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