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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도 연합 총 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독도연합.이 원 수
독도를 둘러싼 바다에 대한 韓·日간의 시각
李 鍾 學
(前 독도박물관장)
서론
독도와 이를 둘러싼 바다에 대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상반된 정책을 취해왔다. 1945년 이후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한국은 일본의 분쟁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무대응 전략으로 일관하는 반면 일본은 장차 국제사법재판소에 문제가 회부될 상황에 대비해 국제법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다양하며 치밀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독도에 대한 광업권 허가 및 과세, 재판판례, 그리고 일본인의 독도로의 호적이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본고는 이들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한국의 무대응 전략이 타당성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Ⅰ. 빼앗긴 우리의 바다 '朝鮮海’
1. '日本海’의 ‘竹島’로 바뀐 朝鮮海의 獨島
"…… 고기가 많은 것에 대하여 일본의 해안이나 많은 섬을 대부분 답사했으나 조선해 만큼 고기가 많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거의 거짓말 같이 수면으로부터 높이 뛰어올라 무리를 지어 고기가 밀고 오는 것을 보았다. …… 3마일쯤 떨어진 장소에서 수십 통의 건착망(巾着網)을 넣었더니 (바닷속 고기를) 모두 다 잡지는 않았을까 여겨질 정도로 많이 잡혔다. 그리고 그쪽에는 많은 섬들이 있어서 다양한 어족들이 이 섬을 향하여 회유하고 있었다. 삼치[ ]나 큰 상어[ ]가 몸체를 드러내어 떼를 지어 오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것을 보더라도 조선해에 고기가 많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고래 같은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얼마든지 무진장 잡히는 것이 아니겠는가.……"(『대일본수산회보(大日本水産會報)』제301호, 1907년 9월)
위의 글은 불과 한 세기 전 일본의 기록이다. 사면이 드넓은 바다로 둘러 싸인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일찍부터 조선해(朝鮮海)까지 진출했을까. 조선해는 일본의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어족을 가진 황금어장이었기 때문이다.
『대일본수산회보』(제153호 잡록, 1895년 3월)는 "일본이 조선에서 무역 외에 큰 이익을 보려면 어업 이외에는 없다"라고 단언하며 일본내에서 싸우지 말고 조선해로 나갈 것을 부추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朝鮮海'란 오늘날 '동해(東海)'라고 불리는 우리의 동쪽 바다다. 19세기 중엽까지 대안(對岸)인 일본은 물론 제3국까지 이 바다를 '朝鮮海'라고 불렀고 대부분의 지도에서도 ‘朝鮮海’로 표기돼 왔다. 반면 일본은 ‘朝鮮海’에 대해 방위개념인 ‘日本西海’로 불러왔다. ,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이나 일본 수로지 등 공식문서에 수록된 朝鮮海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다.
① 「朝日通商章程」- 이 문헌은 1883년 6월 22일 조선(閔泳穆)과 日本(竹添遲郞)이 체결한 어업협정 조약문이다. 이 조약문 41조에는 "日本國 肥前·筑前·石見·長門은 朝鮮海에 접한 漁港 (對朝鮮海面處)"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도 분명히 바다 이름을 '東海'나 '日本海'가 아닌 '朝鮮海'로 表記했다. 이는 당시 양국의 조약문에서도 '朝鮮海'를 공식적인 바다 이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② 「 瀛水路誌」 제19호- 1885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에서 발행한 이 「水路誌」에는 당시 해군 대위였던 기모쓰키(肝付兼行)의 글이 실려 있다. 이중에 "이방인들이 竹島와 가까운 오키(隱岐) 가까이 있는 바다를 일본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일본인 들이 이 바다를 '朝鮮海'로 부르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이를 일본해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기록이다.
또한 '조선해'로 표기된 지도는 서양에서 제작한 것들까지 포함하면 상당량에 이른다. 그러나 서양 제작 지도는 참고 자료는 될지언정 바다 이름을 정하는 데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일 양국에서 제작된 지도는 당사국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한국측으로서는 일본이 '조선해'로 표기한 지도가 매우 유효하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측이 제작한 '조선해' 표기 지도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해' 표기 지도만 해도 총 30여종, 이 가운데 일본이 제작한 지도는 12점이다.
'조선해' 표기 일본 제작 지도 일람표
최근세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던 조선해는 메이지(明治)유신을 계기로 일본이 제국주의 색채를 드러내면서부터 점차 사라져 갔다. 대신 '일본서해(日本西海)', '조선일본양해(朝鮮日本兩海)'로 명칭이 바뀌다가 어느 순간 일본해로 굳어져버렸다. 이로써 우리는 한국강점이 조선해에 대한 침탈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개방시킨 후 조선해에 맘대로 출어했으며 그 다음에는 1905년 독도를 강점했고 마지막으로 한국전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해는 일본해로, 독도는 다케시마로, 조선해협은 쓰시마해협으로 완전히 그들의 이름으로 바뀌어졌다.
1895년 4월 3일자 『산인(山陰)신문』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대승을 거두자, "대만 및 팽호열도(澎湖列島)가 일본의 판도로 편입되자 세계 지도상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는 류큐만(琉球灣)이 일본해의 끝이었으나 다시 지나해(支那海)를 빼앗아 그 영역을 넓혀 무려 1,000 방리(方里)에 이르는 팽호열도 주변까지 모두 일본해라 칭할 수 있게 됐다"고 장담했다.
일본의 이러한 바다에 대한 집착은 역시 태평양 전쟁 시기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東京日日新聞』(1942년 1월 9일자)에는 해군 보도부 과장 히라데(平出) 대좌가 일본 A-K 방송에서 한 연설을 게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제압하여 '新日本海'로 만들 수도 있다"고 호언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지 한달 후에 맞이한 일본 천황을 받드는 기념일에 한 연설이어서 그들의 야욕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패전이후에도 일본의 인식은 전혀 바뀌지 않아 독도는 여전히 '일본해'에 떠있거나 존재하는 '다케시마(竹島)' 로 되어있다. 일본 국회나 시마네현 의회의 회의록을 살펴보면 독도는 항상 일본해에 있는 섬이다. 대표적인 발언을 살펴보자.
……다케시마란 일본해에 떠 있는 섬인데 우리들은 히비야 공원정도의 넓이라고 배워왔습니다만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영토라고 믿고 있으며 이곳에 한국이 실효지배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국민으로선 참을 수 없는 바, 이것이 솔직한 일본인의 감정일 것입니다.(竹島というのは日本海に浮かんでいる島ですが, 私たちは, 日比谷公園ぐらいの廣さというふうに敎わっておりますが, これは當然日本の領土だと信じておりますし, ここに韓國が實效支配を强めている, 國民にとっては我慢がならないところ, これが率直な日本人の感情でありましょう-제145회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 富澤 의원, 1999년 3월 3일)
……일본해에 존재하는 다케시마, 이것은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로 우리들은 그것을 보전해야한다고 국민은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日本海に存在する竹島, これは我が國の固有の領土ということで, 私どもはその保全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國民はそう思っているわけであります.-제141회 중의원 결산위원회, 冬柴의원, 1997년 12월 11일)
일본은 일본해에도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일본의 바다(日本の海)로까지 부르고 있다.
일본으로서 200해리 중국 한국의 어선을 일본의 바다로부터 쫓아내는 한편 또한 일본은 제주도 해안이라든가, 또는 조어도에서, 이 곳은 일본의 영유로 문제가 되는 곳이지만 또한 중국 영유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중국의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이 되는 곳에서도 상당부분 조업하고 있다.(日本にとって二百海里, 中國, 韓國の漁船を日本の海から締め出す一方, また日本は,濟州島沖とか, あるいは魚釣島でも, これは日本の領有で問題なところですが, さらに中國の領有となる部分についても, 中國の二百海里, 排他的經濟水域となるところでもかなりの部分を操業している.-제136회 중의원 농림수산위원회, 山田의원, 1996년 5월 15일)
이제 일본의 바다는 한국, 중국선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앞으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외국선박이 침범하여 조업하는 것을 단속하려면 현상 체제로는 불가능하진 않을까요. (今や日本の海は韓國, 中國船にじゅうりんをされておる, こういう實態であります. 今後, 二百海里の排他的經濟水域で外國船の侵犯操業を取り締まるとなれば, 現狀の體制では不可能ではないでしょうか. -제136회 중의원 운수위원회, 米田의원, 1996년 2월 23일)
현실이 이러한 데도 한국의 대응은 고작 동해찾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부지원을 받는 연구단체에서도 이같은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한 단체는「일본해」란 명칭을 「동해」로 바꾸기 위해 유엔지명전문가회의 의장과 국제수로기구(IHO) 사무총장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 학자 등을 초청해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접한 언론의 보도는 위의 기대들이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지난 2000년 1월 IHO가 "동해와 일본해의 병기(倂記)방안을 IHO이사회에 권고할 것"이라고 밝혔다가 일본측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2. 바다의 주권은 朝鮮海찾기부터
일본이 국제 기구의 권고마저도 거부하고 일본해를 고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미 100여년전 그들의 주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일본해란 공칭(公稱)을 가진 이상 그 해상주권은 우리가 점유한 게 아니겠는가. 국권상 결코 겸연쩍어 할 필요가 없으며 그 해상주권은 먼저 습관상 현재 어로를 하고 있는지 유무에 따라 실적을 표명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어선을 이 해상에서 종횡무진케 하고 어업에 힘써 이익을 챙기는 것을 습관화하고 그 실적을 천하공중(天下公衆)에 인식시켜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훗날 이 해상의 주권과 관련해 다른 나라와 논쟁을 벌였을 때 실적을 표명하는 논거가 약해지므로 국권상 불리하게 되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이를 또한 깊이 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수산잡지(日本水産雜誌)』, 關澤明淸,「일본해의 어업은 어떠한가」, 1893년)
결국 일본의 '동해-일본해 병기' 요구 거부는 '동해'이름 찾기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본보기였다.
차제에 '동해' 이름찾기는 무산된 게 차라리 다행이다. 한번 확정되면 다시 바꾸기 어려운 게 지명이다. 수천만년이 지나도 동해는 동해다. 이제 우리는 이 바다의 이름
이 일관된 역사성을 지닌 '조선해'란 진실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체계화하여 차분하게 국제사회에 조선해로 정착시키는 데 온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Ⅱ.「島根縣 告示 第40號」는 애당초 없었다
1. 이른바 「島根縣 告示 第40號」의 진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이름을 붙여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고 주장해왔다. 1905년 당시 일본에는 중앙지 지방지를 모두 합해 무려 104개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시마네현에서 발행됐던 신문들은「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1990년 6월을 전후해 그곳 지방신문인 『산인(山陰)신문』을 분석하며, 한달반 이상을 시마네현에서 체류했다.
필자는 이 기간동안 『산인신문』이 창간된 1883년도부터 「시마네현 고시」이후인 1906년까지 23년 치 신문을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그야말로 '이잡듯' 훑어보았다. 『산인신문』은 일본국회도서관에도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지만, 열람과 복사를 하는 데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또 물가가 비싼 도쿄에서의 장기 체류를 피해 직접 시마네현을 찾게된 것이다.
필자의 사료발굴결과를 토대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고시여부'를 둘러싼 국내외의 대표적 논의를 먼저 검토해 본다.
1)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주장
일본의 대표적 독도전문가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 {竹島の歷史地理學的硏究} 古今書院, 1966)는 이른바 '竹島의 島根縣編入과 그후의 措置'(전게서 209쪽 이하 참조)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각의 결정을 거친 후, 府縣告示로써 영토의 소속 및 소관을 정하는 수속은 당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일본)에서 취하던 慣行으로, 竹島(獨島)의 島根縣編入도 이 수속을 따른 것에 다름 아니었다.
즉, 메이지 31년(1898)의 南鳥島, 메이지 41년(1908)의 中の鳥島는 모두 각의결정을 거친 후, 각각 다음과 같은 東京府告示로써 그 영토편입을 일반에 공시하였다.
○ 東京府告示
東京府告示第五十八號
北緯二十四度十四分東經百五十四度ニ在ル島嶼ヲ南鳥島ト稱シ自今本府所屬ト爲シ小笠原島島廳所管ニ屬セラル
明治三十一年七月二十四日
東京府知事 肥塚 龍
(전게서 214쪽, 밑줄과 괄호: 필자)
즉 미나미도리시마(南鳥島)를 도쿄(東京)부 소속으로 영토편입해 오가사와라 도청(島廳) 소관으로 한다는 1898년 7월 24일자의「東京府告示 第58號」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독도를 불법편입한「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보다 7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가와카미는 그 지방, 즉 도쿄지역의 신문을 통한 '고시여부'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위 고시는 필자가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최소한 두 신문에서 동일한 날짜에 고시된 바 있다. 그것은 다음의 (자료1)과 (자료2)이다.
(자료1)『都新聞}(第4075號) 明治 31年 7月 24日(日) 2面
東京府告示 第五十八號
北緯二十四度十四分東經百五十四度に在る島嶼を
南鳥島と稱し自今本府所屬と爲し小笠原島島廳所
管に屬せらる
明治三十一年七月二十四日
東京府知事 肥塚 龍
(자료2)『讀賣新聞}(第7552號) 明治 31年 7月 24日 2面
東京府告示 第五十八號
北緯二十四度十四分東經百五十四度に在る島嶼を
南鳥島と稱し自今本府所屬と爲し小笠原島島廳所
管に屬せらる
明治三十一年七月二十四日
東京府知事 肥塚 龍
가와카미는 「東京府告示 第58號」가 '도쿄의 신문에 고시된' 사실을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위와 같이 '신문에 고시된' 것은 그의 주장대로 "당시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취하던 慣行" 밖의 문제라는 의미인가? 다시 말해서, '신문에서의 고시여부'는 일본에서의 영토편입절차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의미인가?
아니면「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시마네 지방의 신문에 고시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문제를 앞두고 그들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의 「도쿄부 고시 제58호」가 '도쿄의 신문에 고시'됐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만약「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시마네의 신문에 고시됐다면, 가와카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도연구자는「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신문에 고시됐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이 무슨 일인가 ?
앞서 말한 바 있지만, 필자는 이미 지난 81년 이후 일본을 수십여 차례 드나들며, 마이크로 필름을 통해 이른바「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고시여부를 확인하면서, 1905년 당시 일본에서 발행됐던 일간지의 수가 104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아울러 목록을 입수해 둔 바 있다. 그런데 필자가 미처 모르고 있던 신문에 고시문이 게재됐다는 놀라운 사실이 신용하에 의해 언급된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곧바로 발표자인 신용하에게 다시 확인해 본 바도 있었다. 아래에서는 신용하의 발표내용과 그 내용의 진위를 재차 확인하기 위해 필자가 벌인 일련의 과정을 밝힌다.
2) 신용하의 유령신문:『世方新聞』
신용하가 1997년 5월 23일 독도학회 주최 『제3회 학술심포지움}에서 발표한 연구내용(신용하,「독도에 대한 일본의 1905년 소위 '영토편입'의 불법성과 부당성」, 58∼59쪽)중 문제의 부분을 먼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내무대신훈령」 훈제87호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隱岐島를 距하기 西北으로 85해리에 있는 島嶼를 竹島라 칭하고 지금부터는 그 소속을 隱岐島司의 所管으로 한다. 이 뜻을 管內에 告示토록 하라.
右 訓令함
明治 38년 2월 15일
內務大臣 芳 川 顯 正
島根縣知事 松永武吉殿
……
일본 내무대신은 이 결정을 일본의 중앙정부의 「官報」에 게재하지 못하고 島根縣知事에게「管內에 告示」토록 1905년 2월 15일자로 훈령하였다.
……
내무대신으로부터 위의 훈령을 받은 島根縣知事는 1905년 2월 22일 <島根縣告示 第40號>로서 다음과 같은 告示文을 조그맣게 世方新聞에 게재하였다.
(밑줄: 필자)
「島根縣告示 제40호」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隱岐島를 距하기 서북으로 85해리에 있는 섬을 竹島라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本縣 소속 隱岐島司의 所管으로 정한다.
明治 38년 2월 22일
島根縣知事 松永武吉
위의 인용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바 「島根縣 告示 第40號」의 고시 여부를 둘러싼 논의를 하면서, 신용하는 일본이 그 고시문을 "조그맣게 世方新聞에 게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는 독도학회 『제3회 학술심포지움』 당일인 97년 5월 23일, 신용하의 발표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리셉션장에서 학술회의 방청인 ㄱ씨에게 부탁, 신용하에게『世方新聞』의 소재에 대해 질문을 한 결과 "일본인의 글에서"라는 짤막한 답변을 얻어냈다. 이튿날 다시 ㄱ씨가 신용하의 연구실로 전화를 통해 이 신문의 출전여부를 묻자, "10여년전 외무부에서 얻은 자료라서 정확히는 모르나, 일본측의 문서로 기억한다. 외교문서를 그들이 거짓으로 기록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더 이상 출전을 확인하지 않고 인용했다. 짐작컨대 시마네현 지방신문이 아니겠는가?"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같은 놀라운 발표에 관한 확인작업차 필자는 곧바로 시마네현립 도서관 자료실(島根縣立圖書館 鄕土資料室), 일본국립도서관 신문관(日本國立國會圖書館 圖書館 協力部), 도쿄대학 메이지 문고(東京大學法學部附屬 近代日本法政史料センタ- 明治新聞雜誌文庫) 등에 신용하가 언급한 『世方新聞』의 존재여부를 조회해 보았다.
그 조회과정의 대강과 결과를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島根縣廳 圖書館 資料室에의 조회(1997. 5. 26)
질의 : 한일관계사연구를 위해, 귀 현 발행신문에 대해 문의합니다.
1. 명치 38년 귀 현에서 발행한 신문현황
2. 명치 38년「世方新聞」 발행 여부
회신 : 島根縣立圖書館 鄕土資料室로 부터의 회신(1997. 5. 27)
1. 明治38年 島根縣で發行された新聞狀況
山陰新聞(創刊 明治 15年 ∼ )
松陽新報(創刊 明治 34年 ∼ 昭和17年)
* 別紙「島根·鳥取兩縣新聞發達圖」を參照して下さい.
2. 明治38年「世方新聞」發行の有無について
「島根縣新聞史」には記載がありませんでした.
當館にも所藏していません.
(2) 日本國立圖書館 新聞館에의 조회(1997. 5. 28)
질의 : 한일관계사연구를 위해, 신문에 대하여 문의합니다.
1. 명치 38년 일본에서 발행한「世方新聞」의 유무
이상에 대하여 회신을 부탁드립니다.
회신 : 日本國立國會圖書館 圖書館協力部 國際協力課로부터의 회신(1997. 5. 30)
件名 :「世方新聞」の所藏について
1997年5月28日付貴信でお尋ねの表記について,下記のとおり回答いたします.
「世方新聞」は, 當館では所藏しておりません.
{明治新聞雜誌文庫所藏 新聞目錄}(東京大學法學部明治新聞雜誌文庫編
東京大學出版會 昭和52)にも,その記載がありませんでした.
また,次の文獻を通覽さましたが,[世方新聞」についてはやはり
言及されておりません.惡しからず,ご了承ください.
① 地方別 日本新聞社 日本新聞協會 昭和31 538p.
<當館請求記號 070.21-N688t>
② 日本新聞百年史 日本新聞聯盟 昭和37 1,060p.
<當館請求記號 UC126-9>
③ 明治時代の新聞と雜誌 西田長壽著 至文堂 昭和41 299p.
<當館請求記號 UC126-14>
④ 日本新聞發達史 小野秀雄著 五月書房 昭和57 506p.
<當館請求記號 UC126-46>
(3) 東京大學明治文庫에의 조회(1997. 6. 11)
질의 : 한일관계사연구를 위해, 신문에 대하여 문의합니다.
1. 명치 38년 일본에서 발행한「世方新聞」의 유무
이상에 대하여 회신을 부탁드립니다.
회신 : 東京大學法學部附屬 近代日本法政史料センタ- 明治新聞雜誌文庫로 부터의 회신
(1997. 6. 11)
1997年6月11日付けの貴信の問い合わせについて下記のとおり回答いたします.
「世方新聞」は, 當文庫では所藏いたしておりません.
また,次の文獻を調べてみましたが,[世方新聞」について言及されておりません.
1. 新聞總覽 明治43年版 日本電報通信社 1910刊
2. 日本出版百年史年表 日本書籍出版協會 1968刊
위와 같이 조회한 결과 모든 곳으로부터 "발행된 바 없으며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회신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일본에 대한 조회와 병행, 우리의 외부무에도 조회를 했다. 이는 "10여년전 외무부에서 얻은 자료라서 정확히는 모르나, 일본측의 문서로 기억한다. 외교문서를 그들이 거짓으로 기록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더 이상 출전을 확인하지 않고 인용했다.……"는 신용하의 답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97년 5월 28일 필자는 외부무의 조약국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신용하 논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측 구상서의 열람을 요청했다. 이에 그는 관련부서인 국제협력과에 협조할 것을 지시했다. 국제법규과 정연욱 사무관은 "담당관이 출장 중이므로 돌아오면 상담 후 확인하여 회답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이튿날인 29일, 국제법규과의 배종인 사무관으로부터 "원본열람은 '동북아1과' 소관으로서, 담당자가 교육 중이니 내일 다시 협의 후 통보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5월 30일, 외무부 담당사무관에게 결과를 확인키 위해 통화를 했는데, "동북아1과 담당이 출장 중이라 열람이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다시 타부서로 미루는 태도와 대외비 운운하기에 “금일 중 그 여부를 통보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날 오후 3시 외무부의 담당사무관에게서 확인 전화가 오기를 "동북아1과 담당자인 김완중 서기관과 논의한 결과 대외비라 열람은 불가하며 타인에게도 열람시킨 바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6월 5일 배종인 사무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전화를 받았다.
외무부자료는 논문집으로서 필요하다면 제공하겠다. 그리고 대외비라서 열람불가한 점에 오해없으시기 바란다.
결국 필자는 문제의 글을 발표한 독도학회회장 신용하에게 1997년 6월 11일 다음과 같은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貴會가 주최한 제3회 學術심포지움('97. 5. 23 프레스센터)에서 發表된 論文中 <獨島에 대한 日本의 1905年 所謂「領土編入」의 不法性과 不當性>의 內容에서 59쪽 2째줄의 「世方新聞」의 正確한 出典을 1997年 6月 17日까지 通報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어떠한 회신도 없다. 왜? 결론적으로 필자는 독도학회 회장이며 독도보존연구회 회장이기도 한 신용하가 있지도 않은 유령신문인『世方新聞』을 조작한 것으로 단정한다. 결국 이것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 행위인가? 이 부분에 대해 신용하는 분명한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島根縣 告示 第40號」는 어떻게 된 것인가
3)「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回覽"
……
그러면 일본정부는 '영토편입'이 갖추어야 할 요건의 일부인 공시를 어떠한 방법으로 했는가? 島根縣의 작은 지방신문과 縣廳에서 고시하는 방법을 취했다①. 현청의 고시라는 것이 작은 지방신문과 현청의 게시판에 공문을 써붙여 며칠 두었다가 떼어내거나 지방신문에 간단한 공고문을 내고마는 것이다②. 그러므로, 우연히 島根縣의 현청소재지에 유능한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가 마침 이 짧은 기간에 작은 지방신문과 현청게시판을 자세히 읽고 본국에 긴급히 보고하지 않는 한, 이 방법에 의해서 한국인들이 獨島가 일본에 침탈당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③. (신용하, 1997, 전게논문, 61쪽)
위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용하는 일본의 공시방법을 논하면서, "島根縣의 작은 지방신문과 縣廳에서 (짧은 기간) 고시하는 방법을 취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이라는 수사를 사용해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고시는 정부부처, 행정관서의 통보사항을 내용 그대로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크든 작든 고시는 고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시는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청 게시판에 고시됐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신용하가 그것을 목격하였다는 말인가. 앞서 밝혔듯이 신용하가 주장한『世方新聞』은 조작된 유령신문이다.
한편 필자는 1999년 9월 14일 시마네현립도서관에 메이지 38년 2월 22일자의『島根縣報』를 조회해 보았는데, 시마네현립도서관 자료과 향토자료계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신을 받게 됐다.
明治38年2月22日の島根縣報について (回答)
このことについて,平成11年9月14日付をもってお問合せになりましたが,
下記のとおり回答いたします.
記
上記の件について,明治38年2月22日の縣報は當館には所藏しておりません.
明治21年からの縣報を所藏しているのですが,完全な資料ではなくところどころ拔けて
おりました.もうしわけありません. 李さんが御必要な明治38年2月22日の
島根縣報告示第40號竹島關係のものは島根縣廳へ問い合わせをされては
いかがでしょうか.
電話番號 0852-22-6139
島根縣廳總務部總務課情報公開係
尙, 原本ではないのですが, 圖書の中でこの島根縣告示第40號が揭載されています.
それでもよろしければ,複寫しますので, その折はもうしわけありませんが,
お知らせ下さい.
즉 메이지 21년부터의 현보를 소장하고는 있지만, 필자가 조회한 메이지38년 2월 22일자의 현보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위의 회신에서 알 수 듯이 시마네 현청 총무부 총무과 정보공개계로 연락을 해보면, 메이지 38년 2월 22일자의 이른바「告示 第40號」관계의 문건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9월 22일 "獨島(竹島)연구를 위하여"라는 목적으로「縣報告示 第40號(明治 38年 2月 22日)」의 열람을 신청했고 마침내 9월 29일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로부터 다음과 같은「縣報告示 第40號」라는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문건을 보면, 우측가장자리 가운데에 "回覽"이라는 朱印이 선명하게 찍혀있음을 알 수 있다. "回覽"…….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와카미는 1905년의「島根縣告示 第40號」의 정당성을 1898년의「東京府告示 第58號」를 예로 들며 일본의 "일반적인 관례"임을 주장하고 있지만,「東京府告示 第58號」는 적어도 두 신문을 통해 일반에 알려졌다. 그러나 가와카미는 이 사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신용하는 고시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일본은 그들의 말대로 고시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자료 뿐이다. 신용하가 고시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러면 무슨 근거에서 고시했음을 인정하는가. 더욱이 일본의 대표적 영토학자도 모르고 일본에서는 발간되지도 않은 세상에 없는『世方新聞』을 신용하는 어디서 보았는가. 결국 그는 유령의 신문까지 조작하면서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와카미는 그렇다치고 신용하의 논의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몰학자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일본은 일반적 관례에 따라서 고시를 한 것이 아니라 시마네현청 내에서 그냥 몇몇이서 비밀리에 돌려보는 데 그친, "回覽"으로 끝난 것이다. 더욱이 실제 "回覽"이 됐는지 그 또한 의문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비밀스런 이유가 있었기에 그들 지방의 신문사에서도 알고 있을 리가 없으며, 신문에 공시될 리가 없는 일이다. 우리의 독도는 이렇게 철저히 비밀리에 그들의 영토로 불법편입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만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품고 있는 진실이다. 결국「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허구이며 이 사실은 필자가 입수한 시마네현 고시이후 석달이 지난 당시 일본 신문을 통해서도 확연히 입증된다.
한편, 필자는 앞서 언급한 '1999년 9월 14일 島根縣立圖書館에 明治38년 2월 22일자의 「島根縣報」 조회'와 그에 따른 '島根縣立圖書館(資料課 鄕土資料係)으로부터의 회신내용'에서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현보가 완전하지 않아 빠진 것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시마네 현립도서관(자료과 향토자료계)으로 전화를 걸어, 누락돼 있다는 현보의 구체적인 내역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시마네현립도서관(자료과 향토자료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件名: 島根縣報の所藏について (缺號分)
連絡事項
返事が遲くなり大變申しわけありませんでした.
お問い合わせの件ですが,當館に所藏している[島根縣報]は正式には[島根縣令]又は[島根縣訓令]という名稱のものです. [島根縣報]という名稱になったのは大正五年四月からです.
當館に所藏している明治二十一年から大正五年三月までの縣令類は縣報に變わるものとして利用しているため縣報と呼んでいますがそのために回答に不十分な点がありましたことお び申し上げます.
즉 「시마네 縣報」라는 명칭으로 바뀐 것은 다이쇼(大正) 5년, 즉 1916년 4월부터의 일이기 때문에, 「島根縣令」 또는 「島根縣訓令」이었던 1905년 당시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다룬 「縣令類」는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결국 시마네현립 도서관에도 없는 이 「秋鹿村役場 島根縣 告示 明治38年」 문건은 시마네 현청에 단 한 장뿐인 유일본이다.
한편, 필자는 11월 19일 시마네현청(총무부 총무과 정보공개계)에 또다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조회를 요청했다.
題目: 島根縣告示に關する質問
表紙に書いている秋鹿村役場について敎えてもらいたいです.
1. 秋鹿村は地名ですか.
2. いまでも現存する地名ですか.地圖上の位置は.
3. 地名が變ったらいつ變更されて今の地名はなんですか.
즉 「秋鹿村役場 島根縣 告示 明治38年」 문건에 표시돼 있듯이(밑줄), 이 아이카무라(秋鹿村)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는 11월 22일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내왔다.
[回答] 秋鹿村は昔の地名で,昭和35年8月1日に松江市に編入さらています.
今の地名では島根縣松江市秋鹿町,松江市大垣町,松江市岡本町に屬
しています.
즉 이 아이카무라는 과거의 지명인데, 1960년 이후 오늘날 시마네 현청이 있는 마쓰에(松江)에 3곳으로 나뉘어 편입돼 있다는 회답이었다.
이러한 답변에 필자는 또다시 11월 24일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로 다음과 같이 문의한 바, 11월 26일 아래의 회답을 받았다.
問議題目: 島根縣告示に關する追加の問議
昨日の答辯についてまた知ってほしい点がありますので問議します.
1.秋鹿村は明治38年の當時,島根縣の縣廳の所在地ですか.
2.縣廳の所在地ではなかったら當時の秋鹿村役場と明治38年島根縣告示とはどんな 關係ですか.
3.告示の表紙の左上段には「第一種」と表示されてあります.
何を意味しますか.
* 添附: 島根縣告示の表紙の寫本 1部
[回答] 秋鹿村は當時の縣廳所在地ではありません.
この書類は當時秋鹿村が縣告示を續っていた冊子(竹島だけの告示ではなく)を
縣のほうでひきついで保存しているものです.
「第一種」については縣の文書管理規定上保存期間が10年以上又は永年の文書 を意味します.
즉, 표지에 '秋鹿村'이라고 쓰여져 있는 이유는, '秋鹿村'이 현청소재지여서가 아니고, 당시 '秋鹿村'에서는 「시마네현고시 제40호」뿐만 아니라, 다른 현 고시도 함께 묶어서 관리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계속 그런 형태로 보존돼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결국 이 「秋鹿村役場 島根縣 告示 明治38年」이라는「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시마네 현립 도서관에도 없고, 시마네 현청에만 단 한 장 보관되어 있는 유일한 것이다. 또한, 일반에 고시된 것이 아니라, 현청 내에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돌려 본, 그야말로 "回覽"을 통해 우리의 독도를 그들의 땅으로 비밀리에 편입시킨 것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하다.
2.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허구성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를 공포하고, 독도를 정식으로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1904년 일본어민이 "독도영토편입과 대하원(貸下願)"을 제출하자, 독도를 무주지라 왜곡하고,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지사의 명의로 소위「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불법 강탈했다.
아래에서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허구성을 소위「시마네현 고시 제 40호」이후 발행된 당시 신문을 통해 밝힌다.
1) 발틱함대와의 해전상황을 전하는 일본의 관보와 신문들
1905년 5월 29일∼6월 1일에 걸쳐 일본의 관보와 신문들을 일제히 독도부근해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해전상황을 집중적이고 대대적으로 보도했 다. 먼저 관보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관보(1905년 5월 29일)
전보(戰報)
……
29일 오전 착전
연합함대의 주력은 27일 이래 적 잔당에 대해 추격을 속행,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 1세(전함), 아리요르(전함), 세냐윈(장갑해방함) 및 이즈무르드(순양함)으로 이뤄진 일군을 만나 이를 공격하고……
관보(1905년 5월 30일) 호외
전보
……
○ 일본해 해전 속보 일본해해전에 관해 그후 접수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보고는 아래와 같다(海軍省).
전문 4) 금 30일 오후 착전
5월 27일 오후에서 다음날인 28일에 걸쳐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울릉도부근까지 해전을 「일본해의 해전」이라고 부른다.
전문 5) 동상
연합함대의 대부분은 앞서 전보한 바와 같이 그제 28일 오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 적함대의 주력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추격을 중지하여 그 처분을 하던 중……
필자는 해전상황을 알리는 기사들을 모두 마이크로 필름으로 확보했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의 관보는 물론 당시 중앙지와 지방지 104개의 신문 모두가 한결같이 독도를 '竹島'라 하지 않고, '리앙꼬르드암'이라 칭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위 참고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905년 5월 29일(월)과 5월 30일(화)의 관보호외와 일본의 신문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하지 않고,「리앙꼬르드암」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의 신문으로는『오사카 아사히(大阪朝日)신문』이 1905년 5월 29일자「호외」를 통하여 당시의 해전상황을 가장 먼저 보도하고 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大阪朝日新聞
5. 29(號外)
[ 海軍大勝利公報 ]
大海報 제111호
5월 27일 이래 일본해해전에 관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보고
전문 1) 5월 27일 오전 착전
…… 적함 발견 경보받고 연합함대 곧바로 출동……
전문 2) 5월 27일 밤 착전
연합함대는 이날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적함대 요격…… 아군피해 근소……
전문 3) 5월 29일 오전 착전
연합함대는 27일 이래 나머지 적에 대해 추격을 계 속.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 제1세(전 함)…… 공격.
5. 30(號外)
[ 日本海會戰公報 ]
大海報 제121호
일본해해전에 관한 연합함대 사령장관보고(5월30일 오후 착전)
전문 4) 5월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쳐 오키노시마(沖の島) 부근으로부터 鬱陵島부근 까지의 해전을 日本海海戰이라 칭 한다.
전문 5) 연합함대는 앞서의 전보와 같이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 적함대의 주력을 포위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울 도…… 죽변만 부근…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29일자 호외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일간지들을 일제히 30일과 31일에 걸쳐 발틱함대와의 해전속보를 전하고 있다.
결국 고시 이후 석달이 지났지만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도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케시마」라는 명칭을 사용한 신문은 하나도 없고, 모두 「리앙꼬르드암」으로 그대로 표기해 당시 일본 전국의 104개 신문 모두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월 31일자『마이니치(每日)신문』을 시작으로 몇몇 신문에서「리앙꼬르드암」의 위치 등과 시마네현으로 편입된 사실이 있음을 처음으로 보도하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每日新聞 (1905. 5. 31.) 2면
0 리앙꼬르드岩
어제 對馬海戰公報에서 본 리앙꼬르드岩은 일명 竹島라 하며, 鬱陵島(松島) 동남 약 50해리 10분 되는 곳, 동경 132도 북위 37도1분에 위치하는 조그만 섬이다.
② 電報新聞(1905. 5. 31.) 2면
0 리앙꼬르드의 地位
일본해해전에서 28일 적의 제3함대를 공격하여 단숨에 항복받은 리앙꼬르드岩은 石州 <石見國·현시마네현> 하마다(濱田)에서 180海里, 對馬水道에서 240海里(1해리=1851m)되는 곳으로 울릉도 가까이에 있다. 세간에서는 울릉도를 松島라 부르고, 리앙꼬르드를 竹島라 칭한다 한다.
③ 讀賣新聞(1905. 6. 1.) 5면
0 리앙꼬르드岩
리앙꼬르드岩(일명竹島)은 옛부터 무인도로서 세인들은 별로 모르지만, 이 섬에는 강치가 많이 살아, 시마네 현민은 종종 건너가 이것을 잡았다. 그러나 그 관할이 분명치 않아 본년 2월 내무성은 처음으로 이 섬을 시마네현 관할로 정하고 竹島라 이름지어, 울릉도인 松島와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마쓰나가 시마네현지사의 말. 이번에 대해전으로 이 조그만 섬이 도고대장에 의해 세계에 빛나는 광영이며, 즉 이는 시마네현의 광영이기도 하다고 싱글벙글…….
④ 中京新報(1905. 6. 2.) 3면
0 리앙꼬르드岩
이번의 大海戰으로 유명하게 된 리앙꼬르드岩은 일명 竹島라 하는데, 예부터 무인도로서, 세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 섬에는 강치가 많기 때문에 시마네현민은 종종 이 섬에 건너가 이것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종래 아무래도 그 관할을 알 수 없어 본년 2월 내무성은 처음으로 이 섬을 시마네현 관할로 정하고, 새로이 竹島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울릉도인 松島와 대비하여 이름붙였다나.
⑤ 靜岡民友新聞(1905. 6. 2.) 1면.
0 大海戰
……28일…… 가미무라 함대는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5척의 적함을 발견, 곧바로 이를 포위하였다.……리앙꼬르드岩이라는 이름은 이번의 海戰에 의해 유명하게 되었지만, 일명 竹島라는 무인도로서, 강치가 많으며, 본년 2월 내무성은 이를 시마네현 관할로 결정했다.
⑥ 京都日出新聞(1905. 6. 2.) 1면
0 행복한 竹島
리앙꼬르드岩(일명 竹島)은 옛부터 무인도로서 세인들은 별로 모르지만, 이 섬에는 강치가 많이 살아, 시마네 현민은 종종 건너가 이것을 잡았다. 그러나 그 관할이 분명치 않아 본년 2월 내무성은 처음으로 이 섬을 시마네현 관할로 정하고 竹島라 이름지어, 울릉도인 松島와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마쓰나가 시마네현지사의 말. 이번 대해전으로 이 조그만 섬이 도고 대장에 의해 세계에 빛나는 영광이 되고, 아울러 이는 시마네현의 영광이기도 하다고 싱글벙글.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 일본은 울릉도를 가리키는 마쓰시마(松島)와 구별해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란 이름을 지었다. 송죽(松竹)이 상징하듯 두 섬, 즉 울릉도와 독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모자관계의 섬 또는 부속도서관계임을 그들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결국 독도는 주인 없는 섬이 아닌 것이다.
한편 일본의 관보에서는 6월 5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리앙꼬르드암」은 '竹島'라고 다음과 같이 정정하고 있다.
官報 第6577號(1905년 6월 5일)
訂正 지난달 29일 관보호외 본란 일본해해전 전보의 3항 및 30일 관보호외 일본해해전 속보 5항 중「리앙꼬르드암」을 모두「竹島」로 정정함.
이렇게 관보를 통한 정정기사가 나간 후 이튿날 비로소 일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정기사를 싣고 있다. 즉
「訂正: 大海報 제111호(其3) 및 동 제112호(其5) 중,「리앙꼬르드岩」을「竹島」로 정정한다」(岩手日報 1905. 6. 6)
이러한 일련의 기사를 통해 이른바「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일본의 관보도 모르고 신문도 모르게, 비밀리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 『官報』第6667號(1905년 9월 18일)
이것은 당시 부산주재 일본영사인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1905년 7월 31일 그들의 외무성에 올린 보고 내용이다.
韓國鬱陵島現況
「강치라는 海獸는 울릉도에서 동남 25리에 있는 얀코島에 서식한다. 작년 무렵부터 울릉도민이 이것을 잡기 시작했다. 포획기간은 4월에서 9월까지의 6개월간이다.……」라고 보고하고 있다.(밑줄: 필자)
위의 관보 내용을 통해서 한국주재 일본 외교관조차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영토에 편입돼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도고 헤이하치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당시 일반적으로 불렀던「양코島」라 부르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 외교관은 독도가 울릉도민의 생활권임을 잘 알고 있음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다는 일본 각의의 결정과 소위「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일본 정부는 물론 자국내에서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를 침탈하기 위한 기만적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에서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일본 내에서조차 알지 못하였던 것을 어찌 바다건너 우리정부에서 알 수 있겠는가?
<신문 일람표>
01 大阪朝日新聞 5.29(號外) 5.30(號外) 5.30(2면) 5.31(3면)
6.01(2면) 6.02(1면)
02 大阪時事新報 5.30(1면)(2면) 5.31(1면)
03 時事新報 5.30.3면
04 讀賣新聞 5.30(2면) 5.30(5면) 6.01(5면)
05 日本 5.30(2면) 5.31(2면)
06 每日新聞 5.30(2면) 5.31(2면)
07 新愛知 5.30(2면)
08 神戶又新日報 5.30(1면) 5.31(1면) 6.01(2면)
09 國民新聞 5.30(2면)
10 報知新聞 5.30(2면) 5.31(2면)
11 信濃每日新聞 5.30(3면) 5.31(2면) 6.01(1면)
12 山陽新報 5.30(2면)
13 電報新聞 5.30(1면) 5.31(1면) 5.31(2면) 6.01(1면)
14 都新聞 5.30(2면)
15 東京日日新聞 5.30(2면)
16 中外商業新聞 5.30(2면) 5.31(3면)
17 人民 5.30(2면) 6.01(1면)
18 函館新聞 5.30(2면) 6.01(2면)
19 靜岡民友新聞 5.30(2면) 6.02(1면)
20 京都日出新聞 5.30 5.31 6.02(1면)
21 臺灣日日新報 5.30(附錄) 5.31(號外) 5.31(1면)(2면) 6.01(1면)
22 中京新報 5.30(2면) 5.31(2면) 6.02(3면)
23 九州日日新聞 5.31(號外) 6.01(2면)
24 佐渡新聞 5.31(2면) 6.01(2면) 6.02(1면)
25 福岡日日新聞 5.31(1면)
26 北國新聞 5.31(號外) 6.02(1면)
27 二六新聞 5.31(2면)
28 北海タイムス 5.31(1면) 6.01(1면)
29 中國 5.31(2면) 6.01(3면)
30 扶桑新聞 5.31 6.01
31 廣島藝備日日新聞 5.31(1면) 5.31(附錄)
32 鎭西日報 5.31(2면)
33 兩羽日日新聞 5.31(1면) 6.01(2면)
34 琉球新報 6.01(2면)(3면)
35 愛媛新報 6.01(2면) 6.03(2면) 6.04(2면)
36 紀伊每日新聞 6.01(1면)
37 秋田魁新聞 6.02(2면)
38 岩手日報 5.31(2면) 6.06(2면) 6.11(2면)
39 THE NEW YORK TIMES 6.01
40 미상 5.30 41 미상 5.30(號外) 42 미상 5.31 43 미상 5.30 5.31
<신문 참고자료>
大阪朝日新聞
5. 29(號外)
[ 海軍大勝利公報 ]
大海報 제111호
5월 27일 이래 일본해해전에 관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보고
전문 1) 5월 27일 오전 착전
…… 적함 발견 경보받고 연합함대 곧바로 출동……
전문 2) 5월 27일 밤 착전
연합함대는 이날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적함대 요격…… 아군피해 근 소……
전문 3) 5월 29일 오전 착전
연합함대는 27일 이래 나머지 적에 대해 추격을 계속.
28일 리앙꼬르드岩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 제1세(전함)…… 공격.
5. 30(號外)
[ 日本海會戰公報 ]
大海報 제121호
일본해해전에 관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보고(5월30일 오후 착전)
전문 4) 5월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쳐 오키노시마(沖の島) 부근으로부 터 鬱陵島부근 까지의 해전을 日本海海戰이라 칭한다.
전문 5) 연합함대는 앞서 전보와 같이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 적함대 의 주력을 포위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울도…… 죽변만 부근.
전문 6)
5. 30. 2면. 0 敵艦降服の狀
해전공보에서 보았듯이…28일 적함을 추격하여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5. 31. 3면 0 日本海海戰公報
대해보 제121호
전문 4) 5)…… 리앙꼬르드岩…… 6)
6. 01. 2면 0 大海戰 別報
……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 02. 1면 0 敵艦降伏の實況
우리 주력함대는 28일 적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추격하여……
大阪時事新報
5. 30. 1면 0 曠古의 大海戰에 대하여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우리 함대가……
2면 0 敵艦隊全滅
大海報 제111호
5월 27일 이래 계속중인 일본해해전에 관한 연합함대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전문 1(5월 27일 오전 착전) 적함 출현경보…… 연합함대출동……
전문 2(5월 27일 밤 착전) 연합함대는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적함대 공격……
전문 3(5월 29일 오전 착전) 연합함대는…… 28일 리앙꼬르드암 부근에서……
5월 29일 大本營海軍幕僚(어제 號外재록)
5. 31. 1면 0 大海戰公報
대해보 제112호
전문 4(30일 오후 착전) 27일 오후부터 28일에 걸친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울릉 도 부근까지의 해전을 일본해해전이라 칭한다.
전문 5(30일 오후 착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鬱陵島… 竹邊灣 부근
전문 6(30일 오후 착전)
時事新報
5. 30. 3면 0 曠古未曾有の大捷利
…… 같은날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우리 주력함대가……
0 <<리앙꼬르드岩 지도>> ……鬱陵島(松島). 붓솔岩…… 리앙꼬르드岩 표시
讀賣新聞
5. 30. 5면 <<적함의 항로>>…… 리앙꼬르드岩. 鬱陵島 표기.
5. 30. 2면 0 大海戰大捷報(大本營公示)
5월 27일 이래 계속중인 일본해해전에 관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전문 1) 5월 27일 오전 착전
…… 적함 발견 경보받고 연합함대 곧바로 출동……
전문 2) 5월 27일 밤 착전
연합함대는 이날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적함대 요격… 아군피해 근소
전문 3) 5월 29일 오전 착전
연합함대는 27일 이래 나머지 적에 대해 추격을 계속.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 제1세(전함).공격.……
6. 01. 5면. 0 리앙꼬르드岩
리앙꼬르드岩(일명 竹島)은 예부터 무인도로서 세인들은 별로 모르지만, 이 섬에 강치가 많이 살아, 시마네 현민은 종종 건너가 이것을 잡았다. 그러나 그 관할이 분명치 않아 본년 2월 내무성은 처음으로 이 섬을 시마네현 관할로 정하고 竹島라 이름지어, 울릉도인 松島와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마쓰나가 시마네현지사의 말. 이번 대해전으로 이 조그만 섬이 도고대장에 의해 세계에 빛나는 광영이며, 즉 이는 시마네현의 광영이기도 하다고 싱글벙글.
日本
5. 30. 2면 0 적함전멸
전문 1) 2) 3)…… 리앙꼬르드岩……
0 항복을 권고하다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5. 31. 2면 0 公報
전문 4)
전문 5)……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전문 6)
每日新聞
5. 30. 2면 0 세계 미증유의 大捷
전문 1)
전문 2)
전문 3)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東鄕 提督의 達眼
도고 제독은「…… 그들은 반드시 경로를 가까운 쓰시마 해협을 곧바로 통과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하였다.……
5. 31. 2면 0 적함대의 全滅(敵提督의 捕虜)
전문 4) 5) 6)
0 리앙꼬르드岩
어제 쓰시마 해전 公報에서 본 리앙꼬르드岩은 일명 竹島라 하며, 鬱陵島(松島) 동남 약 50해리 10분되는 곳, 동경 132도 북위 37도1분에 위치하는 조그만 섬이다.
新愛知
5. 30. 2면 0 大海戰大勝 公報
전문 1)
전문 2)
전문 3)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神戶又新日報
5. 30. 1면 0 海戰 公報
전문 1)
전문 2)
전문 3)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5. 31. 1면 0 피아의 전술
<<지도>>
6. 01. 2면 0 칙어
0 大海戰 續報(公報)
전문 4)
전문 5)…… 리앙꼬르드岩 부근…… 울릉도… 죽변만……
전문 6)
國民新聞
5. 30. 2면 0 帝國海軍の偉勳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對馬海峽大海戰
…… 東鄕平八郞의 보고……
전문 1) 2) 3)…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報知新聞
5. 30. 2면 0 大海戰大勝利(大本營海軍幕僚)
……
…(5월 29일 오전 착전)…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일로 해전도>> ……우쓰료島. 리앙꼬르드岩 표기
5. 31. 2면 0 大海戰: 旗艦擊沈 提督捕獲
전문 4)… 호칭한다
전문 5) (5월30일 오후 착전)… 지난 28일 오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전문 6)
信濃每日新聞
5. 30. 3면 0 大海戰
東鄕 司令長官報告
전문 1) 27일 오전착
전문 2) 27일 밤착
전문 3) 29일 오전착.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5. 31. 2면 0 空前の海戰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 01. 1면 0 大海戰(30일 오후 10시 32분 착전)
전문 4(30일 오후착) 27일 오후부터 28일에 걸친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울릉도 부근까지의 해전을 일본해해전이라 칭한다.
전문 5(30일 오후착)…리앙꼬르드岩부근에서… 鬱陵島… 竹邊灣 부근
전문 6(30일 오후착)
山陽新報
5. 30. 2면 0 海戰公報
전문 1) 2) 3)…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敵艦降伏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電報新聞
5. 30. 1면 0 適艦隊主力全滅
연합함대주력은 27일 이후 나머지 적의 추격을 속해,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서 적함 니콜라이 제1세(전함)….를 공격….
5. 31. 1면 0 適艦隊主力全滅(大海戰續報) …5월 30일 오후 착전…
5월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쳐 오키노시마 부근으로부터 鬱陵島부근까지의 해전을 日本海戰이라 칭한다.
연합함대는 앞서의 전보와 같이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적함대의 주력을 포위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5. 31. 2면 0 리앙꼬르드의 地位
일본해해전에서 28일 적의 제3함대를 공격하여 단숨에 항복받은 리앙꼬르드岩은 石州<石見國·현 시마네현> 濱田에서 180海里, 對馬水道에서 240海里(1해리=1,851m)되는 곳으로 울릉도 가까이에 있다. 세간에서는 울릉도를 松島라 부르고, 리앙꼬르드를 竹島라 칭한다 한다.
6. 1. 1면 0 勅語
5.30일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렸 다.
「연합함대는 적함대를 조선해협에서 요격 분전하기 며칠, 드디어 이 를 섬멸시켜 공전의 위공을 올렸다. 짐은 너희들의 충렬에 의해 ……」
1906. 5. 27. 1면 0 사진: 島根縣下竹島(소위 리앙꼬르드岩)之眞景
都新聞
5. 30. 2면 0 空前의 大勝利
전문 1) 2) 3)
0 리앙꼬르드岩의 위치
별항 해전공보 중에서 볼 수 있는 리앙꼬르드岩은 한국 울산 앞바다에 있는 울 릉도 동쪽, 오키도 서북에 있는 항해자들이 목표로 하는 하나의 암초이다.
東京日日新聞
5. 30. 2면 0 未曾有の大捷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大海戰大勝利(대해보 제111호)
전문 1) 2) 3)… 리앙꼬르드岩……
0 적함대 궤멸 별보
… 제주도… 이키노시마… 조선연안방면……
0 <<지도>>…… 울릉도를 松島로, 독도를 리앙꼬르드岩으로 표기.
中外商業新聞
5. 30. 2면 0 海軍大勝
大海報 제111호
전문 1) 2) 3)
5. 31. 3면 0 敵艦全滅하다
전문 4)… 일본해해전이라 호칭한다.
전문 5)…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전문 6)
人民
5. 30. 2면 0 大海戰
전문 1) 2) 3)… 리앙꼬르드岩…
0 적함에 항복을 권고하다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6. 01. 1면 0 大海戰 續報
전문 4) 5) 6)
函館新聞
5. 30. 2면 0 敵艦隊全滅 詳報
(29일 오전착)…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01.2면 0 大海戰詳報(30일오후 9시 7분 동경발)
公報. 30일착. 이번의 해전을 일본해해전이라 명명한다. 연합함대는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함대의 주력을… 돈스코이는 울릉도에 좌초…
靜岡民友新聞
5. 30. 2면 0 大海戰公報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적함…… 공격….
0 <<지도>>…러함대의 진로…
6. 02 .1면 0 大海戰
… 28일… 가미무라 함대는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5척의 적함을 발견, 곧바로 이를 포위하였다. 리앙꼬르드岩이라는 이름은 이번의 해전에 의해 유명하게 되었지만, 일명 竹島라는 무인도로서, 강치가 많으며, 본년 2월 내무성은 이를 시마네현 관할로 결정하였다…
…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조선 鬱陵島에 좌초하고……
京都日出新聞
5. 30. 0 大捷公報
전문 1)
전문 2)
전문 3)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5. 31. 0 일본해의 해전 公報
전문 4)… 일본해해전 호칭…
전문 5)……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전문 6)
6. 02. 1면 0 행복한 竹島
리앙꼬르드岩(일명 竹島)은 예부터 무인도로서 세인들은 별로 모르지만, 이 섬에는 강치가 많이 살아, 시마네 현민은 종종 건너가 이것을 잡았다. 그러나 그 관할이 분명치 않아 본년 2월 내무성은 처음으로 이 섬을 시마네현 관할로 정하고 竹島라 이름지어, 울릉도인 松島와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마쓰나가 시마네현지사의 말. 이번에 대해전으로 이 조그만 섬이 도고대장에 의해 세계에 빛나는 영광이 되고, 아울러 이는 시마네현의 영광이기도 하다고 싱글벙글……
臺灣日日新報
5. 30(附錄) 0 海戰大捷公報
……29일 오전착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5. 31(號外). 0 海戰大捷公報(續報)
전문 4(5월 30일 오후 착전) 5월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쳐 오키노시마 부근으로부터 鬱陵島부근 까지의 해전을 日本海の海戰이라 칭한다.
전문 5(5월 30일 오후 착전) …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부근…
전문 6(5월 30일 오후 착전)
5. 31. 1면 0 海戰大捷公報
전문 1) 2) 3)…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2면 0 리앙꼬르드岩の所在
…….리양꼬루岩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종래 보통의 지도상에 기재된 것이 적어 아직 모르는 자가 많은데, 해도에 의하면, 이 바위는 북위 37도 10, 동경 131도 55 지점에 위치한다. 우리의 오키 열도에서 서북 80浬 떨어진 바다에 있으며, 흡사 오키 열도와 한국 울릉도의 중간지점이다.
6. 01. 1면 0 海戰大捷公報(續報)
전문 4(5월 30일 오후 착전) 5월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쳐 沖の島부근으로부터 鬱陵島부근까지의 해전을 日本海海戰이라 칭한다.
전문 5(5월 30일 오후 착전) …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부근…
전문 6(5월 30일 오후 착전)
中京新報
5. 30. 2면 0 大海戰公報
전문 1) 2) 3)…리앙꼬르드岩…
0 敵艦降服光景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5. 31. 2면 0 <<大海戰地附近略圖>> ……리앙꼬르드岩……
6. 02. 3면 0 리앙꼬르드岩
이번의 大海戰으로 유명하게 된 리앙꼬르드岩은 일명 竹島라 하는데, 예부터 무인도로서, 세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 섬에는 강치가 많기 때문에 시마네 현민은 종종 이 섬에 건너가 이것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종래 아무래도 그 관할을 알 수 없어 본년 2월 내무성은 처음으로 이 섬을 시마네현 관할로 정하고, 새로이 竹島라 명명했는데, 이는 울릉도인 松島와 대비하여 이름 붙였다나.
九州日日新聞
5. 31(號外). 0 大海戰顚末公報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대장 보고(5. 30. 大本營착전)
30일 착. 연합함대는 지난 28일 오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 함대의 주력을 포위공격 항복을 받고……
6. 01. 2면 0大海戰顚末公報(30일 오후 8시 24분 도쿄발. 31일 오전 2시 10분 본사 착)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대장 보고(5. 30. 大本營착전)
30일 착. 연합함대는 지난 28일 오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함대의 주력을 포위공격, 항복을 받고……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울릉도남안에 좌초… 28일… 정오경 竹部灣 부근에서 적의 구축함 한척을 격파……
0 大海戰 命名(5월 30일 대본영 착전)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친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鬱陵島부근까지의 해전을 日本海 海戰이라 칭한다.(이상 두 건은 어제 호외재록)
佐渡新聞
5. 31. 2면 0 大海戰 後報
전문 1)
전문 2)
전문 3)……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 01. 2면 0 我艦隊の追擊
30일 오후 대본영 착신… 28일 오후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울릉도… 죽변만…
6. 02. 1면 0 28일의 海戰場
우리 연합함대 주력이 28일 적함대를 공격한 리앙꼬르드岩 부근은 오키 서북방 근해이다.
福岡日日新聞
5. 31. 1면 0 日本海海戰
(29일 오전 착전) ……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北國新聞
5. 31. 號外 0 대해전 그후의 공보(30일 오후 8시 31분 도쿄발)
전문 4) …… 일본해해전이라 칭한다.
전문 5) …… 리앙꼬르드岩……
전문 6)
6. 02. 1면 0 日本海의 大海戰詳報
…… 리앙꼬르드岩 부근……
二六新聞
5. 31. 2면 0 日本海海戰 續報
전문 4)… 일본해해전이라 칭한다.
전문 5)…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전문 6)
北海タイムス
5. 31. 1면 0 大海戰 詳報
전문 1) 2) 3)…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 01. 1면 0 日本海大海戰(情報)
… 도고 함대는… 이키 쓰시마 오키 세섬의 삼각형 속으로 적을 포위… 돈스코이… 울릉도에 침몰…… 죽변만…
0 大海戰 公報
전문 4) 5) 6)
0 <<日本海海戰位置>> …… 鬱陵島(일명 松島)… 죽변만…
中國
5. 31. 2면 0 大海戰詳報(公報)
전문 1) 2) 3)…리앙꼬르드岩…
6. 01. 3면 0 大海戰 續報(公報)
大海報 제121호
전문 4(5월 30일 오후 착전) 5월 27일 오후부터 다음날 28일에 걸쳐 오키노시마 부근으로부터 鬱陵島부근 까지의 해전을 日本海の海戰이라 칭한다.
전문 5(5월 30일 오후 착전) …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부근…
전문 6(5월 30일 오후 착전)
扶桑新聞
5. 31. 0 大海戰公報
전문 1)
전문 2)
전문 3)……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
0 東鄕大將의 高義
공보의 우리 주전함대는 지난 28일 적함을 추격하여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적전투함 니콜라이1세 이하……
6. 01. 0 칙어하사
廣島藝備日日新聞
5. 31(附錄) 0 海戰大捷 續報
…리앙꼬르드岩…울릉도동남안…울릉도남방…죽변만(조선 울산북방)…
5. 31. 1면 0 激戰最中の勸降
…… 우리 주전함대가 28일 적함을 추격하여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 러 적전투함 니콜라이 제1세 이하……
鎭西日報
5. 31. 2면 0 海戰公報の全文(29일 오후 11시 40분 도쿄발)
……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兩羽日日新聞
5. 31. 1면 0 海戰公報
……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 01. 2면 0 칙어
0 大海戰公報(30일 오후 9시 10분 도쿄발)
30일 대본영착 도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보고에 의하면,… 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패잔함대주력을 포위 공격, 항복받고 추격중지. 또 오후 5 시 북서쪽에서 기함 돈스코이를 발견…… 추격…… 포격…… 이튿날 아침 돈스코이가 울릉도에 좌초되어 있음을 발견…
琉球新報
6. 01. 2면 0 일본해의 해전
…… 울릉도 부근에서……
0 해전의 명명 및 결과
…이번의 해전을 일본해해전이라 명명하고, 28일 울릉도 부근에서……
3면 0 日本海の海戰顚末の要
……
전투 1 ……
전투 2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愛媛新報
6. 01. 2면 0 大海戰公報
대해전보 제111호
5월 27일 이래 계속중인 일본해해전…… 에 관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전문 1 (5월 27일 오전 착전) 적함 출현경보… 연합함대출동….
전문 2(5월 27일 밤 착전) 연합함대는 오키노시마 부근에서 적함 대 공격…
전문 3(5월 29일 오전 착전) 연합함대는……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敵艦降服の狀
해전공보에서 보았듯이 우리 주전함대가 28일 적함을 추격 리앙꼬르드 岩 부근에 이르러 적전투함 니콜라이1세 이하….
6. 03. 2면 0 日本海實戰談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6. 04. 2면 0 敵艦降伏の實況
우리 주력함대는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1세……
紀伊每日新聞
6. 01. 1면 0 日本海會戰公報(大海報제121호)
전문 4(5월 30일 오후 착전)…… 日本海海戰이라 칭한다.
전문 5(5월 30일 오후 착전)…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부근
전문 6(5월 30일 오후 착전)
秋田魁新聞
6. 02. 2면 0 大海報의 說明
……
28일의 해전장 우리연합함대 주력이 28일 적함대를 공격한 리앙꼬르드 岩 부근은 오키 서북방에 있는 근해
0 항복을 권고하다
……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岩手日報
5. 31. 2면 0 海戰別報(29일 오후 10시 착전)
전문 1)
전문 2)
전문 3)……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0 大海戰槪聞
유사이래 미증유의 대해전은 지난 27일 오후2시부터 對馬海峽 東水道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초함이 제주도바다에서 적함대가 오는 것을 발견한 것은 27일 아침 오전 6시였으며, 적함대가 對馬海峽東水道 가까이에 온 것은 오전 10시 40분경…… 조선 蔚山 앞바다에서 부터 鬱陵島에 이르는……
6. 06. 2면 0 東鄕聯合艦隊司令長官報告
………
訂正
大海報 제111호(其3) 및 동 제112호(其5) 중,「리앙꼬르드岩」이라는 것을 竹島로 정정한다.
6. 11. 2면 0 <<27-8양일간 일본해 피아회전도>>… 松島와 竹島로 표기
THE NEW YORK TIMES
6. 01. 0 日本海戰 지도
JAPAN SEA KOREA STRAIT
matsu island liancourt rocks
미 상
5. 30. 0 敵艦全滅
대해전 공보
전문 1) 2) 3)
0 적에게 항복을 권고
…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 이르러…
미 상
5. 30.(호외) 0 大海戰 詳報
東鄕艦隊司令長官의 公報
27일 착……
27일 밤착……
29일 오전착…… 28일 리앙꼬르드岩 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1세
미 상
5. 31. 0 大海戰 詳報
전문 1) 2) 3)
미 상
5. 30. 0 大海戰大勝利
전문 1) 2) 3)
0 大海報 說明
28일의 해전장 우리연합함대주력이 28일 적함대를 공격한 리앙꼬르드岩 부근은 오키 서북방에 있는 근해
5. 31. 0 空前의 大勝利
전문 4)… 일본해해전이라 칭한다.
전문 5)… 리앙꼬르드岩… 울릉도… 죽변만…
전문 6)
미 상
5. 30 0 大海報 說明
28일의 해전장 우리연합함대주력이 28일 적함대를 공격한 리앙꼬르드岩 부근은 오키 서북방에 있는 근해
요약 및 결론 -독도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자세」
일본의 이른바「島根縣告示 第40號」의 고시여부와 이를 둘러싼 주요 쟁점에 대해 검토를 해보았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이미 지난 1981년 이후 일본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마이크로 필름을 통해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고시여부를 확인하면서, 1905년 당시 일본에서 발행됐던 중앙지와 일간지의 수가 104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필자가 미처 모르고 있던 신문에 고시됐다는 '놀라운' 사실을 신용하가 공개한 것이었다. 필자는 곧 신용하 발표내용의 진위에 대해 일련의 확인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신용하에 의해 『世方新聞』이라는 유령신문이 조작됐음을 밝혔다.
. 필자가 입수하고 있는 「秋鹿村役場 島根縣 告示 明治38年」이라는「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시마네 현립도서관에도 없고, 시마네 현청에만 보관돼 있는 단 한 장의 유일본이다.
또한 일본의 일반적 관례에 따라 고시한 것이 아니라 시마네현청 내에서 그냥 몇몇 사람이 돌려보 "回覽"으로 끝난 것이다. 그나마 "回覽"조차 됐는지 그 자체도 또한 의문이다. 하여간 이런저런 비밀스런 사정이 있었기에, 그들 지방의 신문사도 알 수 없었고 따라서 신문에 공시되지도 않았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자체가 일본이 철저히 비밀리에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불법편입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허구인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
1905년 2월 22일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한 일본의 독도영유권 장의 허구성은 3개월이 지난 그해 5월의 신문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즉 일본의 신문도, 관보도, 심지어 그들의 외교관조차 몰랐다는 사실이다.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다는 일본 각의의 결정과 소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관해서는 일본정부는 물론 일본 자국내에서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 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더욱이, 일본정부는 소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에서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나 일본 내에서조차 알지 못하였던 사실을 어찌 바다건너 대한제국에서 알 리 없으며 이는 완전히 자가당착이다.
신용하의 자료의 이용자세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해 두면서, 분명하고도 공개적인 해명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그 스스로 "……이것은 진실과 진리를 탐구하는 원리에 비추어서도 천만 부당한 것이며, 학문적으로도 반드시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대로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신용하를 비롯한 이른바 '독도연구자들'은 그 동기가 비록 '직업인으로서의 글쓰기'에 있다할지라도, 최소한 '글쟁이로서의 자세와 양심'을 제대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결코 자신들에게는 유리할 수 없는 자료를 스스로 공개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상에 앉아서 '새로운 글거리'의 출현만을 기대하는 안일한 자세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를 찾아나서야만 할 것이다.
보론
한·일 두나라의 독도문제에 대한 시각
1. EEZ를 갖지 않는 암석 독도와 오키노도리시마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란 섬이 있다. 도쿄에서 무려 1,700여㎞떨어진 일본 최남단의 섬이다. 최고 높이 2.7m인 이 섬은 유엔해양법협약에서 일단은 섬으로 인정받았으나 만조시에는 거의 전부 물에 잠겨 암초의 머리부분만 살짝 수면에 보일락말락한 상태였다. 1987년 일본은 이 지역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면서 수면에 드러나는 바위가 줄어드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일본 건설성은 재해복구라는 명목으로 바위를 고정하는 공사를 실시했다. 바위 위를 1만개의 테트라 포트로 둘러싸고 콘크리트로 고정시키는 대공사로 약 400일 동안, 연인원 8만명을 동원해 285억엔(한화 2,850억여원)이나 소요됐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독도의 동도는 높이 99.4m, 서도는 174m에 달해 섬의 형태조차 유지할 수 없었던 오키노도리시마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온전한 섬이다.
1999년 10월 24일 김윤배씨(독도사랑동호회 회장)는 해양수산부에 독도문제에 대한 몇가지 질의를 하였다. 그 가운데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 협상에서 「섬」 혹은 「바위」로서 지위를 갖는지, 그 중 하나의 지위를 갖는다면 왜? 그러한 지위를 갖는지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해양수산부 해양정책과는 10월 29일 아래와 같이 회신을 했다.
4) EEZ 협상에서 독도의 지위(섬 또는 바위)
O 정부는 유엔해양법협약 관련규정에 따라 현재 독도를 EEZ를 가지지 않는 암석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명분과 실리면에서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보고 있음. 다만, 이러한 입장이 향후 독도의 EEZ 기점 사용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님.(98년 11월 8일, 국회대정부 질의시 국무총리 답변)
일본은 억지로 섬의 형태를 유지해서라도 EEZ를 늘리는 반면 한국은 엄연히 존재하는 섬까지 암석으로 규정하여 입지를 스스로 축소해버린 것이다. EEZ를 갖지 않는 암석이란 해석은 독도기점 EEZ를 주장하는 일본에 후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독도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경비대 주둔, 등대설치, 접안시설 건설만으론 실효적인 지배를 충족시킬 수 없다. 독도를 근거로 경제 활동을 영위하면서 이와 관련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 가야 실효적 지배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2. 독도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
얼마전 일본 외무성의 2000년판 『外交靑書』가 발간되자 한국언론은 야단법석을 떨었다. 독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의도가 주목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지난 5월 10일자 연합뉴스의 관련보도를 살펴보자.
日 외무성 "독도는 日영토"
【도쿄=연합】일본 외무성이 발행, 9일 발표한 2000년판 ‘외교청서’가 독도문제에 대해 언급,‘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거듭 주장하고 나서 의도가 주목되고 있다.
외교청서는 독도문제와 관련,‘일·한 관계 현안의 하나로서 독도(죽도)를 둘러싼 소유권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일본의 입장은 일관돼 있으며 앞으로도 양국간에 끈기있게 대화를 거듭해나갈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외무성은 외교청서 99년판에서 독도문제를 각론 한국편 후미에 삽입, 외교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피하려는 눈치였으나 올해는 본론에 거론했으며 97년판에서는 ‘독도에 관한 일·한양국의 차이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유엔해양법조약 비준에 따른 조치는 독도문제에 관한 각각의 입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양 수뇌간에 확인’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청서를 편집한 일본외무성종합외교정책국 기획과는 “특별히 의식한 것은 아니다”고만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는 진부한 정부보고서였다.
본인은 최근 독도와 관련해 중요한 문건을 입수했다. 일본 국회(參議院 衆議院) 회의록과 시마네현 의회회의록, 그리고 일본 사법부의 독도사건 판례 전문이다. 본인이 입수한 자료를 보면 다케시마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의 고유한 영토라는 주장이 언제나 반복돼왔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러한 주장은 한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는 게 아니라 의회, 또는 재판이란 공론의 장에서 떳떳하게 이뤄져왔다.
외교청서보도는 우리 언론이 얼마나 독도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언론기관의 특파원, 정부기관의 주재원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자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독도인식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적신호였다. 회기가 열리면 날마다 생중계되는 국회의 회의를 성실하게 확인만 했어도 위와같은 한심한 기사는 나오지 않았으며 요란을 떨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론의 반성과 분발이 요구된다.
1999년 10월께 본인은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오키군(隱岐郡) 고카무라(五箇村)에 독도의 번지 유무, 본적등록자 수 등에 대해 질의를 했다. 이에 대해 고카무라 역장(役場-한국의 면사무소에 해당)은 아래와 같은 회신을 10월 29일 보내왔다.
受信者: 送信日時 平成 11年 10月 29日
李鍾學 樣
送信者:
五箇村役場 總務課
擔當者 永海治
1.竹島の番地について
島根縣 隱岐郡 五箇村 竹島官有無番地
2.本籍登錄者數等について
法の定めにより, 公表は出來ません.
일본 시마네현 주민들이 독도에 호적을 옮긴 사건으로 인해 국내의 여론은 들끓었다. 1999년 12월 28일 제209회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는 급히 회의를 소집, 정부대책을 확인하는 등 독도문제에 관한 현안보고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홍순영(洪淳瑛)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은 주일대사관을 통하여 일본정부에 확인을 요청한 바 '최근 수년 사이에 독도로 호적을 옮긴 수명의 일본인이 있다'고 통보해 온 바 있다고 보고했다. 구체적인 시점이나 인원을 알 수 없는 막연한 회신을 답변이라고 전해들은 것이다. 거의 두달 후인 12월 27일에야 외교부는 대변인 논평을 했을 뿐이다.
외교부의 안일한 자세는 이날 국회 질의와 답변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오세응(吳世應) 위원: 저는 내용에 대해서는 장관 말씀하신 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양해하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외교부의 독도문제에 관한 기본자세가 너무 해이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1 페이지에 시마네현입니까, 시네마현입니까?
외교통상부장관 홍순영: 시마네현입니다.
오세응 위원: 잘못된 것 아세요, 모르세요?
외교통상부장관 홍순영: 시마네현 올시다.
오세응 위원: 잘못된 것 아세요, 모르세요?
외교통상부장관 홍순영: 실무자들이 한문을 몰라서 ……
그러나 정치권의 인식 또한 정부 못잖게 안일했다. 박철언(朴哲彦) 의원의 질의를 보자.
호적을 옮겼느냐 안 옮겼느냐는 일본내 호적을 확인하면 그리로 옮긴 것은 금방 확인될 수 있는 공부상의 문제 아닙니까?
박 의원은 한국에서 호적을 문의하면 일본은 금세 답해 줄 것으로 생각한 양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일본 정치권이 한국 행정기관에 문의하면 답변해줄 것 같은가. 독도에 대한 연구는 없고 정치인은 담당부처 장관에게 호통만 치고 장관은 변명하기에 바쁜 한심스런 모습이었다.
반면 일본국회에서의 독도문제에 대한 접근은 매우 구체적이고 집요하다.
지난 1997년 마스다 요스케(益田洋介 54·공명당·비례대표)의원은 대정부질의에서 독도문제 해결을 위해 일미안전보장조약을 적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마스다 의원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단지 존재(presence)하는 게 아니라 액션을 취해줘야 한다”면서 5월 21일 제140회 참의원 '국제문제에 관한 조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다케시마의 오늘날과 같은 불법점거상태를 해제해야 할 일본 자위대가 국제평화유지군(PKF)이라든가, 국제평화유지활동(PKO)라며 좀체 나서는 것이 안된다면 일미안보조약에 근거해 미군에게 원조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竹島の今の不法占據狀態を解除するべく, 自衛隊がPKFだとかPKOだとかとなかなか出ていけないのであれば日米安保條約に基づいてアメリカ軍に援助を求めるべきである……)
불법점거상태의 해제란 바꿔말해 물리적 강제행사, 즉 무력제재도 포함하는 군사적 수단의 동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스다의 독도영유 방법론이 물리적 색채가 강한 반면 한국의 최대약점인 경제력 불균형을 이용해 독도문제의 압박수단으로 사용하자는 의견도 빈번히 제기되고 있다. 시마네현 몫의 비례대표인 이시바시 다이키치(石橋大吉) 의원(민주당)의 국회발언을 살펴보자.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국에서 막대한, 말하자면 금전에 대한 원조라든가, 융자든가 요구받은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역시 이러할 때에는 말하는 방식은 나쁘지만 조금 거래하는 정도의 일이라고 여기고 (다케시마를)돌려달라, 돌려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서의 통고만으로는 안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しかし, 今までの歷史を振り返ってみると, 韓國から膨大な, いわば金錢についての援助だとか融資だとか, 要求されることは再 あっているわけですね. やはりこういうときには, 言い方は惡いが, 少し取引するぐらいのことを言って, 返せ, 返してほしい, こういうことを言うべきだと私は思う. 文書の通告だけではだめだ, こういうふうに思います.-제144회 중의원 농림수산위원회, 1998년 12월 11일)
3. 광업권 설정과 과세, 판례-왜 심각한가?
필자는 지난 5월 1일, 11일 두차례에 걸쳐 독도에 대한 일본 시마네현의 광업권 설정과 과세, 일본 사법부의 다케시마 사건 판례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1954년 2월 26일 일본 시마네현은 도쿄에 거주하는 쓰지 도미조( 富藏)에게 독도지역에 대한 인광(燐鑛) 광업권을 허가해 주었으며 그 이후 광구세를 징수해왔다. 이에 대해 쓰지는 독도가 한국측의 불법점거로 인해 사실상 채굴이 불가능하므로 광구세를 징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1959년 국가와 시마네현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961년 11월 도쿄 지방재판소는 이에 대해 이유가 없다며 소를 기각함으로써 독도가 일본 영토란 사실을 판례로써 남겼다.
시마네현의 광업권 설정은 우리에게 불과 3개월전 종결됐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서영유권 분쟁을 상기시킨다.
영국과 프랑스는 영불해협사이에 있는 망키에(Minquiers)및 에크레오(Ecrehos) 도서를 둘러싸고 수년간 분쟁을 벌인 끝에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1953년 11월 17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영국에 승소판결을 내렸다. 영국정부가 왕립재판소와 지방행정당국의 조치들을 통하여 사법권(司法權), 지방행정권 및 입법권(立法權)을 행사한 사실 등이 구체적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의 분쟁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양측을 대표했던 변호인들에게 독도를 어떻게 해야 일본령으로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수 있는지 자문한 뒤 구체적인 계획까지 수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계획이 이번 광업권 설정과 판례로써 확인된 것이다.
광구권 설정이 있고 불과 7개월후인 1954년 9월 25일 일본정부가 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영유권문제를 제소하자고 구상서로 제의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의 독도지배는 2차대전 패전으로 상실됐다. 반면 한국은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 연합국최고사령부(SCAPIN)지령,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 등에 의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를 조약에 의하지 않은 불법 점거로 간주하고 자국 마음대로 광구권을 설치하고 통치권을 판례로써 남긴 것이다. 이는 영유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민관(民官)이 합작이 돼 벌인 술수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독도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한국에 제의한 것도 이같이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계산된 행위인 것이다.
4. 실재하지 않는 섬 나카노도리시마와 간도(間島), 녹둔도(鹿屯島)
얘기가 다소 초점에서 빗나간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영토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시각차를 설명하겠다. 메이지(明治) 연간(1868년∼1912년) 일본은 십수개의 섬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그 가운데는 실재하지도 않는 가공(架空)의 섬인 나카노 도리시마(中の鳥島)까지 있었다.
반면 이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는 간도(間島)와 녹둔도(鹿屯島)를 빼앗겼다. 간도(間島)는 한민족이 생활했던 한국의 영토였다. 면적 2만 1천㎢에 이르는 간도는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와 청 사이의 불법적인 흥정에 따라 청국에 귀속됐다. 1909년 9월 4일 일제가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 만주 안봉선(安奉線) 철도부설권, 푸순(撫順) 탄광 채굴권과 간도영유권을 청과 맞바꾼 것이다.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鹿屯島)도 1587년(선조 20)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지켜냈던 우리의 영토였다. 그러나 녹둔도는 1890년 청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소위 '북경조약'에 따라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한마디로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1890년 7월 서울 발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과 『마이니치(每日)신문』의 기록은 무기력한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녹둔도를 점령하고 해군의 화약고를 설치하는 등 각국의 신문보도로,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마치 동양의 일대 춘사(椿事)가 발생한 것처럼 어수선한데 한심하고 딱한 것은 그 본가(本家) 당사국인 한국에서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신문을 보고서야 겨우 아는 것 같으니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다.
오늘날 우리 국민 가운데 '녹둔도'를 아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제 땅을 빼앗기고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영토의식의 부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론 - 총제적인 위기에 빠진 독도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독도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 영토의 일부를 무력점거한 침략자이다. 일본에게 침략만 당해왔던 한국이 침략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엄연한 우리 영토에 대해 광업권을 설정하고 이를 판례로써 합리화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도발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므로 독도문제를 부각시키면 일본의 분쟁의도에 말려들 의도가 있다며 무대응이 상책이라고 문제의 심각성을 호도하고 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은 바로 무대응 때문에 자초한 불행 아니었던가. 일본의 의도를 면밀히 연구하고 대비하는 가운데 무대응전략이 하나의 방법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이지 지금과 같이 무관심한 자세로는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정부가 개인보다 정보력이 뒤진다면 문제아닌가. 모르면 즉시 달려와 조언을 구해야 하는 게 정부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관계자는 항상 뒤늦게 왔고 마치 상부기관에서 지시하는듯한 고압적인 자세로 자료제공을 요구했다. 국민의 의견을 겸허히 경청하고 노력하지 않는 한 독도는 우리 곁을 떠나고 말 것이다.
독도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의 한국강점은 바다로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우리의 바다인 조선해의 이름을 빼앗고 독도를 차지한 후 한국을 강점한 것이다. 독도는 한국영토의 위기상황을 알려주는 파수대와 다름없다. 독도는 결코 동쪽 끝의 바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