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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학기 마태복음 제 19 강
마태 9:18-38(9:38)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8)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일을 기록했고, 8,9장은 예수님께서 고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것을 가르치셨겠지만 저자는 이를 산상수훈으로 정리했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셨겠지만 저자는 그 중 열 사람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열 사람 중 여섯 명에 관해 배웠고 오늘은 나머지 넷에 관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나오기 어려웠지만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오늘은 먼저 그들의 믿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고치시면서 백성들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도울 일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8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우리가 제자들에게 주신 이 기도제목의 뜻을 공부하고 가을에 우리도 이 기도제목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너희 믿음대로 되라(18-31)
18-31절에서 예수님은 한 관리와 혈루증 앓던 여인과 한 맹인을 도우십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이 어떠했습니까?
첫째, 한 관리 - 불가능한 것을 믿는 믿음 : 18절을 보면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그러자 예수님은 곧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관리의 집에 가셔서 곡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시며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손을 꼭 잡으시자 소녀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소녀를 살려 주신 것은 아버지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한 마디로 일반적인 관념이나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딸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딸은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딸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내 딸이 방금 죽었으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에게 만일 딸이 있다면 딸이 아무리 큰 병에 걸렸다고 해도 죽기 전에는 뭔가 가능성을 찾기도 하고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딸이 죽어버리면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이 죽기 전에는 기도를 할 수 있지만, 죽어버리면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관리는 달랐습니다. 그의 딸이 죽었지만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죽은 딸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뭔가 가능성이 있어야 예수님께 나가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전혀 가능성이 없을 때,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천민권 목자는 학부시절 논문 공모전에 도전했습니다. 은행 구조조정을 주제로 잡았는데, 금감원에 계신 최아브라함 목자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이 구할 수 없는 좋은 자료들을 많이 구했습니다. 논문을 쓸 때 좋은 자료를 모으는 일이 상당히 중요한데, 좋은 자료를 구했으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목자님에게 마지막 검토를 받을 때 아브라함 목자님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볼 때 이번 논문은 제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건 논문이 아니라 자료 뭉치에 불과합니다. 그냥 좋은 경험했다 생각하고 다음 기회에 도전하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선배요 그 분야의 전문가가 한 말이었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천민권 목자는 괜히 망신만 당하느니 그만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3일을 남기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가능성이 없지만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자료 뭉치를 논문으로 만들고자 궁리했고, 그때 SWOT분석이라는 매우 단순한 도구를 통해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소박한 접근이어서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의외로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석박사 과정의 사람들이 수상했고 학부학생은 2명이 선발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것입니다. 천민권 목자는 처음에 좋은 자료를 의지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듣고 도전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가능성 있는 일을 해야 성공 한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 가능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입니다. 사람이 늘 가능한 일만 하려하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가 됩니다. 그래서 가능성으로만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그러다 피리불고 떠드는 자들처럼 믿음의 분위기를 망치거나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의 방해꾼이 됩니다. 믿음이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믿는 것입니다.
봄 학기 돕다가 관계성이 소원해진 양들이 있습니다. 또 한동안 돕다 관계성이 끊어진 양들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가능성 없다며 부정적이 되거나 단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찌할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그럴수록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봄 학기 좋은 성적을 받아 자신감이 붙은 사람도 있지만 봄 학기에 학점을 망친 사람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좋은 성적 받은 사람이 2학기에 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든 일을 믿음을 배우는 기회로 삼고 도전한다면 가능성 없던 사람에게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혈루증 앓던 여인 - 방법과 형식을 초월한 믿음 : 예수님께서 한 관리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그 여자는 속으로 “내가 그의 옷을 만지기 만하면 낫게 될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혈루증은 부인병의 일종으로 하혈을 하는 힘든 병입니다. 이 여자는 12년 동안 이 병 때문에 시달렸습니다. 마가복음 보면 이 여인은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지만 낫지 못하고 고생만 했습니다(막5:26).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다 썼지만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을 하시자 즉시 여인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여인의 피가 그쳤고 여인을 괴롭히던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사 그녀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떠합니까? 한마디로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입니다. 앞에 나온 한 관리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살아 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또 예수님께 나와서 엎드려 절하며 구하였습니다. 관리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나 하인을 위해 나온 백부장 등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요청함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남들처럼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릴 수 없었습니다. 다만 조용히 예수님의 뒤에 와서 그 겉옷 끄트머리를 만졌습니다.
여인이 왜 이처럼 몰래 나와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이 여인이 율법에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있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에 걸리면 그가 앉았던 자리도 부정하게 되고 거기에 접촉 한 사람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손을 씻지 않고 누구든지 만지면 그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레 15:11). 그러니 이 여인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오는 것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럽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창조적인 방법으로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가만히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속으로 믿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통념을 뛰어 넘었습니다.
사람들은 일하는 방법이나 형식을 중시합니다. 전화한통도 예의 있게 하길 바라고, 중요한 일일수록 방법이나 절차를 더 많이 따집니다. 사람들은 방법이나 형식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중시합니다. 방법과 형식에 문제가 있어도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믿음에 민감하십니다. 방법이나 형식이 서툴고 잘못되어도 믿음으로 나오면 아시고 즉각 반응하십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예수님께 몰래 나왔고 게다가 율법까지 어기며 나왔기에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그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그녀의 불안한 마음에 평안을 주셨고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녀를 죄의식과 혈루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중요한 일일수록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해야 하고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일하는 방법과 절차를 따지며 논쟁하고 싸웁니다. 사람이 믿음을 배우려 하면 마음도 하나 되고 방법이나 형식에 자유합니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방법과 절차만 따지다보면 언쟁하는 목소리만 높아지고 문제는 점점 커집니다. 예수님 바로 옆에서 떠들고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군중들로 전락합니다. 우리가 간절한 심정으로 믿음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맹인들 - 말씀을 믿는 믿음 : 26절을 보면 예수님이 방금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2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실 때 맹인 둘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맹인들은 거기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자 그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이 맹인들이 가진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삼하7:12). 다른 사람들은 병 잘 고치는 예수님, 귀신 잘 나가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그리스도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한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저자인 마태가 5-9장에 가르치고 고치신 일을 기록하며 결론적으로 말하고 진리가 바로 이것 -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진리가 이 소경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고백되었습니다. 요즘 한창 주목 받는 올림픽 경기에 비유하자면 그들의 믿음은 그야말로 금메달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믿음을 가지는 일도 중요합니다. 요14:11b을 보면 예수님께서 믿음 없는 빌립을 도우실 때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하는 일을 기초로 예수님을 믿는 일은 믿음의 초보단계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계속 행하는 일을 보고 믿음을 가지려하면 믿음이나 인격이 자라지 못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표적신앙이나 무당신앙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 가지는 일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맹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믿음의 고백을 다시 듣고 싶으셨는지, 아니면 그들의 믿음의 고백을 좀 더 견고하게 해주시길 원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기억했기에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우리는 어제 스데반 선교사님의 볼리비아 선교보고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속역사를 처음 시작하실 때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셨듯이 볼리비아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도 한 사람의 아브라함 - 아브라함 에릭 목자를 먼저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에릭 목자를 세우실 때 그에게 창세기 12:1-3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의 아내 잉그리드 목자는 사명인의 삶의 걸림돌 같았고, 사랑하는 큰 아들은 장애아였습니다. 그는 운명적이 되기 쉬웠지만 창세기 12:1-3절을 받았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을 때 그는 모든 운명조건을 극복하였고 그 말씀대로 볼리비아의 믿음의 조상으로 섰습니다. 그에게 많은 부족함이 있었지만 그에게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섰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초라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지라도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란 말씀을 믿으면 존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벧전2:9). 우리가 지금은 경기대의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로 쩔쩔매고 있을 지라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믿으면 우리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행1:8). 말씀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자라가게 하고 큰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조스데반 선교사님은 가난한 볼리비아에서 많은 수치를 당했지만 히12:2말씀을 믿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는 부끄러움 때문에 장사도 못하고, 제자양성도 못하고 슬퍼하며 옷가게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었을 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이제 그 말씀대로 장차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주셨던 연요절 말씀을 다시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2.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32-38)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던 그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하자 무리들은 놀라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비방했습니다. 행하는 일을 보고 믿음을 가져도 부족한데 행하는 일을 보고도 비방하는 그들은 구제불능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어야 할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도 못했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 마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쳐주신 일 열 가지를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맹인들을 고쳐주신 아홉 번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하고 한 단락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예수님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합니다. 36절을 봅시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셨고 많은 무리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제를 가난이나 질병문제로 진단하지 않았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한다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제를 목자 없는 문제로 진단하셨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문제가 많습니다. 쇠고기 문제, 독도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경기는 하락하는데 물가는 폭등하니 생활고에 허덕입니다.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고생하고 사교육에 밀린 공교육이 기진한 상태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에너지 문제, 환경문제가 심각합니다. 정치적인 갈등과 분쟁이 극심해 전쟁하는 곳이 늘어납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보면서 골치가 아프고 우울해 집니다. 뭔가 시원한 해답이 있을까 싶어 시사프로그램이나 신문을 보며 소위 전문가들의 해법에 관심을 기울여보지만 진단도 해법도 시원치 않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의 진단을 믿고 따라야 할지 참 고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시대의 문제를 목자 없는 문제로 보시고 목자가 있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37,38절을 보면 문제 많은 세상을 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은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다 자라 추수하게 된 곡식들이 세상에 가득하고 곡식을 추수하여 주인에게 드릴 일꾼이 없습니다. 추수할 곡식을 제 때 추수하지 않으면 썩거나 병들어 못쓰게 된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인은 1년 농사를 망치고 모든 손해를 보아야 하니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농부의 마음 같고, 또 세상은 추수할 사람이 없는 곡식 같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몰려오던 예수님 시대에나 합당한 말씀 같습니다. 또 한국교회와 UBF가 한창 부흥하던 70,80년대에나 합당한 말씀 같습니다. 어제 최요한 선교사가 강의한대로 지금은 추수할 때가 아니라 객토 하여 씨를 뿌릴 때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여전히 세상은 추수할 곡식이 많고 일꾼이 부족합니다.
어제 선교보고를 들었던 볼리비아 같은 제3세계 국가에는 한 두가정이 30~40명, 때론 100명 넘는 양들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수도권에는 교회가 많으나 김태헌 목자의 어머니가 계신 진도에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많아도 정작 양들을 인도해줄 참 목자는 적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가족들이나 친구들 중에도 목자 없이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이 있고, 캠퍼스에도 방향이 없고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고생하고 기진한 양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낫을 대기만 하면 바로 쓰러질 양들을 기대하거나 뙤약볕에 나가 고생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그렇지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여전히 추수할 곡식이 많습니다.
선교사들로부터 이런 간증을 종종 들었습니다. 처음 선교지에 나아갈 때 희어져 추수하게 될 밭을 생각하면서 선교지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가서 양들을 만나보면 그들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현지사정도 모르는 선교사들을 무시합니다. 그때 선교지는 아직 땅도 일구지 않고 씨도 뿌리지 않은 황량한 들판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꾸준히 캠퍼스에 나아가 양들을 가르치고 고치려 씨름했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예수님의 눈으로 양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볼리비아의 빠울리나 조 선교사님은 가브리엘 의대개척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캠퍼스를 심방했고, 홍콩의 안젤리나 선교사님도 하루도 쉬지 않고 2년을 캠퍼스에서 기도했다 합니다. 그러다보니 양들에 대한 상한 마음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였고 또 예수님의 눈으로 양들을 볼 수 있었다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수많은 병자들을 가르치고 고치신 후에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겼고 추수하게 될 밭과 같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경기대를 개척한지 2년이 거의 되어갑니다. 자주 캠퍼스에 올랐고 양들을 가르쳐주고 고쳐주려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 눈을 뜨게 하셔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고, 추수하게 될 밭과 같음을 보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맺는 말 : 제자들에게 기도부탁 하신 예수님
추수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은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할 때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들과 세상을 볼 수 있고,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실 것입니다. 경기대에도 추수할 일꾼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며 가을학기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올해 7명의 추수할 일꾼을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