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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 단편 2 (南冥 曺植)
다음에 들어선 입석리(立石)에서는 전국의 산야와 처처에 흔히 있는
'선돌' 설화와 달리 '선비학당'(修己門)이 눈을 끌었다.
폐교된 입석초등학교의 교사를 개보수해 "옛 선비의 곧은 정신과 몸
가짐을 배우는 장"으로 세웠다는 곳이다.
유가(儒家)의 근본 이념인 인(仁)을 통한 수신(修身)의 장(場)이라는
뜻일 것이다.
문익점, 조식등의 영정을 보면서 사자소학을 통해 지(志), 기(氣), 인
(仁), 의(義) 등 선비의 기개와 정신을 훈장으로 부터 배우게 된다나.
권학로(1), 수기문(2) 안에 선비학당으로 거듭난 입석초교(3. 4)
남명의 산천재(5:전재)
문익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거니와 남명 조식(南冥曺植)은 합천
생이지만 산청 산천재(山天齋:시천면)의 주인으로 단 한번의 출사도
없는 처사(處士)다.
그렇다고 마냥 고고(孤高)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도 낙방한 적이 있으며 이후 은둔처사가 된 것은 빠른 시국판단에
철저한 보신(保身) 때문이었음이 그의 행적에서 감지되니까.
그는 왕(王)에게 서릿발 같은 상소문(丹城辭職疎 등)도 올렸다.
감히 아무도 상상 못할, 금기를 깬 글을 쓰고 말을 했다.
그러고도 그가 수(壽)를 누린 것은 군주시대에도 언로(言路)가 살아
있었다는 증표라 하겠다.
우리 군사독재시대라면 쥐도새도 모르게 당했을 것이니까.
이즘도 인터넷에 거슬리는 글 올렸다 해서 잡아가려 혈안 아닌가.
좌(左) 이 퇴계, 우(右) 조 남명이라 했다.
소위, 영남학파의 쌍두를 말한다.
그 중 하나인 경상우도의 남명이 추앙을 받으면 뭣하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야 훌륭한 스승이라잖은가.
정인홍 등 그의 문인(門人)들이 개판을 쳤는데.
폐교사의 재활용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 하겠으나 지금이 과연
옛 선비정신이 절실한 시대인가.
선비들 등쌀에 서러웠던 민초들의 혼백들이 기절할 일 아닌가.
온고지신(溫故知新)하겠다는 것이라면 지호지간의 다물민족학교와
도 상충되지 않나.
선돌의 전설이 빠질 리 없다.
10리 밖 운리의 단속사 창건 당시 도인(스님)이 법력을 이용해 인근
돌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한데, 절 공사의 완공으로 더 이상 돌이 필요 없게 되자 절로 향하던
돌들이 모두 (지금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버렸다는 것.
흔한 선돌 전설 + 진주의 명석 설화와 분위기가 같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입석리에는 비(碑)와 각(閣)이 유난히 많다.
유적비, 효행비, 송덕비, 열녀각, 정려각 등.
선돌마을이라 그런가.
이처럼 특별히 기릴 분들이 배출된 마을인가.
단속사로 가다가 서버렸다는 입석들(1~3)
유적비, 효행비, 송덕비, 열녀각, 정려각(4~8)
어천을 떠날 때 어느 지도에 1001번도로를'호암로'라 해서 괴이쩍어
했는데 입석리 여러 간판에서 '호암'을 보았다.
그리고, 구산마을 지나 금계천변에 세워진 호암동천(虎巖洞天)이라
음각된 자연석에서 호암로의 연유를 알 만 했다.
금계천(지도에는 남사천이지만 금계사쪽에서 발원한다 해서 지역민
들은 금계천) 월편에 호랑이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호암골이 됐단다.
호암동천 마을 표석
그런데 왜 동천인가.
동천의 사전적 뜻은 "산과 내가 둘려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다.
그렇다면, 장대한 지리산자락의 골짝마을들은 처처가 동천이다.
형이상학적 동천(洞天)이란 하늘에 잇닿은 동네다.
그러므로 동천에 사는 사람이 곧 신선이다.
그렇다면, 호암골의 그들은 신선처럼 살고 싶은 염원을 동천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인가.
하긴, 백두대간과 9정맥, 팔도 산과 길에서 '동천' 두 글자만 만나면
무척 관심 깊게 살폈으나 매번 헛방이지 않았던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은 곳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헤맸으니 매번 헛
발질일 수 밖에.
아니, 등하불명이었던가.
삼각산 기슭 우이천변 내 작은 집이 바로 동천임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 천만 다행이지.
내 작은 동천
무엇을 예닮자는 것인가
바야흐로 산청의 향토사학자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할 시간.
남사삼거리에서 1001번도로(호암로)를 떠나 지리산 들머리 중산리
를 잇는 20번국도변의 '남사예담촌 전통찻집'을 찾아갔다.
통화에서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음성이라 느꼈으나 고매한(?) 분을
만나려면 자세 낮추는 정도야 당연하다 생각했다.
내 신분과 전화번호, 취지 등을 분명히 밝혔고 이 집에 도착해 알려
달라는 지시대로 그의 집에 전화했다.
그러나 무슨 사연인지 그는 늙은 길손의 귀한 1시간을 날려버렸다.
오전에는 선약이 있다 해서 그 시간에 나는 예까지 걸어왔건만 감감
무소식인 그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기다리는 중에 마침 이 집에서 판매대행중인 그 분의 저서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를 일별(一瞥)하고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황금같은 시간을 바칠 만큼 그에게서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아무리, 향토사학자 풍년시대라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 분이 향토사학자라면 유무식간에 향토사학자 아닌 촌로 있는가.
구전(口傳)이 주를 이루고 있는 향토사인데.
<경북하면 안동 하회마을이요,
경남하면 산청 남사마을이라 할 정도로 진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
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 또한 전통한옥마을로 유명합니다>
남사예담촌 홈피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격변기에 각골통한(刻骨痛恨)의 살육이 자행됐던 지역이다.
최씨 고가, 이씨 고가, 고대광실(高臺廣室)들이 지금 관광상품으로
환골탈태했다 하여 질곡의 역사에서 면죄되는 것이 아니다.
그 건물이 아니고 그 안의 주인공들 말이다.
토호들의 착취와 괄시가 오죽 심했으면 사상적 격변기에 가장 많이
참담했던 지역이었을까.
예담촌 최씨고가
예담촌은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담장 너머 그 옛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도 가지고
있다" 니 골 깊었던 반상시대의 옛 향수를 기리고 있다는 말인가.
산청에 남긴 그 선비들의 유산은 과연 무엇인데?
진정, 무엇을 예닮자는 것인가.
닮아야 할 만큼 가치있는 옛 것이 온존(溫存)되고 있단 말인가.
이순신 장군은 꾀까다로운 분?(백의종군로 有感)
허탈한 기분을 추스르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 표석을 발견했다.
옥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려고 합천 초계의 권율 도
원수 진영으로 가는 도중에 이 마을 한 농가에서 하룻밤을 보냈단다.
<6월 초1일경신 비가 많이 내리다. ........ 저물어 진주경계인 단성땅
박호원 농노 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반가이 맞기는 했으나 잘 방이
마땅치 않아 고생스럽게 밤을 보내다. 六月初一日庚申 雨雨..暮投丹
城境地 晉州地境朴好元農奴家 主人欣然接之 而宿房不好 艱難過夜>
(亂中日記 丁酉日記中)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 표석과 이사재
이즘,'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 해서 명분이야 어떠하던 관광상품
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해당지자체들이 정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행로지 표석 바로 뒤에 송월당 박호원(松月堂朴好元)의 재실
이사재(尼泗齋)가 있다.
박호원이 선조17년(1584)에 세상을 떴다니까 이사재가 들어서기 전
이었을 것이다.
일찍(5세때) 모친을 여읜 그는 사모(思母)의 정이 남달라 모친 묘가
있는 이 곳에 약간의 전답을 매입하여 농막을 짓고 하인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 하인집에서 1박했나 보다.
이사재는 훗날, 그 농막터에 세워진 듯 한데 이구산(尼丘)과 사수천
(泗水) 간에 있다 해서 그리 명명했나.
이곳 이구산은 공자와 관련 깊은 이구산과 동명이산이다.
그러나 남사마을은 오히려 동명동본의 산으로 이해하려 하는 듯.
이 산자락에서 공자정신의 후예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아무튼, 이사재 주인 박호원은 임꺽정 토포사의 종사관으로 토적에
공을 세웠고 승지,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하나 이 지방에
알려진 것처럼 who' who(名士錄)에 오를 만큼 저명인사는 아니다.
밀양박씨 문중자료에 의하면 좌참찬을 지냈고 훗날 종1품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송월당공파(松月堂公派)의 파조(派祖)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순신 장군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며 자기보다 18세나
연상이이라 하나 자기 시대에 정2품 벼슬한 박호원을 모를 리 없다.
더구나 그의 농노집에 유했으면서도 일기에 이름석자만 달랑 썼다.
그의 일기를 정독해 보면 열거하는 인명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간단
하게나마 직함적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으면서도 왜 그랬을까.
난중일기를 번역한 한 저명 문인이 '朴好元農奴家'를 "박호원이라는
농사짓는 종의 집"이라고 실수를 했다.
좌참찬이 농사짓는 종으로 추락한 어어처구니 없는 이 실수의 빌미
제공자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박호원의 이름 앞 혹은 뒤에 아무 직함이나 하나만 적어놓았더라면
그같은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부질없는 생각 하나 더 떠올랐다.
이순신장군의 성격이 너무 정갈했나?
농노도 사람이고, 농가도 사람 사는 집인데 아무렴 감옥에 비할까.
모진 옥살이를 하고난 직후인데도 이 집이 얼마나 나빴기에 '艱難過
夜'(힘들고 고생스럽게 밤을 보내다) 라고 적었으니 말이다.
꽤 꾀까다로운 분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오조점 대신 안봉리 이학근 부부
향토사학자 만난다는 부푼 기대 역시 해프닝으로 돌리고 남사리를
떠났지만 하루를 앗겼다는 박탈감에 속이 상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 분을 만나면 꼭 물어보려 한 것은 '오조점'이다.
그런데 그가 쓴 책에도 이미 다 알려진 내용들일 뿐 오조점이 없다.
뿐만 아니라 단성~ 산청간 각 20리 지점 어느 곳에도 점(店)자 돌림
지명이 없거니와 아는 이도 없다.
다만, 아침에 걸어온 청계저수지 남서쪽 운리에 점촌마을이 있다.
그 일대는 산청 고령토의 최대 매장지이므로 관련이 있는 지명일 것
으로 추측해 보는데 제철을 했던 곳이란다.
요지(窯址)와 철산화물 등이 발견되고 있다니까.
그러나 여길 오조점이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일 것이다.
우선 거리가 맞지 않거니와 옛 통영별로라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강과 동행하는 길이며 현감이 송객정까지 지어놓은 편한 길을 두고
웅석봉 대현을 넘는 험로를 어떻게 대로라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잘 포장된 지방도로로 업그레이드되었음에도 고개넘기가 편
치 않으며 대중교통마저 불모지대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겹다 해도 양반 등쌀을 피하고 싶은 민초들이나
다녔을 법한 길을 대로라 할 수 있겠는가.
20번국도를 따라 솔고개 아래에서 어제 걸었던 길에 다시 들었다.
약도를 그려가며 자상히 가르쳐준 김태식님이 새삼 고마웠다.
한 승용차가 속상한 내 마음을 읽었나.
길을 물은 운전자는 나를 원지삼거리까지 태우고 갔다.
해질녁까지 신안과 산청 경계에서 오조점을 다시 수소문해보겠다는
집념으로 버스들을 다 보냈기 때문에 막판에 조금 지친 상태였다.
안봉리 앞 옛3번도로에서 지나가는 소형트럭을 향하여 무심코 손을
들었는데 저만큼에서 서주었다.
안봉리 달아랑마을의 이학근(李學根)님과 만삭의 부인이다.
그들은 나를 산청온천랜드 앞까지 태워주고 돌아갔다.
옛길을 걷는 늙은 이를 이해하고 신안땅에 다시 오게 되면 들르라며
주소까지 남겨주고.
산월이 임박한 아내의 기분 전환을 위해 드라이브 중이라는데 늙은
길손에게 적선을 한 것이다.
사천의 한국항공우주산업(주)와 어떤 인연일까.
낙남정맥 종주중 마산과 함안 경계인 한치에서도 그 회사 직원들이
내게 많은 먹거리를 주려했는데 대로를 걷는 중인 산청땅에서 또 그
회사 부장으로부터 후한 도움을 받았다.
오조점 대신 이학근님 부부!
꿩대신 닭이 아니라 닭을 쫓다가 꿩을 얻었다 할까.
두 달이 못되어 그들에게는 한 생명이 태어났다.
이학근님은 닉네임'두칠이'로 우리 카페를 통해 득남의 기쁜 소식을
알려왔다.
그 가정에 새 생명을 허락하신 분께서 행복과 평화도 함께 주시리라
믿거니와 또한 간절히 빌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