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고 이틀 후, 아르헨티나가 브라질과 시합을 가졌다. 그 경기는 공식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축구 도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국민적 열광의 진짜 이유는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의 복귀에 있었다. 코케인 복용 혐의로 경기 출장 금지를 당한 이후 그가 아르헨티나 대표로 처음 출전하는 시합이었던 것이다. "선수들은 모두 마약을 해요. 누구나 다 마약을 합니다." 한 축구팬이 내게 말했다.
리버 플레이트 스타디움(River Plate stadium)으로 걸어가는 길은 참으로 유쾌했다. 경기장 주변 지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깨진 포석과 하수구 냄새가 이 도시에 대한 나의 인상으로 남아 있지만 리버 플레이트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넓고 아주 깨끗했다. 그 지구는 마치 메이드스톤[Maidstone, 잉글랜드 동남부 켄트(Kent)주의 도시. 메이드스톤 유나이티드(Maidstone United) 클럽이 있다]처럼 보인다. 과거 영국인 클럽이었던 리버(River)는 지금 백만장자 클럽(los Millionarios)으로 발전해 있다.
내 친구들이 경기장 맞은편에 있는 사격 클럽에 차를 대었다. 구(舊)해군기술학교(EMSA) 건물에서 2~3백 야드 떨어진 곳이었다. 1970년대에 EMSA 건물은 해군의 고문 시설로 사용되었고, 그래서 아르헨티나의 아우슈비츠로 통했다. 그러다가 1978년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대회를 개최하게 되자 그곳은 선수들의 숙박시설로 바뀌었다. 1978년 월드컵 결승전은 리버 플레이트 경기장에서 치러졌다.
경기장은 내내 떠들썩했다. 때때로 "깡충깡충 뛰지 않는 사람은 영국인"이라는 구호가 나왔고, 그러면 관중의 거의 절반이 이에 대한 응답으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이외의 대부분 시간 동안 그들은 주로 노래를 했다.
브라질 사람들, 브라질 사람들,
얼마나 슬픈 얼굴인지,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인
그는 펠레보다 한 수 위지.
아르헨티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500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왔다. 나는 브라질에서 온 기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브라질 국가 대표팀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에 찍힌 'PRESS'라는 단어를 보고 그들이 기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축하해야 할 백 번째 기념일이 아니라고 해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시합을 능가할 축구 경기는 없다. 두 팀 다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자국 선수들을 모두 소집했고, 출전 선수 22명의 연봉을 모두 합해보았더니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두 팀은 아마도 세계 최고의 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땅딸막한 선수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는 "평화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른 선수 같았으면 이미 수 년 전에 돈을 챙겨 이 바닥을 떴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은 그가 그랜드호텔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다 있었던 일이다. 그가 갑자기 승강기 문에다 대고 뭔가 빠른 말로 지껄이더니 곧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아르헨티나나나나나나!!!" 하고 절규했다. 다른 이용객들이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마라도나는 불굴의 의지인이다. 그는 선수 생활 기간 동안 수도 없이 진통제를 맞았고 그래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는 모든 역경에 맞서 싸웠고 승리했다. 그는 다시 뛰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수백 명의 사진기자들 앞에서 몸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찍고 또 찍었다. 이 작은 소동으로 경기가 10분 늦게 시작되었고, 그 바람에 전세계 텔레비전 편성 시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낯익은 장면이 펼쳐졌다. 노란색-파란색-흰색의 브라질, 하늘색-흰색 줄무니의 아르헨티나, 관중석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흰색 색종이, 연막탄, 끊임없는 소음.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기를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그 모습이 어떠할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실제로 경기장을 찾은 게 실망감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같은 영화를 10번씩이나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아니라면 이 사태를 새롭게 관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홈팀에 편파적인 시합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옆에 있던 뉴욕 타임즈 New York Times 기자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브라질팀에서 패스가 두 번 이상 연결되면 관중석에서 항의와 야유가 빗발쳤다. 그때마다 브라질의 혐의자들은 적법한 소유자들에게 재빨리 공을 되차주곤 했다. 전반전은 완전히 아르헨티나의 주도권하에 있었다.
앞 장[10장]에서도 언급했지만, 마라도나는 이제 시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4개월 전 세빌랴(Sevilla)와 에스파뇰(Espa ol)의 경기에서 그가 뛰는 모습을 본 이후로, 그는 체중을 많이 줄인 상태였다. 그는 자유자재로 브라질 수비진을 유린했다. 그가 최전방 공격수에게 몇 차례 송곳 같은 패스를 연결시켰지만 번번이 무위로 끝났다. 그렇기는 했지만 아르헨티나가 먼저 득점에 성공했다. 만쿠소(Mancuso)가 골키퍼 타파렐(Taffarel)에게 평범한 슛을 날렸는데 그 공이 골키퍼 손 안에서 되튀기다가 골문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세트 플레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것은 명백히 골키퍼의 실책이었다.
[마라도나는 계속해서 집중력을 발휘해 경기에 임했다. 필리피(Filippi) 주심은 마라도나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심판을 보아야만 했다. 그는 좀처럼 킥 실수를 하지 않았다. 26분 경에 그가 찬 우아한 25야드 프리킥은 브라질 골문 가로막대에 맞고 말았다.
그러나 그도 예전의 그는 아니었다. 그는 이제 나이도 더 먹었고, 더 차분해졌으며, 더 둔해져 있었다. 공을 몰고 그라운드를 질주할 만한 체력은 사라진 것이다. 그 자신도 미드필드에서의 패스 연결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같은편 선수들은 그에게 볼을 패스해야만 했다. 다음날 발행된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 Buenos Aires Herald 는 뻔뻔스럽게도 교체투입된 레오 로드리게스(Leo Rodriguez)의 기동력이 더 돋보였다고 적었다.
마라도나는 후반전 중간에 교체되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그라운드 밖으로 나오다가 주심 필리피가 보지 안는 틈을 타 그에게 엿이나 먹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경기 중에 그는 심판을 향해 그라운드의 흙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물론 그가 심판을 가격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흙덩이가 딴 데로 날아간 걸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일련의 제스처는 은혜를 모르는 행동이었다. 주심 필리피도 이 위대한 선수가 상대의 마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매 번 프리킥을 선언함으로써 그날의 분위기에 편승해주었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아직 마라도나가 교체되기 전에 이미 브라질이 동점 상황을 만들었다. 경기는 막판에 폭력 행위로 인해 변질되었다. 아르헨티나 선수 루헤리(Ruggeri)와 브라질 선수 Valdo가 1백주년 기념 슬로건, '백 년을 한결 같은 열정으로(100 Years with the Same Passion)'를 실천하려고 주먹다짐을 벌이다가 함께 퇴장당했다.
수백 명의 기자들이 대기실 밖에서 선수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선수들에게 귀찮게 달라붙어 공허하고 무의미한 말들이나 받아적는 것은 저널리즘의 어두운 측면이다. 우리는 거의 한 시간가량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마침내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문을 쿵쾅거리며 두드리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문 안쪽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떴다. 두 시간 후, 그러니까 새벽 1시 경에 나는 여전히 경기장 주변을 배회하며 선수단 버스를 찾고 있었다.
결국 예언자가 등장했었음에 틀림없다. 아니라면 기자들 스스로가 말들을 꾸며냈을 것이었다. 다음날 신문을 봤더니 관련기사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후보 선수 알베르토 아코스타(Alberto Acosta)가 했다는 말을 여기 소개한다. "마라도나요? 그가 감격해서 말하는 모습을 봤어요. 저는 그가 곧 최상의 몸 상태를 회복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브라질 감독 카를로스 알베르투 파레이라(Carlos Alberto Parreira)는 마라도나를 '다른 행성에서 온 선수'라고 불렀다. 이 말은 자기팀 스트라이커 카레카(Careca)의 별명인 '다른 세계에서 온 선수'라는 말을 변형한 것이다.
마라도나가 다른 행성에서 왔든 다른 세계에서 왔든 그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삶을 살았다. 시합 전날 그는 아르헨티나축구연맹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그는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세기의 축구 선수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efano)가 더 훌륭한 선수라고 말했다.) 브라질과의 경기는 목요일이었다. 그는 일요일에 있을 세빌랴와 로그로네스(Logrones)의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토요일에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월요일에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수요일에 벌어질 덴마크와의 시합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에 그는 짬을 내어 세빌랴 경영진을 공격했다가 다시 사과했다. 그가 결국에는 다시 코케인에 손을 댄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축구와 정치라! 참 독창적인 주제군요!" 내 책의 주제를 말하자 엔시소(Enciso) 장군이 보인 반응이었다. 장군은 내게 아주 친절했다. 축구와 정치의 관계는 적어도 아르헨티나에서만큼은 독창적인 주제라고 할 수 없다. 그곳에서 축구와 정치는 입자물리학이나 신경학만큼 높이 평가받는 학문 분야이기 때문이다. 1978년 월드컵 대회가 내가 특별히 주목한 대상이다.
주최국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엔시소 장군은 축구팬이 아니다.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이 치러지는 시간에 그는 자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유일한 버스 승객이었음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도 그날 밤은 기억하고 있다.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고 병적으로 흥분한 상태였죠. 온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급진당(Radicals) 사람들이 페론주의자들(Peronists)과 포옹을 했고, 구교도와 신교도, 그리고 유태인들도 서로 얼싸안았죠. 오직 하나의 깃발만이 나부꼈습니다. 아르헨티나 국기말이에요!" 1978년 월드컵과 포클랜드 전쟁[아르헨티나와 영국이 포클랜드 제도와 주변 속령들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선전 포고 없이 벌인 단기간의 전쟁으로 1982년 상반기에 일어났다. 아르헨티나가 완패했다]을 비교해보자. 군중이 언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가득 메웠을까? "바로 맞아요! 정확히 동일합니다!" 장군이 기뻐하며 밝게 미소지었다.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축구야말로 국민적 단결에 유용한 위대한 치료약이므로 돌아가면서 매 년 각 국가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내가 말해보았다. 그가 웃었다. "돈이 너무 많이 들걸요."
FIFA는 1970년대 초반에 아르헨티나에 1978년 월드컵 대회 개최권을 부여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는 정기적인 정치 일정 같은 것이었다. 이 나라에는 재미있는 농담이 하나 있다. 군사학교 옆을 지나갈 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저기 우리 미래의 대통령들께서 훈련받고 계신다." (아프리카에도 똑같은 농담이 있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장군들은 유머라고는 몰랐다. 그들은 엔테 아우타르키코 문디알(Ente Autarquico Mundial)이라는 월드컵 조직 위원회를 새로 구성했다. 그러나 조직위원장 악티스(Actis) 장군이 취임 후 첫 기자회견을 갖기 위해 가다가 저격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군들은 자국 국민에게 '더러운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위험인물'(군부에 의해 광범위하게 정의된 용어)로 분류된 사람들 1만1천 명이 '실종되거나',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비밀리에 살해당했다. 비행기에서 리버 플레이트 경기장으로 떨어뜨려 죽이는 것도 그들이 선호하던 한 방법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역사가이자 영화감독인 오스발도 바이에르(Osvaldo Bayer)와 이 죽음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아버지 나라인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바이에르가 샴페인을 한 병 땄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내 조국에서, 성스런 로마 카톨릭의 나라에서 이런 잔혹 행위가 일어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칠레의 피노체트(Pinochet)는 천사였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을 처형하기만 했으니까요." 바이에르는 영화도 만들었고, 아르헨티나 축구 Fu tbol argentino 라는 책도 썼다.
나는 에베 보나피니(Hebe Bonafini)와도 대화를 했다. 그녀는 엔시소 장군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같은 여성이었다. "월드컵은 말비나스[Malvinas,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클랜드 제도(전쟁)을 말비나스 제도(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과 같았죠. 국기가 휘날렸고, 술을 마셨고,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죠. 모두들 '아르헨티나여, 영원하라'를 외쳤습니다. 군중에게는 한 판의 축제(fiesta)였습니다. 실종되거나 투옥당한 사람이 있는 가족들에게는 비극(tragedia)이었지만 말이예요." 보나피니 여사는 5월광장 어머니회(Mothers of the Plaza de Mayo) 회장이다. 이 단체는 자식들이 '실종된' 어머니들의 모임이다. 아르헨티나는 1983년에 민주정체를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실종자들의 어머니 할머니들께서는 오늘날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에서 목요일마다 집회를 연다.
그들은 살인과 고문 박해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학살의 주모자들인 장군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날에는 십여 명의 어머니회 회원들(Madres)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 있는 한 작은 사무실에 모인다. 표면상으로는 그들의 운동을 취재한 신문 기사들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다지만 사실은 친교와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모임이다. 대다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이들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불유쾌한 사람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제 좀 사라줘 줬으면 하고 바란다.
공장 노동자의 아내였던 보나피니 여사는 아들 두 명을 잃었다. 한 명은 끌려가기 전에 그녀 자신의 집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목욕탕 바닥에 피와 물이 뒤범벅된 광경을 목격하고 놀라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라. 처음에는 그녀에게 축구 얘기를 꺼내는 것이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1970년대에 세계가 아르헨티나의 이 참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이 포악한 장군들은 월드컵 개최를 묘수로 떠올렸다. 아르헨티나가 월드컵(Mundial) 우승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자신들이 국내에서 자행한 만행들도 그 와중에 유야무야 묻혀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당시 아르헨티나는 비델라 장군의 폭압적인 독재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대회의 동맹 불참을 호소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가를 재통합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들은 돈이 없어 월드컵을 치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손으로 그들은 시작했다. 전체 주민 수보다 더 많은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 경기장들이 속속 솟아올랐다. 대회 장소를 잇는 도로도 새로 건설되었다. 통신수단도 개선되었고, 아르헨티나에 처음으로 컬러 TV가 소개되었다.
아르헨티나에는 월드컵을 위한 재원이 따로 없었다. 당연히 다른 곳에서 돈줄을 확보해야 했다. 월드컵과 직접 관련이 없는 중요한 계획들은 폐기되었다. 1978년 2월의 더 타임즈 The Times 기사를 보면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유행하던 말이 "내일(ma ana)이면 나아질 거야"에서 "월드컵(Mundial)이 끝나면 나아질 거야"로 바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괴한 게 월드컵 대회 그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군사정부 통치 기간에 인플레이션율은 1976년 600%에서 1982년 138%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대회 조직위원회(junta)가 내건 슬로건, '2천5백만 아르헨티나인 모두 월드컵에 참여하자'는 곧 '2천5백만 아르헨티나인 모두 월드컵에 돈을 대자'로 널리 퍼졌다. 자금이 얼마나 투입되었는가는 군사정부 시절의 비밀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대회 개막 4개월 전, 그러니까 1978년 2월에 군사정부의 재정 비서 후안 알레만(Juan Alemann)은 최종 경비가 7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액수는 예초 예상치 7천만~1억 달러를 훨씬 능가하는 금액이었다. 위원회가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대회를 유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알레만이 덧붙였다.
7억 달러라는 수치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과거에 열렸던 다른 어떤 월드컵과 비교해보더라도 비용이 7~8배는 더 들어간 것이 된다. 이 수치는 4년 후 열린 스페인 월드컵 개최 비용의 거의 3배다. 그러나 진짜 액수는 7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우선, 부정부패로 빠져나간 액수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비공식적으로 빠져나간 가외 비용은 3~4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통 추산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액수가 빠져나갔을 것이다. 악티스 후임으로 조직위원장직을 맡은 카를로스 라코스테(Carlos Lacoste) 제독--그는 당시 FIFA의 부회장이기도 했다--이 현재 우루과이에서 호사스런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대회 준비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리버 플레이트 스타디움에 깔린 잔디에는 어리석게도 바닷물이 뿌려져 몽땅 죽고 말았다. 새 잔디가 급히 깔렸지만 공의 바운드가 규칙적일 리 없었다.)
거기다 페루에게 제공한 뇌물 비용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2라운드 경기에서 페루와 만났는데, 최소 4대0 이상의 승리를 거두어야만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앨리 머클라우드(Ally MacLeod)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가 이미 발견한 사실이지만 페루는 강팀이었고 그래서 실력으로는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반드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해야만 했다. 당시 페루의 장군들은 언제나처럼 돈이 필요했고 기꺼이 자신의 동료들을 도와주었다. 라코스테가 이 경기 담합을 주도했다. 아르헨티나는 3,5000톤의 무상 곡물을 페루로 선적했고 이 틈에 무기도 같이 보내주었다. 더불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페루에 5천만 달러를 신용대출해주었다. 아르헨티나 감독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Cesar Luis Menotti)가 골키퍼와 후보 선수 모두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아르헨티나는 페루를 6대0으로 누르고 결승전에 안착했다. 이 시합이 아마 월드컵 역사상 뇌물을 주고 승리를 헌납받은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뇌물이 제공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다. 1986년 선데이 타임즈 Sunday Times 에 이 담합 경기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이 날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시합이 있었다.) 그러나 주요 취재원이었던 조직위원회 고위 공무원 한 명과 두 명의 축구협회 직원들은 당연히 익명으로 남기를 희망했다. 기사 작성자 마리아 라우라 아비그놀로(Maria Laura Avignolo)는 '배덕죄'와 다른 법률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리마에서는 월드컵 대회 당시 페루팀 후보 골키퍼였던 만소(Manzo)가 술에 취해서 자기팀이 돈을 받고 게임을 포기해버렸다고 떠들고 다닌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그것으로 경기 담합의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시합은 없다. 페루팀은 평소에 입던 길고 가느다란 대각선 줄무늬 유니폼을 안 입고 흰색 경기복을 착용했다. 또 몇 차례 좋은 득점 기회도 놓쳐버렸다. 미치광이(El Loco)로 알려진 귀화한 아르헨티나인 골키퍼 키로가(Quiroga) 선수는 평소와는 아주 다르게 경기에 임했다. 페루팀 출전선수 명단에는 경험 없는 후보 선수가 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수비수 한 명을 최전방에 배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레이엄 테일러(Graham Taylor)가 경기 내내 납득하기 힘든 선수기용과 전술을 구사했음에도 그에게 곡물을 제공하는 사람은 더이상 없었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머니회 회원들은 모두 그 시합 얘기를 꺼내며 경기 담합의 증거들을 열거했다. "축구 광신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지요." 보나피니 여사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축구 광신자 종교 광신자 정치 광신자들, 광신자들은 언제나 위험한 법이죠."
장군들은 월드컵을 개최해 자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쿠데타 소식만이 단 몇 줄의 기사로 해외에 소개되는 이 나라에 월드컵은 수천 명의 기자들을 불러모을 것이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바꾸는 게 필요하다면 월드컵이야말로 아르헨티나인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메를로(Merlo) 장군이 말했다.
장군들은 뉴욕에 있는 한 홍보회사를 고용했고, 곧이어 국가 전체의 겉치장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면 아르헨티나를 부자 나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빈민가를 없애라. 비야스 미세리아스(villas miserias)로 불도저가 보내졌고, 주민들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지 않는 지방이나 카타마르카[Catamarca, 아르헨티나 북부, 안데스 산록의 척박한 지역]의 황무지로 쫓겨났다. 로사리오[Rosario, 아르헨티나 중부의 도시]로 들어가는 주요도로를 따라 장군들은 벽을 세우고 거기에 멋진 집들의 파사드[fa ade, 박공벽쪽의 건물 정면]를 페인트로 그리게 했다. 도시의 빈민가를 외국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빈곤의 벽'은 오래 서있지 못했다. 빈민가 사람들이 집을 수리하거나 다른 데 쓰려고 야음을 틈타 콘크리트 평판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이 '빈곤의 벽'이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Adolfo Pe rez Esquivel)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것 같다. 아마 조각가에다 전직 건축학 교수이기 때문이리라. 그가 자기 집에서 나에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아르헨티나 민중의 비참과 억압 상태를 가리기 위해 그들은 거대한 무대 배경을 만들었던 겁니다." 안경을 낀 이 비쩍 마른 인물은 198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위원회(junta)의 적이었고, 그래서 1977년에 체포되었다. 그가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월드컵 결승전 하루 전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평판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엔시소 장군이 내게 말했었다.
월드컵 대회 이전에 군사 정부에서 바리도 작전[Operation El Barrido, 바리도는 청소라는 뜻의 스페인어]이라는 걸 수행했다고 페레스 에스키벨이 내게 말해주었다. 영장 없이 무단 침입하여 하루에 최고 200명까지 '제거'하는 게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수상쩍은 사람들이 외국 기자들과 만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월드컵 대회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면서 폭로를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죄수들이 사형당했다. 더불어 비밀 수용소의 일부는 기자들이 찾을 수 없는 외딴 곳으로 옮겨지거나 심지어 군함에 새로 설치되었다. 이 조치들을 그 홍보회사가 권고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군인들이 몬토네로[Montonero, 유격대원이란 뜻으로 투파마로스 계열(투파마로스는 우루과이의 혁명가로 도시 게릴라 전략을 추구했음)의 반정부 무장 단체]의 공격을 막기 위해 거리를 순찰했다. 일부 외국 언론인들은 이 기만적 평화에 속아버렸다. 더 타임즈 의 데이빗 밀러(David Miller) 기자는 대다수 아르헨티나인들은 "솔직히 불행하지도 더이상 억압받고 있지도 않다"고 보도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를 탈출한 영국계 아르헨티나인 기자 앤드류 그레이엄-욜(Andrew Graham-Yooll)은 영국 기자들이 자기 집에 와 아르헨티나가 정말 멋진 나라였다고 이야기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판적인 언론도 있고 알아서 기는 비굴한 언론도 있죠."
비판적 언론이 많았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가 이미 많은 스포츠 기자들에게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에 대한 기초 지식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보도했다. 수백 편의 기사에 히틀러가 주도한 베를린 올림픽이 인용되었다. 독일 TV의 사회자 두 명은 월드컵 개회식 내내 시청자들에게 '사라진 사람들'의 진실을 소개했다. 전세계의 TV 카메라가 5월광장 어머니회의 목요집회를 필름에 담았다. 한 프랑스 기자는 개회식 도중 멀리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대회장 밖에서 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마 그는 리버 플레이트 스타디움 옆에 사격 클럽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실수의 대가를 치러야했다. 아르헨티나 기자들이 프레스 센터에서 그를 폭행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기자들 중에 군사 정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많은 아르헨티나 기자들이 '실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들의 국가를 모욕하는 일은 그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자신도 아르헨티나팀과 그들의 감독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세계 언론에 더 많은 취재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골치 아픈 걱정만 없었더라도 장군들은 이 외국의 위험인물들을 자국 언론을 통제하듯이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방침을 바꾸었다. 그들은 이 외국인들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했고, 멘도사[Mendoza, 아르헨티나에서 포도주로 유명한 고장]까지 데려가 포도주도 맛보게 해주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환대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그들의 사례였던 것이다! 관광객을 끌어모으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예를 들어, 어느 시점에서 전국민의 반이 월드컵을 관전하러 아르헨티나에 가겠다고 했던 스코틀랜드마저 실제로는 4~5백 명밖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월드컵은 장군들에게 결코 쿠데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사 정부의 잔악상을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월드컵의 모든 관객은,
피흘리는 아르헨티나의 증인
몬토네로(Montonero)의 슬로건이었다. 유럽인들은 불현듯 자기들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와 사회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가시철조망에 싸인 축구공이 인쇄된 자동차용 월드컵 스티커를 보았거나 직접 사서 붙였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던 건 월드컵 덕택이지요." 어머니회 회원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점은 그것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외국의 여론을 등에 업고 페레스 에스키벨과 다른 수감자 몇 명이 결승전 전날 석방되었다. "나는 바로 여기 내 집에서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을 지켜볼 수 있었죠." 그가 과거를 행복하게 회상했다. (그가 이후로도 14개월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월드컵은 아르헨티나의 투자와 관광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행사였지만 인권 신장에는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계속 편파 판정을 일삼던 주심 고네야(Gonella)가 마침내 호각을 불어 이 남아메리카에서 개최된 월드컵 결승전의 종료를 선언하자 장군들은 모두 득의만만해졌다. 아르헨티나 국민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함께 춤을 추는 믿을 수 없는 그러나 부인할 수도 없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는 밤이 새도록 들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제지당하지 않고 노래하고 또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1978년에 십대였던 다니엘 로드리게스 시에라(Daniel Rodriguez Sierra)가 내게 한 말이다. "승리의 환희에 도취해 있는 사람들을 TV로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아주 참담했지요." 보나피니 여사의 말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태가 아주 위험스러워 보였답니다." 승리를 축하하지 않으면 네덜란드를 지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머니회는 자기 조국에서 낯선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꼈다.
위원회(junta)는 국민적 열광에 편승하려고 했다. "2천5백만 아르헨티나인 모두가 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아르헨티나는 한 번이 아니라 천 번도 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튼(Eton)교 출신자인 재정 장관 Dr. 마르티네스 데 오이(Marti nez de Hoy)가 식육 가공 도매업자들과 가진 한 점심식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국가 원수 비델라(Videla) 장군 역시 텔레비전 연설에서 비슷한 교훈을 이끌어냈다. 축구는 전국민을 중독시키는 신종 아편 같았다. 당신의 과제에 월드컵을 대입해보라. 그러면 그 과제가 여러분을 알아보고 사랑할 것이다.
정말 그래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바이에르는 아르헨티나 축구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챔피언이다. 그러나 우리의 열광은 진정한 기쁨의 표현이 아니다. 침묵을 강요당해 온 사회의 울분이 폭발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학자이며 언론인인 카를로스 페레이라(Carlos Ferreira)는 자신의 시 <월드컵 Mundial>에서 승리의 감격이 지나가고 난 자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끝이 좋을 리 없었다
불명예스럽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잊고 있던 시체들이 다시 떠오른다
강에서,
공동묘지에서.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망각의 노래를 부르네.
이제 우리 다시 여기 왔도다
북소리와 함께,
땀에 젖은 광란의 깃발과 함께,
세상의 가치가 전도된 채
'사라진 자들'을 잊어버린 건 장군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자신들이 가난하고, 정권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또 세계 챔피언이라면, 당연히 그들은 세계 챔피언인 사실에는 기뻐하겠지만 가난과 정권의 위협에는 분노할 것이다. 아마도 빵과 오락은 모든 국민이 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바이에르가 지적한 것처럼 1978년은 오락거리는 넘쳐났지만 빵은 여전히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팬들은 국가 대표 축구팀과 위원회(junta) 사이에서 어떠한 동질성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선수들에 환호했다. 그리고 비델라 장군이 입장하자 야유를 보냈다. (적어도 일부는 그랬다.) 월드컵 개최 5년 후, 장군들은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만약 그들이 축구에 아르헨티나의 국부를 쏟아부음으로써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본 것이다. 그들이 주최한 월드컵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이 마키아벨리적이기보다는 얼마나 우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교실 뒤쪽에 앉아 선생님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하는 무식한 깡패 학생들이었다.
장군들이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은 단순무식하고도 파시스트적인 것이었다. 국가는 강력하게 통일되어야만 한다.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한 목소리를 낸다면--엔시소 장군의 말처럼, "오직 하나의 깃발, 아르헨티나 국기만이 존재한다면"-- 그 나라는 강력하게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행복한 상태는 승리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일자리와 주택, 안정된 통화를 공급하는 것처럼 지루하고 고된 노력이 따르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이 말하는 승리란 군사적 승리나 위대한 애국주의 행사일 뿐이다. 사람들을 거리로 뛰쳐나와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를 부르게 하는 것이면 그들에게는 무엇이든 다 승리이다. 연속되는 승리의 행진이야말로 장군들의 유일한 정책이었다. 그들이 계획한 가장 큰 승리는 월드컵 대회를 주최하고 거기서 우승하는 것, 그리고 포클랜드 제도 침공이었다. 이 두 계획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정말이다. 그래서 월드컵 노래 <바모스 아르헨티나, 바모스 아 가나르[Vamos Argentina, Vamos a Ganar, 전진! 아르헨티나. 승리를 위해 싸워라]>가 포클랜드 전쟁 기간 중에 다시 울려퍼졌던 것이다. (브라질에도 정확히 이에 상응하는 노래가 있다. '전진, 브라질'이란 의미의 행진곡 <프라 프렌테, 브라질(Pra Frente, Brasil)>이란 노래가 그것이다. 1970년 월드컵을 위해 쓰여진 이 곡은 브라질 군사정부의 주제곡이 되었다.)
"이 장군들은 철부지 같은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레이엄-욜의 말을 더 들어보자. "1982년에 군사적 침공을 단행한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에게 박수를 쳐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어리석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나라 군부는 정치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1920년대부터 '자신들이 명령만 하면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월드컵 대회 때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죠. '자 이 작것들아, 마음껏 즐겨라!' 하고 말이에요. 실제로 그들은 모두가 그러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1978년에 장군들은 겹경사를 만들어볼 요량으로 또 하나의 승리를 계획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비글 해협[Beagle Channel, 남아메리카 남단에 있는 해협.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다윈의 탐험선 '비글'에서 유래한 것이다]에 있는 3개 섬의 영유권을 놓고 칠레와 다투었던 것이다. (두 나라가 그 섬들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면 여러분은 아마 기절초풍할 것이다.) 국제 중재 재판소가 칠레 손을 들어주었다. 아르헨티나도 당연히 그 결정을 거부했다. 긴장이 고조되었고, 마침내 1978년 6월 월드컵 대회가 한창인 가운데 아르헨티나 국방 장관이 그 섬들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월드컵으로 고조된 애국주의를 즉각 전투 행위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파시스트 정부들은 끊임없는 정치 캠페인을 필요로 한다. 군중이 항상 가두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원회(junta)는 시체 운반용 고무가방을 주문했고, 병원들에는 침상을 비워놓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은 막판에 포기되었다. 위원회(junta)는 개전에 찬성했으나 비델라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카톨릭 교회가 중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라틴아메리카에서 카톨릭 교회가 바티칸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1978년 말경 카톨릭 교회는 두 나라를 억지로 화해하게 했다. 위원회(junta)는 새로운 승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2년에 위원회는 칠레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준비한 시체 운반용 가방과 무기를 포클랜드 제도로 보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포클랜드 전쟁은 월드컵 때문에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군부가 1982년 5월 개전과 거의 동시에 영국에 항복해버린 진짜 이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페인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장군들은 대중을 침묵시켰다. 5월광장 어머니회를 제외하고 대중의 자유 발언이나 토론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독재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도 나름의 암호화된 저항이 존재했다. 우리가 1978년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 감독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의 말을 믿는다면 그도 축구 용어를 통해 저항을 표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노티는 마른 키에 코가 컸으며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사리오(Rosario)에서 자랐다. 그곳은 페루인 골키퍼 키로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급진적 정치와 세련된 첨단 축구의 전통이 이 도시를 특징짓고 있다. 메노티는 이 두 가지 전통을 모두 물려받았다. 메노티에게 있어 축구는 하나의 예술이다. 그는 리카르도 비야(Ricardo Villa) 오스발도 아르딜레스(Osvaldo Ardiles) 마리오 켐페스(Mario Kempes) 등 휘하 선수들이 선보인 로사리오 축구(Rosarian football)로 1978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17세 소년 디에고 마라도나에게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메노티는 결승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승리는 예로부터 아르헨티나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경기, 바로 축구에 표하는 경의입니다." 이 말이 바로 암호화된 항의였다.
네덜란드를 격파함으로써 급진주의자들이 장군들의 운명을 구해낸 것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어지자 메노티는 다르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책 속임수 없는 축구 Fu tbol sin trampa 에서 "내 삶을 유린하는" 전제 정치체제와 타협하여 아르헨티나팀을 지도했다며 종종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해야 했단 말인가? "실력도 안 되는 형편없는 팀을 지도하란 말인가? 비신사적 행위와 속임수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팀이나,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팀을 감독하란 말인가? 아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다." 수비 위주의 축구는 마치 독재 체제와 같아서 자유로운 정신을 가두어버린다. 메노티(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대작자(代作者) 카를로스 페레이라)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축구를 함으로써 자기가 이끈 팀이 한때 자유롭고 창조적이었던 아르헨티나 축구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창조적이었던 과거 아르헨티나의 기억을 환기시켰다고.
이런 생각을 비웃기는 쉽다. 메노티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선, 월드컵 우승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는데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장군들의 이익을 위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르딜레스 역시 그가 선수들에게 정확한 원칙을 제시했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 남아메리카인들은 빵에는 신경도 안 쓰고 오직 빵에 바를 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스퍼스(Spurs)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여전히 '속임수'를 썼다. 메노티가 이끈 팀에도 전통적인 푸주한[비신사적이고 거친 플레이를 통해 상대 선수들에게 겁을 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선수]과 심지어는 킬러(Killer)라고 불리는 선수도 몇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페루를 매수했다. 그리고 위원회(junta)의 비밀 지령하에 선수들이 약물 주사를 맞은 것 같다. 한 정보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리오 켐페스와 알베르토 타란티니(Alberto Tarantini)는 페루와 경기를 끝내고도 흥분 상태가 전혀 '가라앉지 않아' 한 시간 이상을 더 뛰고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팀의 잡일 담당원 오캄포(Ocampo)가 관련된 소변 샘플 제출 과정에도 의혹이 많았다. 결승전 후 확인된 결과에 의하면 한 선수가 임신한 걸로 나오는데 이는 분명 다른 제공자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네덜란드팀은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라야 겨우 우승할 수 있는 팀이라고.
메노티에 반대하는 다른 주장으로 장군들 스스로가 그에게 적극적인 공격 축구를 주문했다고 하는 것이 있다. 이런 식의 얘기는 정권 홍보에도 도움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전통적 축구 스타일에 대한 메노티의 강조는 "외래 사상과 공산주의의 영향"을 배척하는 군사정부의 태도와도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였다. 월드컵 대회가 이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그러나 메노티는 진지한 사람이다. 독재적 지배와 카를로스 빌라르도(Carlos Bilardo)에 의해 널리 퍼진 경기 방식이야말로 그에게는 악이었다. 메노티주의(Menottismo)와 빌라르로주의(Bilardismo)는 삶을 대하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다.
빌라르도도 큰 코를 가지고 있다. 그 또한 1986년에 아르헨티나팀을 이끌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메노티와의 유사점은 여기까지이다. 집안도 좋은데다 크리픈[Crippen, 미국 태생의 영국인 치과의사이자 살인자(1861~1910). 아내를 독살하고 정부와 캐나다로 도주중 체포됨. 영국 경찰은 그를 체포하는데 최초로 무선 통신을 이용했다]처럼 실력 있는 의사이기도 한 빌라르도는 에스투디안테(Estudiantes)에서 축구를 했다. 이 팀은 신사적 태도가 전혀 없기로 정평이 나 있는 팀이다. "우리는 맞서 싸울 상대팀 선수 각각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죠. 그들의 습관 성격 약점,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의 사생활까지도요. 이렇게 준비하고 시합에 임해 상대편 선수들을 자극하면 그들은 잔뜩 열받아 퇴장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반발하곤 했죠." 1960년대에 에스투디안테에서 활약했던 또다른 선수 후안 라몬 베론(Juan Ramon Veron)의 말이다. 에스투디안테에 관한 소문은 유럽에까지 퍼졌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남아메리카의 챔피언을 지낸 이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 AC 밀라노(AC Milan), 페예노르트 로테르담(Feyenoord Rotterdam)과 3년 연속 세계클럽컵(World Club Cup) 결승전에서 폭력적 경기로 상대팀의 간담을 서늘케 했기 때문이다. 알프 램지[Alf Ramsey, 잉글랜드팀 감독으로 1966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에게 '야수' 같다는 인상을 심어준 1966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대표팀도 같은 부류였다.
페예노르트의 빔 판 하너겜(Wim van Hanegem)은 빌라르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주 영리한 친구였죠. 체구도 작고 말랐는데 기술은 아주 좋았어요. 야비했냐구요? 맞아요. 그건 사실이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죠. 기분이 좀 나빴던 건 그가 계속해서 침을 뱉었다는 거죠. 난 그건 못 참거든요. 차라리 걷어차이는 게 나한텐 더 나아요." 페예노르트와의 경기에서 빌라르도는 욥 판 댈러(Joop van Daele)의 안경을 부러뜨렸다. 그는 "기억에 없는데요" 하고 말한다. 하도 그런 짓을 많이 해서 정말로 생각이 안 날 듯도 싶다.
새 대표팀 감독에 취임한 Dr. 빌라르도는 아르헨티나를 남성적인 팀으로 탈바꿈시켰다. 아르헨티나는 1986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0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훈련받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들의 플레이는 거리의 갱단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칠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의 아르헨티나팀을 규정하려고 하면 아마도 마라도나의 '신의 손'이 넣은 골이란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런 부정행위야말로 에스투디안테가 늘 써먹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물론 그들은 애써 변명을 하는 수고도 하지 않는다, 마라도나와는 달리. 이것이 빌라르도주의 축구였다. 물론 그는 축구 스타일을 놓고 철학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축구는 그저 축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축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승리라고 생각한다.
메노티는 1990년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아르헨티나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보여준 플레이는 우리 국민의 진짜 성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요."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문학에서, 예술 분야에서, 축구에서 여러분들은 거칠게나마 두 개의 분파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미학을 소중히 하는 집단과 아름다움을 철저히 짓밟는 집단 말입니다. 오늘의 아르헨티나는 막다른 골목에 와버렸다는 느낌입니다."
메노티는 카페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다. 장군들이 다시 군사학교로 무사히 물러나면서 아르헨티나 축구는 이제 더이상 정치적으로 악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1993년 1월 스페인 리그에서 테네리페(Tenerife)와 세비야(Sevilla)가 격돌함으로써 우리는 메노티주의와 빌라르도주의의 한 판 대결을 마지막으로 목격하게 된다.
빌라르도는 당시 세빌랴에 있었는데 거기서 다시 한 번 문제의 팀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착실히 파울을 했다. 경기 도중 TV 카메라에 잡힌 빌라르도의 모습에는 부상당한 상대편 선수를 치료해줬다고 자기팀 물리치료사를 나무라는 장면도 있었다. 세빌랴에는 마라도나와 시메오네(Simeone), 두 명의 아르헨티나 선수가 있었다.
새로운 메노티는 테네리페의 감독 호르헤 발다노(Jorge Valdano)였다. 스페인의 고급 일간지 엘 파이스 El Pai s 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발다노는 빌라르도가 이끄는 1986년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뛰었는데도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다. 테네리페에도 사탄 레돈도(Satan Redondo), 피씨(Pizzi), 데르티시아(Dertycia) 등 세 명의 아르헨티나 선수가 포진하고 있었다.
두 팀이 격돌하게 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기자들이 열일 제쳐놓고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모두가 하이베리 전투[Battle of Highbury, 하이베리는 아스날의 홈경기장으로 아스날과 토튼햄 핫스퍼의 호적수 관계를 영국인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188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Battle of London이라고도 한다] 이후 최악의 경기를 각오하고 있었다. 마라도나 역시 이를 갈며 이 시합을 기다렸다. 그는 언론과의 회견에서 레돈도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여러 해 전에 사탄이 무슨 시험인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국제 친선 경기에 결장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양 팀 모두 빌라르도주의 축구를 벼르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메노티주의와 빌라르도주의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테네리페가 3대0으로 승리했다. 페널티킥을 두 개나 얻어 피씨가 모두 골로 성공시킨 덕분이었다. 이 경기에서 옐로카드가 무려 13장 나왔고 퇴장당한 선수도 3명이나 되었다. 여기엔 피씨와, 레돈도를 퇴장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 마라도나도 끼어 있었다. 빌라르도까지 낀 항의 소동이 벌어졌고, 시메오네와 경찰관들의 충돌은 테네리페시(市)지사가 진상 조사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빌라르도는 발다노를 "흰 장갑을 낀 도둑놈"이라고 비난했다. 발다노도 응수했다. "빌라르도가 대표팀을 이끌고 두 차례나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했는데도 아르헨티나 축구의 공적 제1호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