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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붓다, 헤라클레이토스 여기엔 숨은 조화가 있다 |
어느 날 밤 물라 나스루딘의 부인이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키스도 포옹도 하지 않는군요. 내게 사랑을 호소하던 때를 기억해
보세요. 그 때 당신은 나를 깨물어 먹을 듯이 사랑했고, 나는 그것을 너무나 좋아했어요. 다시 한번 나를 깨물어 줄 수는 없나요?"
물라 나스루딘이 침대에서 일어나 걸어나갔다. 부인이 말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나스루딘이 말했다.
"욕실에 가서 이빨을 가져 와야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집착하지 말라. 집착하면 스스로 지옥을 만든다. 집착이 지옥이다. 집착 없는 의식은 항상 천국에 산다. 기분과 함께 움직여라. 기분을 받아들여라. 변화를 수용하라. 그러면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삶이란 본래 그렇게 변화는 법이다. 만물이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대항해도 '변화'라는 삶의 법칙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젊은 시절에는 감정 상태와 기분이 다르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늙은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면 아주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어떻게 늙은 사람이 젊은 시절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변했다. 젊었을 때 그대는 로맨틱하다. 경험이 미숙한 몽상가다. 그러나 늙으면서 모든 꿈이 사라진다. 여기에 나쁜 것은 없다. 꿈이 사라지면 실체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이제 그대는 시인(詩人)과 같은 성향에서 멀어졌다.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잘못된 점은 없다. 꿈은 하나의 기분이고 계절이었다. 계절은 변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지점에 도달했는지를 알고 그 상황에 충실해야 한다.
그대의 변화하는 자아에 충실하라. 그것이 유일한 실체다. 붓다가 자아는 없다고 말한 까닭이 그것이다. 그대는 흐르는 강이다. 고정된 자아는 없다. 그대 안에서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붓다는 인도에서 추방당했다. 왜냐하면 인도인들, 특히 브라민과 힌두교인들은 아트만(ataman)이라는 영원한 자아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붓다는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며, 그 외에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영원한 것이 되려고 하는가? 왜 죽은 사물이 되려고 하는가? 죽은 것만이 영원하다. 파도가 오고 간다.
이것이 바다가 살아 있는 비결이다. 파도가 출렁거리지 않으면 바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을 것이다.
바다가 죽어 버릴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를 통해 살아간다. 변화란 양극단 사이에서의 변화를 말한다. 그대는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그대가 계속해서 생기를 찾고 신선해지는 비결이다. 그대는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활력을 회복하여 일을 하러 나간다.
이런 양극성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일과 휴식은 대립된다. 열심히 일할 때 그대는 긴장한다. 지치고 피곤해진다. 이때 그대는 깊은 휴식의 골짜기,
잠 속으로 들어간다. 표면이 멀어지고 그대는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대는 더 이상 표면과 동일시되어 있지 않다. 이름이나 에고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 표면에 있던 모든 것이 멀어진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신선해진다. 이 망각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이 망각이 활력을 불어넣는다. 3주만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대는 미쳐 버릴 것이다. 반대 극으로 이동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잠을 자지 않는 사람, 즉 반대 극으로 이동하지 않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으면 그대는 깨닫는 것이 아니라 미치고 말 것이다! 서양에 미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이다. 동양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조만간 서양 전체가
미쳐 버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양극성을 잃어버렸다. 논리는 이와 다르게 말한다. 논리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 종일 휴식하면, 낮에 온종일 휴식을 연습하면 밤에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이것이 논리다. 논리는 휴식을 연습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부유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은 낮에 하루 종일 휴식하고 나서
불면증을 호소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휴식한다. 침대나 편안한 의자에 누워서 쉬고 또 쉰다. 그렇게 하루 종일
쉬고 나서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른다. 그들은 논리적이다.
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이 의사에게 갔다. 그가 기침을 하면서 들어서자 의사가 말했다.
"기침 소리가 한결 좋아졌군요."
나스루딘이 말했다.
"물론, 그렇겠죠. 밤새도록 기침을 했으니 숙달될 수밖에!"
하루 종일 휴식하면 밤에 쉴 수 없을 것이다. 이리 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뒤척거림은 휴식이 가능하도록 몸이 운동을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잘못된 사람은 없다. 반대 극으로 움직여라. 낮에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밤에 깊은 잠을 이룰 것이다. 깊은 잠을 자고 나면 일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무한한 에너지가
느껴질 것이다. 그대는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일을 통해 휴식을 얻는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한다.
"저는 불면증입니다. 밤새도록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에게는 휴식이 필요 없다. 가서 오랫동안 걸어라. 미친 듯이 달려라. 아침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 그렇게 해보아라. 그러면 자동적으로 휴식이 찾아올 것이다. 틀림없이 휴식이 올 것이다. 휴식에는 테크닉이 필요 없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 아니라 활동 명상이라는 테크닉이다. 그대는 이미 너무 쉬고 있다. 불면증이 그 증거다."
삶은 서로 대립되는 것 사이에서 움직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것이 삶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숨은 조화다.
그는 매우 시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철학적이지 않다. 철학은 이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는 모순이
가능하다. 시는 철학자들이 꺼려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시는 삶에 대해 더 진실하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빙글빙글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들은 결코 핵심을 찌르지 못한다. 그들은 여기 저기 주변을 쑤석거릴 뿐이다. 그러나
시는 직접 핵심을 치고 들어간다.
동양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비교될 만한 사례를 찾는다면 선사(禪師)들이 있다. 특히 하이꾸(haiku)라고 알려진 선시(禪詩)가 있다. 선시의 대가 중에 바쇼(Basho)가 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들은 거의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바쇼는 철학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런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단 세 줄로 된 하이꾸, 열 일곱 개의 음절로 된 짤막한 형식의 시를 썼다. 헤라클레이토스 또한 단문만을 썼다. 그는 칸트(kant)나 헤겔(Hegel)처럼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일정한 체계를 형성한 사람이 아니다. 수수께끼 같은 짤막한 경구들을 남겼을 뿐이다. 이 경구 하나 하나가 다이아몬드처럼 완벽하다. 다이아몬드는 각 면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 다른 면과 상관될 필요가 없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이렇게 신비적인 경구를 사용하는 방법은 서양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오직 한 사람, 니체가 똑같은 방식으로 썼다. 그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신비적인 경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
이후 오직 니체만이 그런 방법을 썼을 뿐이다. 동양에서는 깨달은 사람들 모두가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 우파니샤드와 베다가 그렇고, 붓다, 노자, 장자, 바쇼가 그렇다. 단지 경구가 있을 뿐이다. 이 경구들은 아주 짤막하기
때문에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경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삶 전체가 변형될 것이다. 지적인
능력으로는 이 경구를 이해할 수 없다. 여기 바쇼의 선시를 들어 보라.
오래된 연못에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이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 시는 참으로 회화적이다. 오래된 연못이 있고, 그 가장 자리에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그리고 개구리가 뛰어든다. 그대는 물이 튀는 것을 볼 수 있다. '퐁당'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바쇼는 모든 것을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삶이다. 오래된 연못,
그 속에 뛰어드는 개구리, '퐁당'하는 물소리......그리고 침묵. 이것이 그대다.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침묵.
헤라클레이토스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먼저 그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사용한다. 그 다음에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경구를 준다. 그는 시인이지만 보통의 시인이 아니다. 그는 힌두교에서 '리쉬(rish)'라고 부르는 시인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시인이 있다. 하나는, 여전히 꿈을 꾸면서 그 꿈을 통해 시를 짓는 시인들이다. 바이런(Byron), 셀리(Shelley), 키이츠(Keats)같은 시인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 다음에 '리쉬'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시인들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실체를 꿰뚫어 보며, 이 실체로부터 시가 태어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리쉬다. 그는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시인, 존재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시인이다. 그는 서양에서 최초의 실존주의자다.
이제 그의 신비스러운 경구를 깊이 들여다보자.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왜 그런가?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나은 이유가 무엇인가? 드러난 것은 표면적이다. 그리고 표면은 거짓이기 쉽다. 표면은 다듬어지고 인공적인 것이기 쉽다. 중심에서 그대는 실존적이지만 표면에서는 사회적이다. 결혼이 표면적이라면 사랑은 중심에 있다. 사랑은 숨은 조화이지만 결혼은 겉으로 드러난 조화이다.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고 하자.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들 부부가 성난 얼굴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정중하고 너무나 다정하게 말한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조화다. 표면적으로는 조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아무 조화도 없다. 이것은 그저 형식이고 겉치레일
뿐이다. 진정한 인간은 겉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일지라도 중심에서는 항상 조화롭다. 스스로 모순되게 보일지라도 그 모순 속에는 숨은 조화가 있다.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 사람, 표면적으로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사람은
진정한 조화가 없는 사람이다.
항상 일관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반되는
요소들이 만나 어우러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 분명하게 선을 그어 놓는다. 그들은 표면적인 삶을 살면서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일관성은 진정한 일관성이 아니다.
깊은 곳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들끓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잘 해 나간다. 그대는 그들이 이런 상태라는 것을 잘 안다. 그대 또한 그들과 같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대는 잘 해 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도움이 안된다. 표면적인 모습에 연연하지 말라. 더 깊이 들어가라. 대립되는 것 사이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지 말라. 그대를 양쪽 모두를 살아야 한다.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양쪽 모두를 살 수 있다면, 사랑하면서도 주시자로 남고, 미워하면서도 주시자로 남을 수 있다면, 이 주시가 숨은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때 그대는 사랑과 미움이 변화무쌍한 기분일 뿐이며 계절처럼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상반되는 것들 안에서 게쉬탈트(gestalt)를 볼 것이다.
'게쉬탈트'라는 이 독일어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 단어는 배경과 형상 사이에 조화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배경과 형상은 대립되지 않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은 검은 칠판 위에 하얀 백묵으로 글씨를 쓴다. 검은 색과 흰색은 상반된다.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그들은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검은 색은 검은 색이고, 흰색은 흰색이다. 그들은 대립되는 양극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왜 검은 색 칠판에 하얀 색 글씨를 쓰는 것일까? 하얀 색 칠판 위에 하얀 색 글씨를 쓸 수는 없을까? 또는 검은 색 칠판 위에 검은 색 글씨를 쓸 수는 없을까? 그렇게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용한 짓이다.
검은 색이라는 배경이 있어야만 흰색이 그 위에 형상을 이룰 수 있다. 그들은 대조된다. 그 사이에 긴장이 있다. 그들은 상반된다. 거기에 숨은 조화가 있다. 흰색은 검은 색 위에서 더 하얗게 보인다. 이것이 조화다. 하얀 색 칠판 위에서 하얀 색 글씨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거기엔 긴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립되는 것이 없다.
유태인들이 예수를 처형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이 사건을 하나의 게쉬탈트로 만들었다. 십자가가 검은 색 칠판이 되었고, 이 칠판 위에서 예수는 더 하얗게 되었다. 처형당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가 남아 있는 것은 십자가 때문이다. 예수는
붓다와 마하비라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십자가 덕분이다. 세상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를 사랑한다. 십자가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색 칠판 위에 씌어진 흰색 글씨다. 그러나 붓다는 하얀 색 칠판 위에 쓴 하얀 색 글씨다. 거기엔 대조가 없다. 게쉬탈트가 형성되지 않는다. 배경과 형상이
똑같다.
단지 사랑만 하고 미워할 수 없다면 그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에는 강렬함이 없다. 불꽃같은 열정이 없다. 그저 차갑게 식은 감정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열정이 된다. 이 '열정'이라는 단어는 아름답다. 열정은 강렬하다. 사랑은 어떻게 열정이 되는가?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의 자비는 무능하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그는 무능하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는 미워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다. 미움이라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때, 거기에 열정이 있다. 이때 배경과 형상이 조화를 이룬다. 하나의 게쉬탈트가 형성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가장 심오한 게쉬탈트에 대해 말한다. 겉으로 드러난 조화는 진짜 조화가 아니다. 숨은 조화가 진정한 조화다. 그러니 표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보다는 깊은 곳의 무질서 사이에서 일관성을 발견하라.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서 조화를 찾아라.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이것이 종교적인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의 차이점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표면적으로만 조화롭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중심에서 조화롭다. 종교적인 사람은 모순될 수밖에 없다. 반면, 도덕적인 사람은 항상 일관되다. 도덕적인 사람은 믿을 만 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도덕적인 사람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 점칠 수 없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예측을 불허한다. 그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한편, 사원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며 환전상들을 내쫓았다. 그는 자비에 대해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사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혁명적이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그는 아주
일관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버트란트 러셀은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의 일관성 없는 태도를 꼬집고 있다.
"예수는 일관성이 없다. 그는 신경증 환자 같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화를 낸다.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무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배가 고픈 상태에서
무화과나무를 지나갔다. 그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계절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았다. 이때 예수는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퍼부었다. 무슨 인간이 이런가? 이런 그가 사랑을 말한다고?"
예수는 숨은 조화를 갖고 있다. 하지만 러셀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현대판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내면에 깃든 숨은 조화를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러셀이 기독교인이 안된 것은 잘된 일이다. 아주 좋은 일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도덕주의자다.
모든 행동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과의 일관성인가? 누구에 대한 일관성인가?
누구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가? 과거와의 일관성? 내 말이 다른 말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강물이 흐르지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강을 보라. 강은 때로는 오른 쪽으로 굽어지고, 때로는 왼쪽으로 굽어진다. 때로는 남쪽으로 가고 때로는
북쪽으로 간다. 그대의 눈에는 이 강이 아주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숨은 조화가
있다. 강물은 바다에 도달한다. 강물이 어디로 가든 바다가 목적지다. 강물은 때로는 남쪽으로 간다. 땅이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로 강물은 북 쪽으로 간다. 땅이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가든 강은 똑같은 목적지를 지향한다. 강물은 언제나 바다를 향한다. 그리고 결국 바다에
도달한다.
강물이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항상 남쪽으로 갈 것이다. 내가 북 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나를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다."
이 강물은 결코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러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강물은 결코 바다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일관적이다. 너무 표면적이다. 그들은 숨은 조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대립되는 것들을 통해
똑같은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대립되는 것들을 통해 동일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그들은 아는 게 없다. 전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