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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P / 자전거와 교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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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건강이야기 스크랩 헌릉 탐방기
난계 추천 0 조회 47 14.03.14 07: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4년 3월 4일 (화) 촬영

 

 

조선의 3대왕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입니다.

 

 

 

 

 

 

헌릉은 조선 전기의 왕릉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능이지요. 고려시대의 능제를 기본으로 조성

했다는 헌릉의 시원은 실은 신라시대의 33대 왕 성덕왕릉입니다.성덕왕이 죽자 그의 아들 효성 

왕은 부왕의 공덕과 명복을 기리기 위해 봉덕사를 세웠고 효성왕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 경덕왕

 은 구리 12만근을 들여 속칭 "에밀레 종"이라고 하는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다 사망 합니다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의 뒤를 이은 36대왕 혜공왕이 30년이나 걸려 완성하지요. 되돌아 갑니다

   경덕왕때는 불국사를 세우고 석굴암을 창안 하는등,생동감 있는 조각 양식이 크게 발달했던 시기 

 였습니다.선왕인 성덕왕의 릉도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었지요. 호석을 두르고 난간석을 만들고   

  12지신상도 세웠습니다. 이후 성덕왕릉은 신라 왕릉의 규범이 됐을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시대  

 까지도 왕릉 양식의 시원이 됐다고 합니다.                                                                      

 

 

 

 

헌릉의 정자각입니다. 다른 능보다 장중해 보이는군요. 세월의 무게 때문일까요?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망료위입니다.

 

 

 

 

 

 망료위는 예감이나 소전대와 같이 축문을 태우는 시설입니다. 태조의 건원릉과 이 곳 에만 

 있습니다. 최근 정릉(신덕왕후 강씨)에서도 망료위가 발굴 되였다고 하네요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땅 속으로 묻혀서 그럴까요? 한 단밖에 없는게 참 앙증 맞습니다

 

 

 

 

 

정자각과 사초지 사이의 신도입니다.

 

 

 

 

 

태종의 신도비입니다, 신도비는 조선 초기의 네 임금 능에만 세웠습니다. 그중 그대로 있는 곳은

태조의 건원릉과 이곳 헌릉 뿐입니다. 세종의 것은 나중에 발견되여 세종문화연구소에 있습니다

 

 

 

 

 

태종의 신도비는 임진왜란시 파괴되여 비신이 깨지고 받침돌도 사진처럼 훼손 됐습니다.

그래서 1695년(숙종21)에 새로 또 세웠습니다. 비각 안에는 두기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능상 하계에서 본 정자각과 비각의 모습입니다.

 

 

 

 

 

중계에 앉아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팔각의 장명등 지붕이 꽃 봉오리 처럼 가파르네요. 조선 전기 능의 장명등의 양식입니다.

후기로 가면서 장명등 지붕은 활짝 피여 있는 꽃처럼 각도가 넓어집니다.                                   

 

 

 

 

헌릉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두쌍씩 있습니다. 다른 릉에는 한쌍 뿐이지요 조선 왕릉중

   제일 규모가 큰 왕릉입니다. 그러나 문무인석이 제일 크다는 것은 아닙니다.                         

철종의 예릉이나 장경왕후의 희능은 문무인석의 높이가 3미터가 넘습니다.                        

 

 

 

 

헌릉은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입니다. 중기 부터는 고석이 4개가 됩니다.

 

 

 

 

 

쌍릉으로 조성된 헌릉은 병풍석,난간석,혼유석,장명등,등을 왕과 왕비능에 따로 만들었습니다.

후기로 가면서는 쌍릉이라도 단릉처럼 혼유석,장명등,등을  한개만 세웠습니다.                    

 

 

 

 

 

 

 

 

 

 

 

 

 

 

 

 

헌릉 능 앞에 있는 판석입니다. 임금이 능에 올라 왔을 경우 예를 올리던 곳입니다.

 

 

 

 

 

헌릉은 상계,중계,하계로 구분되여 있습니다. 옆의 조선 후기의 인릉은 중계가 없어졌죠.

 

 

 

 

 

해설사 경흥호님입니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구성한 돌의 명칭입니다.

 

 

 

 

 

두 능은 난간석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능의 면석과

 

 

 

 

 

우석엔 불교의 색채가 있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태종의 혼유석 뒤 하전석에는 네모난 홈이 파여저 있는데 이 홈속에 고여 있는 물을 태종우라고

 합니다. 오늘도 이 곳에 물이 고여 있네요. 가뭄 중 인데도 말이예요. 태종은 승하시 가뭄에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죽으면 비를 내려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 후로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10일    

     전,후 에는 꼭 비가 내렸다는데 백성들은 이때 오는 비를 태종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면석의 인물들이 쓴 관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이 새겨 있습니다.

 

 

 

 

 

우석에는 방울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요.

 

 

 

 

 

모두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양입니다.

 

 

 

 

 

 

 

 

 

 

 

인석 끝에는(해바라기) 문양을 새겼습니다.

 

 

 

 

 

다른 인석에도 같은 꽃을 새겼지만 오랜 풍파에 다 닳아 보이지 않는군요.

 

 

 

 

 

세월의 무상함을 봅니다.

 

 

 

 

 

왕이 되기 위해,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권의 지속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았은

 

 

 

 

 

태종은 지금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지금도 자신이 한 일이 최선이였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궁굼하군요.

 

 

 

 

 

 

 

 

 

 

 

망주석의 세호입니다.

 

 

 

 

 

태종의 혼령도 저 세호를 통해 세상 구경을 했겠죠.

 

 

 

 

 

 

 

 

 

 

 

초기의 세호는 나무 토막 같다고

 

 

 

 

 

어루만저 보는 님.

 

 

 

 

 

헌릉 탐방을 마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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