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뻑적지근하게 첫 타를 치루는구나. 단숨에 날린 화살이 산맥 바로 아래에서 거대한 화구를 형성하니 곧 바로 비명이 들리며 어두운 기운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거, 예전에 몰려들었던 악마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데?
"지금 우리들 중 이곳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너다. 이곳의 악신의 성역. 나와 크리스, 네프리스는 자기 몸을 지키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설마 전에 우리가 여기서 겨우겨우 빠져나왔단 말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정말, 인가? 옆에 다가서는 네프리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닌게 아니라 크리스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냥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더욱이 어두운 하늘 때문에 얼굴이나 겨우 분간할 만한 어둠 속에서 아리나의 얼굴도 긴장 때문인지 굳어 있었다.
"에엑? 아니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녀석들이 온다!"
"으악!"
아리나에 의해 강제로 앞으로 떠밀리고 보니 금새 주위의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10층 아파트만큼 큰 것이 셋, 아까 썩은 고깃덩어리가 되었던 눈알이 열, 온 땅을 헤집으면서 달려오고 있는 머리 둘 달린 염소 같은 것이 스물.
으악! 나보고 도대체 어찌하라는 거야?!
"우린 너만 믿는다."
"부탁해!"
"꼭 살아남아라!"
"젠장!"
나중에 제느랑 죽어라 염장질 해주마! 셋에게 어깨를 떠밀려 혼자 떨어지고 아리나를 비롯한 세 명은 보호막을 치고는 그 안에 들어앉았다. 순식간에 덜렁 혼자 세상에 떨어진 셈. 앞으로 집은 어찌하고 자식은 안 딸렸지만 밥 달라는 처는 어찌하고 어떻게 벌어먹고 살 건지?
"에잇! 나중에 꼭 복수할거야!"
제느한테 다 꼰질러서 말이야,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일단 이왕 일이 이렇게 된거, 확실하게 쓸기 위해서 전에 썼던 총을 다시 만들어냈다. 악신의 성역이라고 뭔가 몸에 특별히 느껴지는 압박감 같은 건 없지만 빛은 왠지 끌어올 수 없는 지라 이런 걸로 해결을 볼 수 밖에. 양손에 만들어낸 가짜 P-90과 FA-MAS로 일단 보이는 데로 후려갈겼다.
쿠구궁! 쿠구구궁!
"…."
"이, 이거 지금 장난이지?"
뒤에서 들리는 네프리스와 크리스의 목소리에 되게 뻘쭘했다. 몇 방 쏘지도 않았는데 탄착군에 뻥뻥하고 지축을 뒤흔들며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더니 검게 죽은 땅에 새겨진 커다란 화구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징그러운 눈알들과 그림자들은 다 어디 갔는지 조각도 안보였다. 이거 나도 이렇게 센 줄 몰랐는데?
"정신들 차려. 여긴 위험한 곳이야. 빨리 미궁으로 들어가야 해."
"미궁? 거기는 또 어딘데요?"
"저 검은 바스탈린 산맥 아래에 입구가 있다. 총 200층 짜리 미궁이야. 이상하게도 그 안쪽의 것들은 지상보다는 약해서 적당히 숨기에는 괜찮을거야. 지난번에 왔다가 놓고 간 물건들도 그대로 있을거고. 서둘러. 움직이자."
"네…."
제느는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몰라도, 계속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더구나 이 안쪽에 들어오면서 그나마 이어져있는 감각이 흐려져서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대충 지하에 있는 건 알겠는데….
두두두두두!
아마도 크리스나 네프리스에게는 버거운 것을 넘어서 마주치면 바로 도망가야될 놈들도 나왔는데 냅다 갈기면 속절없이 쓸린다. 총알이야 내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되는데로 코빼기라도 내비치면 바로 갈겨주는데, 좀 강하다 싶은 것들은 몇 방 맞고 버티거나 막아내다가 쓸리고 그 외는 불쌍할 정도로 싹 쓸렸다. 때문에 미궁쪽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쉬웠다.
"젠장. 우린 뭐 한 거지?"
"저 녀석이 센거야. 분명."
"손에 들고 있는 건 또 뭔데?"
"묻지마. 다칠거야."
물어도 별로 다칠건 없는데? 거 참 사람 무안하게 스리 등뒤에서 그렇게 다 들리도록 쑥덕될 건 없잖아. 하여튼 빨리 제느를 찾아서 이 바닥을 떠야겠다.
"그런데 미궁 입구는 어디에 있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미궁 입구는 위장되어 있어. 앞으로 100걸음 더 전방으로 걸은 후 동쪽으로 20걸음, 북쪽으로 70걸음, 다시 동쪽으로 50걸음, 다음에 서쪽으로 70걸음, 남쪽으로 70걸음 걸으면 나타난다."
"엥?"
"웃! 바질리스크다!"
크리스가 지르는 소리에 산맥의 기괴하게 변형된 나무들 사이를 헤집고, 아니 다 부러트리면서 나온 집은 커녕 커다란 배 한 척 만한 도마뱀에게 총탄을 되는데로 선사해주고 나서 아리나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니 동으로 70, 북으로 70, 서로, 70, 남으로 70이면 이건 그냥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무슨 삽질이야. 정말."
"삽질? 너는 미궁이 그냥 걸어가면 있는 거라고 생각해? 다 정해져 있는 룰에 따라 움직여야 되는 거란 말이야."
"그래. 정해져있는 룰에 따르지 않으면 미궁은 입구를 내주지 않아. 우리도 바보는 아니라구. 저기! 나이트쉐이드!"
"에잇! 그런게 있으면 진작 말해주지 말야!"
꾸워어어어!
무슨 전차가 달려오는 것처럼 땅을 울리며 달려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총을 몇 번 발사하니 명중한 자리에서 하얗게 빛이 퍽 터지며 순식간에 그림자가 바스러진다. 훗. 역시 난 명사수에다 뭐든지 한방에 처리하는 나이스 가이라니까.
"빨리빨리 따라와! 뭐하는 거야!"
"으에엑!"
어찌됐든 달려드는 온갖 악마와 마물들을 물리치며 어찌어찌 힘들게 미궁의 입구에 도달했다. 다른 사람은 어찌됐든 아리나는 그 혼란 속에서도 정확히 걸음을 세 가며 걸은 모양이다. 정말로 처음에 왔을 때는 뭔가 밑에 커다란 것이 있다는 것만 느껴졌는데 동서남북으로 돌았다가 다시 와보니 밑에 확실히 커다란 빈 공간이 있었다.
"70. 나타난다."
오래되고 이리저리 갈라진 커다란 문이 아리나의 목소리와 동시에 조용히 나타난다. 기괴하고 끔찍한 마수들과 시체들이 가득한 이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따뜻한 갈색빛을 지닌 고풍스런 나무문이었다. 크기는 대충 내 키의 세배 정도, 넓이는 20여 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쥔장의 취미가 무슨…."
"들어가자."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면 못 들어와. 이 문은 들어갈 때 1분, 나갈 때 1분밖에 유지되지 않거든."
"엑? 그런건 진작! 같이 가요!"
멍하니 있다가 크리스의 말을 들으니 정말로 문을 이루는 힘이 흩어지면서 사라지려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되게 친절하네.
아리나가 다가가 가볍게 문을 밀자 육중해 보이는 나무문은 크기와 겉 모양새와는 달리 아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안쪽은 벽에 걸린 횃불에 의해 밝혀져 있는데 벽이고 천장이고 바닥이고 모두 네모 반듯한 벽돌로 빈틈 없이 짜 맞춰져 있었다.
쿠웅!
문이 닫히니 바깥쪽하고 공간 자체가 완전히 단절된다. 뭐 그 수준이야 내가 몇 번 총으로 쏴주면 바로 뚫릴 수준이지만 아리나에게는 약간 버거운 수준이다. 저번에 그렇게 고생했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구나. 근데 그러고보니….
"반지가…."
반지를 낀 손가락에서 약간 아릿한 느낌이 들면서 안개가 깔린 듯 두리뭉실했던 느낌이 깨끗하게 이어진다. 역시 제느는 이 안쪽에 있었구나. 느낌이 괜찮은 걸 보면 아직 무슨 큰 일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으잉?"
횃불에 비치는 문의 윤곽이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지니 남은 것은 반대쪽과 똑같이 끝없이 이어진 통로뿐. 이거, 저쪽은 그냥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닌데?
"저쪽은 가면 죽게 되는 거울 통로야. 영원히 갇혀서 혼도 빠져나오지 못하지.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서로 꼭 잡고 다녀야 해. 까딱 잘못하면 미궁의 저주 때문에 각자 떨어져서 죽게 된다."
"아, 그런건 싫어. 크리스∼."
"여길 만든 녀석은 커플질투단원이라는 말이 있던데."
"조용히 해. 우리가 전에 도약한 곳은 10층에 있는 클루스의 방이었으니까 아직 우리 짐은 거기 그대로 있을거야. 일단 거기로 간다. 튀어 나오는 녀석들은 모두 아르벤이 해결해라."
"아, 그러죠 뭐."
왠지 모르게 억울하지만 대충 수긍하곤 다시 총구를 들었다. 양손에 들린,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처럼 묵직한 금속의 감촉이 새삼 몸을 긴장되게 만든다. 제느는 분명히 이 아래 깊숙한 곳에 있을 거라 생각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몰라도 대답은 없지만 분명 죽지는 않았을 거다. 뭐 붙잡혔다고 해도 무슨 일이야 당하겠어? 그냥 감금되어 있겠지. 말이야 그렇지만, 제느 같은 미소녀를 차마 불쌍해서라도 괴롭히거나 해체하는 짓은 절대 못 할거다. 아니 그런 상식이 통할 놈이라고 해야 하나?
"전체 미로는 방사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에 방들이 몇 개씩 있어. 통로에는 규칙이 있어서 길을 잘못 들면 거울세계로 날아가게 되지. 일단 한번 거울세계로 날아가게 되면 우리로서는 탈출이 불가능해. 물론 너라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함부로 움직이지는 말아."
"그럼 아리나가 앞장서야 되지 않아요?"
"아니. 미궁에서부터는 주로 앞에서 마수들이 튀어나온다. 지난번에 함정은 대부분 해체해버려서 괜찮을 테지만 마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거든. 지금 우리는 대응할 여력이 없어. 그에 상대할 만한 무기도 없는 상황이야."
그렇군. 하기사 아리나는 활 하나에 크리스랑 네프리스는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없으니까 마법도 제대로 못 쓰겠구나. 그리고 마법사라곤 하지만 보통 사람에 불과하니 괜히 마수랑 맞상대 하다가 뼈도 못 추릴라. 이거 내가 몸빵전사네 완전히.
"그럼 나랑 크리스가 중간에 설 테니까 아리나가 맨 뒤에 서고 네가 앞에 서면되겠다. 10층까지 어떻게 가는 지야 알고 있으니까 중간에 길이 막히거나 한다고 조급해하면서 혼자 튀어나가지마."
"네."
일단 네프리스의 말에 따라 그렇게 진형을 짜곤 네프리스가 일러주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뭔가 벽면은 으스스하고 아무도 없이 조용한데 주기적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바닥 돌에는 먼지 하나 쌓여있지 않고 벽에 촘촘히 걸려 통로를 밝히고 있는 횃불은 꺼져있는 것 없이 잘 타고 있다. 무슨 마법의 흔적 같은 건 안 보이는데 여기도 혹시 사람이 사나? 에이, 밖에 그런 것들이 돌아다니는데 설마 사람이 살까.
"왜 이렇게 조용한거죠?"
"대답은 이곳을 만든 녀석만이 해줄 수 있겠지."
딱 사람 걷는 데에 알맞은 만한 돌로 된 통로가 계속 이어진다. 중간에 갈림길이나 다른 통로, 문 하나 없이 일자로 죽 이어진 공간. 어디 꺾어진 곳이나 돌아 나가는 곳도 없었다. 결국 횃불이 빈틈없이 통로를 밝히고 있지만 저 끝은 어두운채로 보이지도 않는다.
"응?"
투다다당!
갑자기 뭔가 통로 저쪽에서 느껴지기에 대충 쏴 갈겼더니 잠시 후에 통로 저쪽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으로 흔들림이 전해져온다. 뭐지? 방금 무슨 어두운 기운이었는데?
"저기 뭔가 못 느꼈…왜 그런 얼굴이에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면 얼굴이 왜 그렇게 질렸어? 설마 내가 이상한 낌새 느끼면 아무렇게나 흉기를 휘두르는 무뢰한이라고 생각 한거 아냐? 뭐 느끼자마자 냅다 쏴 갈겼으니 그렇지만 어두운 기운이었다구.
"어쨌든 빨리 가요. 제느가 잡혀 있다고요."
"잠깐. 제느가 남자를 사귄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네가 그 애한테 뭔데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아, 잠깐만. 그거에 대해선 내가 설명해 줄게."
내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아리나가 먼저 네프리스의 손을 잡더니 크리스와 함께 뒤로 끌고가 쑥덕쑥덕 댄다.
불현듯 가슴이 아팠다. 제느에게 있어 난 뭐지? 아, 나 참. 괜히 또 사람 울적하게 만드네. 거 뭐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거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일단 구하고 보자. 막말로 잃고 나서 변심하지도 않고 끝까지 나를 찾아낸 여자인데 그런거 가지고 고민할 필요 없잖아. 요즘 사귀었다 헤어졌다 남자는 돈이에요∼라는 여자들 보다 100%, 아니 200%는 훨씬 낫다. 그러니까 빨리 구하러 가야지.
"아 뭐해요! 남은 지금 급해 죽겠는데!"
"아리나 그건 무슨!"
"됐어. 이해하려 하지마. 그러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알겠어?"
"아, 나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 납득 안가는 얼굴 하면서 오지 말란 말이야! 도대체 뭘 말해줬기에 저러지?
"빨리 내려가요. 이렇게 머뭇머뭇거리다가 뭐 이상한 거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
하여튼 이 사람들 적진에서 이렇게 분열하면 어쩌자는 거야? 저번에는 어떻게 여기서 살아나왔을까? 그거 참 이상하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며 통로를 따라 죽 걸으며 제느의 느낌을 정확히 찾으려고 계속 더듬었다. 미궁에 들어오면서부터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계속 불러봐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직 직접적인 전달은 되지 않는 모양. 더구나 저쪽에서도 내가 여기 들어왔다는 것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조용하다.
정말로 어떻게 된 걸까? 제느는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구하러 와달라고 한 걸까? 진짜로 이상한 일 당했으면 어쩌지?
"계속 이렇게 걸어가기만 하면 되나요?"
"그래. 길을 잘못 들지 않으면 1층에서 3층까지는 계속 하나로 이어지는 통로야. 지금쯤이면 3층 막바지에 도착 했을 텐데…저기다. 내려가는 계단이야."
정말로 계단이 있네? 끝없이 이어진 똑같은 통로 한쪽 벽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틈이 나 있고 거기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죽 이어져 있었다. 천장 높이는 꽤 높은 것이 뭔가 으스스했고 통로처럼 횃불이 일정한 간격마다 하나씩 걸려서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꽤나 깊었다.
"4층부터는 본격적이야. 조심해."
"네."
시계를 확인하니 입구에서 들어온 때부터 1시간쯤 지났다. 계속 똑같은 모습만 봐와서 그런가 그렇게 길지는 않았네? 계단에서 내려와 4층의 복도에 내려서자 제일 먼저 보인 건 무너져 있는 맞은 편의 벽이었다.
뭔가 커다란 것에 얻어맞은 듯 벽돌이 무너져내려 암반이 보이는 벽에는 누군가의 피로 보이는 새까만 얼룩이 져 있었는데, 그 옆을 보니 뼈다귀 뭉치가 있었다.
"전에 내려올 때 생겼던 약간의 트러블이야."
"그래요?"
못 본 걸로 치자. 당장 일어나서 달려들 것도 아니고. 이곳의 복도는 왠지 바람이 있다. 여전히 벽돌을 짜 맞춘 벽에 일정하게 걸린 횃불은 똑같은데 미약하게 미풍이 계속 불었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도 실려오는 냄새 따위가 전혀 없다. 이런 복도라면 하다 못해 돌 냄새라도 있을 법 한데 그런게 전혀 없으니 위보다 더 으스스했다.
"분위기 한번 싸하네. 원래 이래요?"
"응. 지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거야. 여기선 세계의 정보가 지옥으로 빨려든다.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건 그 때문이야. 이미 빼앗긴 거지."
지옥하고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니, 그 무슨 무시무시한 말이냐. 한층 이 밑에 있을 제느가 걱정된다. 정말로 좀 평범 한데는 우리 집 밖에 없는 거야? 왜 가는 데마다 지옥이니 드래곤이니 광신도같은 게 있는 건데?
"잠깐! 뭐가 와요!"
뭐야 이건? 지금보다 꽤 센데? 일행의 앞을 막아서고 한 탄창 분량의 총알을 쏟아내었을 때 멀리서 폭발하는 느낌이 느껴졌다. 이런, 충격파가!
"모두 엎드려!"
뒤에 서 있던 네프리스를 덮쳐서 깔고 엎드린 순간 온 통로를 다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덮쳐온다.
쿠우웅!
딱!
크윽, 이게 왠 태클?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어요.
"쿨럭. 쿨럭."
뭔가에 얻어맞은 뒷머리를 어루만지며 일어나니 횃불이 죄다 꺼져 통로가 온통 깜깜하고 먼지가 날린건지 돌가루인지 공기가 탁하다. 뭔진 몰라도 오던 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데. 위력은 확실하지만 담부턴 이런 좁은 데서는 이런거 쓰지 말아야 겠다.
총구로 머리를 긁고 있으려니 기침을 몇 번하던 크리스가 주문을 외어 빛 구슬을 만들어냈다. 충격과 함께 불어온 바람에 통로에 걸려있던 횃불은 죄다 꺼진 상태. 바닥에는 같이 날려온 것으로 보이는 돌조각들이 이리저리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다. 저 짱돌은 아까 내 머리를 타격했던 녀석인가보군.
"하여튼 위협요인은 사라졌으니, 다시 가볼까요?"
"앗! 자기!"
"에엣…."
어흑, 어쩐지 안 일어난다 싶더니, 기절한 거였어? 네프리스를 안아드는 크리스를 보다가 슬쩍 뒤돌아서 모른 척 하고 있으려니 네프리스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자꾸 지체되는 게 불만인지 아리나의 퉁명스러운 말에 다들 발걸음을 재촉했다.
본격적인 미궁의 시작인지 이제부터는 길이 일직선으로 난 편한 길이 아니었다. 간간이 옆의 방문을 부숴 버리고 나오는 끈적끈적한 괴 생물체라든지, 갑자기 발 밑에서 튀어나오는 사람 몸뚱이만한 작살하며 이것저것 안 나오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이 무적인 내가 있으니 망정이었지,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인 셋이서 왔으면 벌써 볼장 다 보고 저 세상 갔을 거다.
그리고 거진 반 9층 막바지라고 아리나가 말했을 때, 우리 앞에는 이상한 돌 조각들로 짜 맞춰진 막다른 골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번과 규칙이…달라졌군."
"퍼즐 같은데요?"
"퍼즐이야."
길 한가운데를 떡하니 버티고 막아선 벽은 두터운 돌 하나로 돼 있는지 이음새가 없고 눈높이 쪽에 6조각으로 된 퍼즐이 박혀 있었다. 뭐 보통 한곳이 비고 조각들을 이리저리 움직 일 수 있게 된 퍼즐이랑 똑같은데 그림이 아니라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글자들이 그 위에 새겨져 있었다. 절망하라, 경배하라, 죽어라…뭐야 이걸 만든 놈은?
"문구가 참 이상하네."
"너, 이거 읽을 수 있냐?"
"네? 네."
크리스가 물어보았다가 뜨악하는 표정을 짓는다. 저거 읽으면 대순가 왜 그래? 그러는 동안 아리나가 활을 등에 메고 글자를 손가락으로 훑어가며 천천히 읽었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뒈져버려라. 나약한 생물들아. 그리고 다시 일어나 엎드려 절망하고 경배하라…라. 무슨 뜻이지?"
"또 이상한 이야기 늘어놓는 구만 이 아저씨."
"규칙을 알 수 있겠어?"
아리나가 고개를 젓더니 팔짱을 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저거에 뜻이 있나? 하여튼 선문답은 어려워. 벽으로 다가가 밑을 훅 불어보니 쌓여있던 먼지가 날리며 바닥 돌과 틈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돌하고 경계가 명확히 있는 거 하며 벽이 닿아있는 자리만 이리저리 깨져 있는 걸 보니 저 반대쪽에도 통로가 있나? 혹시 몰라서 총으로 석벽을 쳐보았다.
쨍!
"뭐하는 거야?"
"혹시 저 쪽에도 통로가 있어요?"
"당연히 있지. 이 벽은 기관으로 해서 통로를 막고 있는 것 뿐이야. 두께는 거의 4m가까이 되지."
"흐음 그렇다면. 뚫어버려도 상관은 없어요?"
"가능은 하지만, 뭐? 너 하려고?"
네프리스가 으악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역시 그냥 힘으로 뚫고 가면 함정이라도 터지는 건가?
"이 바보야 그냥 뚫고 갈 거면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겠니? 이 벽을 깨버리면 통로 배열이 바뀌도록 조작된단 말이야. 길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돼버려."
"잠깐."
"예?"
네프리스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아리나가 우리를 제지하더니 벽을 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중간에 있는 퍼즐부터 벽과 바닥에 있는 돌까지 철저히 훑더니 앞을 막아선 돌 벽을 손등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거, 부숴 버리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리나?"
"아르벤이 들고 있는 건…기본적으로 내 활과 비슷해. 너도 느꼈잖아. 아직도 못 믿겠어?"
"아, 하지만 너무 충격적이라고. 어떻게 신이 지상에 현신 한다는 거야?"
"현신해 있어. 지금 바로 네 눈앞에."
이거 이렇게 정체가 까발려지면 곤란한데. 아니 안 믿으려나? 아리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도 네프리스의 눈빛은 여전히 불신의 빛이 여전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신을 뵌건 200년 전이었다. 그 신성은 지고했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신화는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크다.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일이 그저 단순한 장난일 뿐인 권능이며 그 증거가 아르벤의 손에 들린 병기이지. 내 활은 기본으로 확립된 유사차원에서 에너지의 화살을 끌어내지만 저것은 전혀 아무 것에도 관여하지 않고 물질과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신 말고 가능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내가 아는 역사 내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아, 잠깐만요! 갑자기 웬 철학적인 이야기예요? 이거 부시면 되는 거죠?"
"부숴. 생각해보니까 네 신성력이라면 부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기계장치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미궁은 악신의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거니, 그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너라면 간단해."
"음. 그런거라면."
아리나가 뜨악하는 크리스와 네프리스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숨었다.
아까 두드려보았을 때 꽤나 두꺼운 것 같았으니까, 또 그냥 부숴 버리면 아까처럼 또 짱돌에 안 맞는 다는 보장도 없고…그냥 녹여버려야겠다.
"좀 크게 터질 테니까 준비해요!"
"그래!"
대답하는 억양을 보니 어찌됐든 빨리 하라는 눈치다. 에이 뭐 어쩌겠어. 내가 한 몸 희생해야지. 일단 두께만 4m에 달한다는 이 짱돌을 날려버리면 피해가 크고 녹이기로 결심했으니까 발사되는건 열선 정도로 하면 되겠지? 괜히 또 무너지면 피곤하니까 방향은 하늘로 하는 게 좋겠다. 또 녹은 돌들이 다 어디로 튀겠어?
"하나, 둘, 셋!"
퍼엉!
총구를 벽에 갖다 대고 적당히 조절하면서 방아쇠를 당긴 순간 빛이 번뜩하더니 눈앞에서 돌벽이 통째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 어허? 왜 이렇게 세지? 후끈 하는 열기에 뒤로 물러나니 채 증발하지 않고 남은 돌벽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연기를 뿜어내고 통로 저편과 하늘까지 그대로 뚫린 구멍이 보였다.
별 보이네? 근데 되게 깊이 들어왔다. 어림잡아 100m도 넘겠는걸?
"아, 네 말 믿을래. 저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야?"
"아무 이상 없군. 가자."
"…."
제느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10층은 복도 하나에 방문이 좍 늘어선 형태였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한 10m마다 하나씩 걸려서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회반죽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벽에 나무는 금장식이 상감된 떡갈나무였다.
"거 참 쥔장의 취미 한 번 고상하네."
"오오. 다시 오셨습니까?"
"누구냐!"
갑자기 들린 느끼하기 그지없는 미중년스런 목소리에 총구부터 들이대고 보니 전혀 몰랐는데 웬 집사 스타일의 아저씨가 복도 중간에 서 있다. 아무런 낌새도 못 느꼈는데 갑자기 저렇게 나타날 수가 있나? 그러나 아리나는 전에 한번 본 건지 놀라지도 않고 앞으로 나서서 말을 걸었다.
"우리 짐을 가지러 왔다."
"그거라면 45번 방에 잘 놔두었습니다. 여타 다른 사항은?"
"없다. 혹시 여기에 누가 오지 않았는가?"
"하루 전 지고하신 우리 주인님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되는 은발의 여성분이 지나가셨습니다."
으응?! 은발의 여성? 제느?!
"뭐라고 했지?!"
"저의 주인님의 행방에 관해 물으시곤, 아래층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 후로는 보질 못했군요."
젠장! 젠장! 역시 제느는 여기로 왔던 거였어! 어떻게 하지? 여태까지 말이 없는 걸 보면 필시 무슨 일을 당했다는 건데? 설마 또 해체 당하거나 십자가에 꿰이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혼자서 그렇게 가서 꿰어 있어봐라. 당장에 그냥….
"내려가는 길은 열려 있는가."
"닫혀 있습니다만, 열어드리겠습니다."
"저기 아리나…."
뒤돌아서는 그를 보며 아리나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아리나가 내 손을 잡았다. 으응? 내가 손에 이렇게 힘 주고 있었나?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리나는 냉정한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약간 젓는다.
"같이 가자.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짐 정도 밖에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너도 혼자서 갈 셈이냐? 반려인 그분 생각도 해야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
"…."
그래. 아리나의 말이 맞아. 하지만 진정이 안되잖아. 제느가, 제느가 불러도 대답도 없고 느낌도 흐릿한데, 그냥 이렇게 노닥거릴 수는 없는 거 아냐. 당장 이 총 한방이면 저 밑바닥까지 다 뚫어버리고 내려갈 수 있을 텐데 뭘 망설이고 있는거지? 제느가 무슨 험악한 일을 당했을 까봐 겁나는 건가?
"아니요. 가겠어요. 제느인데요, 제느인데 이렇게 노닥거릴 수는 없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있든 반드시 구해내고, 그렇게 만든 놈한테 똑같이 해버릴 겁니다. 제느는 내 목숨보다 소중해요."
"…그렇다면 짐을 챙긴 다음 같이 가자. 어차피 우리로서는 이 곳에서 오래 버틸 수 없어. 여기는 안전하지만 그리 오래 안전하지는 못 할거야. 짐을 찾으면 우리의 전력도 꽤 보강되니 바로 내려가자."
"알겠어요."
에이. 또 이렇게 감상적이 되면 안 되는데. 조금만 기다려. 곧 갈 테니까.
집사차림 아저씨는 10층의 관리인으로 전에 왔을 때 싸워서 이겨서 공손해졌다고 한다. 뭐 대충 주인격으로 인식된 거라나? 진짜 사람은 아니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란다.
끝없이 늘어선 방들 사이로 지나가다 아저씨가 문을 연 곳은 사자가 금장으로 새겨진 문이었다.
"으잉?"
이거 뭐, 무슨 던전 분위기를 다 깎아 먹냐 어째. 안에는 여느 저택의 거실과 다름없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구는 모두 고급이요, 금색과 은색, 반짝이는 보석이 많았고 그 한쪽에 지팡이와 검, 보따리 등 찾는 것이 맞는 걸로 보이는 물건들이 한 가득 쌓여있었다. 던전이라면 괴수들이 돌아다니거나 밟으면 꺼지고 작살이나 화살이 날아오고 독가스가 뿜어지는 함정이 있어야 하는데 쥔장의 취미는 그게 아닌가보다. 내가 너무 타락한건가?
"찾았다! 내 지팡이!"
"중요한 것만 챙겨. 적어도 100층까지는 내려가야 할지 몰라."
"에엑?!"
"거짓말!"
"제느는 구하지 않을 거야?"
울상 짓는 둘에게 아리나가 한심한 듯 말하곤 활을 어깨에 매고 보따리 중에서 화살이 묵직하게 들어있는 화살통을 꺼냈다. 네프리스와 크리스도 몇 가지 간단한 책과 지팡이, 육포 같은 식량 몇 개를 따로 챙겨서 등에 짊어지니 짐 정리도 금방 끝났다.
"으음. 근데 왜 나한테는 이렇게 많이…."
"무게 따위 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우리들 먹을 거다. 잘 간수해야해."
이건 사기야. 무슨 옛날 보따리 장사도 아니고 내 몸집보다 더 큰 식량 보따리라니, 말이나 돼? 내가 억울해하건 말건 아리나는 짐을 다 챙겼다며 우리를 끌고 나왔다. 예의 아저씨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안내하기 시작했다.
"10층은 얼마나 계속 되는 거예요?"
"10층에는 정확히 1만 4천개의 방이 있습니다. 중앙의 주 통로를 중심으로 네 개의 통로가 있으며 거기서 방사형으로 퍼진 형태입니다."
"11층에 내려가는 곳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이 속도대로 10여분이 걸립니다."
10분이라, 금방 나오겠기는 한데 상당히 크구나. 더구나 1만 4천개의 방이란 건 잘 상상이 안 되는데? 그만한 방들이 들어차려면 도대체 집이 얼마나 커야 되는 거야?
11층의 계단은 여태까지의 통로처럼 밋밋한 회색빛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로 옆에는 붉은색 카펫과 황금장식으로 비할 것 없이 화려한데 여기만 이렇게 이빨 빠진 듯 회색빛이라. 쥔장의 센스를 다시 생각해봐야 겠군.
"이곳입니다. 곧장 11층으로 내려가실 수 있습니다."
"내려가자."
11층은 9층과 똑같았다. 다만 그 층의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피해요!"
이런! 처음부터 함정이라니! 아리나를 층계로 밀쳐내고 바닥에 총구를 꽂았다. 바닥의 돌을 파고드는 충격을 느끼며 방아쇠를 당기니 바닥의 돌이 터져 나가고 아래에서 올라오던 힘이 총알을 맞고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폭발에 튀어 오르는 돌 사이로 무언가 검은 것이 보인다.
"윽, 뭐야?"
"정말로 10층이 안전한 곳이었네요."
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이글거리며 사라져 가는 불꽃 사이로 검은 기운이 흩어진다. 이건 분명한 악마의 기운. 그것도 상당히 강력하다고 생각되는 악마였다. 물론 지금은 죽어버려서 약간의 사념과 기운만 남았지만 멀쩡히 올라왔다면 아리나는 그냥 찢겨져 죽었겠지. 정말로 악신인가? 이렇게 악마가 직접적으로 그냥 올라올 정도라면 보통 문제가 아닌데.
아리나는 말 없이 바닥에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보다가 구멍을 건너 뛰어 반대편에 섰다. 그리고 활로 몇 번 벽과 천장, 바닥을 건드려보더니 안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소심한 크리스와 네프리스는 방금 그걸 보더니 쫄았는지 둘 다 하늘을 쳐다본다.
거, 손에 살벌한 지팡이하고 둔기를 쥐고 있으면서 그러면 쪽 팔리지 않나?
"지옥문이 열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11층부터는 우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여기는 이미 지나간 뒤에서 발동되는 함정도 무수히 많으니까."
"에이, 정 뭐하면 다 때려부수고 가요."
"모르는 곳을 함부로 때려부수다간 그대로 다른 곳으로 날려가 버릴 지도 몰라. 그럼 돌아오는 데에 골치 아프겠지?"
"…."
바닥을 활로 두드리며 아리나가 약간 날카롭게 날이 선 표정으로 쏘아붙인다. 아, 음. 뭐 그도 그렇겠지. 아리나가 여기 들어오더니 긴장을 했나? 왜 저렇게 날카롭게 반박하지? 그러고 보니 전에 제느를 납치한 그 녀석이 여기로 왔을 테니까…저렇게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그냥 보고서 무지막지하게 화를 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놈이니.
"가자. 그렇다고 여기서 그대로 눌러 앉으면 아무것도 되질 않아."
다시 일행을 편성하고 11층을 걸어갔다. 이번에는 내가 후미에 서고 아리나가 맨 앞에 선 다음 네프리스와 크리스가 온갖 보조마법을 아리나에게 걸어주었다. 기본적인 물리공격 차단에서부터 대 마법 방어까지 충돌 나는 것만 제외하곤 죄다 걸어주는 듯 했는데 걸어가면서 줄잡아 수십 번의 영창을 하면서도 둘 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둘 다 대마법사구나 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정말로 상당한 기운을 썼는데도 이번엔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어서 그런지 제대로 실력 발휘가 되는 모양이다.
"함정 중에는 발동시키지 않으면 넘어갈 수 없는 것도 있어. 그러니까 함부로 아무거나 건드리지 말 것."
"네에. 엇!"
뒤에서?! 위협적인 기운이 뒤에서 매섭게 날아온다. 재빨리 뒤로 돌아서 어두운 복도 저편으로 총을 쏘아댔다. 그리고 총알이 날아가고 난 후 복도 저편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엎드려요!"
쿠우우웅
불안하게 바닥이 흔들리며 온 통로에 폭음이 울리더니 먼지구름이 횃불을 꺼트리면서 날려온다. 그거 도대체 뭐야? 또 누가 무슨 함정을 밟은 거지?
"쿨럭! 으 먼지. 누가 뭐 밟았어?"
"건드린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통로 자체에서 감지가 되게 해 놓았나?"
"이런. 뭐 나오는 거 없길래 방심하고 있었는데."
"근데 뭐 하나 튀어나오면 왜 이렇게 센 거예요?"
일어나서 옷을 털고 한숨을 쉬며 그리 말하니 크리스가 네프리스의 손가락을 입으로 빨며 우물거린다.
"여기가, 레벨이 높은 데니까, 그렇지."
"앗. 자기야."
이런 젠장. 난 왜 저걸 보면서 적개심이 드는 거지? 난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솔로부대원인데? 도대체 왜 저게 염장으로 느껴지는 걸까? 나도 제느 손가락 빨아볼까? 이런, 하여튼 빨리 제느 구해내서 초 염장 공격을 해줘야지. 아, 왠지 모르게 부글부글 끓네.
"잡담은 그만하고 다시 간다. 방금 전처럼 뒤통수 맞지 않게 조심하라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그나마 내가 느끼지 않았다면 방금 전 날아오던 것에 다들 죽었을 거다. 여하튼 그렇게 겪고 나니 다들 행동이 눈에 띄게 신중해졌는데, 그런만큼 튀어나오는 함정이나 마법도 많고 험악해졌다. 갈림길에서는 갑자기 바닥에서 통로 전체를 가로지르는 쇳날이 튀어나와 내가 동강날 뻔했고, 수시로 천장이나 벽, 바닥에서 머리통만한 화구나 화살, 창 등이 기어 나왔다.
"후아. 후아. 후아."
일단 들어오는 사람 죽이려고 만들어 놓은 거니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냐? 어떻게 한 발짝 걷고서 함정이고 또 함정이냐? 그렇게 만들기도 어렵겠다.
"좀 쉬었다 가자. 일생동안 당할 생명의 위협을 다 당한 것 같아."
크리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더니 등을 벽에 기대고 숨을 헐떡댔다.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들도 정말 대단하다. 눈앞에서 사람의 생명을 단번에 앗아갈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다 튀어나왔었는데 아직까지 멀쩡하잖아?
"이런게 바로 기적이란 거군. 지상에 임한 신이 부리는 기적. 화살이 피해가고 발동 되야 할 마법이 사라진다. 우리 셋이서 왔다면 벌써 다 어딘가의 시체가 되어 있을 거야."
아리나가 그 옆에 앉아서 중얼거리는 말에 네프리스가 흙먼지로 잔뜩 찌든 얼굴을 아래위로 끄덕인다.
"중간쯤에 발 밑에서 튀어나오던 쇠톱에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딱 멈춰버리지 뭐야. 녹슨 것도 아니었는데 그때 정말로 느꼈어. 그건 기적이야."
저런게 기적? 화살이야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는 거고 톱날 같은건 기관으로 작동되는 거니 고장 날 수도 있는 건데 저런 것들을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건가? 무엇보다 제느랑 같이 있으면 기적이 생겨날지 몰라도 암것도 모르는 나하고 같이 있는 다고 무슨 기적이 일어나?
"그게 무슨 기적이에요. 화살이 빗나갈 수도 있는 거지."
"아니야. 네가 있음으로 해서 화살이 빗나가고, 고장날 수 없는 기관이 고장난거지. 당장 여기에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내려왔다는 것이 원래는 있을 수 없는 것이야. 그것이 의미하는 건 너로 인해서 우리들의 인과가 비틀어졌다는 거지. 인과율은 신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소소한 일조차 인과를 무시하는 너의 위치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군."
아, 어려운 말. 아리나의 말에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일행이 기대있는 반대쪽 벽으로 가서 등을 벽에 대고 기댔다.
"뭐 그런데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원인과 결과, 인과율 같은 걸 무시한다면서 제느는 왜 툭하면 화살 맞고 마차 뒤집어졌는데 재수 없게 다리가 부러질까? 또 맨날 이상한 놈들한테 잡혀가서 괴롭힘 당하고…혹시 미소녀라 인기가 많은거?
"음, 그런데…어엇?!"
"야!"
어, 어라? 갑자기 왜 이상한데가 보이지? 떨어지고 있잖아?!
"야아아아!!!"
황망히 허우적거리는 사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크리스의 얼굴이 사라지고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이 닥쳐왔다. 팔을 휘저어봐도 주위에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뭐야 이거! 방금 전까지 화살도 비켜나가게 인과율을 무시한다면서 이런 함정에는 왜 걸리는 건데?! 우와 사기라고 그거!
"이이익!"
투다다당!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더니 총알이 벽면에 맞아 폭발하는 불빛에 어둠이 가시고 뭔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튀어나와 같이 떨어지는 돌조각, 파편 사이로 총알에 맞아 벽이 폭발하면서 그 너머의 광경이 살짝살짝 보이는데 분명히 내가 빠졌던 그것과 같은 통로다.
"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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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음. 너무 질질 끌고 있어요. 후딱 완결을 지어야 할텐디.
사실 내용은 얼마 안되는데 -0-
첫댓글 흐훗~ 기대되는군요~!
완겨리;;;;;;
음... 엔딩..이라... 해피였으면 하는바램이지만 주인장님 맘이시니;;; 아무튼 감사합니다~
ㅇㅎㅎㅎ....메일 들어오면서 글 올라왔나 보다 드디어 올라왔네요 ㅎㅎㅎ 글쓰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마지막의 "꺄아아…!" 는 뭐죠-_-;
다음계정을찾은다음에 워~ 그동안 못보았던 부분 @.@ 돌아가게보았습니다... 훗..
감사함니다 잘보고있어요
감사함니다 잘보고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