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박한, 그러나 정겨운 서부경남 사투리 *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 하동이다보니 모든 문화적 배경은 서부 경남일 수밖에 없다. 음식은 다른 경상도 지역보다 짜고 매우며, 같은 고향 사람끼리 만나면 “야 이 문디야!” 하고 유별나게 인사하는 것 말고도 사투리에서 그 특징이 뚜렷하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은 이라면 거기 펼쳐지는 무수한 서부경남 사투리의 향연에, 표준어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할 적이 많을 것이나 이 사투리를 쓰며 살아왔던 이들은 매우 정겨우리라. [토지]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많지만 나는 서부 경남 사투리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 가치를 더해 준 점에 가장 큰 의미를 찾는다.
그렇지만 한 번씩 하동에 들를 때마다 황당한 경험을 하곤 한다. 선산이 거기 있어 벌초를 하러 갈 때면 사촌 형님댁에 들른다. 한 번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종수(사촌형수)가 우리 마을에도 올해 대학생이 둘 생겼다기에 무심코 “무슨 대학인데요?” 하자, 앞집 애도 ‘고대’, 옆집애도 ‘고대’ 다닌다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명문대 다닌다고 하여 믿을 수 없었던 것보다는 이렇게 깡촌(빈촌)에서 사립대 다니려면 등록금이 엄청날 텐데 어떻게 보낼 수가 있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나중에 ‘고대’가 ‘(진주)교대’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면서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또 한 번은 사촌 형님이 하동과 바로 저 강 건너 산청에는 옛날부터 유명한 학자가 많이 나온 학문이 높은 지역이라기에 유명한 학자가 누구냐고 물은 적 있다.
“니 모르나? 냉면선상 말이다.” “냉면선생요?” “그래 냉면선상 말이다.” 도무지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아 고개를 흔들자 형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아 핵교 선상이라면서 냉면 선상도 몰라?” 혀를 차기에 그래도 알 수 없어 이것저것 물어보니 남명 조식 선생 가리킴을 알았다. ‘남명’이 ‘냉면’으로 변해버렸으니 ….
뿐만 아니다. 형님 댁에 머물던 중 이웃에서 놀러 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우리 마을은 절대로 인물이 나올 수 없다고 하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마을 이름이 ‘망골’이라 ‘망하는 동네’니 잘 될 리 없다는 거였다. 설마 마을 이름을 그리 지었으리라 싶어 찾아보았더니 행정지역상 이름으로는 ‘심곡리(心谷里)’였다. 예전에는 ‘마음골’이었는데 일제 시대에 한자로 바뀌어 그리 된 것이다. 원래 이름 ‘마음골’을 ‘맘골’로 줄여 발음하였고, ‘맘골’이 ‘망골’로 바뀌었던 것이다. 마음을 편히 해준다는 뜻의 마을 이름 ‘마음골’을 잘못 줄여 읽음으로써 원래의 뜻과 아주 거리가 멀어졌고,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
잘못 발음함으로써 뜻이 달라진 경우는 또 있다. 원래는 마을 앞 넓은 타작마당은 온갖 곡식을 타작하는 마당이란 뜻으로 ‘백곡(百穀)마당’이었는데 너도나도 ‘배꼽마당’이라 불렀다. ‘백곡’이 ‘배꼽’이 된 건 발음의 유사성 때문이겠지만 뜻이 완전히 달라졌다.
서부경남 사투리 중엔 정겨운 말도 있으나 간혹 거슬리는 말도 있다. ‘참말이냐?’고 묻는 대신 ‘에나가?’로 말한다. 듣기에 어색한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일본어인 줄 아나 서부경남에서 ‘니 말이 에나가?’ 했을 때는 ‘한 점의 거짓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나?’는 확인을 요구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어릴 때 내 동생은 나더러 ‘엉가’라 했고, 막내누나는 큰누나더러 ‘새이야’ 하고 불렀다. 엉가란 말이 사전에선 어린이들 사이에서 ‘언니’를 가리키는 사투리로 돼 있으나 형제 사이에도 쓰였고, ‘새이야’란 말은 ‘힘’이 ‘심’으로 구개음화되듯이 ‘형아야’에서 변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것도 형제 사이에서보다는 자매 사이나 시누올케 사이에서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우리 고모는 울엄마더러 늘 “새이야!” 하고 불렀다.
아마도 서부경남 사투리의 절정은 물고매 사건이리라. 지금도 나이 든 이라면 기억 속에 담겨 있을 터. 오래 전 장학퀴즈 월말 장원전에서 한 문항만 남겨진 상황에서 문제가 출제되었다. 대략 이런 내용의 질문이었다.
‘식량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농촌에서 구황식품으로 널리 애용된 농산물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진주에서 온 학생이 재빨리 벨을 눌렀고, 그 문제만 맞추면 역전이 되어 장원을 움켜쥘 수 있는 중요한 기로에 섰다. 사회자는 답을 요구했고 진주 학생은 ‘고매’라고 답을 했다. 사회자는 ‘고구마’란 답과 비슷한 말에 좀더 분명한 답을 얻으려고 두 음절이 아닌 세 음절이라고 친절히 힌트를 주자 그 학생은 ‘물고매’라고 답했다. 당연히 틀린 답으로 처리됐고 장원은 다른 학생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호사가 한 사람이 이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찾아본 모양이다. 결국은 누군가 지어낸 얘기로 판가름 났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아직 많은 경상도 사람들은 그걸 사실로 알고 있을까?
‘고매’는 ‘고구마’의 경상도 사투리다. 꼭 서부경남이 아니더라도 경상도 지역에선 두루 쓰인 말이다. 바삭바삭한 고구마를 타박고매로, 물기가 많은 고구마를 ‘물고매’라 하였다. 만약 그때 사회자가 네 음절 하고 물었더라면 학생은 혹 ‘타박고매’라 답을 했을까?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더라도 나는 서부경남 출신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안다. 어투에서 확 드러난다. 다른 곳보다 ‘촌스럽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 나에게는 들을 때마다 그저 정겹기만 하다. 객지에서는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첫댓글 사투리는 서부경남 사투리가 정겹지만 저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 중에는 전라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라도 사투리도 제법 알고 쓸 줄 아는데, 아직 서울 지역 사람들과는 만날 기회가 적어 표준어에는 영 익숙하지 못합니다. 수업에서야 표준어를 사용한다지만 어투를 흉내내지 못해 그냥 글만 들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글 쓸 때마다 워드에 붉을 줄이 그어지면 '아, 뭔가 잘못됐구나!' 하며 사전을 찾아보지요. 마음 속 한편으로는 '이래선 안 되는데' 하는 반성을 자주 하면서.... 표준어와 표준발음에 더 익숙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