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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마리산 마이산
진안읍내를 지나 마이산 쪽으로 접근하면 말귀처럼 생긴 마이산의 모습이 자태를 들어낸다. 원래 이름은 西多山 ,다시말해 소도산인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주필대에 처음 들렸을때 말귀처럼 생긴산을 보고 웃었다하여 마이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태조가 속금산으로 개명하였다가 아들인 태종이 다시 마이산으로 환원시켰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마이산이 뿜어내는 묘한 신비감에 잠시 젖어든다. 누가 말했던가... 산을 보기 위해서는 먼발취에서 보아야 산이 보인다고... 산을 더 많이 더 크게 볼려고 그 산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산의 세세한 부분을 느낄수가 있지만 산을 볼수는 없다고... 그 말도 틀린말은 아닌가 보다. 지나는 길에 스치듯 보는 마이산이 정말 마이산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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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마을 돌거북
탑사를 가기위해서는 마이산을 한바퀴돌아 뒷쪽으로 접근해야 수월하다. 뒤쪽으로 차를 몰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돌거북을 보았다.
안내문을 잠시 인용하여 본다. 이 돌거북은 은천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워졌다. 기미(己未:1919)년 이후 마을이 큰 화재로 전소하는 일이 생기자 마을 남쪽의 써리봉이 풍수상 화산(火山)이어서 라고 믿고 수신(水神)인 돌거북을 세워 화재를 막고자 경신(1920)년에 거북상을 조각하여 이 자리에 세웠던 바 1988년경 무도한 자들에 의해 도난당했다. 그 후 2005년에 은천마을 숲이 (사)생명의숲에서 주관하는 전통마을 숲 복원사업지로 선정되었기에 과거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돌거북을 복원하여 이 자리에 세운다. 2005.9.18(한가위)에 은천마을 주민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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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입구의 주필대 암봉
마이산 탑사를 오르기 위해 주차장에 들어서면 우측에 주필대와 이산묘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대장군시절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복귀하던길에 굳이 먼길을 돌아 이곳 진안 마이산까지 왜 왔는지 미스터리이지만, 금척을 얻기 위한 행보로 추론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암벽밑이 이성계가 말을 쉬게했다는 주필대이다.
마이산은 원래 산 천체가 하나의 바위로 되어있다라는 일행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신의 거대한 조화를 보는 듯 그 거대함에 억눌려 인간으로서 그동안 자연에 대해 행했던 오만을 뉘우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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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 기념비
이산묘에 도착하여 보니 주변에 비석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그 중 하나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친필로 세겨진 비석이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연상케 한다.
구한말 항일 의병장 정재 이석용이 호남 각지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마이산 남쪽 용바위 위에 제단을 쌓고 500명의 의병들과 함께 천재를 지냈다고 한다.
비문에 의하면... 湖南義兵倡義 同盟團結成址 호남의병창의 동맹단 결성지 大統領 金大中 대통령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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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대에 세겨진 마이동천馬耳洞天
진안가는 길목인 임실군 성수산 상이암에 있던 무학대사가 이곳으로 이성계를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의 상징인 금척을 얻기위해 그는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꿈속에서 신인으로 부터 금척을 받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마이산 동쪽 은수사 태극전에는 단군 영정과 함께 금척수수도가 걸려있다고 한다.
안내판에 있는 내용에는... 주필은 임금이 거동길에 잠시 머무르거나 묵고 간 것을 뜻한다. 주필대는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가 남원의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 마이산에 올라 금척(金尺)과 관련 된 시를 읊은 것을 기리기 위해서 1924년 이 고을 선비들이 뜻을 모아 새긴 글이다.
주필대 안내판 뒤에 天馬東來로 시작한 비문에는 이성계가 읊었다는 시를 이렇게 해석 해 놓았다. 천마가 동쪽으로 와 형세가 이미 궁하니 흰털 말발굽 더 건너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네. 연인(내시)이 삐만 사 가고 그 귀만 남기니 변하여 두 봉우리 되어 반공 중에 솟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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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대에 있는 이산묘
주필대에서 눈을 돌리면 이산묘가 있다. 입구 한쪽에 새워진 안내문에는... 이산묘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묘는 구한말 순국지사 연재 송병선선생과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애국충정의 뜻을 이으려는 지역의 선비들이 1925년 이산정사를 건립하고, 1946년 회덕전懷德殿을 완공한데 이어 영모사(永慕祠)와 영광사(永光祠)를 건립, 단군, 태조, 세종, 고종 등 4성위와 조선개국 이래 충신과 유림 40위, 구한말 을사조약 이후 충신, 열사 34인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우 좌측 암벽에 주필대(駐필臺) 라고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전투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에 머물렀던 곳으로 전한다. 또한 주필대 암벽 윗부분에는 황단터가 자리하는데, 1907년 의병장 이석용을 비롯한 의병들이 집결하여 호남에서 최초로 국권수호를 위해서 호남 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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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 좌측 암벽
이산묘 마당 좌측에서 본 암벽의 모습이다. 암벽 아래 부분에 주필대라 각자가 새겨져 있고 마이동천이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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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사(永光祠)
마당에 옆 여러문 중에 한쪽의 문을 통과하니 영광사라고 쓰여진 건물이 보인다. 안내문에 내용을 인용하자면 영광사(永光祠)에는 단군, 태조, 세종, 고종 등 4성위와 조선개국 이래 충신과 유림 40위, 구한말 을사조약 이후 충신, 열사 34인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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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모습의 회덕전懷德殿
시끄러운 주차장의 경적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한적함이 익숙해지고 어느덧 이곳 회덕전 앞에 섰다. 출입금지라고 되어있는데 이곳까지 와서 구경온 것만이 아닌터라 참배를 강행하기로 했다. 사당문을 열고 들어가니 깜깜한 안쪽에 가려진 위패들로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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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께 예를 올리고...
초를 켜고 맨 왼쪽에 모셔진 단군께 예를 올리고 누군가 놓고간 성금 옆에 약간의 성금을 더해 놓고 나왔다.
돌아서 나오면서 다시한번 회덕전을 되돌아 보며 ... 할아버지 이곳에 계시니 감사합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민족의 혼이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는가? 단군 앞에 서면 항상 말이 짧아지고 생각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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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이산묘를 나오면 주차장 매표소 뒷쪽 산으로 조형물과 약간 윗쪽 절벽의 붉은 암각이 눈에 들어온다. 非禮勿動이라고 씌인 고종황제의 친필로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자는 의미로 내린글이라고 한다. 고종에 의해 금척의 의미가 다시금 강조된 이유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새삼 반갑기도 하다. 조선왕조의 의미가 시작된 성지에 조선이 몰락해갈 즈음 이곳에 금척을 되찾아야만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남기게 되었는지가 명백해지는 대목이다.
안내판이 있어 읽어보니 비례물동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예절을 따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글은 1916년 고종황제가 내린 어필로 본뜻은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을 되찾는 일은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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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대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한터라 일행은 서둘러 이산묘를 뒤로하고 마이산 석탑군으로 향한다. 마이산으로 향하면서 문득 스치며 지나는 생각이 있다. "아니라 부인하면서도 단군을 우리나라의 민족혼으로 가슴에 두고 있구나." "수많은 역대왕들이 단군을 찾고 단군께서 남긴 흔적들을 파헤치고 자신의 정통성을 연관지으려 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이렇게 숨겨두고 배척하지만 그래도 가슴깊은 곳에는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깨어있지 못하고 잠자고 있을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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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진안 이산묘 가는 길
중부 고속도로 장수IC --> 진안방면 26번국도 --> 진안읍내 --> 마이산 입구 삼거리 --> 마령면 (마이산 뒷쪽) --> 석탑사 입구 우측에 마이동천, 이산묘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편의상 차량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기준으로 가는 길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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