히" 지킬 수 있는 정권이었다. 다시 말해서 꼭두각시를 세우라는 것이다.
슈킨이 보고서를 보낸 시점은 12월 25일, 바로 그때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 장관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우리 민족에 대한 신탁 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였다. 여기에서 또 한 번 겉과 속이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앞에서는 한반도에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한 과정을 논의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꼭두각시 정권 수립의 지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자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북한의 공산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45년 10월 12일, 여전히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에 북조선 주둔 소련군 25군 사령관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반일당(反日黨)과 민주주의적 단체들은 자기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지방 자치 기관과 소련군에 등록하여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지도 기관의 인원 명부를 제출할 것."
실제로 집행된 명령은 명령서보다 훨씬 엄격했다. 각 정당은 인원 명부를 제출하는 것은 물론 신원 조사도 받았다. 심지어 조상 때부터의 가계(家系)와 8세 이후부터의 자서전 내사까지 받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당시 북한 지역의 정치 지도자급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서부터 출신 배경까지 샅샅이 파악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은 북한의 공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소련이 진군한 지역에는 대단히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착취자들의 재산을 무산대중에게 돌려준다는 요란한 구호와 함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그리고 기존의 공산당과 여타 정당 사이의 합당으로 노동 대중 정당을 출범시킨다. 처음부터 공산당 정권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 대중 정당의 노선을 주장하는 연립 정권을 수립한다.
연립 정권이 수립되고 나면 잇달아 의심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연립 정권에 참여한 인물들의 암살, 사고사, 숙청이 이어진다. 의문사(疑問死)가 연달아 일어난 뒤에 살아서 남아있는 자들은 소련과 친화적인 공산주의자들뿐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친소 단일 정권을 수립한다. 이때쯤 되어서 정당의 이름도 공산당으로 바뀐다.
소련의 "공식"은 북한에도 충실히 대입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 조만식까지도 포함한 연립 정부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다가 국내파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이 암살당하고 민족주의자 조만식은 연금되어서 생사(生死)가 불투명해졌다.
북로농의 김일성과 남로당의 박헌영이 남아있더니, 결국 국내파 박헌영은 숙청되었다. 최종 승자는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이었다. 좌우합작이니, 연립 정부니 하는 것은 친소 독재 정권으로 가는 중간 단계들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스탈린의 흉계를 꿰뚫어보았다.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동단결(大同團結)이 필요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20대 개화파 시절부터 사용했던 유명한 구호를 외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공산주의와 싸우고 나라를 세우는데 근원이 되는 신념은 기독교 정신이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28일 정동 교회에서 연설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40년 동안 사람이 당하지 못할 갖은 고난을 받으며 감옥의 불같은 악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온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
북한에서는 이미 공산 정권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남한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마침내 정면 대결을 선언했다. 1945년 12월 19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앙 방송국(KBS)을 통하여 중계된 이승만의 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은 한반도의 붉은 세력을 향한 선전 포고였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은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他國)의 권리 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를 위주(爲主)하는 자이다 ...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共産) 명목을 빙자하고 국권(國權)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 사리(私利)와 영광을 위하여 부언낭설로 인민(人民)을 속이며, 도당(徒黨)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軍器)을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名詞)를 조작하여 국민 전체의 분열 상태를 세인(世人)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奸計)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 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사욕(私慾)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소련과 공산주의의 인기는 세계적으로 절정이었다. 소련군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웠다. 특히 1943년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결전에서 독일군을 섬멸한 것은 전세(戰勢)를 역전시킨 쾌거로서 세계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소련은 2천만 명이 죽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면서 미치광이 히틀러를 꺾은 전승국(戰勝國)이었다. 미국의 국무부, 재무부 등의 요직에는 무계급 만민 평등의 공산주의 선전과 영웅적인 투쟁에 매료되어 자발적으로 소련의 첩자가 된 고위 관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요 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반역, 파괴, 공산 세력은 국가 건설의 길을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건국(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2차 대전 이후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었다. 소련에 대한 대결 노선을 천명한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반도의 김일성, 박헌영 역시 스탈린의 지령에 절대 복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 점을 지목하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 하나 못 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형용(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서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이승만은 남한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의 졸개이며 매국노라는 점을 직설적으로 폭로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 "한국 사람의 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서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민족 반역자로 묘사하였다. 모습은 한국인이지만, 실상은 소련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들이란 지적이었다.
소련이 그렇게 좋으면 소련으로 가라는 말은 단어 하나만 바꾸면 지금도 유효하다. 이 나라의 종북 세력들이여, 수령이 그렇게 좋고 북한이 좋으면 북으로 가라. 거기서 주체 사상을 하든 유일사상을 하든 마음껏 하라.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먼저 그 사람들을 회유(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오 ... "
설득이 되면 우리 편이다. 하지만 설득이 안 되는 자들이 문제다. 그들에 대해서 이승만은 비정하게 말했다.
"친부형(親父兄), 친자질(親子姪)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애증(愛憎), 친소(親疎)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 ...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 된다."
이승만은 공산당은 절대로 협동할 수 없는 원수이며 파괴자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위대한 연설은 이렇게 끝난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쟁의 화(禍)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민주 정체하(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 무궁한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당시만 해도 남한에서 공산당은 불법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우익과 좌익이 죽기살기로 싸우던 시기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강경한 연설은 조갑제의 표현처럼 "70세 노투사(老鬪士)의 위대한 선제 공격"이었다.
제대로 얻어맞은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은 "세계 민주주의 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박헌영 등 공산 세력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것이 불과 세달 전인데, 갑자기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앞뒤가 안 맞았다.
이승만에게서 보여지는 천재성 중의 하나는 타이밍이다. 공산당에게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 12월 19일이다. 박헌영이 반박하면서 남한 정국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입장을 놓고 찬반양론이 뜨거워졌다. 논쟁이 한창 달아오르던 12월 26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과인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었다.
한국인들에게 자치(自治) 능력이 없으므로 강대국들이 5년 기한의 신탁 통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이었다. 5천년 독립국이었던 우리가 자치를 못한다는 지적은 화약고와 같던 민심에 불을 붙였다. 즉각 김구와 이승만이 주도하는 반탁(反託)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공산당도 처음에는 반탁의 흐름에 밀려가는 듯 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은 찬탁인지 반탁인지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소련의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처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결국 박헌영은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소련군 민정(民政) 사령관 로마넨코가 지침을 하달했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1946년 1월 2일 서울로 돌아와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남한 민중에게 제대로 된 학습 효과가 되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이승만이 공산당은 사대주의자에 매국노라고 비판했다. 그 말이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강대국이 조국을 다스린다는데 공산당이 찬성하고 나섰다.
이승만의 말이 맞다는 것을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이승만은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해방에서 건국까지의 3년 동안, 이승만과 다른 지도자들의 중요한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승만은 외부 세력이 만들어놓은 흐름을 관망하다가 적당하게 올라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절한 타이밍의 선제적 행동으로 스스로 흐름을 만들어나갔다. 본인이 흐름을 만들고 본인이 주도해 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것이 그가 대권(大權)을 차지한 중요한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