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짙은 안개를 눅눅히 펼치며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낙엽을 하나 둘 떨구고 있다. 힘겹게 주섬주섬 떠나는 가을에는 마른 흙냄새가 난다. 까칠한 머리칼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흘러간다.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몇해 전 가을밤이었다. 아마 보름밤이었을 것이다. 밤은 교교하게 깊어가고 풀벌레 소리만 한재골에 가득했는데 그 밤의 달과 차(茶)를 잊지 못한다. 저수지물에 잠긴 달과 하늘에 떠 있는 달, '구름모자' 에서 들고 나온 찻잔에도 달이 마알갛게 떠 있었다.
노옥천(盧玉川)의 " 푸른 구름 같은 차는 끊임없이 바람을 부르고 백화는 떠서 찻그릇에 엉기네."라는 시와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흑요석처럼 번들거리던 저수지, 병풍처럼 두르고 선 검은 숲은 무섭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위치한 한재골은 광주 훼미리랜드에서 10여분의 거리로 백양사로 넘어가는 고개 쪽에 있다. 광주근교로 푸른 송림 사이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봄이면 파릇한 잎 사이로 산벚꽃이 화사하고 무르익은 봄바람에 날리는 벚꽃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름이면 울창한 숲 아래 약 1.3km에 이르는 계곡물의 시원함에 몸과 마음을 식히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온 산을 덮는 단풍은 그 유명한 백암산의 백양 단풍빛만 못지 않고, 빈 몸으로선 겨울나무에서는 버림의 미학을 보아도 좋다. 어쩌면 송림을 쓸고 가는 해일 같은 바람을 만날 수도 있다.
담양군 대전면은 후백제 기병지요, 태조 견훤이 3개월간 도읍으로 정한 곳이라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또 대치리에 있는 한재 초등학교에는 600여년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 천연기념물 제 284호)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 유명사찰을 돌아다니며 불공을 드리던 때에 심었다고 전한다. 근방에는 광주에서 용강을 건너 한양으로 통하는 큰길로 옛날에는 이 나무가 이정표의 구실을 하였다 한다. 오랜 세월 오가는 길손의 휴식처가 되었던 느티나무 아래 서 보라. 두 팔로 아름드리 나무를 안아보아도 좋고, 우러러보며 자연의 무한한 힘과 한 그루 나무만큼도 누릴 수 없는 인간의 목숨을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나무는 우리가 관심을 갖었을 때 비로서 살아 있는 역사 유물로 의미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