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캄보디아 교전사태의 이해 (하)
캄보디아여, 이것은 진검승부이다
저자 : 크메르의 세계 연구부
서부전선으로 모여드는 캄보디아의 별들
1월25일, 태국의 극우 왕당파 "옐로우셔츠"(PAD) 세력이 캄보디아 국경문제를 이슈로 정부를 압박하는 시위에 나서면서, 캄보디아-태국 국경에서 긴장이 고조됐다. 이러한 국면전환의 배경에는 태국 여당 국회의원 1명을 포함한 PAD 지지자 7명이, 국경에서 캄보디아 당국에 체포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들 태국인 7명은 작년 12월29일 사깨오(Sa Kaeo) 도의 캄보디아 접경지역에서 양국 국경상황에 대한 조사활동을 벌이다, 불법잠입 혐의로 캄보디아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프놈펜으로 압송됐다. 국회의원 1명을 포함하여 5명은 지난 1월21일 불법잠입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선고와 동시에 집행유예를 통해 석방됐다. 하지만 PAD 내에서도 강경파에 속하는 "태국 애국 네트워크"(TPN)의 지도자인 위라 솜꽘낏(Veera Somkwamkid) 변호사와 그의 비서는 간첩혐의가 추가되면서, 각각 징역 8년 및 6년형을 선고받고 프놈펜의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PAD의 방콕 시위로 국경에서 긴장이 고조되어 갈 때, 크메르어 신문 <캄보디아 익스프레스 뉴스>(CEN)는 1월28일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 태국어-파위한) 근처에서 촬영한 사진 1장을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캄보디아 훈센(Hun Sen) 총리의 장남으로 지난 1월 초 육군 소장으로 승진한 훈 마넷(Hun Manet: 1977년생) 소장이 국경 지역 주요 지휘관들과 작전회의를 갖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더구나 여기에는 훈센 총리의 3남인 훈 마니(Hun Mani: 1982년생) 대령도 함께 하여, 이번 국경갈등에 대응하는 캄보디아 측의 태도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서 이뤄짐을 짐작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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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EN) 1월28일에 촬영된 이 사진에서, 캄보디아 군 지휘관들이 최전방의 지휘소에서 작전지도를 검토하고 있다. 좌로부터 훈센 총리의 3남인 훈 마니 대령, 훈센 총리 장남인 훈 마넷 소장, "왕립 캄보디아 군 총사령부"(RCAF) 부사령관 찌어 다라 대장, 켕 소멧 장군, RCAF 예하 제3사단장 스레이 도엑 소장. |
캄보디아 군에서 평소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의 군사적 상황을 감독하는 임무는 "합참본부"와 유사한 "왕립 캄보디아군 총사령부"(RCAF)가 담당한다. 따라서 여기에 상비군으로 배치된 병력들도 "왕립 캄보디아 육군본부" 예하 부대들이 아니라, 군총사령부 직할의 국경수비대 혹은 특수부대가 맡고 있다. 그럴 경우 총사령부의 부사령관들 중 찌어 다라(Chea Dara) 대장과 제3사단장 스레이 도엑(Srei Doek 혹은 Srey Doek) 소장, 그리고 작년에 창설되어 "제8여단"으로 불리다 최근에 개칭한 제43여단장 유임 핌(Yim Phim) 준장 라인이 의사결정 라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태국군과의 협상창구도 이들이 담당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캄보디아 군대의 의사결정은 평소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왕립 태국육군"(RTA)은 전국을 4개 군구로 나누고 각 군구마다 2~5개 사단을 두고 있다. 각 군구는 1개 보병사단과 1개 전개사단을 필수로 갖추고 있고, 지역에 따라 기갑사단이 배치된 곳도 존재한다. "쁘레아위히어 사원"이 위치한 시사껫(Sisaket) 도의 경우, 북동부 지방을 관할하는 "제2군구"가 담당하고 있다. 이번 교전사태에서 태국군의 모든 지휘권은 제2군구 사령관인 타왓차이 사뭇사콘(Thawatchai Samutsakhon) 중장이 일관되게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군사예비사관학교"(육,해,공,경찰을 위한 고교과정) 동기생(12기)이자 상관인 육군사령관 빠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대장과 밀접하게 공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4일 첫 교전이 있은 직후 가진 2월5일의 휴전협상 자리에서, 태국 측 타왓차이 사령관의 상대자는 캄보디아 육군본부 예하 제4군구 사령관인 찌어 몬(Chea Morn) 중장이었다. 이는 통상적으로 참여했던 찌어 다라 - 스레이 도엑 - 유임 핌 라인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캄보디아 육군은 전국을 6개 군구로 나누고, 각 군구마다 1개 주둔사단을 두고 있다. 제4군구는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있는 시엠립(Siem Riap)에 본부를 두고, 쁘레아 위히어(Preah Vihear) 도와 웃더 미언쩌이(Oddar Meanchey) 도 등 북부지방을 관할한다.
이 협상에서 양국 지휘관들은 휴전에 합의했고, 캄보디아는 포로로 잡았던 태국의 민병 공수부대 "타한판" 소속 병사 4명을 인도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다시금 1박2일 간의 치열한 교전이 발생했다. <방콕포스트>의 2월8일자 보도에 따르면, 태국군 지휘관들은 당시의 휴전협상 결과가 캄보디아의 야전부대들에게 충분히 숙지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돌발상황이 훈센 총리 장남인 훈 마넷 소장 때문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다시 말해 첫날의 포격전에서 캄보디아 병력의 피해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훈 마넷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재차 도발했다고 보는 것이다. 태국군 소식통들은 그 근거로서 전선 지역의 무선교신 감청내용을 들고 있다. 캄보디아 군의 무선교신에서 훈 마넷이 병력에게 지시를 내리는 통화내용이 포착됐다는 것이다. 당시 태국군은 일시적으로 훈 마넷이 부상했을 것으로 추정했었다고 한다. 태국군 소식통들은 캄보디아에게 있어서 이번 전쟁은 "훈 마넷 영웅만들기"의 무대가 될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뒷받침해주기라도 하듯이, 최전방의 캄보디아 군 병력의 배치는 과거와 비교하여 이례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 "쁘레아위히어 사원" 배후 27 km 지점에 위치한 삼 엠(Sam Em) 마을은, 캄보디아 병력에게 있어서 주요한 배후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2월9일, 캄보디아 국회대표단이 이곳의 주둔병력을 위문차 방문했다. 여기에는 심지어 훈센 정권을 독재정권이라며 비난하던 제1야당 "삼랑시당"(SRP)의 중진의원들도 참가했다. 훈센 총리 역시 프놈펜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일치단결하여 정부와 군대를 지지해준 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이날 삼엠 마을에서 국회의원들을 맞이한 사람은 "훈센 총리 경호부대"(PMBU) 사령관(=경호실장)인 힝 분히엉(Hing Bunheang) 대장이었다. 경호부대 사령관은 군총사령부의 당연직 부사령관 중 1인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총리의 신변안전에 관한 최고 책임자가 병력을 이끌고 전방에 나온 것이다. 힝 분히엉 사령관이 전방에 모습을 보인 것은 최소 2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캄보디아가 이번 대치상태를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캄보디아가 거의 모든 기동전력을 전방으로 배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캄보디아 군대는 총병력이 7만5천~10만5천명 정도로 추정되는데(유령 군적자들이 남아 있다는 점 감안), 2,500~3,000명 정도로 구성되는 여단형 군구 사단들은 지역방어를 담당한다. 따라서 유사시 이동배치 가능한 전력은 대부분 여단급의 특수부대들이다. 훈센 총리 경호부대는 총 4,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이뤄져 있고, 그 중 2,000~3,000명 정도가 여단급 특수부대 편성을 가질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역시 총리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2,000명 규모의 "70여단"도 경호부대의 외곽조직으로 볼 수 있는데, 전선에 배치된 징후가 보이고 있다.
캄보디아 군부에서 군총사령부 참모장(부사령관 겸직) 꾼 낌(Kun Kim) 대장- 경호부대 사령관 힝 분히엉 대장 - 70여단장 마오 소판(Mao Sophann) 소장 라인은 훈센 총리의 경호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인맥이다. 훈 마넷은 작년부터 총리 경호부대 부사령관도 맡고 있다.
한편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사진들을 분석해보면, 현재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에는 "캄보디아 왕립 헌병" 소속 특수부대들도 보이고 있다. 캄보디아 왕립헌병은 총 7천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며, 전국 각 시도별로 지부를 두고 있다. 또한 법률이 부여한 권한에 의거하여, 경찰과 동일하게 민간인들에 대한 민, 형사상의 사법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정권안보형 군사조직이다. 캄보디아 축구협회장도 맡고 있는 왕립헌병 사령관 사오 소카(Sao Sokha) 중장 역시 훈센 총리가 상당히 신임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고, 그 역시 군총사령부의 당연직 부사령관이기도 하다.
왕립 헌병 병력 중 약 2,000명 정도는 여단급 특수부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왕립 헌병 소속 특수부대가 전선에 배치된 것 역시 캄보디아가 이 전투에 상당한 군사적,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 최강의 붉은 베레들인 "911 공수여단" 역시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전편에서, 현재 태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번 대치국면이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 군의 배치상황과 그 지휘관들의 면면을 보면, 캄보디아 역시 이 전장에서 쉽게 발을 뺄 수 없다는 상황판단 하에 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원래 이번 대치국면은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바였고, 미처 예상치 못한 궤도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캄보디아 역시 이번 사태가 정권안보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안으로 변해버렸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태국군의 군사적 배치상황에 관해 새로운 보고들이 들어오고 있다. <방콕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빠윳 짠오차 태국육군 사령관이, 내각에서 "쁘레아위히어 전쟁터"(Preah Vihear battlefield)라고 작전명을 부여한 계획에 서명했다고 한다. 이 작전계획은 총 병력 23,641명을 쁘레아위히어 사원이 있는 시사껫 도 뿐만 아니라, 사깨오(Sa Kaeo) 도, 수린(Surin) 도, 우본 라차타니(Ubon Ratchathani) 도 등 태국 북동부 전역의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배치하는 것이다. 이제 캄보디아와 태국은 이번 국경분쟁에 자신들이 가용한 신속배치군(Task Force) 전력 중 거의 모두를 동원하고 있다.
완성에 다가간 훈센 독재의 로드맵
"2008년 7월 27일 총선"에서, 훈센 총리가 이끄는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전체 123석 중 90석을 차지하는 기록적 승리를 얻었다. 이미 이 선거에서 집권 CPP의 승리가 예상됐긴 했지만, 추후에 들어온 보고들은 CPP가 상당한 관권, 금권선거를 저질렀고, 야권에 대한 사법적 협박 및 물리적 공격까지 가했다는 증언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어찌됐든 이 선거를 통해, 훈센 총리는 1993년 총선 이후 오랜 기간 이어졌던 "푼신펙당"(FUNCINFEC)과의 연립정권 체체를 끝내고, CPP 단독으로 정부구성이 가능한 권력집중을 이뤄냈다. 그러나 "1997년의 유혈 쿠테타"를 통해, 훈센 정권은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의 장남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i) 왕자가 이끈 푼신펙당에 대해 실질적 우위는 이미 점하고 있었다. 당시의 쿠테타는 훈센 정권에게 군부권력의 독점을 안겨다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정적이고도 핵심적 기반은 2008년 총선 이전에도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2008년의 총선 승리는 이러한 내용적 권력집중에 제도 및 형식적 측면의 완결성을 부여해준 통과의례였을 뿐이다. 훈센은 전형적인 군벌형 정치인으로 원래 군사적 재능이 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만의 하나 선거에서 패한다면 반드시 총구를 들이대고서라도 되찾아 올 인물이며, 그에게는 그것을 실현시킬 거의 사병화된 군사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8년 총선의 승리는 이 무자비한 군벌에게 신사적 외양만 선사한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법, 문화와 사회 등 캄보디아의 모든 부문에 걸쳐 그의 CPP에 합법적인 독점권을 부여한 사건이었다.
이후 2009년에 들어오면서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권력집중의 폐해들이 표면화됐다. 캄보디아 여성인권 분야의 헌신적 운동가인 무 소쿠(Mu Sochua) 여사나, 제1야당 "삼랑시당"(SRP) 총재 삼 랑시(Sam Rainsy) 의원 같은 야당 인사들에 대해서는 명예훼손과 비방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 등의 혐의를 씌워, 집권당만의 투표를 통해 의원면책 특권을 박탈시켰고, 이후 벌금형과 같은 사법적 유죄판결을 통해 활동범위를 옥죘다. 또한 비판적인 언론인들과 변호사 등에 대해서는 징역형을 부과하고, 심한 경우엔 청부살인의 사례도 보고되어 있다. 물론 야당 소속의 지방의 하급 당직자들에 대해 물리적 폭력이 행사됐다는 보고들은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훈센 정권은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캄보디아의 야당 및 시민사회를 압박해나갔다.
반면 기존의 권력 동업자였던 왕당파 "푼신펙당"을 또다시 연립정권이란 명목으로 품에 안으면서, 기존에 "푼신펙당"이 갖고 있던 해외 및 지식층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까지 흡수해나갔다.
이러한 흐름은 2010년에도 이어졌고, 그 강도는 더욱 노골적인 것이었다. 베트남과의 국경선 확정 작업에서 캄보디아가 무리한 양보를 했다고 폭로했던 SRP의 삼 랑시 총재는 결국 해외 망명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견제세력의 부재로 인한 폐해는 2010년 한해를 줄곧 달구었던 주제였다. 토지나 부동산 개발사업들에 있어서 강자들이 행하는 토지수탈과 강제철거는, 힘없는 빈곤층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퇴역군인들 등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다. 또한 마약상용자 수용소 등에서 발생하는 인권유린 사례와 강간피해자들의 증가 및 그 보호조치의 미흡 등 부정부패와 관련된 부조리들도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온 한해였다.
훈센의 입장에서 보자면, 2009-2010년 사이의 야당 및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제 당분간은 CPP 외부에서 정권안보를 위협할만한 의미있는 규모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여당인 CPP 자체가 국가권력의 독점체인 동시에 불안의 진원지도 될 수 있는 것이다.
2010년 연말부터 오랜 논란 끝에 선포했던 <부패방지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법률에 따라 설치된 "부패방지단"(ACU)은 11월에 지방법원 검사 1명을 독직 혐의로 체포했다. 이 정도 직책의 인물이 정치적 사안이 아닌 문제로 체포된다는 것은,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에서 180개 국가 중 158위(2009년) 수준인 이전의 캄보디아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던 일이다. 훈센 총리의 측근 자문위원이었던 옴 옌띠엥(Om Yentieng) 변호사가 이끄는 ACU는 지난 2개월 사이에 훈센 정권의 새로운 실세조직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2011년 1월에 들어와서, ACU는 태국 국경 지방인 번띠 미언쩌이(Banteay Meanchey) 도 지방경찰청장 훈 히언(Hun Hean)과 부청장 치엉 손(Chheang Son), "국가 마약단속국"(NACD) 사무총장 모엑 다라(Moek Dara), 내무부 마약단속국장 찌어 렝(Chea Leng) 같은 거물들을 일시에 체포했다. 이들이 체포된 것은 마약거래의 뒤를 봐준 혐의였다.
하지만 <미국의 소리>(VOA) 크메르어판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에 대해, 구속된 인사들이 주로 찌어 심(Chea Sim) 상원의장(당서열 1위) 및 그 처남인 사켕(Sar Kheng) 내무부장관(당서열 4위)과 친분이 있던 인물들이란 점에서, 훈센 총리(당서열 2위)가 CPP 내부의 권력투쟁에 돌입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추측을 하기엔 아직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캄보디아 정부의 이러한 변화는, 금년 1월3일 훈센 총리의 장남 훈 마넷이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는 것과 때를 같이 했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 승진을 두고 향후의 캄보디아 권력의 향방을 사색케 해준다고 논평했다. 다시 말해 캄보디아가 부자세습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란 말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훈 마넷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사 켕 내무부장관의 아들인 사 소카(Sar Sokha)도 1월 20일 "프놈펜 광역경찰청" 부청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이들보다 다소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호 남홍(Hor Namhong) 외무부장관의 장남 호 남보라(Hor Nambora: 1954년생으로 추정) 주영 캄보디아 대사 같은 이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아버지 직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선임장관을 맡고 있는 쩜 쁘라싯(Cham Prasidh) 전 상무부장관의 가문도 이와 유사한 방식의 인사배치를 통해 동일한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캄보디아 출신의 정치 만평가인 사끄라와(Sacrava) 화백은, 이러한 장관들 집안은 "장관직 그 자체가 가업인 가문들"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캄보디아 사회는 최근 세대교체에 가속을 밟기 시작했다. 훈 마넷의 여동생으로 훈센 총리의 장녀인 훈 마나(Hun Mana: 1980년생)는 나이에 비해 결코 짧지 않은 비지니스 경력을 갖고 있다. 그녀는 훈센 부부가 소유한 "바이욘TV"(Bayon TV)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얼마 전에는 주요 신문사도 인수한 캄보디아 언론계의 거물이다. 그 외에도 캄보디아에는 이미 "CPP 가족들"이라 부를만한 독특한 상류층이 형성되어 있다. 훈 마넷의 육군소장 진급은 캄보디아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흐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훈센 총리가 그의 진급시기를 금년 초로 잡은 것은, 제반 상황의 안정에 대한 정치적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CPP: 공산당에서 상인연합회로
"킬링필드"로 유명한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은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캄보디아에 공산정권(국명: 민주 캄푸치아)을 출현시켰다. 크메르루즈 정권은 이념적으로 원시 농업사회를 지향하는 극단적 마오이스트들이었지만, 동시에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기도 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 크메르인들의 거주지였던 메콩 강 하류지역을 서서히 잠식하여, 기필코 자국 영토로 만든 베트남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히 큰 정권이었다.
캄보디아 및 라오스의 공산주의 운동은 원래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이 주도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 속에는 친-베트남 성향의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크메르루즈는 한편으로는 당내의 친-베트남계를 숙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남부 접경지역을 군사적으로 자주 침범했다. 이들은 베트남에 대해 대단히 호전적이었고, 현실적인 군사적 고려도 별로 하지 않은 채 현지의 베트남인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78년 12월 25일, 공산 베트남은 12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크메르루즈 정권이 지배하던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진격한 후에 1979년 1월 7일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크메르루즈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 1월7일이 바로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가장 성대히 기념하는 국경일 중 하나인 "학살정권에 대한 승전기념일"(1.7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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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euters) 2009년 1.7절 기념행사에서 사열을 하고 있는 캄보디아 지도부 3인방. 좌로부터 헹 삼린 국회의장, 찌어 심 상원의장, 훈 센 총리. |
캄보디아 점령 "베트남 인민군"은 1989년 말에야 최종적으로 철군했다. 당시 서부지역의 태국 국경 지역에는 붕괴한 크메르루즈와 왕당파(푼신펙당) 및 공화파 반군들이 연합하여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군의 병력은 최대 20여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반군들은 "태국 영내에 있는 기지들"에서 활동했다. 이들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700 km에 이르는 태국-캄보디아 국경선에서, 폭 500 m 규모의 거대한 지뢰지대 "K5 벨트"가 설치되었다. 이것을 입안한 인물은 캄보디아 주둔베트남 군 총사령관으로, 훗날 베트남 국가주석이 되는 레덕안(Le Duc Anh) 장군이었다. 1980년대의 10년간은 캄보디아가 사실상 베트남의 식민치하에 있던 시기였다.
베트남 군대가 프놈펜을 점령했을 때, 얼마 안되는 캄보디아인들도 함께 종군해왔다. 그들은 주로 숙청의 위기에 직면하여 베트남으로 도망쳤던 크메르루즈 당원들이었고, 특히 숙청의 이유가 친-베트남 성향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NUFNS)이란 정치조직을 결성하여 동참함으로써,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베트남의 위성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수립됐다. 27세의 훈센도 바로 이 정권의 실세 중 한 명이었고, 그 역시 한때는 크메르루즈가 자랑하는 전쟁영웅이었다.
비교적 온건한 공산국가였던 PRK 정권은 도지사급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반드시 베트남인 고문관이 배치되어 있어서, 사실상 베트남이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국가였다. 훗날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혼란에 빠진 러시아가 더 이상 베트남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자, 베트남은 막대한 전비 부담으로 철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훈센의 PRK는 철군 이후에도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했고, 그리하여 유엔이 주도하여 캄보디아의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평화협상이 시작됐다. <1991년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내전은 끝이 났고, 1993년 유엔의 관리 하에 크메르루즈를 제외한 모든 정파들이 총선에 참여하여 오늘날의 캄보디아 왕국이 수립되었다.
1980년대 PRK 정부에서, 실제적인 의사결정권은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이라 불리는 당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KPRP 내에서는 3명의 지도자들이 주요하게 부상했다. 정권의 명목상 수장은 헹 삼린(Heng Samrin) 국가주석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권력은 찌어 심과 훈센의 양강구도를 하고 있었다. 찌어 심은 대중적 인력동원의 조직과 선전활동을 담당하는 정치조직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NUFNS) 의장을 맡고 있었고, 명칭은 "캄보디아 단결발전수호 통일전선"(KUFNCD)으로 바뀌었지만, 오늘날까지 그 직책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훈센은 정부에서 일했다. 처음부터 줄곧 외무부장관을 맡으면서, 1985년에는 세계 최연소 총리 겸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원래 공산국가에서는 정부의 총리보다 정치조직의 의장이 어떤 면에서는 더욱 중요한 직책이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찌어 심의 세력이 약간 더 우위에 있었지만, 평화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총리라는 직책 자체가 훈센의 권위를 기술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오늘날 훈센 총리의 여당인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바로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의 후신인 것이다. 따라서 다당제 의회정치에 적응한 정당이면서도 공산당에서 출발했던 역사로 인해 상당히 독특한 운영체계를 갖고 있다. 때로는 정통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간혹 그 내부의 움직임이 베일에 가려질 때도 있으며, 268명에 이르는 중앙위원 모두에게 당서열이 부여된다.
오늘날의 CPP도 1980년대에 형성된 3두 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찌어 심은 상원의장으로서 당서열 1위이자 당의장(총재)을 맡고 있고, 훈센은 총리로서 당서열 2위이자 부의장이다. 그리고 헹 삼린은 국회의장으로서 당서열 3위이자 명예당의장을 맡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헹 삼린은 찌어 심 계파와 훈센 계파 사이에서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자체로는 별다른 세력이 없으면서도, 그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양대 계파 사이에 긴장이 발생할 수도 있는 정치적으로 절묘한 위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난 30년간 찌어 심의 권력기반은 서서히 위축되어 왔다. 형식적으로 다당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상황 하에서, 내각의 수장인 총리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당연할 것이다. 이제 훈센은 사실 상의 독점적 최고 권력자이며, 당내의 서열은 그다지 의미도 없는 것이다. 헹 삼린(1934년생)이나 찌어 심(1932년생) 모두 훈센(1952년생)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은 이들이다.
찌어 심 계파가 갖고 있던 베트남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훈센의 권력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상당한 인적 자원을 배치해두고 있다. 그 중에는 캄보디아 국적을 가지고 캄보디아인으로 행세하는 인물들도 보고되고 있을 정도이다. 훈센 역시 본질적으로는 친-베트남계지만, 베트남이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될 경우 제거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의 전임자였던 PRK의 초대 총리 뻰 소완(Pen Sovan)이 바로 그렇게 숙청되었고, 당시 뻰 소완 체포현장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훈센이었다. 게다가 역내 패권확보에 있어서 베트남의 공작은 집요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도 베트남의 그러한 성향 때문에 크메르루즈가 그토록 반-베트남적 자세를 취했을 것이고, 그러한 강박관념은 크메르루즈 정권 시대의 비극에도 일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CPP의 지도층들은 자녀들의 통혼관계를 통해, 사실상 거대한 가족을 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각자의 경제적 이권들도 잘 나눠갖고 있다. 캄보디아 주요 부총리들의 부인들이 대부분 각자의 건설회사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캄보디아 사회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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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PP) 캄보디아에서는 마을 어귀마다 집권당의 홍보간판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한 입간판들에는 이 사진과 같이 CPP 로고나 3인의 지도자들 사진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좌로부터 찌어 심 상원의장, 훈센 총리, 헹 삼린 국회의장. |
하지만 베트남 및 CPP와 관련하여, 훈센 권력의 마지막 고비는 2009년 1월에 군총사령관(합참의장)이었던 께끔연(Ke Kim Yan) 대장을 부총리 겸 "국가 마약단속국"(NACD) 의장으로 좌천(?)시키면서 끝이 났다. 께끔연 대장은 찌어 심 계파로 분류됐지만, 군부에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던 실세 군인이었다. 그의 교체 당시 국내외 크메르계 웹사이트들에서는, 사오 소카 헌병사령관이 그를 헌병사령부에 수 시간 동안 감금했다는 소문이 관가에 나돌았다고 전했을만큼, 께끔연의 교체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후 새로운 군총사령관에는 훈센 계파의 뽈 사로은(Pol Saroeun) 대장이 임명됐다. 뽈 사로은은 임명 직전 2-3년간 베트남에 체류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유학은 사실상 베트남에서의 정치학습이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뽈 사로은이란 인물을 통해 훈센은 베트남과의 연결고리도 강화하는 동시에, 튀지도 않는 관리형 군부 수장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뽈 사로은이 관리형에만 머물 수 있다면, 장남 훈 마넷의 군부 장악력도 더욱 탄력을 받게 될 터였다. 현재까지는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크마애의 해방자인가, 요운의 앞잡이인가
베트남을 등에 업고 권력을 손에 쥔 훈센에 대해, 크메르 사회의 평가는 양분된다. 훈센 자신과 CPP 세력은 자신들이 크메르루즈의 학정에서 크메르 민족(크마애)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1979년 1월 7일이야말로 캄보디아가 "요운"('오랑캐'라는 의미로 베트남을 비하하는 크메르어 표현)의 수중에 떨어진 국치일이라 말하고, 훈센과 CPP야말로 베트남의 앞잡이이자 매국노라고 말한다. 훈센 총리는 금년도 1.7절을 즈음한 연설에서, 앞으로 "나를 매국노라 부르는 사람들은 국회의원 면책특권이 아니라 면책특권 할애비를 가졌다 할지라도 구속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 위협했다. 이에 대해 야당인 "삼랑시당"(SRP) 대변인 유임 소완(Yim Sovann) 의원은 1.7절이 "CPP의 탄생기념일일 뿐"이라 논평했다. "메콩 닷 넷"(http://mekong.net)의 운영자로서, 동남아 전문 기고가이기도 한 브루스 샤프(Bruce Sharp)는 훈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가 크메르루즈를 배신한 것도 단지 자신에게 조여들어오는 숙청을 피하기 위한 이유에서였을 뿐이다. 만일 그 숙청이 훈센 개인에게로 향해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크메르루즈의 학살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을 터였다." |
캄보디아 사회에서 베트남 관련 사안은 상당한 폭발력을 지닌다. 캄보디아인들은 이웃의 양대 강국인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 모두에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 두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호시탐탐 노려왔던 역내의 패권국들이기 때문이다.
2003년 1월에 태국의 한 유명 여배우가 "앙코르와트는 태국 영토"라고 발언했다는 오보가 나갔다. 그러자 "프놈펜 폭동"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태국대사관을 불태웠다. 하지만 태국과 캄보디아는 동일하게 인도-스리랑카 문화권에 속하면서 상좌부불교(소승불교)를 신봉한다. 또한 복식과 예법, 예술과 명절 등 문화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많아서, 간혹 태국이 캄보디아를 지배할 경우에도 베트남에 비해서는 문화적 충돌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중국 문화권으로,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관습과 복식 등에서 이질적 문화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간혹 베트남이 지배했던 지역에서는 문화적 충돌이 더욱 빈번했고, 그 강도도 컸던 것이다.
현재 베트남 남부에는 "크메르 끄롬"(Khmer Krom)이라 불리는 캄보디아계(크메르) 유민들이 상당 수 살고 있다. 베트남 정부의 공식통계로는 100만명이지만, 크메르 끄롬계의 반정부 단체는 700만명이라 주장한다. 현재 크메르 끄롬인들은 고유문화 및 종교의 말살정책과 토지수탈 등으로, 상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베트남은 이 지역을 17세기부터 잠식했고, 결국은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동화정책은 막대한 인구(현재 약 9천만명에 육박)를 가진 장점을 살려, 새로운 지역으로 자국민을 이식시키는 공격적인 방식이다. 참고로, 캄보디아의 인구는 현재 1,40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 고무노동자로서 캄보디아로 유입된 베트남계 주민들은 1970년대에는 20여만명으로 추산됐고, 이후 훈센의 베트남 위성정권 시절에도 막대한 인원이 이주해왔다고 회자된다. 1991년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푼식펙 계파는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인구가 75만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이것은 크메르루즈 계파로 하여금 평화협상의 틀에서 빠져나가는 핑계로 이용되기도 했다. 크메르루즈는 1998년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투항이나 체포가 이뤄진다.
일반적으로 국제사회는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에 대해 떤레 삽(Tonle Sap) 호수 주변의 가난한 수상마을 거주자에만 관심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캄보디아 사회에 완전히 동화하여 주류사회로 편입된 베트남계 주민들이 외국인들이 추정하는 것보다는 상당히 많이 있다. 또한 혼혈을 이룬 베트남계까지 합치게 되면 그 수는 더욱 대폭 늘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구들조차 베트남 전통명절(뗏=구정)이 되면, 베트남 내 본향으로 성묘를 떠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곤 한다. "해외의 크메르인 공동체들"에서 현재 캄보디아 정부의 요직에 있는 "아무 아무개는 원래 베트남인"이라는 설이 여러 형태로 떠다닐 정도이다.
만일 베트남에 대한 캄보디아인들의 민족감정이 분출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2003년의 프놈펜 반-태국 폭동을 능가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1970년 론놀(Lon Nol) 세력이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캄보디아 전역에서는 반-베트남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베트남인들 약 12,000명 가량이 사망하고 20만명이 본국으로 피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1975년 4월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았던 초기에도 베트남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의 수가 통상 20만명 안팍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훈센은 베트남과의 관계에서 초래되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최근 2년간 야당인 SRP는 베트남 국경 문제를 제기하는 데 상당한 당력을 집중했다. 현재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2005년에 양국이 체결한 협정에 따라, 2012년 완료를 목표로 국경표식 설치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5년의 캄보디아-베트남 국경협정은 1985년에 PRK-베트남 사이에 체결된 내용의 복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1985년의 국경협정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 체결 당시 백지화됐던 바 있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민족주의 진영은 이것을 부활시킨 훈센 정권에 대해 맹렬한 공세를 펼치는 것이다.
삼랑시 파동
2009년 10월 베트남 국경지역의 일부 농민들이 야당에 도움을 청하면서, 새로운 국경표식 때문에 자신들이 농토를 상실하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현장을 방문했던 제1야당 총재 삼 랑시 의원은 논 한가운데 박혀있던 임시표식용 말뚝 4개를 뽑아버렸고, 이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다.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CPP 국회의원들은 삼 랑시 총재가 가진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해버렸다. 이어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했지만, 삼 랑시 의원은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다.
2010년 1월 23일(토) SRP 국회의원 일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1월27일에 있을 삼 랑시 의원의 궐석 선고공판을 이틀 앞둔 1월25일(월)에, 삼 랑시 의원이 직접 인터넷 방송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전문가들과 함께 검토한 위성판독 증거자료들을 공개할 것이라 예고했다. 이 자료들에는 삼 랑시 총재가 뽑아버렸던 국경표식들이 최대 500 m까지도 캄보디아 영토 안쪽으로 들어와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도 캄보디아의 마약상용자 수용소에서 엄청난 인권유린이 발생한다는 보고서를 동일한 1월25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1월24일(일) 오전에 "쁘레아위히어 사원" 인근에서 2차례의 짧은 교전이 있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전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이 사실을 보도했다. 간혹 양측 지휘관들이 금새 오해를 풀고 휴전했다는 후속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교전 발발" 소식은 이후 2-3일간 주요한 헤드라인이 되고 말았다. 결국 1월25일에 발표된 삼 랑시 의원의 증거자료들과 HRW의 보고서 내용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1월27일에 궐석재판을 통해 삼 랑시 의원에 대한 징역형이 확정됐다.
삼 랑시 의원에 대한 유죄판결이 나오자, 야당은 이 문제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이 날 캐롤 로들리(Carol Rodley) 주캄 미국대사도 1월29일 한 봉제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삼 랑시 의원 재판에 관해 "재판이란 공정해야 할 것"이란 발언을 했고, 향후 캄보디아산 섬유제품에 관세가 부과될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날 밤 10시경 쁘레아위히어 사원보다 200 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뽀우삿(Pursat) 도에서 간단한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이 역시 전세계 언론들은 물론이고 한국의 언론들까지 받아서 보도했다. 그리고 1월30-31에도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안보정국
이 시기부터 훈센 총리는 태국과의 긴장에서 강도를 높여가며 "안보정국"으로 몰고갔다. 야당은 여전히 베트남 국경 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었고, 2009년 12월부터 본격화된 베트남의 경제적 진출도 사상 최대의 규모로 급속히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안보정국"은 다른 모든 것을 잠재워나갔다. 서쪽 국경의 긴장고조로 동쪽 국경의 문제들은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2월6일 훈센 총리 및 그 부인 분 라니(Bun Rany) 부부는, 군복 차림을 함께 하고서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방문, 불교식 제사를 지냈다. 2월8일에는 쁘레아위히어 사원에서 서쪽으로 100 km 정도에 위치하여, 태국이 실효지배 중인 또다른 분쟁 지역 "따모안 톰 사원"(Ta Moan Thom Temple)도 방문했다. 하지만 사원 앞 광장에서 당시 태국육군 제2군구 사령관이던 위왈릿 촌삼릿(Veevalit Chornsamrit) 중장이 영접과 더불어 정중하게 제지했다. 이 방문 당시 양국 군대는 각각 1개 여단(1,500명) 씩을 배후에다 배치하고, 총기를 조준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관련 동영상]
훈센은 위왈릿 사령관에게 영어로 "관광객 자격으로 들어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에 위왈릿 사령관이 "무장을 해제하셔야만 들어가실 수 있다"고 정중히 답하자, 그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훈센 총리는 이 방문길에서 태국의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에게 보내는 발언을 통해, "당신은 태국이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침략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만일 거짓말이라면 당신 가족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을 것이란 점을 신령님께 맹세하고도 말할 수 있는가?"와 같은 특유의 실랄한 독설과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2월25일 훈센 총리가 연설을 통해 "기업들은 방위성금을 내라"고 말했고, 정부에서 각 대기업마다 할당한 내용이 적힌 문서가 누설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감시기구들이 이러한 일은 "군경유착"이며, 군대가 사기업에 봉사할 우려가 있다며 비판했다. 특히 영국에 본부를 둔 "글로발 위트니스"(Global Witness)는 "캄보디아 군대는 거대한 범죄집단"이라며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3월4일에는 중부지방의 한 비행장에서 "다련장 로켓 발사훈련"이 공개리에 실시했다. 이것은 크메르루즈가 붕괴한 이래, 캄보디아가 실시한 최초의 중화기를 동원한 군사훈련이었다. 훈련실황은 주요 TV들로도 모두 방송됐다. 아세안 사무총장이 캄보디아의 군사훈련에 우려를 표명하자, 훈센은 "우리 로켓이 당신 머리라도 때렸단 말이오?"라고 공개적인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캄보디아 군부 인사도 안보정국에 동참했다. 태국 국경 지역을 관할하는 총사령부 부사령관 찌어 다라 대장은 3월24일 발언을 통해, "지금까지 태국군 88명을 사살했다"고 뜬금없는 발표를 했다. 또한 3월31일 발언을 통해, 해외에 체류 중인 "삼 랑시 총재는 태국의 이익에 기여하는 반역자"라고 매도했다. 그리고 4월8일에는 "태국과의 국경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월1일 미국은 캄보디아가 2009년 12월에 위구르 난민들을 중국으로 강제송환시킨 데 대한 보복조치로서, 캄보디아에 증여키로 했던 군용트럭 200대의 선적을 취소시켰다. 4월4일에 쁘레아위히어 사원에서 짧은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들이 외신을 온통 뒤덮었다. 캄보디아 군 지휘관인 유임 핌 여단장은 상호간 오해를 풀었다면서, "술취한 병사들이 실수를 했다"는 황당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이때도 방위성금 모금 작업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고, 마련된 재원은 훈센의 군대를 위해 사용될 터였다. 4월17일에는 사원에서 서쪽으로 수십 km 떨어진 오스맛(O'Smach) 국경에서 15분간의 교전이 발생했고, 사상자 없이 곧 휴전했다.
2010년도 상반기에 태국은 온통 "레드셔츠"(UDD) 시위대의 항쟁에 매달려 있었다. 훈센은 이러한 시기를 잘 활용하면서, 동쪽의 민감한 사안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서쪽으로 돌리고, 방위성금 모금을 통해 실익도 챙겼다. 캄보디아 서쪽 국경과 동쪽 국경의 정치적 연관성에 대해 주목했던 연구사례는 아직까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학술공동체 "크메르의 세계"가 자체에서 선정한 <2010년 캄보디아 10대 뉴스>를 발표하면서, 이 문제를 지적한 경우만 발견될 뿐이다.
어찌됐든 태국에서 UDD 시위대가 5월19일 강제진압 당한 후, 2010년 하반기에는 태국 국경에서 단 1건의 오발사고조차 보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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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캄보디아 공군의 주력 비행장인 "뽀쩬똥 공항"(=프놈펜 국제공항)에 방치되어 있는 각종 구형 미그기들. 이 사진은 2000년 1월에 촬영됐는데, 이 항공기들은 당시에도 이미 사용이 불가한 상태로 방치되던 중이다. 이후로는 이들 항공기를 목격했다는 보고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 수량은 17~19대 정도로 추정되지만, 캄보디아 공군은 사실상 전투비행단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라 평가할 수 있다. |
훈 마넷의 전쟁
앞서 지적한 것처럼 캄보디아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진행 중인 태국과의 교전사태는 훈센 총리 장남인 훈 마넷의 경력을 좌우하게 될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훈마넷의 미래는 집권당인 CPP 세력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 CPP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지배체제가 대를 이어 부드럽게 이양되기 위해서는 훈 마넷이라는 구심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33세인 훈 마넷은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브리스톨 대학"(Bristol University)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최근에는 박사학위도 수여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훈 마넷은 2년 전 일약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군문에 들어가, "캄보디아 국방부" 대테러국장으로 임명됐다. 이 직책은 캄보디아 내의 모든 특수부대들을 감독하는 자리이며, 매년 "미국이 지원하는 대테러 교육훈련"의 연락창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는 총리 경호부대 부사령관까지 겸직했다. 금년 1월에 군대의 중견 계급인 소장으로 진급한 것은, 이제 그가 머지 않아 군의 최고 요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훈센 총리와 캄보디아 군부는 훈 마넷이 현존하는 어떤 캄보디아 군 장성들보다도 경력이나 자질 면에서 우수하며, 충분히 차세대 장교들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발탁한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훈 마넷이 부자세습의 길로 가려한다면, 군부 뿐만 아니라 CPP라는 당을 장악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일반 국민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확신시켜야 할 과제를 안게 된다. 바로 현재 진행 중인 교전사태야말로 드물게 나타난 기회인 동시에, 실패할 경우엔 정치적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차기 총선은 2013년에 치뤄진다. 당으로 진출하려면 총선에 출마해야만 한다. 비록 정당명부제 투표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캄보디아의 선거제도는 선거구별로 득표수를 가리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에 걸맞는 경력관리를 위해서도, 훈 마넷은 이번 교전사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만 할 부담을 지고 있다. 더구나 이제는 국내외에서 모두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태국 군부도 훈 마넷이 1999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방콕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훈 마넷은 "브리스톨 대학" 유학 시절, 태국군에서 파견된 젊은 장교들이나 태국인 학생들과 두터운 교분을 형성했다고 한다. 또한 방콕에서 개최된 군사분야 회의 등에 참석하면서 태국을 수없이 왕래했다고 한다. 그를 아는 태국군 소식통들은 훈 마넷이 자상하고 친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양국 군대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로서는 이번 교전사태의 상황이 녹록치 않아 보인다. 2010년 상반기에 훈센의 "안보정국"에 농락당했던 태국군으로서는, 이번 사태에서 군인 본연의 자존심을 걸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태국 내 정치적 불확실성은 군부로 하여금 이번 사태를 또다른 탈출구로 이용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태국 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교전사태는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에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해줄 수도 있는 기회이다. 따라서 태국 군이 이전처럼 소극적 대응을 할 것이란 기대를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태국 육군이 이미 23,000명 이상의 병력 전개를 가시화시킨 이상, 이 싸움은 진검승부에 돌입한 셈이다. 최악의 경우, 캄보디아는 제트엔진을 장착한 전투기가 단 1대도 존재하지 않는 자신들의 처지를 처절하게 곱씹게 될지도 모른다.
이 충돌사태는 상당히 급박하게 전개됐다. 캄보디아로서는 상황이 이렇게 빠르게 전개될 것을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지난 1월3일 훈 마넷이 육군 소장으로 진급할 당시만 해도, 훈센 총리가 가진 권력의 로드맵에는 오로지 순탄한 도로들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국사회는 레드셔츠(UDD)와 범-보수층으로 나뉘어 있고, 범-보수층은 다시금 3자로 나뉜다. 정부, 군부, 옐로우셔츠(PAD) 시위대가 그것이다. 이들 3그룹은 "지금 이대로"라는 생각에서 공통되면서도, 그것을 확보하는 방식은 "셋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주도권을 쥐는 방식"을 추구한다. PAD는 군부에 대해 "싸우라!"고 압박하며, 아피싯 정부를 배제시키려 하고 있다. 반면 정부 내에서 아피싯 총리는 가능하면 PAD를 달래려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국제사회를 대면하는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 외무부장관은 자신이 원래 PAD 출신이면서도, 국제사회의 이목을 의식하여 보다 온건한 방식을 추구하려 하는 모습이다. 태국 군부는 아직 외형상으로는 정부에도 PAD에도 기울지 않고 있다. 오로지 23,000명의 병력을 전개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시기가 왔을 때,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더욱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22일, 캄보디아의 세 거두인 훈센 총리, 찌어 심 상원의장, 헹 삼린 국회의장이 라오스를 방문했다. 공항 출영행사도 없는 이례적인 출국이었고, 사실상의 비밀 방문이었다. 그리고 라오스에서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3국 공동의 행사들이 몇 가지 노출됐을 뿐이다. 당연히 베트남의 주요 인사들도 라오스로 모여 있었다. 하루 뒤인 12월 23일 라오스 총리가 교체됐다. 상대적으로 친 중국 성향의 보와손 보파완(Bouasone Bouphavanh) 총리가 아직 임기를 마치지 않은 시점에서 발표된 사임이었고, 후임에는 베트남에서 정치학습을 한 경력이 있는 통싱 탐마웡(Thongsing Thammavong) 국회의장(전인대 의장)이 이어받았다. 라오스 총리의 전격적인 교체는 동남아 고속철도 건설이 가시권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동남아 경제진출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베트남도 최근에 당대회를 가졌다. 하지만 이들 3개 공산권 국가들에서 이뤄지는 일들에 대해 충분한 정보들은 제공되지 않는 상황이다. 캄보디아의 세 거두가 라오스에서 어떤 행적을 갖고 있는지도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분명한 점은 작금의 인도차이나 전역이 차세대의 권력 재편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태국은 그 마감시한에 달해 있고, 캄보디아는 독자적으로 진행하던 권력승계 로드맵을 교전사태를 통해 태국과 공유해버렸다. 캄보디아에게 있어서, 지금으로서의 최상책은 체면을 많이 구기지 않은 채 물러설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은 만용 섞인 정치 쇼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이 싸움이 정면승부로 나아가면, 태국과 캄보디아 모두 자국의 권력승계 문제를 여기다 걸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태국 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 고민이고, 처음부터 긴장고조의 주도권이 태국에서부터 행사됐다는 점이 우려를 낳게 한다. 훈센 총리가 이 사태를 일찌감치 "전쟁"(war) 상태로 규정하고, 따라서 국제사회가 개입해야 한다고 한 주장도 필자와 동일한 고민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2월14일(월) 뉴욕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개최될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양국의 외무부장관들은 각기 자국의 복잡한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과연 어떤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그 비공개 회의의 결과를 숨죽이고 지켜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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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캄보디아 현대사를 간략하게 핵심만 정리해 있어서 쉼없이 읽어 내려왔습니다.^^*
진이 다 빠지네요.. ^ ^
걱정입니다..
이미 어제 뽀이뻿에서 충돌이 있었다는 미확인 정보가 있는데...
아피싯 총리가 기자들 앞에서 긍정도 부정도 못했습니다..
최전방 초소에 전화 한방이면 가능한 일인데..
전방 상황이 총리에게 신속히 보고가 안된다는거죠..
아피싯 총리는 <뽀이뻿에 전력이 증강된 것만 보고받았다>고 했다네요..
원래 그렇긴 하지만..
지금 태국 군부가 뭘 할지가 염려되네요...
헤드라인만 일단 읽어봤구요. 점심시간에 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세의 귀염둥이 보아즈 올림
휴~ 상, 중, 하 다 읽었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거기에다가 라오스까지 그거 참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그물들을 촘촘히 파악하려니 만만치 않은데 이 글을 쓰신 울트라-노마드님의 노력이 절절히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그 어떤 나라도 순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가 흘러가는 방향이란 것이 일시적으로 뒤로 갈지라도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더 깊게 공부가 필요함을 느끼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과찬을 해주셔서 쑥스럽네요,,
하여간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염려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