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茶禪 … 무소유의 ‘茶聖’ |
16살에 출가해 차와 인연 …
‘다신전’’ ‘동다송’ 등 저술 통해 우리 차 중흥의 기틀 다져 |
두륜산의 햇살도 나그네처럼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햇살이 물러난 골짜기에는 벌써 산그늘이 머루 알 빛깔로 접히고 있다. 나그네는 서둘러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열반할 때까지 머물렀던 일지암(一枝庵) 가는 산길로 오른다. 초의가 차를 마시며 선열에 잠겼던 다정(茶亭)이자, 수행공간이던 일지암이라는 단어가 오늘은 예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한산(寒山)의 시에 일지(一枝)라는 말이 나온다. ‘내 항상 생각하나니 저 뱁새도 한 몸 편히 쉬기 위해 한 가지에 있구나(常念焦瞭鳥 安身在一枝).’ 작은 뱁새도 두 가지를 욕심내지 않고 한 가지에 만족할 줄 안다는 지족(知足)을 말하고 있다. 초의도 한산이 오른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미망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 이상을 욕심낸다.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두 채, 필요치 않은 군더더기에 집착한다. 나그네는 군더더기를 버리고 사는 게 무소유의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정약용에게 가르침 받고 김정희와는 차로 우정 나눠
다서(茶書)의 고전인 ‘다신전’과 ‘동다송’을 저술한 우리 차의 중흥조 초의는 정조 10년(1786) 나주목 삼향에서 태어나 고종 3년(1866)에 열반한 선승으로 성은 장(張)씨이고, 자는 중부(中孚)였다. 15살 때 강변에서 탁류에 휩쓸려 죽을 뻔한 순간 부근을 지나던 승려가 건져주어 살아났는데, 그 승려의 권유로 16살에 남평 운흥사로 출가했다. 초의는 불경과 차(茶)와 탱화와 범패를 배우고, 이후 대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20대 초반에 이미 불법을 통달하고 크게 깨닫는다. 24살 때는 강진으로 정약용을 찾아가 유서(儒書)를 받고 시부(詩賦)를 익힌다.
다산은 초의에게 “시를 배우는 데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기르려는 것과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시심의 근본을 당부한다. 그런데 다산은 훗날 유배에서 벗어나 한강변의 고향에 살면서 초의가 제자 된 지 두 달 만에 자신의 대의(大意)를 깨달았다(見明星悟 是弟二月)는 시를 남긴다.
16살의 명민한 초의가 운흥사로 출가한 것은 훗날 다성(茶聖)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인연이 됐다. 야생 차밭이 흩어져 있는 운흥사와 부근의 불회사는 그곳 수행승들에 의해서 다선불이(茶禪不二)의 선풍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곳의 행정구역 지명이 다도면(茶道面)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의에게 진정한 다우(茶友)는 추사 김정희였다. 두 사람은 차를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으로 마신 말띠 동갑 지기였다.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보내주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는 편지는 웃음을 자아낸다. “어느 겨를에 햇차를 천리마의 꼬리에 달아서 다다르게 할 텐가. (중략) 만약 그대의 게으름 탓이라면 마조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으로 버릇을 응징하여 징계할 터이니 깊이깊이 삼가게나. 오월에 거듭 애석하게 여기노라.”
이윽고 일지암에 올라 마루에 앉아본다. 암자도 볏짚의 풀옷(草衣)을 입고 있다. 나그네는 문득 초의스님의 옷자락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암자 옆의 누각에 있던 젊은 스님이 초의 가풍을 잇고 있는 여연스님의 ‘반야차’ 한잔을 권한다. 차를 마시자 산길을 오르며 헐떡이던 마음도 저잣거리의 헛된 꿈도 쉬어진다. 초의스님은 말했다. 차의 티끌 없는 정기를 다 마시거늘 어찌 대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는가(塵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 그렇다. 차 한잔 속의 향과 깊은 맛에 자신을 놓아버리자. 만 가지 천 가지의 말도 차 한잔 마시는 것 밖에 있지 않다(萬語與千言 不外喫茶去)고 하지 않았던가. 석양의 햇살이 물러가는 두륜산의 먼 산자락이 선경(禪境)에 드는 관문처럼 그윽하기만 하다.
※일지암 가는 길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초의선사 동상을 먼저 들른 다음 곧장 산길을 따라 20여분 정도 오르면 초의선사가 40년 동안 머물렀던 일지암에 다다른다. 문의 061-533-4964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어귀에 이르자 차의 그윽한 향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바로 옆 전통찻집에서 차를 덖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인들은 차의 그윽한 향과 맛을 일컬어 차의 신, 즉 다신(茶神)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를 품다(品茶)하면서 ‘다신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이다. 나그네는 뜻밖의 다신을 만난 셈이다. 정약용의 영혼인 양 차의 혼백과 마주치다니 황홀하다.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이 된 것은 지금 나그네가 서 있는 산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이 40살에 강진으로 유배 온 까닭은 스무 살 때 이복 맏형 약현(若鉉)의 처남 이벽(李壁)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천주교 서적을 본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조 15년 자신의 나이 30살 때 노론의 주도로 천주교가 사교(邪敎)라 하여 박해가 시작되자 동복 형 약전과 함께 배교한다. 이후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온 정약용은 노론의 공격에도 벼슬을 거듭하다 정조가 승하한 후 40살이 되던 순조 1년에 체포돼 국문을 받는다. 이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형 약종과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은 사형당하고, 형 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가야 하는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해 10월 잠적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다시 국문을 받고 형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정약용은 동문 밖 밥집 노파의 호의로 골방 하나를 얻어 기거한다. 처음 2, 3년 동안은 국문받은 몸의 후유증과 고향 생각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낸다. 친인척과 선후배를 한꺼번에 잃은 비극과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절망감으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밥집 노파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다. 노파가 어느 날 정약용에게 던진 말의 요지는 ‘부모의 은혜는 같은데 왜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그렇지 아니한가?’였다. 생의 뿌리를 묻는 노파의 말에 세상을 기피하려던 정약용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이 밥을 팔면서 세상을 살아온 밥집 주인 노파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면서 크게 깨닫고는 흐트러져 있는 자신을 경계한다.
정약용이 재기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혜장(惠藏)과의 우연한 만남이다. 백련사 주지 혜장과 밤새도록 마음을 주고받는 다담(茶談)을 나누며 차츰 다인이 되었고, 반면에 유서(儒書)에 밝았던 혜장은 정약용을 만나 그가 애독하던 논어와 주역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갔던 것이다.
직접 판 약천 등 ‘다산초당’ 경치 옛날 그대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정약용에게는 한 잔의 차야말로 정신을 추스르는 영약(靈藥)이었고, 훗날에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서책을 마무리 짓게 한 저술삼매의 감로수였던 셈이다. 차를 좋아하게 된 정약용은 혜장에게 ‘병을 낫게 해주기만 바랄 뿐 쌓아두고 먹을 욕심은 없다오’라는,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걸명(乞茗)의 시를 보내기도 한다.
다산초당은 이제 기와로 덮여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직접 판 샘 약천(藥泉)과 차 부뚜막인 다조, 초당 왼편 위에 직접 정석(丁石)이라고 새긴 바위, 제자들과 함께 만든 연지(蓮池) 등 초당의 네 가지 경치는 옛날 그대로다. 약천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정약용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앉곤 했던 자리,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일각(天一閣)으로 가 정약용의 귤림(橘林)이란 다시(茶詩)를 읊조려본다. ‘책뿐인 다산초정/ 봄꽃 피어나고 물이 흐른다네/ 비 갠 귤나무 숲의 아름다움이여/ 나는 바위샘물 길어 차병을 씻네.’ 다산은 제자에게 말했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그러나 나그네는 다산이 자기 질서를 지키고자 날마다 다짐했던 맹세의 말이라는 것을 안다. 다산이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된 것은 바로 자신과의 약속을 몸부림치며 지켜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오랜만에 뱃고동 소리를 듣는다. 배 한 척이 심호흡을 하고 있다. 서둘러 배에 오른 나그네는 바닷바람을 쐬며,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20여년의 유배와 19년의 은거생활을 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일생을 떠올려본다.
윤선도의 시련은 나이 30살에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조야(朝野)를 깜짝 놀라게 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서인 이이첨 등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된다. 이후에도 집권세력인 서인의 난정(亂政)에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 번번이 좌절하곤 한다. 이를 보면 그의 기질은 차를 즐긴 조용한 품성에다 타고난 반골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그네는 윤선도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좌절 속에서도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고,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많은 단가와 시조를 남겨 정철(鄭徹) 박인로(朴仁老)와 더불어 조선시대 삼대 가인(歌人)으로 불리고 있다.
많은 단가·시조 남긴 ‘조선의 歌人’
윤선도는 권력 지향적인 인간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자연 귀의를 갈망했다. 그의 귀의처는 관향(貫鄕)인 해남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이었는데, 그에게 시(詩)와 차(茶)는 자연과의 합일을 위한 매개체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보길도를 처음 찾은 것은 51살 때였다.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피난 중인 원손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가복(家僕) 수백명을 배에 태우고 갔으나 왕자 등은 이미 붙잡혀가고 없었다.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내려갈 작정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보길도에 닻을 내리고 격자봉 계곡을 찾아 들어가 그곳 일대를 부용동이라 이름 붙이고,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던 것이다.
이후 해남 금쇄동을 오가며 은거하던 윤선도는 66살에 효종의 친서를 받고 실로 18년 만에 상경했지만, 그를 배척하는 서인의 모함에 맞서 칭병(稱病)하며 남양주 고산촌(孤山村)에 머물다 곧 해남으로 돌아가고 만다. 고산촌에 머문 인연으로 호가 고산이 되었고, 이때의 심정을 읊조린 다시(茶詩) 한 편이 전해지고 있다.
‘가파른 산이 인가에 가까우니 풍속도 경박하구나/ 착하고 아름다운 그대 말씀 일찍이 자랑했네/ 좌우 둘레는 첩첩 높은 산봉우리 솟았고/ 앞뒤로는 긴 모래밭 펼쳐 있네/ 거친 차와 궂은 밥도 더 먹지 못하겠네/ 끝내 뜻 맞지 않아 기대한 희망 멀어졌으니/ 오래도록 부용동 옛집이나 추억하려네.’
서인들의 횡포로 조정이 잘못돼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차라리 부용동으로 돌아가 동천석실(洞天石室)에 앉아 차 마시며 정조를 지키고 싶다는 희원의 시다.
보길도 선착장에서 내려 곧장 부용동에 올라가 계곡 물이 휘돌아 흐르는 세연정(洗然亭)에 들렀다가 보길도의 주봉인 격자봉 아래 자리잡은 낙서재 터를 둘러본다.
낙서재에서 유서를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맞은편 산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에 올라가 차를 마셨을 법하다. 부용동 8경 가운데 ‘동천석실의 저녁연기(洞天石室暮煙)’가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땀을 흘리며 동천석실에 올라보니 숙박 취사를 할 수 없는 작은 정자로,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면 차 달이는 연기가 틀림없었을 듯하다. 석실 앞에는 차 부뚜막이었던 바위가 있고, 찻물을 기른 석천(石泉)이 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오우(五友), 즉 물 바위 솔 대나무 달이라는 자연을 벗 삼아 선비로서 수신(修身)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연은 그런 그에게 이슬과 바람과 햇볕, 그리고 하늘과 땅의 기운을 품은 차를 선사했던 것 같다.
☞ 보길도 가는 길 :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보통 2시간 간격으로 보길도 가는 배가 있다. 보길도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리고 승용차도 함께 승선할 수 있다.
화엄사 매표소를 막 지나니 오른편 다리 입구에 조그만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문에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에 최초로 차를 심었다는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하동 쌍계사 옆에도 차 시배지(始培地)라는 기념 석물이 있어 도대체 어느 곳이 최초의 차 재배지인지 헷갈린다.
오늘은 화엄사 측의 주장을 들어본다. 화엄사의 창건주는 연기조사다. 1979년에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廣佛華嚴經)’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화엄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됐으며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전해져왔는데, 사경의 발문 덕분에 연기는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한동안 인도 승려로 잘못 알려져
1936년에 편찬한 ‘대화엄사사적’을 보면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도의 고승’이란 기록은 틀린 부분이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연기는 의상의 제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사신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최초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막연하게 지리산으로 기록되어 시배지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장죽전에 차 씨를 심었다는 근거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裟事跡略錄)’에 나와 있는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장죽전에 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나그네는 다리를 건너 장죽전을 둘러본다. 정자가 두 채 있고, 대렴이 차를 심었다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화엄사에는 야생 차밭이 장죽전말고도 효대(孝臺) 서남쪽과 구층암 천불전 뒷산에 넓게 퍼져 있다고 한다. 효대란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효성스러운 모습의 석물이 조각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연기조사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을 준다. 나그네는 효대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그네도 경험하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우려준 차를 이 세상 최고의 차로 알고 마신다. 어머니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정성을 마시는 것이리라.
이윽고 나그네는 장엄한 각황전을 지나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사사삼층석탑(四獅三層石塔)이 선 효대에 이른다. 국보 제35호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에 앉아서 비구니 스님이 된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지키고 있으며, 머리로는 삼층 석탑을 떠받들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석탑 정면에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해 찻잔을 들고 있는 석물이 있다. 이 석탑을 지키는 탑전(塔殿) 아래에 야생 차밭이 있을 텐데 탑전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할 수 없이 화엄사 법당 뒤편에 있는 구층암으로 가는 산길에 오른다.
구층암에 들러 암주(庵主) 스님을 찾는다. 암주는 명완(明完) 스님인데, 동행한 다우(茶友)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승(茶僧)이라고 귀띔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다루는 손동작이 물 흐르듯 꽃 피듯 자연스럽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소 짓게 하는 스님의 얘기에 문득 앉은 자리가 편안해진다. “이곳 천불전 뒤에도 야생 차밭이 있는데, 400년 넘은 차나무도 있다고 다인들이 이야기합니다.”
스님에게 어떤 차가 좋은 차냐고 묻자, 웃기만 하면서 벽에 걸린 탁본한 그림을 가리킨다. 석굴암에 조각된, 문수보살이 부처에게 한 잔의 차를 올리고 있는 그림이다. 부처에게 차를 올리듯 우려낸 차가 최고라는 뜻이다. 그렇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리는 차가 최고의 차일 것이다. 천년 전,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올린 바로 그 효심의 차가 최고일 터이다.
구례 화엄사에서 차의 본향인 하동 화개(花開)로 내려오면 차 시배지 논란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개는 차 산지로서 지방 관아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차소(茶所)였다. 초의선사도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 리나 잇따라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이로는 이보다 지나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선동(仙洞) 골 밝기 전에 금당 복수(金堂 福水) 길어와서/ 오가리에 작설 넣고 참숯불로 지피어서/ 꾸신 내가 한창 날 때 지리산 삼신할매/ 허고대에 허씨할매 옥고대의 장유화상/ 칠불암에 칠왕자님 영지 못에 연화국사/ …/ 화개동천 차객들아 쌍계사에 대중들아/ 이 차 한잔 들으소서.’
차 민요에 나오는 다인들 가운데서 오늘 나그네가 만나고자 하는 다인은 진감선사다. 선사의 법호는 혜소(慧昭)인데, 스님은 774년에 금마(金馬, 익산)에서 태어나 생선장사하며 빈한한 가정을 돌보다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어찌 매달려 있는 박처럼 나이 들도록 지나온 자취에만 머물러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도(道)를 구하러 나선다. 애장왕 5년(804)에 세공사(歲貢使) 선단의 뱃사공이 되어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의 선맥을 이은 신감(神鑑)선사의 제자가 된다. 스님은 헌덕왕 2년(810)에 숭산 소림사로 나아가 구족계를 받고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수행하다가 도의가 먼저 귀국하자 종남산으로 들어가 3년간 선정(禪定)을 닦는다. 이후 자각(紫閣, 중국 허난성 함곡관 밖의 지명) 네거리로 나와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3년 동안 보시한 후 귀국한다. 이때가 흥덕왕 5년(830)인데, 스님은 장백사(長柏寺, 상주 남장사)에 머물다가 화개곡으로 들어가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창건한다. 스님은 번번이 왕의 부름에 하산하지 않고 불법을 펴다가 문성왕 12년(850) 77살로 입적한다. 탑이나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헌강왕은 스님의 시호를 진감(眞鑒), 탑호를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다.
비문에는 노래(범패)도 잘했던 선사의 가풍이 잘 나타나 있다. ‘성품은 꾸밈이 없고 말 또한 꾸며 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라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은 항상 두 가지가 없었다.’
왕의 부름 번번이 거절 … “탑 기록 남기지 말라” 유언
다인으로서 닮아야 할 청빈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비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중국차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하겠다. 배를 적실 뿐이다, 라고 했다.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거스르는 것이 모두 이러했다.’
그 옛날 중국차는 구하기 어려워 아주 진귀했을 터이다.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마시는 말차(末茶)였던 것 같은데, 진감선사는 말차의 번거로운 과정뿐만 아니라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말하며 맛에 탐닉하는 속(俗)을 경계하고 있다.
나그네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탑비를 보고 나서 진감선사가 찻물로 이용했던 금당 앞의 옥천(玉泉)으로 가본다. 사미승들이 마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돈오문(頓悟門)을 열고 있다. 문틈으로 그 옛날 진감선사의 차 살림이 엿보인다. 참됨을 지키고 속됨을 거스르는 것이 선사의 차 살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는길
화개천 좌우 골짜기마다 펼쳐진 차밭이 칠불사까지 이어져 있다.
‘차 시배지‘기념 석물은 쌍계사 옆에 있다.
쌍계사 055-883-1901
사단칠정 논변 긴장 녹인 차 한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 반해 너브실(廣谷)에 정착해 산다는 강선생 부부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월봉서원(月峯書院)과 애일당(愛日堂) 고택 뒤로 펼쳐진 대숲에서 청랭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숲 속의 반광반음(半光半陰)에서 자란 부드러운 찻잎은 떫은맛이 옅고 단맛이 나므로 쌈을 해도 맛있다고 한다. 강선생의 안내를 받아 고봉의 독서당이던 귀전암(歸全庵) 터에 오른다. 고봉의 아들이 시묘를 하면서 머문 칠송정(七松亭)을 지나 10여분 동안 대숲을 지나치자 고봉의 묘가 나타난다.
고봉의 선대는 서울에서 거주하였는데, 숙부 기준(奇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부친이 세속의 일을 단념하고 전라도로 내려와 터를 잡았기 때문에 고봉은 중종 22년(1527)에 광주 송현동에서 태어난다. 그는 명종 13년에 대과 1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32살의 젊은 고봉은 처음으로 서소문 안에 살던 성균관 대사성이자 원로학자인 58살의 퇴계를 찾아간다. 이후 두 사람은 장장 8년 동안 편지로 논쟁을 벌인다. 그 내용은 이른바 우리나라 사상사(思想史) 최고의 논쟁이라고 일컫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이다. 사단이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이성적 마음씨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이고, 칠정은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이다.
귀전암 터 약수 아직도 졸졸
퇴계는 사단이 이(理)에서,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고 분리해서 보았는데, 고봉은 이와 기를 서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퇴계는 고봉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나그네는 아들뻘인 고봉의 주장을 받아들인 퇴계의 너그러운 인품과 권위에 짓눌리지 않는 고봉의 패기가 그들의 학문적 성과보다도 더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고봉은 퇴계 사후 2년 만인 선조 5년(1572) 성균관 대사성으로 제수되던 해에 병이 나 46살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그래서일까. 고봉의 사상은 9살 아래인 율곡으로 이어져 더욱 빛을 발하지만 성리학 논쟁에 불을 당긴 그의 짧은 생애가 아쉽기만 하다.
명종 앞에서 거침없이 제왕학을 펼쳤던 기대승. 정즉일(正卽一), 즉 ‘옳은 것은 하나’라고 외치며 대신들과의 타협을 뿌리치고 낙향한 그였기에 퇴계는, 선조가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학자를 천거하라 했을 때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기대승은 학식이 깊어 그와 견줄 자가 드뭅니다. 내성(內省)하는 공부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내성이란 대의(大義)에 어긋나더라도 후일을 기약하며 물러서는 차선(次善)의 수용을 말한다. 나그네는 고봉의 다시(茶詩)를 읊조리며 귀전암 터에 이른다. ‘유거잡영(幽居雜詠)’ 15수 중에서 여섯 번째 나오는 시다.
‘해 가린 소나무는 장막 같고/ 마루에 이른 대나무는 발과 같네/ 벽에는 서자(徐子)의 자리를 달았고/ 꽃은 적선(謫仙, 이백)의 처마에 춤추네/ 학을 길들이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차 달이며 시냇물을 더하네/ 사립문 온종일 닫고 앉아/ 홀로 봉의 부리 뾰쪽함을 감상하네.’
낙향한 고봉은 자신의 천재성을 남도의 풍류와 차로 삭였을 것 같다. 귀전암 터에 올라 이끼 낀 대롱을 타고 졸졸 흐르는 약수를 한 모금 마셔본다. 이곳에서 고봉은 스승처럼 존경한 퇴계에게 밤을 새우며 편지를 썼으리라. 눈이 침침해지면 약수를 떠다가 차를 달였을 터이고. 고봉은 사단칠정 논변의 팽팽한 긴장을 차 한 잔으로 숨고르기 했을지 모른다.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장성인터체인지에서 816번 지방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10여분 달리면 월봉서원이 있는 너브실에 다다른다. 문의 062-951-1247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읽고 분개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성삼문이 모진 국문을 받고 죽은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아내 윤씨는 성삼문과 함께 절의를 지켜 같이 죽지 않은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다 다락에서 목매 자살하고 만다. 야사(野史)가 소설화된 내용이지만 그때부터 나그네의 머릿속에는 신숙주가 몰염치한 배신자로만 각인됐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신숙주의 정감 어린 다시(茶詩)를 한 편 접하곤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그네는 경기 의정부에 사는 후배의 승용차를 타고 그의 묘로 향했다.
도갑산 절 작설차와/ 옹기마을 울타리에 떨어진 눈 속의 매화꽃은/ 마땅히 내게 고향 생각의 뜻을 알게 하니/ 남쪽 고을 옛일들이 떠올라 기뻐하노라(道岬山寺雀舌茶 瓮村籬落雪梅花 也應知我思鄕意 說及南州故事多).
이 시는 신숙주의 증조할아버지가 나주 옹촌(瓮村)에서 살 때 친교를 맺었던 영암 출신인 도갑사 수미(壽眉) 스님이 한양의 신숙주를 찾아온 다음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신숙주는 수미 스님이 보내준 작설차를 오래 마셨을 터인데, 고향집의 눈 쌓인 울타리에 떨어진 매화꽃을 잊지 못하는 그의 낭만에 나그네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안목으로 신숙주는 ‘보한재집’에 안평대군이 소장한 222축(軸, 두루마리)의 서화를 비평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았나 싶다. 대단한 예술 비평인 셈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와 여진 토벌 공로 및 탁월한 경륜으로 6대 왕을 섬겼는데도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주나물보다 못한 변절자’로 평가받아왔다.
‘보한재집’ 등 수많은 서적 편찬
신숙주는 조선 태종 17년(1417) 나주에서 태어나 7살에 대제학 윤회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6살에 윤회의 손녀와 혼인한다. 23살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해 전농직장(典農直長)이란 종7품 벼슬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 부제학 등을 역임하다 문종 2년에 동갑지기인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면서 야심가로 변모한다. 수양대군은 연경에서 사은사의 임무를 마친 뒤 신숙주를 데리고 영락제(永樂帝)가 묻힌 장릉(長陵)을 찾아갔다. 영락제는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장조카인 혜제(惠帝)가 등극하자, 그를 죽이고 황제가 된 인물. 영락제는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들이 장릉 앞에 엎드린 것은 암시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단종이 폐위되자, 역모에 가담한 신숙주는 높은 벼슬을 거쳐 세조 8년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법. 성종 6년(1475) 59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왕이 승지를 그에게 보내 뒷일을 물으니, 북방 방비가 소홀하니 급히 조치하라고 아뢴 뒤 “장례를 박하게 지내고 서적을 함께 묻어달라. 불가의 법을 쓰지 말라”고 유언했다.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와 ‘사성통고’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고려사절요’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를 문득문득 괴롭히는 내상(內傷)은 유학자로서 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영욕(榮辱)이 묻을 수 없는 맑은 차 한 잔을 마시며 눈 속에 매화꽃이 피는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봉분은 말이 없다. 아내 윤씨의 봉분이 오른쪽에 있고, 쌍분 좌우에는 문인석이, 묘역 하단 오른쪽에는 성종8년 이승소가 찬(讚)한 신도비가 적적하게 서 있을 뿐이다.
☞ 가는 길
경기 의정부역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청학리 방향으로 15분쯤 가다보면 의정부교도소가 나오고 맞은편에 ‘신숙주 선생의 묘’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고산초등학교를 지나 구성말로 가다보면 왼쪽에 있다.‘영욕의 유학자’ 신숙주의 묘. 부인 윤씨의 봉분과 나란히 있다.
해인사 초입의 계곡 가에서 흐르는 물을 내려다본다. 푸른 낙락장송 사이로 노랗고 붉은 낙엽이 물 위에 점점이 떠 흐르고 있다. 계곡 이름 그대로 홍류동(紅流洞)이다. 건너편 정자 앞 계곡 가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 둔세지(孤雲崔致遠先生遁世地)’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서 있다. 외로운 구름처럼 떠돌다 간 최치원이 은둔한 땅이라는 뜻이다. 정자 이름은 농산정(籠山亭). ‘농산’은 고운이 가야산 홍류동을 읊조린 시 구절에서 빌린 말이다.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사람 말은 지척에도 분간키 어려워라/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 둘러치게 했나(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고운이 가야산을 첫 은둔지로 택한 것은 해인사에 그의 친형인 현준(賢俊) 스님과 친교가 두터웠던 화엄 종장(宗匠·경학에 밝은 사람) 희랑(希朗)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운은 신라 헌안왕 1년(857)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6두품인 견일(肩逸). 12살(868년)에 당나라로 유학 가 6년 만인 17살 때 과거에 급제한다. 20살에 표수현위에 임관되지만 1년 만에 “덩굴풀처럼 누구에게 붙어 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없이 생각해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며 현위를 사임한다. 그러나 녹봉은 곧 바닥이 났고, 설상가상으로 황소(黃巢)의 반란군이 밀어닥쳐 생계가 아닌 생사를 걱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문사 고병(高騈)이 회남(淮南) 절도사로 부임하자 지인의 도움으로 관역(館驛) 순관에 기용된다. 이후 고운은 고병의 신임으로 중요 직책을 맡는다. 서거정이 우리나라 시문집의 비조라고 찬양했던 ‘계원필경’ 20권의 글도 이 무렵에 써둔 것이다.
차밭 드넓은 화개동에서 신선 같은 생활
고운의 차 살림은 중견 관리로서 공·사석의 많은 행사에 불려다닌 이 시기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계원필경’의 ‘사탐청요전장(謝探請料錢狀)’에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 하니 이 편에 차와 약을 부쳤으면 합니다’ 하고 병든 부모에게 차와 약을 보내는 문장이 보인다.
고운은 당의 혼란과 부모의 병환 때문에 28살(884년) 때 귀국길에 오른다. 헌강왕의 환대를 받았지만 벼슬은 경서를 강의하는 시독(侍讀), 문필기관의 부책임자인 지서서감(知瑞書監), 유학한 학자에게 주어지는 한림학사, 병부에 자문하는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을 지냈다. 그런데 헌강왕에 이어 왕의 동생 정강왕마저 1년 만에 죽자, 고운은 진골들의 견제를 받아 지방 태수로 전전한다. 미소년을 불러들여 요직에 앉히는 등 진성여왕의 난정으로 반란이 자주 일어나 신라는 급격히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궁예와 견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에 고운은 진성여왕에게 구국책의 일환으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직언하지만, 여왕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진골 귀족들에게 묵살당하고 만다.
마침내 고운은 42살 때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입산한다. 지리산 청학동과 삼신동, 고운동계곡, 천왕봉 아래 법계사, 차밭이 드넓은 화개동에서도 차를 마시며 신선처럼 살았다. 그가 화개동에서도 살았다는 증거는 ‘지봉유설’에 소개되고 있는 고운의 시 ‘화개동시(花開洞詩)’다.
나그네는 농산정에서 나와 고운과 희랑 스님이 차를 마시며 세상을 논했던 학사대로 가본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각 옆 학사대는 터만 남아 있고, 전나무 한 그루가 못다 펼친 고운의 꿈인 양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을 뿐이다.
☞ 가는 길
88고속도로에서 해인사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해인사 가는 길로 가다보면 국립공원매표소가 나오고 조금 지나면 홍류동 계곡 가에 농산정이 나타난다.
숲 길을 걷다보면 솔 향기와 바람에 온몸이 씻기는 느낌이다. 게다가 솔바람에는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산중의 고독이 묻어 있다. 나그네는 진각국사가 머물렀던 광원암(廣遠庵) 가는 어귀에서 솔바람의 관욕(灌浴)을 누린다.
광원암은 송광사의 1번지 같은 암자다. 송광사를 짓기 전, 백제 무령왕 14년(514)에 가규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고려 때 진각국사 혜심 스님이 거처하면서 수행자의 필독서인 ‘선문염송’ 30권의 편찬을 완성한 뒤 암자 이름을 광원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선문염송’이 넓게(廣) 멀리(遠)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그네는 다시(茶詩)로서 최고의 명시임이 틀림없는 진각국사의 ‘인월대(隣月臺)’를 누구보다 애송하고 있다. 중국의 시선(詩仙) 이백의 시처럼 무한대의 낭만과 상상력이 느껴진다.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그 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은하수로 달인 차 맛과 차 연기가 계수나무에 드리운 풍경은 어떨까. 이미 우주와 한몸이 된 깨달은 자만이 체험하는 선경(禪境)일 터이다. 진각국사는 고려 명종 8년(1178)에 화순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사인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공부하여 신종 4년(1201) 24살에 사마시(司馬試)를 마치고 태학관(太學館)에 들어갔으나 홀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향한다. 극진한 병간호에도 귀향 이듬해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길상사(현재의 송광사)에 어머니의 사십구일재를 지내러 갔다가 보조국사와 인연이 되어 출가한다.
송광사 광원암에 머물며 집필
입산 후 스님은 어느 절에 머물건 간에 낮에는 ‘선문염송’을 집필하고 밤에는 참선하다가 새벽에는 염송에 나오는 게송을 목청 높여 낭랑하게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특히 사성암은 구례읍에서 10리 거리에 있는데, 스님이 축시마다 읊조리는 게송을 듣고는 읍민들이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스님은 광양 백운암으로 보조국사를 찾아가 그동안 공부한 것을 인정받고, 다시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보조국사와 선문답을 나눈 끝에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너는 마땅히 불법으로써 자임(自任)하여 본원(修禪社)을 폐하지 말라”는 은밀한 유지를 받는다.
스님의 나이 33살이 되는 해에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스님은 스승에 이어 수선사의 제2세 법주(法主)가 된다. 이후 스님은 고종 때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나라의 명에 의해 여러 절을 전전하며 수많은 제자를 가르친다. 56살 때에야 수선사로 다시 돌아와 지친 몸을 추스르다가 이듬해(1234년) 화산 월등사로 가 제자 마곡에게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다.
뭇 고통이 이르지 않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나니/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주 고요한 열반문이라 하리라.
이처럼 쉽게 쓴 고승의 임종게도 없을 것이다. 진각국사의 모든 시는 난해하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탁월한 대시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스님은 많은 다시를 남겼는데, 직접 다천(茶泉)을 파기도 했다.
소나무 뿌리에서 이끼를 털어내니/ 샘물이 영천에서 솟구친다/ 상쾌함은 쉽게 얻기 어렵나니/ 몸소 조주선(趙州禪)에 든다.
나그네는 광원암에 이르러 차와 시를 선으로 승화시킨 진각국사의 흔적에서도 솔 향기를 맡는다. 암자에는 몇 줌의 석양 햇살이 구르는 낙엽을 어루만지고 있다.
☞ 가는길: 남해고속도로에서 송광사 나들목(인터체인지)을 빠져나와 송광사에 이르러 계곡 왼쪽으로 난 산길을 타고 10분쯤 오르면 광원암이 나온다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경남 양산 통도사 산자락에서 최고의 명당은 극락암이라고 한다. 그래서 극락암을 제2의 통도사로 가꾸겠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전국의 수행자들이 극락암 선방에서 한 철 공부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그때 극락암에는 고승 경봉 선사가 있었다. 성철 스님이 흐트러진 선풍(禪風)을 진작하신 분이라면, 경봉 선사는 중생교화에 진력하신 분이다. 성철 스님은 제자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으면 다구(茶具)를 발로 뒤엎을 정도로 불벼락을 내렸지만, 경봉 선사는 누구든 불법(佛法)을 물어오면 시자(侍者)더러 차를 달여오게 하여 일완청다(一椀淸茶)를 권했다.
경봉 선사는 다시(茶詩)도 많이 남겼다. 다음의 시는 선사가 설법을 마치면서 읊조리곤 했던 다시다.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천강의 물 위에 어려 있고/ 산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길이 통했네.
滿天風雨散虛空 月在千江水面中 山岳高低揷空連 茶煎香古途通
옛길이란 모든 수행자들이 이르고자 하는 ‘자유의 길’, 즉 번뇌로부터의 해탈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경봉 선사는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3세에 한학을 공부하고 15세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1년 뒤 통도사로 출가한다. 통도사에서 경(經)을 공부하던 중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에 충격을 받고는 바로 참선 수행의 길에 든다. 경남 합천 해인사 퇴설당으로 가서 제산(霽山) 선사의 지도를 받아 용맹 정진하는데, 졸음과 들끓는 망상을 이기려고 기둥에다 머리를 박고 허벅지를 멍이 들도록 꼬집고 얼음을 입속에 머금어 생니가 모두 흔들린다. 그래도 시원찮아 장경각 뒷산으로 올라가 울고 고함을 친다. 스님은 다시 10여년을 정진한 끝에 36세 때, 극락암 삼소굴에서 이른 새벽 무렵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홀연히 크게 깨닫는다. 이후 62세에는 극락암 선원 조실로 추대되고, 91세에 입적할 때까지 극락암에서 유유자적한다.
떠돌이 폐병 환자 정성껏 돌보기도
입적 때 시자가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하고 묻자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라고 대답했는데, 그 임종의 말씀은 불자들 가슴에 오랫동안 감동을 주었다.‘한밤중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뜻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일 터이다.
나그네가 경봉 선사를 흠모하는 이유는 스님의 한없는 자비심 때문이다. 다음의 얘기는 나그네가 통도사 밖에 사셨던 한 노파에게서 들은 사연이다. 60년대 초만 해도 피를 토하는 떠돌이 폐병 환자가 많았다. 그런 환자 중 한 사람이 거지가 다된 꼴로 통도사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받아주지 않자 극락암을 찾았다. 경봉 선사가 혼자서 독경을 하고 있는데, 환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스님, 하룻밤 묵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이 허락했다. 환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스님 얼굴과 옷에 피를 쏟고 난 뒤 쓰러져버렸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자신의 새 가사를 꺼내 환자에게 입혔다. 한 시간쯤 후 눈을 뜬 환자는 면목없어하며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스님은 따뜻한 차로 기운을 내게 한 다음 오히려 환자를 정성껏 돌봐 병을 낫게 하고 제자로 삼았다.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에게도 자비로운 차 한 잔을 권했던 경봉 선사의 자비심을 떠올릴 때마다 진정한 수행자상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훈훈해진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에서 양산에 들어서 통도사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통도사 산문이 나오고, 다시 포장된 산길을 타고 직진해 10여분 달리면 극락암에 이른다.
한겨울 햇살이 축복처럼 따사롭게 쏟아지고 있다. 나그네는 지금 김종직(金宗直)이 경남 함양군수 시절 조성했다는 관영(官營) 차밭 터를 가고 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 차밭을 만든 것은 아마 이것이 역사상 최초일 것이다.
점필재(畢齋) 김종직은 우리나라 도학의 정맥을 이은 사림파의 종조(宗祖)로 불린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는 도학은 정몽주에서부터 비롯하여 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데, 특히 김종직은 사리를 버리고 의를 지키며 행하는 것이 도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했다.
김종직이 관영으로 차밭을 일군 이유도 목민관으로서 애민(愛民)을 실천하고자 하는 도학정신의 구현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의 문집인 ‘점필재집’에서 그는 함양 시절을 회상하면서 차세(茶稅)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나라에 바칠 차가 이 고을(함양)에서는 나지 않는데도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세가 부과되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나라에 차를 바치려고 전라도의 여러 곳에서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얻었다. 내가 이 고을에 부임했을 때 이러한 폐단을 알고 백성들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고 관가에서 구입하여 대신 납부했다.”
김종직은 관가에서 차세를 납부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영 차밭을 일군다. ‘점필재집’에나와 있는 그 사연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 김종직은 ‘삼국사기’를 읽다가 신라 흥덕왕 때 지리산에 당나라의 차씨를 심었다는 구절을 보고는 차나무를 찾는다. 마침내 노인들의 증언을 듣고 인근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에서 몇 그루의 차나무를 발견하고는 땅 소유자에게 보상한 뒤 관청 땅으로 차밭을 조성한다. 차나무가 무성해질 몇 년 뒤에는 차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감회에 젖어 다시(茶詩) 두 수를 읊조린다.
함양엔 ‘차밭 조성 터’ 기념비 세워져
신령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코자 하는데/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네.
대밭 밖 거친 동산 백여평 언덕에/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을 덜게 함이지/ 무이차처럼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네.
지리산 실상사를 조금 지나자 엄천사 터로 추정되는 휴천면 동강리 건너편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 차밭 조성 터’라는 기념비가 눈에 띈다. 그 옛날 김종직이 함양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준 마음에 비하면 오늘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관영 차밭을 실제적으로 되살려 명차를 개발한다면 김종직의 애민사상도 기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세수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함양 군민의 뜻은 어떤지 궁금하다.
나그네는 서둘러 함양읍으로 들어가 김종직이 함양을 떠나면서 너무 일찍 헤어진 늦둥이 아들 목아(木兒)의 넋을 달래기 위해 심은 느티나무를 눈에 담는다. 가족을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을 다시금 새겨보게 하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다. 사거리 건너편에는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함양 태수로서 선정을 폈던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지은 누각인데, 김종직과 그 제자들의 운명을 바꾼 건물이기도 하다. 김종직이 당시 관찰사였던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보고는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누각에서 철거토록 했는데, 시판 철거는 훗날 연산군 때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참혹하게 화를 당하는 ‘무오사화’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 가는 길
88고속도로에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전북 남원시 실상사를 지나 30분 정도 달리면 김종직이 관영 차밭을 조성한 경남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에 이른다. 함양읍에 가려면 동강리에서 지방도로를 타고 20여분 곧바로 가면 된다
커다란 종처럼 하늘 아래 매달린 지리산 천황봉의 정기는 경남 산청군 어디서나 느껴진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여생을 보내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국정에 대해 헌책(獻策)한 곳도 마찬가지다. 3칸 기와집 산천재(山天齋)가 있는 경남 산청군 덕산 땅이 바로 그곳이다. 남명은 그곳에 산천재를 지은 뒤 이런 맹세의 시를 짓는다.
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 다만 천황봉이 상제(上帝)와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거나/ 은하가 십 리이니 먹고도 남으리(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산천재 마당을 지키는 매화나무 고목이 꽃망울을 달고 있다.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에 남명의 혼이 깃든 것 같다. 매화가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꽃들이 겨울 추위에 자취를 감추고 없을 때 홀로 피어 있기 대문이리라. 매화마저 피지 않는 겨울은 얼마나 삭막한가. 가지가지에 피어난 매화나무 꽃망울이 더 이상 움츠러들지 말라고 마음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래서 나그네는 매화를 반갑고 귀한 손님으로 여긴다.
남명도 매화나무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소임은 무엇보다 학문이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기울었을 때 그 반대편에 서서 균형을 잡아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명은 벼슬하기를 철저히 거부한 채 학문을 더욱더 연마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꽃피우게 한 유학자였다. 산천재 마루 벽에 그려진 벽화가 남명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면 벽에는 바둑을 두고, 오른쪽 벽에는 차를 달이고, 왼쪽 벽에는 쟁기질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직언 서슴지 않는 상소로 위상 높아져
남명은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경남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을 익혔다. 19세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극형에 처해지고 숙부 언경(彦卿)이 파직되는 것을 보고는 세상의 부조리를 느꼈다. 25세 때 어느 절에서 ‘성리대전’을 보다가 ‘벼슬에 나아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산림(山林)에 처해서 지키는 것이 없다면 뜻한 바와 배운 바를 무엇에 쓰겠는가?’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달아 과거공부를 단념했다. 그리고 30세 때부터는 처가가 있는 경남 김해 신어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길렀으며, 이후 헌릉참봉·전생서주부(典牲暑主簿)·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대비는 생각이 깊으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어리시어 선왕의 한 고아일 뿐입니다’라고 하여 조야를 크게 술렁이게 했다. 이 같은 직언은 산림처사의 위상을 재고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남명은 만년(61세)에 여생을 보내려고 산천재를 지어 벽에 써둔 경(敬)과 의(義)를 지키며 살다가 72세 때 운명했다. 경과 의는 ‘주역’의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구절에서 연유한 말인데, 이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는 패검에까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구절을 새기고 다녔다. 운명할 때 제자들이 그에게 사후 칭호를 묻자, ‘처사(處士)로 하는 것이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와 경이 남명에게 서릿발 같은 지침이었다면 차와 바둑, 그리고 쟁기질은 그의 삶을 따뜻하게 한 훈풍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남명이야말로 유학자 산림처사로서 냉철한 머리와 훈훈한 가슴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다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 가는 길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단성 인터체인지에서 경남 산청군 지리산 중산리 쪽으로 직진하다가 대원사 가는 삼거리에서 덕산 쪽으로 내려가면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 나온다.
동백꽃이 굵은 눈물처럼 뚝 떨어진다. 작은 부도 앞에도 낙화한 동백꽃들이 흩어져 있다. 나그네는 전남 강진군 백련사 왼쪽 동백나무 숲에서 강진만을 눈에 담는다. 산자락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찻잔처럼 아담하다. 술병이 나 일찍 요절한 아암(兒菴) 혜장(惠藏)은 저 바다를 술잔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혜장은 다산에게 차의 맛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한 승려다. 다산이 혜장을 만난 사연은 해남 대흥사에 있는 혜장선사 탑 비문에 나와 있다.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이라 하는데 다산이 지은 글이다.
‘신유년(1801) 겨울에 나는 강진으로 귀양을 왔다. 이후 5년이 지난 봄에 아암이 백련사에 와서 살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하루는 시골 노인의 안내를 받아 신분을 감춘 채 그를 찾아보았다. 한나절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작별하고 북암에 이르렀는데 해질 무렵 아암이 헐레벌떡 뒤쫓아와서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속이십니까? 공이 바로 정대부(丁大夫) 선생이 아니십니까? 빈도는 밤낮으로 공을 사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와 아암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밤새 차를 마시며 ‘주역’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혜장은 입에서 구슬이 구르듯, 물이 도도하게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과연 혜장은 일찍이 전남 해남의 대둔사(현 대흥사)로 출가하여 나이 30세에 두륜회(학승들의 학술대회)의 주맹(主盟)이 될 만큼 불교와 유교에 밝은 승려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혜장은 유학에서는 다산의 깊이를 넘어설 수 없었다. 밤이 늦어서야 혜장이 처량하게 탄식했다.
“산승(山僧)이 20년 동안 주역을 배웠지만 모두가 헛된 거품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요, 술 단지 안의 초파리 격이니 스스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차 보내달라” 다산, 걸명시 지어
이때 혜장은 34세, 다산은 44세였는데 이후 두 사람은 다우(茶友)가 되어 자주 만난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동문 밖 시끄러운 노파의 밥집에서 조용한 고성암 요사(寮舍)로 옮겨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게 해줌으로써 혹독한 국문으로 생긴 지병이 낫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서 다산은 고성암 요사를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고 불렀다.
혜장은 백련사 부근에서 자라는 어린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보은산방에 있는 다산에게 보내주곤 했다. 다산은 차가 오지 않으면 혜장에게 차를 간절하게 요청하는 걸명(乞茗)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고 ‘혜장이 날 위해 차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그의 제자 색성(湟性)이 내게 차를 주었다며 보내주지 않으므로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하여 (차를) 주도록 끝까지 요구하였다’라는 긴 제목의 시를 남긴 것을 보면 혜장의 제다(製茶) 솜씨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혜장의 호가 아암이 된 연유는 이렇다. 타협할 줄 모르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에게 다산이 “자네도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하고 충고하자, 혜장이 그때부터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지어 부른 것이다. 혜장은 술병이 나 죽기 전 자신의 회한을 읊조린 시 한 편을 다산에게 보낸다.
백수(참선) 공부로 누가 깨달았나/ 연화세계는 이름만 들었네/ 외로운 노래는 늘 근심 속에서 나오고/ 맑은 눈물 으레 취한 뒤에 흐르네.
그는 죽을 무렵에 혼잣말로 ‘무단히(부질없이) 무단히’ 하고 중얼거렸고 한다. 교학에는 일가를 이루었으나 부처에는 이르지 못한 자신의 삶이 부질없다는 회한이었으리라. 다산이 인정한 천재였음에도 술병이 나 40세에 요절한 혜장의 삶이 아쉽기만 하다.
전남 진도는 삼별초의 한이 서린 섬이다. 지금 나그네가 넘고 있는 고개 이름도 왕고개다. 왕 무덤이 있는 고개인데, 삼별초가 주군으로 섬긴 왕온은 소수의 삼별초 군사로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에 맞서 10여일 동안 격렬하게 항전하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나그네는 왕고개에서 발길을 돌려 상록수림이 울창한 첨찰산으로 달린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에는 고찰 쌍계사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말년에 은거한 작업실이다. 소치 가문은 이곳에서 아들 미산 허영, 손자 남농 허건으로 대를 이어 남종화의 진경을 보여준다.
소치는 조선 순조 9년(1809)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년부터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 초동(樵童)으로 들어가 살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는다. 윤선도 고택에는 문인화가 윤두서의 그림과 화첩이 있어 전통 화풍을 익힐 수 있었다. 어린 소치가 차를 알게 된 것은 윤선도 고택에서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찾아가 살면서부터였다. 초의는 시서화에다 차까지 능한 선사였는데, 암자의 자잘한 일을 돕는 동자가 필요했던 터라 소치를 맞아들였다. 어린 소치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초의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봄이 되면 하루 종일 산에서 야생 찻잎을 따야 했고, 초의가 찻잎을 가마솥에서 덖어 내놓으면 그것을 비비고 말렸다. 지방 관리나 추사 김정희 같은 손님이 오면 마당 한쪽에서 주전자 밑에 솔방울을 모아 찻물을 끓이는 일도 소치가 도맡아했다.
궁중화가 되고 벼슬도 지중추부사 올라
따라서 소치는 20대에도 다도 공부만 했을 뿐, 그림 수업은 깊게 하지 못했다. 그에게 전기가 온 것은 초의가 소치의 재주를 알아보고 한양의 추사에게 소개한 뒤부터였다. 소치는 31세 때인 1839년부터 추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웠는데, 추사에게서 중국 대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익혔다. 그는 원나라 말기 산수화의 대가인 대치 황공망의 화풍을 익힌 뒤 자신의 호를 소치라고 했는데, 이때 추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고 평했다. 1846년에는 권돈인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린 그림을 헌종에게 바쳐 여러 차례 왕을 알현한 뒤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칭송받았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로는 해남 우수사 신관호, 다산의 아들 학연, 민승호,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이 있다. 그는 스승인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승을 위로하기도 했다. 추사가 1856년에 죽자, 소치는 다음해 한양을 떠나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한다. 자신의 이름도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의 왕유를 본떠 허유라고 개명한다.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대표작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등이 삼절로 칭송받던 한양생활의 작품이 아니라 말년의 서화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에게는 사교의 시간보다 사색과 고독의 시간이 더 적실한 것이다.
소치에게 차 한잔은 말년의 고독을 달래주는 도반(道伴)이었을 터다. 곤궁해진 그에게 차는 1892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감로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자고로 이름난 사람들을 보아라. 죽을 때까지 불우하여 곤궁하게 지냈다. 내가 일세에 삼절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내 분수에 넘치는 일, 어찌 그 위에 부귀를 구했겠느냐.’
☞ 가는 길
진도대교를 건넌 다음 진도읍으로 가서 의신면 쪽으로 직진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의 첨찰산과 소치가 은거했던 운림산방이 나온다
학포당(學圃堂)은 기묘명현(己卯名賢·조선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류) 중 한 사람인 양팽손의 독서당이고, 쌍봉사는 천년 고찰이다. 나그네가 학포당과 지척에 있는 쌍봉사를 하나로 묶어 얘기하는 까닭은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차(茶)가 바로 그것이다. 쌍봉사 일대의 양지바른 산에는 야생차가 제법 넓은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부터 이 지방 선비나 승려들이 차 살림을 했다는 증거다.
쌍봉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사자산파 개산조 도윤이 입적한 곳이다. 도윤은 당나라 유학승으로 ‘평상심이 도(道)’라고 외친 중국의 남전선사 회상(會上)에서 차의 부처로 불리는 조주와 법 형제가 되어 공부했던 스님이다. 따라서 도윤의 차 살림은 그때부터 시작됐을 터이고, 그가 들여온 차씨로 인해 오늘날 쌍봉사 일대의 야생 차밭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학포 양팽손은 성종 19년(1488)에 능주에서 태어나 중종 5년 20세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고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다. 현량과에 발탁되어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관원 정원,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다 홍문관 교리에 재직하던 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김정 등을 위해 분연히 소두(疏頭·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처음 이름을 적은 사람)한 뒤 삭직된다. 이후 양팽손은 고향인 능주로 낙향하여 쌍봉마을에 독서당을 짓고 여생을 보낸다. 능주에 유배 온 조광조와 매일 만나 경론을 논하다가 그가 사약을 받고 죽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신을 손수 염해 쌍봉사 부근의 깊은 산골에 가매장해준다. 이후 기묘명현들이 복관되면서 그도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매번 사양하다가 1544년 용담현령에 잠시 나아갔다 병환으로 곧 사임하고 다음해 58세로 눈을 감는다.
조광조도 생전에 학포 인격에 대해 극찬
이와 같은 그의 일생을 볼 때 조광조가 살아 생전에 그를 일컬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芝草·영지)나 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평했던 것이 결코 과장의 덕담만은 아닌 듯하다.
한편 학포는 문장과 서화로도 크게 명성을 얻은 선비다. 안견의 산수화풍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학포는 후기의 윤두서, 말기 허련과 함께 호남의 3대 문인화가로 불리며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를 비롯해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사군자’ 같은 그림에도 능했는데, 나그네가 주목하는 그림은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연지도(蓮芝圖)’다. 학포의 후손이 1916년 추사의 본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며, 다기(多器)와 함께 연꽃, 영지가 그려진 두 폭으로 그가 차 살림을 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선비의 사랑방이나 독서당에 걸어놓는 책가도(冊架圖·18~19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정물화로 책, 벼루, 먹 따위의 문방구류를 기본으로 꽃병, 주전자 등을 배합해 그렸다) 계열의 그림에는 다기가 그려진 작품이 흔치 않아 학포당에서 여생을 보낸 그가 차를 마시는 쌍봉사 선객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조광조의 시신을 가매장한 터가 능주에서 수십 리 떨어진 쌍봉사와 가깝다는 점도 당시 수행자들하고의 교분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차의 성품(茶性)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맑고 향기로운 것이다. 조광조가 학포를 가리켜 “맑고 향기로운 사람”이라고 평한 것을 보면 학포야말로 차 향기를 닮은 선비였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진정한 다인이란 차를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차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 가는 길
전남 화순에서 장흥과 보성 가는 길로 바로 가다 보면 이양면소재지가 나오고 다시 보성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쌍봉마을 어귀에 학포당 표지판이 나온다.
차를 대중화하는 데 효당 최범술만큼 공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다도계의 정설이다. ‘한국의 차문화’ 저자 운학 스님도 “효당의 다통(茶統·차살림)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사 그의 다통에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차를 이만큼 인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 다승들이 머물렀던 경남 사천의 다솔사. 차가 아니더라도 정겨운 절 이름이 주는 매력 때문에 꼭 가고 싶었는데, 막상 절에 당도하고 보니 듣던 대로 다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법당 뒤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차 밭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차 밭에 그늘을 드리우는 편백나무 숲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효당만큼 이력이 다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승려이자, 3·1운동 때는 영남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훗날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치가, 국민대학을 창설한 교육자, 다도인 등등이다.
1904년에 다솔사 앞마을에서 태어난 효당은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6년에 다솔사로 출가한다. 그는 승려 신분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쇼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박렬의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돕고자 상하이로 건너가 폭탄을 운반한다. 이 때문에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단재 신채호의 유고를 간행해 또 한 차례 고초를 겪는다. 그 뒤 만해 한용운의 제자가 되었으며 해방 뒤에는 해인사 주지를 지내는 등 다양한 경력과 일화를 남기면서 60년 그의 나이 56세를 분기점으로 하여 79년 입적 때까지 다솔사 조실로 주석하면서 자신의 여생을 차로 회향한다.
독립운동하다 8개월간 옥고 치르기도
그의 다도는 엄격했으며 차 맛은 짜기로 유명했다. ‘짜다’는 말은 다인들의 은어로 차의 맛이 진하다는 뜻. 나그네가 극락암 선원장 명정스님에게서 들은 얘기다.
“탕관에서 물을 푸기 전에 선방에서 입정(入定)하듯 차 도구로 탁탁탁 치더군요. 무릎을 꿇고 찻잔을 돌리는데 찻잔에서 손을 뗄 때는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바쁜데 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바쁘기는 뭐가 바빠.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자기가 만들어서 바쁜 것이지’ 하고 핀잔을 주더군요. 또 효당의 차는 매우 짠데 마치 소태 같았습니다.”
효당은 다솔사 작설차의 맛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말년에 그를 찾아온 다인들에게 어린 사미승 시절 노승에게서 들은 구전을 들려주며 회상하곤 했다. 다솔사 작설차 맛은 하동 화개 차나 구례 화엄사 차보다 나았다는데, 실제로 산지를 구별하여 차와 쇠고기를 넣고 같은 물에 끓여본 결과 화엄사 차를 넣은 쇠고기는 단단하고, 화개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부드러우며, 다솔사 차가 들어간 쇠고기는 흐물흐물 물러지더라는 것이다. 효당은 스스로 다솔사의 상품차를 ‘반야로’, 다음 등급을 ‘반야차’라고 이름 지어 보급했다는데 나그네는 지금 그 맛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최근에 어느 시민단체에서 효당이 친일 변절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는데,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이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김 교수의 주장은 한마디로 효당의 북지황군위문사 활동이나 다솔사의 내선불교학술대회 개최는 항일 세력을 돕기 위한 협력 또는 위장이었다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일제 청산이라는 본질 자체를 흐리게 할 수도 있으므로 재삼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남 장성군을 지나다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장성군에서 내건 광고판에 ‘홍길동의 고장’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실존인물인가 싶어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해보았더니 연산군에서 선조 때까지 ‘도적의 괴수’라는 내용으로 여섯 번이나 기록돼 있다. 장성군은 홍길동이 세종 22년(1440)에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하고 있다.
허균이 실존했던 홍길동을 참고하여 ‘홍길동전’을 썼는지도 모른다. 소설가는 역사가들이 단죄한 인물을 변호하고 누명을 벗겨주기도 하니까. 역사는 홍길동을 도적으로 몰지만,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의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금 나그네는 오대산 우통수(于筒水)의 물로 차를 달이고 싶다고 노래한 허균의 다시(茶詩)를 떠올리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전략) 봄 지난 들꽃은 병든 눈을 닦아주고/ 비 갠 뒤 산새들은 조용한 잠을 청하는 듯/
찻사발에 달인 차로 소갈증이나 낫게 하고 싶지만/ 어찌 우통(于筒)의 으뜸가는 샘물을 얻으랴.
우통수는 남한강의 발원지인데, 다천(茶泉)의 성지로서 다인들의 발길이 잦은 샘이다. 우통수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 문신 권근의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수정암이란 상원사 1인 선방인 염불암을 말한다. 나그네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우통수는 염불암 입구에 있다.
허균은 조선 선조 2년(1569)에 명문가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서경덕의 제자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엽(曄)이고, 임진왜란 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제며, 봉()과 난설헌(蘭雪軒)은 동복형제다.
남한강 발원지 다천의 성지
허균은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유성룡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이달에게서 시를 익혔다. 그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해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지만 기생을 가까이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만다. 곧 복관하지만 수안군수 때 불상을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또다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막힘없는 학식으로 이름을 떨쳐 삼척부사가 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불교를 믿는다는 감찰을 받아 파직되어 부안으로 내려가 기생 계생(桂生)과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柳希慶)과 교분을 나눈다. 이때 호남지방의 의적 홍길동의 얘기를 전해 듣지 않았을까 싶지만 정확한 고증은 사학자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후에도 그는 몇 번의 복관과 파직을 거듭하다 결국 역적모의했다는 죄명으로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는 정해진 규범 같은 것을 따르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하는 자유인의 기질이 강했던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의 학문과 재주를 인정하여 조정에서는 번번이 복관을 시키지만, 그는 제도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탈해 살았던 것이다.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이이첨 같은 권세가에게 붙어 아부도 하고, 유교국가에서 감히 불교를 신봉하는가 하면 양반들이 멸시하는 서류(庶流) 출신이나 천민, 기생과 어울렸던 것이 그 예다.
우통수에 이르러 물 한 모금으로 산길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른다. 우통수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안개처럼 모호했던 허균이 차를 달이고 싶어했던 샘물이다. 이 샘물이 한 방울 흘러 한강이 된다. 나그네는 지난해 이 샘물로 너와집 암자 염불암의 선승과 함께 차 한잔 대신 점심 공양 때가 되어 국수를 끓여 먹은 적이 있다. 우통수의 물로 차를 달여 마시고 싶다는 허균을 생각하며.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에서 진부인터체인지로 나와 전나무 가로수
길로 곧장 가면 월정사, 상원사에 이른다. 거기에서 2.8km 떨어진 곳에 우통수와 염불암이 있다.
상백운암(上白雲庵)은 전남 광양의 백운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암자(해발 1040m)로, 현대의 고승인 구산 스님이 9년 동안 수행한 곳이다. 암자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처진 바위는 힘찬 기운을 뿜어내고, 차 맛을 내는 조건 중 최고인 석간수(石間水)의 맛은 깊고 달다.
길상사(현 전남 순천 송광사) 1세 사주(師主) 지눌도 바로 저 돌샘 물로 차를 달여 마셨을 것이다. 좌선을 오래 하다 보면 망상이 고개를 들고 졸음이 오는데, 이때 맑고 향기로운 한 잔의 차는 온몸에 활기를 주고 느슨해진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그래서 선가에 다선일여(茶禪一如)란 말이 생긴 것이다. 지눌이 남긴 다시(茶詩)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 비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을축년(1205) 가을,
보조국사가 억보산(현 백운산)에 있을 때
진각국사가 선승 몇 사람과 보조국사를 뵈러
가는 길에 산 밑에서 쉬는데, 암자와의 거리가 1000여 보나 되는데도 보조국사가 암자
안에서 시자 부르는 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보조국사의 게(偈)는 이러하다.
아이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에 울려퍼지고/
차 달이는 향기 돌길 바람에 전해온다네
(呼兒響落松蘿霧 煮茗香傳石經風).’
지눌이 달이는 차 향기가 1000여 보나 떨어진 곳까지 바람결에 풍겨왔다는 내용은 그가 차를 즐겨 마셨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지눌의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고,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8세 때 사굴산파의 종휘 스님에게 나아가 승려가 된 뒤 밤낮으로 공부하여 명종 12년(1182) 25세 때 승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대중과 정혜결사를 맺고 수행정진을 맹세했으나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결사를 뒷날로 미룬다.
교계의 부질없는 쟁론 질타하기도
이때 고려불교는 선종과 교종이 서로 대립했는데, 지눌은 선교일치의 태도를 고수했다. 따라서 지눌은 불(佛)에 의지하여 정진하기도 했던 바, ‘육조단경’의 ‘진여 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 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라는 구절에 첫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이후 지눌은 마음을 닦으며 정진하는 동안 대장경을 읽다가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하는가’ 하고 교계를 질타한 뒤, 팔공산 거조사로 옮겨 동지들을 모아 ‘정혜결사문’을 선포한다.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언으로 그 방법은 정혜쌍수, 즉 정과 혜를 함께 닦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눌은 8년 만에 결사한 대중 중에 일부가 초심을 잃자, 거조사를 떠나 36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 머물며 ‘대혜어록’을 보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구절에서 홀연히 크게 깨닫는다.
이어 지눌은 희종의 명을 받아 길상사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선풍을 크게 일으킨다. 길상사를 중심으로 백운암, 규봉암, 조월암 등을 오가며 안거한 지 10여년, 지눌은 대중을 불러 모아놓고 주장자를 세 번 치면서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화두 같은 법문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에서 광양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우회전해 2분여 가다 다시 옥룡면 쪽으로 우회전해 곧바로 가면 백운암 이정표가 나온다. 상백운암은 백운암에서 다시 20여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수행자의 발우
나그네가 서원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사계 김장생 선생이 제자를 양성한 ‘돈암서원’이다. 돈암서원은 우리나라 3대 서원 중 하나이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예외적으로 보존되었던 곳이지만, 그런 역사적인 이유보다는 다분히 개인적인 사연이 있어서다.
차례(茶禮)를 지내면서 왜 차가 올려지지 않을까 하고 어린 시절에 늘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10여년 전 어느 날 예를 다룬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예학의 태두 김장생의 ‘가례집람’ 강의를 듣다가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차례(朔望茶禮)’ 때는 신주 오른쪽에는 술잔을, 왼쪽에는 찻잔을 놓는다는 대목에서 “아, 그래서 차례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가 됐다. ‘가례집람도설’의 ‘제기도(祭器圖)’에는 찻잔과 다선(茶), 다탁(茶托), 다완(茶碗) 등 다구들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계 선생이 평소에 차 살림을 했으며 차에 대한 지식이 깊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제사에 대한 사계 선생의 정의는 참으로 명쾌하기만 했다. 사계 선생이 일찍이 향리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오늘 집안의 개가 새끼를 낳아 불결한데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제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폐할 수 없는 일이니 제사를 지내도 불가함이 없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또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묘호란 때는 노구 이끌고 의병 모아
선생을 모시고 있던 사람이 선생의 말을 의심스러워하자 선생은 “앞사람은 정성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내고자 하지 않았고, 뒷사람은 정성이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이다. 예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계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아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조선인 사정에 맞게 예학을 정립했다. 명종 3년(1548)에 한양에서 태어나 10대에는 송익필에게서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고,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 계휘의 권유로 20세 무렵에는 이이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후 사계는 ‘창릉참봉’이 되고,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뒤 품계가 낮은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때는 ‘정산현감’이 되어 백성들의 피란길을 도왔으며, ‘호조정랑’이 되어서는 명나라 원군의 식량조달을 담당했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전부’가 되고, 2년 후 ‘익산군수’로 나갔다가 북인이 득세하자 사직하고 연산으로 내려간다. 정묘호란 때는 팔십 노구를 이끌고 ‘양호호소사’를 맡아 의병을 모으고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혔다. 후에는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한 달 만에 낙향하여 예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한다. 물러난 학자였지만, 서인의 영수 격이 된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사계의 저서는 거의 예학에 관한 것으로 ‘상례비요’ ‘가례집람’ ‘전례문답’ ‘의례문해’ 등이 있고, 제자로는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다.
나그네는 유생들이 사계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응도당’ 앞에서 차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일반 가정에서 차례 때 차 대신 물을 올리는 것은 그만큼 차가 귀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문무왕이 수로왕의 제사 때 차를 올리라고 한 것이나 ‘조선왕조실록’에 차가 제물로 올려졌다는 기록이 수없이 나오는 만큼, 더구나 지금은 차가 대중화돼가고 있으니 차례 때는 물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다.
서울 강남에 봉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법정스님에게서 당신이 봉은사 다래헌에 계셨을 때는 강북에서 절을 가려면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변화는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하다.
봉은사는 조선 중기에 허응당 보우가 주지로 있으면서 유명해진 절이다. 보우는 문정대비의 신임에 힘입어 꺼져가던 전등(傳燈)의 불길을 되살려낸 인물로 그가 문정대비를 설득, 조선에 들어서 없어진 승과제도를 부활시킨 덕에 서산대사로 더 알려진 청허 휴정선사나 사명당 유정선사 같은 걸출한 고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경내에는 갖가지 소담스런 연등이 걸려 있다. 나그네도 마음속에 연등을 하나 켜고 보우스님의 진영이 봉안된 영각(影閣)으로 오른다. 영각 안으로 드니 주불(主佛)인 지장보살 왼편에 보우, 청허, 사명스님 순으로 진영이 모셔져 있다. 나그네는 참배를 하면서 상념에 잠긴다.
그 누가 나처럼 이 우주를 소요하리/ 마음
따라 발길 마음대로 노니는데/ 돌 평상에
앉고 누우니 옷깃 차갑고/ 꽃 핀 언덕
돌아오면 지팡이 향기롭네/ 바둑판 위 한가한 세월은 알고 있지만/ 인간사 흥망성쇠 내
어찌 알리/ 조촐하게 공양을 마친 뒤에/
한 줄기 차 달이는 향기 석양을 물들이네.
도첩제·승과제도 부활에 큰 구실
산승의 면모를 물씬 풍기는 보우의 다시(茶詩)다. 사극에 나오는 권승(權僧)이나 요승(妖僧)의 모습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우리 역사를 하나하나 바로잡고 편견 없이 볼 일이다.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집에서 태어난 보우는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사로 출가해 6년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고 ‘화엄경’ 등 모든 대장경을 섭렵한다. 이후 ‘주역’까지 통달하여 저잣거리의 유학자들과 널리 교유하다 그들의 천거로 중종의 어머니인 문정대비를 만난다. 문정대비의 신임을 얻은 보우가 첫 번째로 한 일은 횡포가 심한 유생을 본보기로 처벌하게 하고 전국의 사찰에 방을 붙여 잡된 유생의 난입을 금지한다. 이에 유생들은 보우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보우는 그들에게 맞서 불교의 기틀을 하나하나 다져나간다.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도첩제도와 승과제도를 다시 시행하여 승려의 위의(威儀)를 지키고 자질을 향상시킨다. 이때 400건이 넘는 유생들의 상소는 조정을 들끓게 한다. 결국 보우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문정대비가 죽고 난 뒤 바로 체포되어 제주도로 귀양 간다. 그리고 귀양 간 지 며칠 만에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수많은 유생과 맞서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키려고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순교한 것이다.
보우를 죽이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극에 달하자, 보우는 차 한잔을 마시며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길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숭유배불(崇儒排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유생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불같이 밀어붙여 전등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한 보우의 삶이 오늘 따라 더욱 크게 느껴진다.
영각을 내려오니 판전(板殿)이라고 쓰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의선사의 스승이던 추사 역시 다인이 아니던가. 고졸미(古拙美) 넘치는 판전이란 편액을 쓰고 사흘 뒤 죽었다고 하니 추사가 남긴 마지막 글씨인 셈이다. 나그네가 찾는 다인의 흔적이란 점에서 반갑고 정겹다.
가는 길: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6번 출구로 나와 아셈타워 쪽으로 100m쯤 걸어가면 봉은사 어귀가 보인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인터콘티넨탈 호텔(코엑스) 맞은편으로 가면 된다.
이른 아침, 낙산사에서 나와 강릉 가는 길에 선교장(船橋莊)을 들른다. 선교장의 다정(茶亭)인 활래정(活來亭)을 보기 위해서다. 이른 아침이어선지 선교장에 든 사람은 나그네 일행뿐이다.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친절한 자원봉사자가 안내를 자청한다. 남편을 따라 강릉에 정착했다며 활래정부터 설명하기 시작한다. 봉사에서 우러난 말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때마침 활래정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봉사자의 마음처럼 곱다. 활래정이란 다정의 이름은 송나라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西遺感)’이란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작은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져/ 하늘과 구름이 함께 어리네/ 묻노니 어찌 그같이 맑은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 活水來).
활래정 연못의 근원은 선교장의 뒷산 태장봉이다. 태장봉의 계곡 물이 연못으로 흘러와 늘 맑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은 다시 경포호로 들어가는데,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 )가 활래란 말을 빌려온 이유는 수신(修身)을 이야기하고 있음일 터다. 마음이 청정하여 거울처럼 되면 하늘과 구름이 오롯이 찾아드는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활래정은 창덕궁의 부용정을 모방해 지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다정 중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활래정 처마 밑에는 다녀간 시인 묵객들의 시가 어지러울 만큼 즐비하게 붙어 있다. 추사 김정희에서부터 근세의 몽양 여운형까지 많은 다인(茶人)들이 시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오천(烏川) 정희용(鄭熙鎔)의 칠언시에는 당시 활래정에서 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조선 후기 선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략) 느지막이 휘장 치고 동자 불러 차
한잔 얻으니/ 난간에는 퉁소 부는 객이 있어
차향 속에 잠겨 있네/ 그중에서 신선의
풍류 얻을 수 있으니/ 아홉 번이나
티끌세상이 헛되이 긴 줄 알겠구나.
창덕궁 부용정 모방한 건물
동자가 차를 달여 나르는데, 다정의 난간에는 퉁소를 부는 객이 있고, 주인과 손님이 마주 앉아 정겹게 다담(茶談)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활래정을 지은 오은은 강릉에 터를 잡아 선교장을 지은 효령대군의 11세손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의 손자인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만석의 농토를 재력 삼아 풍류를 즐긴 은둔거사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풍류는 격조가 있어 한양의 선비들이 험준한 대관령을 넘어 선교장을 찾아왔는데, 특히 추사는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편액과 병풍, 다시(茶詩)를 남겼다.
차를 마시는 전용공간인 다정이, 그것도 궁궐의 누각인 부용정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은 차문화의 전성기를 상징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사실 활래정은 순조 16년(1816), 오은 나이 46세에 지어졌으니 당시는 다산초당의 정약용, 일지암의 초의선사, 정조의 부마(사위)인 해거(海居) 홍현주, 다시를 가장 많이 남긴 자하(紫霞) 신위 등 쟁쟁한 다인들이 차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던 시대인 것이다.
나그네는 문득 창덕궁 부용정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고 만다. 언젠가 부용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종교적 신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의 연을 다 뽑아버렸다고 해서 법정스님과 함께 비 오는 날 현장 확인(?)에 나선 적이 있었다. 스님은 사실을 확인하고 어느 신문에 칼럼을 게재하여 곧 원상복구됐지만 연꽃이 무슨 죄가 있었는지 씁쓸하다. 차 한잔에 편견을 버리는 것도 다인의 정복(淨福)이리라.
☞ 가는 길
양양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강릉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경포대 어귀에 있는 경포동사무소를 지나 2분 정도 가면 선교장에 다다른다
작설차의 영묘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네
태종 때 벼슬 사양하고 치악산에서 生 마감
화개에서는 작설차를 사투리로 ‘잭설차’라고 부른다. 그 잭설차는 우리가 아는 작설차와 다르다. 화개에 대대로 전해져오는 작설차는 차를 우렸을 때 황색이 나는 발효차인 것이다. 그런데 작설차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시가 있었으니, 바로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남긴 다시(茶詩)다. 나그네는 지금 운곡 선생이 말년에 은둔했던 원주 치악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운곡은 조선 초의 문인으로, 원주에서 태어나 고려 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치악산으로 숨어들어 부모를 봉양하며 생을 마친 이다. 그가 남긴 다시는 이렇다.
그리운 서울 소식 숲 집에 이르니/ 가는 풀에 새로 봉한 작설차여라/ 식사 뒤의 한 사발은 두루 맛있고/ 취한 뒤의 세 사발은 가장 뛰어나고 자랑스럽네/ 마른 창자 적신 곳에 앙금도 없고/ 앓는 눈 열릴 때 현기증 없어지네/ 이 물건 영묘한 공덕 시험은 헤아리기 어렵고/ 시마(詩魔)가 다가오니 수마는 없어진다네.
굳이 시 전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운곡이 마신 작설차와 화개 노인들이 말하는 작설차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서다. 화개 사람들은 원래 작설차를 기호식품으로 마시지 않고, 속이 더부룩하거나 감기에 걸렸거나 체했을 때 상비약으로 마셨다고 한다. 운곡 선생의 시에도 ‘취기를 가라앉히고 현기증을 없앤다’고 한 부분이 있다. 나그네도 화개에서 생산하는 명경차를 장복하고 있는데 그 효험을 실감하고 있다.
태종이 치악산까지 찾아와 삼고초려
또 하나 일치하는 것은 사발에 우려 마신다는 점이다. 발효차이기 때문에 녹차처럼 작은 잔에 마시지 않고 사발에 마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발효차였던 작설차가 언제부터 지금 우리가 마시는 녹차로 변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조선시대 중·후기가 아닐까 싶은데, 다산이나 초의가 남긴 시문의 차 달이는 구절이나 묘사를 보면 짐작되는 것이다.
운곡은 일찍이 이방원(태종)을 가르친 적이 있어 태종이 즉위한 뒤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내세워 번번이 거절한다. 그가 치악산에서 출사하지 않은 까닭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다. 그의 절개를 담은 회고시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바 그대로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그래도 태종은 운곡이 사는 치악산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운곡을 만나지 못하고 대신 그의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지금의 풍기) 현감으로 임명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운곡을 삼고초려한 것을 보면 운곡의 학문과 인품이 절로 느껴진다. 전해지는 운곡의 시문은 대부분 충의심을 고양하는 내용들로 유명하다. 특히 운곡은 말년에 저술한 야사 6권을 자손에게 보이며 “이 책을 가묘에 갖춰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했지만, 증손대에 이르러 조선 왕조를 거스르는 부분이 많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원주 시가지를 벗어나 치악산으로 들어가니 과연 운곡을 기리는 사당을 중심으로 왼편 골짜기에는 문중에서 건립한 시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는 둔덕 같은 큰 무덤이 있다. 묘비의 명문 중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고려국의 아들이라는 ‘고려국자(高麗國子)’다. 자(子)라는 한 글자가 하늘이 내린 훈장처럼 눈부시다. 생전에 즐겨 마셨을 작설차 한 잔을 운곡 선생 무덤 앞에 올리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가는 길
원주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치악산 황골 쪽으로 들어서 향로봉 가는 길로 5분 정도 가면 석경마을 입구가 있는데, 거기서 800m 떨어진 곳에 운곡의 사당과 무덤이 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당파에 따라 칭송과 비판이 극명하게 갈리는, 조선 후기의 학자 우암 송시열의 생애도 그렇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사후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전국적으로 70여 개소, 사액서원만도 37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영조 20년에는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당파 간의 상반된 평가를 잠재운다.
우암이 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가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잘 알다시피 김장생은 예학을 정립한 자신의 저서 ‘가제집람’에 차를 다루는 지식도 정리해놓았을 뿐 아니라 차 심부름을 하는 다동(茶童)을 두고 차 살림을 했다. 그러니 스승의 예학을 충실하게 발전시킨 우암도 자연스럽게 차 살림을 했을 터다. 우암은 자신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서에 다음과 같이 차를 권장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차에 대한 풍속이 없다. 그래서 숭늉으로 이를 대신할 수밖에 없으니 부득이한 일이다. 이를 이른바 손(飡)이라 하는데, 이는 밥을 물에 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번거로우니 차를 사용하는 의례를 따르도록 하고, 밥을 물에 말지 않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당쟁 한복판 파란만장한 생애
제사 때 번거로움을 피해 밥을 물에 마는 ‘손(飡)’을 차(茶)로 대신하라는 권유는 스승 김장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우암 자신도 이미 차의 정갈한 맛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사에서는 정성이 최고의 덕목인 바, 차야말로 제사상에 올라가는 어떤 음식보다도 맑고 향기로운 재물이 된다.
우암은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학문은 8세 때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시작하여 12세 때는 부친에게서 ‘격몽요걸’ 등을 배우며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마음에 새긴다. 혼인한 뒤부터는 김장생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우고, 김장생이 죽고 난 뒤에는 김집(김장생의 아들) 밑에서 학문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에 장원급제했고 곧 봉림대군(효종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이름)의 사부가 되어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우암은 낙향하여 10여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다. 훗날 효종이 즉위하자 우암은 다시 관직에 나아가 효종과 은밀하게 독대하며 북벌 의지를 다진다. 효종은 대군 시절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자 하는 원한이 깊었고, 우암은 명나라의 주자학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차원에서 청나라를 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이를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우암은 다시 재야로 돌아가 또 10여년을 고향마을에 묻혀 산다. 다시 효종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조판서에 오르지만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조대비의 복제(服制)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과의 당쟁을 피해 또 낙향한다. 이후 현종 때 좌의정과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잠시 관직에 나아갔을 뿐이었다.
효종비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도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 역시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를 떠난다. 이후 서인들의 재집권으로 정계에 복귀했다가 기사환국 때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다가 83세 때 서울로 압송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예송이 일어날 때마다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가 문란하게 된다”며 서인과 남인, 또는 서인 중에서도 노론과 소론 등의 당쟁의 한가운데에 섰던 우암에게 차 한잔은 어떤 의미였을까. 주자의 교의를 실천하는 덕목 중에서 정직(正直)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던 그이고 보면, 그에게 차 한잔은 정직을 맹세하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한재 이목
다인들은 한재(寒齋) 이목(李穆)을 차의 아버지(茶父) 혹은 다선(茶仙)이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다부(茶賦)’는 1321자의 짧은 차 노래지만 이목의 선비사상과 도학정신, 차에 대한 안목의 깊이를 헤아려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한 이목이 차 살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24세에 중국 연경을 다녀온 뒤부터였다. 특히 이목은 중국 다성(茶聖) 육우의 ‘다경(茶經)’과 마단림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구해 보고는 중국차 산지와 유적지를 돌아보며 차 맛에 매료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차에 관한 논문 같은 ‘다부’를 보면 차와의 인연을 얘기한 서문에 이어 본론에는 중국차 품종과 산지 및 풍광, 차 달이기(煎茶)와 마시기(七修), 그리고 차의 공과 덕에 대해, 결말에는 차를 예찬함과 동시에 ‘내 마음의 차’라며 다심일여(茶心一如)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목의 성품은 강직함 그 자체였다. 성종 때 정승 윤필상의 작태를 보다 못한 이목이 ‘윤필상을 삶아야 비가 내릴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윤필상이 “네가 정말 나의 늙은 고기 먹기를 원하느냐”고 힐난하자 이목은 대꾸도 않고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악연으로 이목은 윤필상의 참소(讒訴)를 받아 28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茶賦’에서 내 마음의 차 노래
이목은 14세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19세 때 진사에 합격한 뒤 성균관 학생이 되어 유생들과 어울렸으며, 24세 때 연경에 가 육우의 ‘다경’을 읽고는 차와 인연을 맺는다. 귀국 후 25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문명을 떨치기도 하지만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윤필상을 탄핵하려다가 오히려 공주로 유배를 간다. 윤필상이 대비의 뜻을 받들어 성종에게 숭불(崇佛)을 권유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이목은 왕 앞에 나아가 윤필상에게 벌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목에게 “네가 감히 정승을 간귀(奸鬼)라 하느냐”고 역정을 냈다. 그러나 이목은 “필상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귀신임이 분명합니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이목은 연산군 1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적(典籍)과 종학사회(宗學司誨), 영안도평사 등을 역임하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또한 임금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비극을 맞지만, 훗날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된다.
나그네가 다인으로서 이목을 주목하는 까닭은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다부’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다신(茶神)이 기운을 움직여 묘경(妙境)에 이르면 저절로 무한히 즐거우리. 이 또한 내 마음의 차이거늘 굳이 밖에서 구하겠는가(神動氣而入妙 樂不圖而自至 是亦吾心之茶 又何必求乎彼也).’
이목이 ‘차의 아버지’이자 ‘차의 신선’으로 불리는 까닭은 ‘다부’를 화룡점정 하는 이 한 구절 때문이다. 이목에게 차 한 잔은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약이 아니라,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라는 마음과 차가 둘이 아닌 하나로 승화되는 다인이 지향해야 할 구경(究竟)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도 도학사상을 차 한 잔에 녹여낸 이목을 진정한 다인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에서 유성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동학사 입구를 지나 반포면 면소재지에 이르면, 농협 건물 뒤편에 있는 이목을 배향한 충현서원이 보인다
진정한 다인이 되려면 직접 차씨를 심고 길러 차를 덖어 마셔야 한다. 그래야만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노동의 신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 비승비속(非僧非俗)이 되어 설잠(雪岑)으로 불리던 그야말로 요즘의 다인들이 존경할 만한 참다인이 아니었나 싶다. 자연의 축복과 인간의 수고를 모르고 어찌 차 한 잔의 소중함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나그네는 일찍이 경주 금오산을 찾아가 김시습이 차를 심고 가꾸었다는 용장사 터를 둘러본 적이 있다. 김시습이 그곳에 매월당이란 산방(山房)을 지어 한양에서 구한 책 10만 권을 쌓아놓고 독서하며 차나무를 길렀던 것이다.
집 북쪽에 차를 심으며 낮을 보내고
산 남쪽에서 약초를 캐며 봄을 보내네
(堂北種茶消白日 山南採藥過靑春).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들리는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8개월 만에 글자를 깨쳤고, 3세 때 시를 지었으며 5세 때 세종에게 불려가 장래 크게 쓰일 것이라는 전지를 받고 오세(五歲)라는 호를 가지게 된 김시습. 이후 그는 13세까지 대사성 김반 등에게서 사서삼경 등을 배운다. 그러나 15세에 어머니가 죽자 학문을 잠시 접고 어린 나이에 시묘살이를 한다. 그 뒤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학문에 힘쓴다. 그가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입신양명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그의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후지(後志)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파란만장했던 천재의 삶 차 마시며 독서와 저술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려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중략) 도(道)를 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홀로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김시습의 마음이 잘 나타난 구절로, 당시 그는 중흥사에서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해버린다. 이후 그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만행하다 책을 구하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간곡한 권유로 내불당에서 불경언해를 돕기도 하는데, 왕위찬탈의 주역들이 세도를 부리는 현실에 절망하여 31세 때 경주 금오산에 은거해버린다. 이후 세조의 원찰인 원각사 낙성회(落成會)에 나아간 적도 있으나 대부분 매월당에서 차를 벗삼아 독서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쓰고 산거(山居)를 소재로 한 시편들을 모아 ‘유금오록’를 남긴다. 7년 세월의 은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10여년을 보내다 돌연 47세에 안 씨를 맞아들여 환속을 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비윤씨 사건’이 나자 다시 방랑길에 오른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무량사였고, 이미 육신의 병이 깊어진 그는 57세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김시습의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차를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독서와 저술 삼매에 빠졌던 금오산 산거 시절이었을 터. ‘금오신화’와 그가 남긴 빼어난 선시(禪詩)들을 보면 그가 마신 차 한 잔의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다. 그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가(堂家)에서 잔을 비우는 사람 멋없는 사람/ 어찌 승설차(勝雪茶·눈 속의 차)의 청허함을 알 수 있으랴.’ 나그네는 무량사 영정각에서 가슴이 뜨거운 그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부도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뜨거운 가슴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한 잔의 청허한 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상념에 잠겨본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대천IC를 빠져나와 보령 시내를 지나 21번 국도를 타고 가다 40번 국도를 이용, 성주터널을 지나 외산에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무량사에 이른다.
추사 김정희 고택을 가는 도중에 동행한 후배가 묻는다. 산중에서 혼자 사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고. 그러나 나그네는 외로움이 힘이라 말한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기에 불편하지 않다고도 말한다. 어떤 날에는 혼자 마시는데도 찻잔을 두 개 놓는다. 또 하나의 잔은 문득 그리운 사람의 몫이다. 빈 찻잔이 앞에 놓여 있기에 그가 없어도 찻자리는 넉넉해진다.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이다.
추사에게 차 한 잔도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사의 삶은 적거(謫居·귀양살이)가 많았다. 추사가 남긴 편지를 보면 유배생활의 고독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된다. 그러한 절대 고독을 달래주었던 유일한 벗이 맑은 차 한 잔이었을 것이다.
김정희는 병조판서 노경(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노영(魯永)의 양자가 된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다. 그러나 아버지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를 배후 조종한 혐의를 받아 추사는 고금도로 유배됐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귀한다. 이후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다 헌종 6년(1840)에 윤상도의 옥사 사건이 재론돼 1840년부터 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에서 외로운 유배생활을 한다.
귀양살이 친구 역할 … 茶門 등 호도 차와 연관
제주도로 가던 길에 추사는 초의가 머물고 있는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초의와 진정한 다우(茶友)가 되었고, 이후 초의는 자신이 직접 덖은 차를 품에 지니고 세 번이나 제주도에 간다.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소박한 암자 같은 서옥(書屋)과 추사 자신을 의인화한 듯한 송백(松柏)의 ‘세한도(歲寒圖)’는 제주도 유배시절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주었던 문인화(文人畵)인데,
참된 예술이 어떤 조건에서 탄생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추사는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려나지만 1851년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사건에 연루되어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아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와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한다.
추사는 북청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초의에게 편지를 쓴다.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는지 ‘큰 눈이 내리고, 마침 차를 받게 되어 눈을 끓여 차맛을 품평해보는데 스님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고, 또 편지 말미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귀중품을 자랑하며 아이처럼 초의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小龍團)이라는 먹을 한 개 얻었습니다. 아주 특이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래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24세 때 동지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갔다가 청의 거유(巨儒)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고증학에 눈을 떴으며, 국내로 돌아와 조선 금석학파의 태두가 된 추사. 운수납자처럼 모든 집착을 버렸으면서도 오직 차에 대한 욕심만은 어쩌지 못했던 추사. 승설(勝雪), 고다노인(苦茶老人), 다문(茶門), 일로향실(一爐香室) 같은 차와 연관된 그의 호를 보면 그가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 짐작이 가는 것이다.
오늘은 추사를 다인으로서 만나고 싶은 소망 때문일까. 추사 고택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그의 묘소로 가 맑은 차 한 잔을 올리고 싶다. 여름날이므로 해가 길 터이지만 서녘의 붉은 해를 보자 갑자기 나그네 마음은 조급해진다. 추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택이 잠시 후면 문이 잠길 것이기 때문이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인터체인지를 나와 32번 국도를 따라 예산 방향으로 가다, 합덕읍을 지난 뒤 신례원 가기 3km 전 사거리에서 ‘추사 고택’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서 직진하면 추사 고택에 이른다.
지금 나그네가 가고 있는 신륵사는 나옹선사가 열반한 곳이다. 나그네는 일찍이 나옹선사의 그림자를 좇아 만행한 적이 있다. 선사가 흘린 향기로운 발자국을 줍고 다녔던 것이다. 오대산 북대 미륵암에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라고 시작하는 ‘토굴가’가 나옹선사의 선시라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가 하면 나옹선사가 출가한 문경 사불산 묘적암에서는 현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이 누에고치처럼 암자 문을 닫아걸고, 자결할 각오로 용맹 정진하여 깨달음을 이뤘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옹선사가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차살림을 하게 된 것은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승 지공 회상(會上)에 머물 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공이 나옹에게 준 ‘백양(百陽)에서 차 마시고 정안(正安)에서 과자 먹으니 해마다 어둡지 않은 약이네(하략)’라는 전법게에도 차(茶)가 나오고, 나옹선사가 남긴 유일한 다시(茶詩)도 중국 승려들의 차 따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차나무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없고/ 내려온 대중 산차(山茶)를 딴다/ 비록 터럭만한 풀도 움직이지 않으나/ 본체와 작용은 당당하여 어긋남이 없구나.
확실히 중국의 고승 위산과 앙산이 차를 따면서 ‘본체와 작용’을 놓고 선문답한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나옹이 지공 회상에 머물 때 지은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나옹의 법명은 혜근(惠勤). 그는 스물한 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을 느껴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한다. 동네 어른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못했던 것. 나옹은 요연선사 밑에서 정진하다 여러 절을 거쳐 25세 때 회암사로 가 4년 만에 대오(大悟)한다. 이후 나옹은 자신을 인가(印可)해줄 스승을 찾아 중국 연경 법원사로 가 인도승 지공을 만난다. 지공에게서 인가받은 나옹은 다시 임제 법맥을 이은 자선사의 처림(處林)을 친견한다. 그때 처림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
“대도(大都·연경)에서 지공 스님을 뵙고 옵니다.”
“지공은 날마다 무슨 일을 하는가.”
“천검(千劍·지공의 가풍)을 씁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나옹의 가풍)을 가져오게.”
이에 나옹은 깔고 앉은 방석을 들어 처림을 후려쳤고, 처림은 마룻바닥에 넘어지면서 소리쳤다.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나옹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처림은 크게 웃으며 나옹을 방장실로 안내한 뒤, 차를 권했다. 선사가 차 한 잔을 권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고, 또한 제자가 스승에게 헌다(獻茶)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나옹은 스승 지공의 제삿날에 다음과 같이 읊조리곤 했던 것이다.
이 불효자는 가진 물건 없거니/ 여기 차 한 잔과 향 한 조각을 올립니다(不孝子無餘物 獻茶一香一片).
나그네는 신륵사에 도착하여 조사당으로 먼저 간다. 열린 문 사이로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의 진영(眞影)이 보인다. 나그네는 차 한 잔을 대신하여 고개를 숙이고 합장한다. 스님의 사리가 안치된 부도 주위의 솔숲에서는 범패 같은 솔바람 소리가 청아하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을 나와 처음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가다 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또 우회전해 42번 국도를 타면, 여주대교를 건너게 되고 신륵사 주차장에 이른다.
나그네가 사는 데서 30여 리 떨어진 곳에 개천사라는 절이 있다. 개천사 스님들은 고려 때 이미 차를 만들어 마셨던 것 같다. 이색이 ‘개천사의 행제(行齊) 선사가 부친 차에 대하여 붓을 움직여 써서 답장하다’라는 다시(茶詩)에서 행제 선사가 만든 영아차(靈芽茶)를 이렇게 품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갑 지기 늙은이라 더욱 친하고/ 영아차 맛은 절로 참따랗구나/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 이노니/ 곧장 고상한 사람 뵙고 싶네.
도대체 영아차가 어떤 맛이기에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 이노니(淸風生兩腋)’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 시구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노동(盧同)이 쓴 다시에 ‘느끼노니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이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다시의 고전 중의 고전인 노동의 시를 자신의 시에 인용했다는 것은 이색이 절창(絶唱)의 다시들까지도 꿰고 있었던 다인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茶詩 통해 영아차 품평 … 차 매개로 스님들과 깊은 교유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은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은 찬성사 곡(穀)의 아들이자 이제현의 문하생으로, 진사가 된 뒤 원나라로 가 국자감 생원 신분으로 성리학을 연구한다. 그러나 3년 만에 아버지 부음을 듣고 귀국한다. 이때 이색은 조정에 개혁 건의문을 올리고 나옹 선사의 탑명을 지어 신륵사와 첫 인연을 맺는다. 또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인쇄, 보관하고자 대장각을 짓는다. 신륵사는 유학자인 이색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했던 절인 것이다.
이색은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면서 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며 관리에 등용된다. 이색은 개혁주의자였던 것 같다. 비리의 온상이던 정방(政房)의 폐지를 건의하고, 유학에 의거하여 삼년상을 시행케 했다. 그리고 대제학이 되어서는 학칙을 재정한 성균관에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유학 보급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케 했다.
그러나 공양왕 1년 위화도회군 사건으로 이색의 관운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태조 이성계가 권력을 잡으면서 장단에 유배되고 이듬해에는 청주의 옥에 갇힌다. 또 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이성계의 명으로 한산백(韓山佰)에 봉해지면서 석방되나 조선에 끝내 나아가지 않고 여강으로 가던 중에 생을 마감한다.
훗날 사람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지킨 고려 충신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가리켜 삼은이라 한다.
척불론(斥佛論)자임에도 이색은 스님들과의 교유가 아주 깊다. 아마도 차로 인해서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앞의 다시에서도 차를 보내준 행제 선사를 고상한 사람(高人)이라 지칭하며 어서 뵙고 싶다고 할 뿐만 아니라, 개천사의 담(曇) 선사와도 동갑내기로 친했다. 또 가지산 보림사 영공(英公)과도 차를 매개로 사귀었다.
나그네는 나옹 선사의 부도를 들러본 뒤 강가 낭떠러지 위에 자리한 신륵사 대장기비(보물 제230호)로 발걸음을 옮긴다. 대장기비에는 이색이 대장경을 조성한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나옹 선사 제자들과 함께 조성한다는 그의 효성이 드러난 대목이다. 그는 유교에 따라 삼년상도 지내고, 불교에 의거해 재(齋)도 지낸 것이다. 여말선초 학자의 복잡한 의식구조를 유추해볼 수 있는 흥미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 가는 길
이색의 효성을 엿보려면 여주의 신륵사를 가보는 것이 좋고 선비정신을 느껴보려면 장단의 임강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한산의 문헌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등을 들러보는 것이 좋다.
포은 정몽주의 혼을 만나려면 개성 선죽교를 가야 하리라. 그러나 분단 시대를 사는 나그네는 충렬서원 위에 있는 포은의 묘소 앞에서 ‘단심가(丹心歌)’의 결기를 느껴본다. 포은이 차를 마시고 다시(茶詩)를 쓴 때는 말년이 아닌가 싶다. 가파르게 기우는 고려와 운명을 함께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그의 다시 ‘돌솥에 차를 달이며(石鼎煎茶)’에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나라에 보국할 힘없는 늙은 서생/ 차 마시는 버릇 들어 세상을 잊네/ 눈보라 치는 밤 그윽한 집에 홀로 누워/ 솔바람 같은 돌솥의 찻물 끓는 소리 즐겨 듣는다네(報國無效老書生 喫茶成癖無世情 幽齊獨臥風雪夜 愛聽石鼎松風聲).
포은의 본관은 영일이고 출생지는 영천이다. 포은은 1360년 (공민왕 9)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예문관 검열, 수찬을 시작으로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종군해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기도 한다. 토벌에서 돌아온 뒤 승진하여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 등을 역임하고, 부모상을 당해 관직을 놓는다. 당시 상제가 문란해져 사대부들 대부분이 삼년상을 줄여 백일 단상(短喪)을 치렀지만, 포은은 예법에 따라 시묘를 살았다.
탁월한 성리학자 … 고려 지키려다 선죽교에서 최후
이에 임금은 정려(旌閭·효자문)를 내렸고, 이듬해 예조정랑과 성균관박사를 겸임케 하였다.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포은의 강설은 당시 전하던 송나라의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이를 보고 대사성 이색은 포은을 ‘동방 성리학(性理學)의 시조’라고 일컬으며 칭송했다. 포은은 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주로 성균관에서 여러 직책을 맡는다. 그리고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배편으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귀국해서 권신들의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에 반대했다가 언양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사지나 다름없는 일본 규슈(九州)로 가 왜 수장에게 왜구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당시 왜구는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훗날 이성계가 지리산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포은은 서울엔 오부학당(五部學堂) 지방엔 향교를 두어 유교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사신이 되어 명나라를 오가며 대명 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기울어가는 고려를 바로 세우고자 의창(義倉)을 두어 궁핍한 민초들을 구제하고, 신율(新律)을 만들어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이때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은밀히 이성계를 추대하려고 하자, 포은이 먼저 이성계의 책사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포은은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게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되고 만다. 역모를 꿰뚫어보고 있었으면서도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힘에 밀려 당하고 만 비극이었다.
불가항력이라고 느낄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절망해버리곤 한다. 포은도 망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마다 유가(幽家·속세를 떠나 그윽하고 외딴곳에 있는 집)에서 차를 마시며 ‘주역’의 책장을 넘겼다. 차는 잠시나마 세상의 일을 잊게 해주고, ‘주역’은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주곤 했던 것이다.
돌솥에 찻물이 끓기 시작하니/ 풍로에 불이 붉다/ 감(坎·물)과 이(璃·불)는 천지간에 쓰이니/ 이야말로 무궁무진한 뜻이로구나(石鼎茶初沸 風爐火發紅 坎璃天地用 卽此意無窮).
포은의 ‘주역을 읽다(讀易)’란 다시인데, 찻물을 주역의 ‘감’으로 보고 풍로의 불을 ‘이’로 대비한 것이 절묘하다. ‘주역’의 오묘한 세계를 차 한 잔에 담아낸 이는 아마도 포은이 최초가 아닐까 싶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용인나들목에서 광주 방면으로 가다가 모현면 면사무소에서 ‘등잔박물관’ 가는 길로 가거나, 수원-광주 간 60번 직행버스를 타고 능원리묘소 어귀에서 내리면 된다.
이른 아침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烏竹軒)으로 가본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우리나라 민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고 한다. 검고 가는 오죽들이 학 다리처럼 늘씬하다. 바로 저 반듯한 집에서 율곡이 태어난 것이다.
조선의 유생들은 율곡을 ‘해동의 공자’라고 불렀다. 그만큼 율곡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이 심화되고 주체적으로 수용됐던 것이다. 인조(1595~1649)가 전국 향교에 비치하라고 명한 ‘격몽요결’의 부록 ‘제의초(祭儀抄)’에서 제례와 차례 때 차를 올리라고 말한 그의 풍모는 참으로 다양하다. 병조판서 때 경연에서 선조(1552~1608)에게 십만양병설을 건의했고, 과거시험을 아홉 차례나 보았는데 모두 장원급제했다. 또 퇴계와 달리 이(理·본질)와 기(氣·현상)를 분리할 수 없다는 이기지묘(理氣之妙)를 주장했으며, 금강산에서 잠시 불교를 공부했던 독특한 경력 등이다.
‘해동의 공자’ 금강산에서 차 경험
율곡은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차를 경험했다. 어머니(신사임당)를 16세 때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19세 때 상심한 채 금강산으로 입산했던 것이다. 율곡의 말 상대는 주로 스님들이었다. 율곡은 옹달샘에서 찻물을 기르던 산승 일학(一學)을 놀라게도 한다.
“대개 좋은 물이란 무거운 물입니다. 궂은 물은 흐리터분하니 무겁게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물보다 가벼운 물입니다.”
찻물로 좋은 중수(重水)와 그렇지 못한 경수(輕水)를 말했던 것이리라. 율곡은 또 다른 산승과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주로 젊은 율곡이 묻고 노승이 답했다.
“공자와 석가모니 중 어느 분이 성인입니까?”
“그대는 이 늙은이를 놀리지 마시오.”
“불교는 유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유교를 버리고 불법을 구하는 것입니까?”
“유교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소?”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라는 것은 무슨 경계입니까?”
“눈앞에 있는 경계지요.”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가 못 속에 뛰노는 것이 색입니까, 공입니까?”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오. 진리의 본체 그것이니 어찌 그런 시 구절에 비겨서 말할 수 있겠소?”
“이름 지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현상 경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본체라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하면 유교의 오묘한 진리는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교의 이치는 글자 밖에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율곡이 노승과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금강산 입산 전에 봉은사에서 이미 이런저런 불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금강산에 머물면서 ‘산중(山中)’이란 다시(茶詩)를 남긴다.
약초 캐다 홀연히 길을 잃었네/ 봉우리마다 단풍 곱게 물들고/ 산승이 찻물 길어 돌아간 뒤/ 숲 너머 차 달이는 연기 피어오르네(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 山僧汲水歸 林末茶烟起).
율곡은 산중 생활에서 익힌 차 살림을 저잣거리에서도 잇는다. 석천(石川)에게 준 다시 ‘차솥(茶鼎)에 불기운은 남아 있으나/ 찻물 끓는 소리(솔바람 같은 소리)는 조용하고…’ 등이나 이사평(李司評)을 만나 ‘차를 마시니 그나마 일도 없고/ 시를 이야기하다 선열(禪悅)에 드네’라고 읊조렸던 것을 보면 그의 차 살림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훗날 관직에서 물러나 ‘나는 오막살이 돌밭 다시 가꾸어 차 마시며/ 한평생 가난 속에 자족하며 살리라’ 하고 귀향하는 마음을 노래한 그야말로 차와 벗할 만했던 무욕(無慾)의 다인이 아니었나 싶다.
☞ 가는 길
오죽헌은 강릉 시내에서 양양 방향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다. 청량리역에서 강릉역까지는 기차를 타고, 오죽헌까지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 오죽헌.
물 맑은 오십천의 절벽 위에 지어진 삼척 죽서루(竹西樓)는 관동팔경 정자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삼척이 자랑하는 명소가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누각 안에는 시인 묵객들의 시판(詩板)과 편액(扁額)들이 즐비하다. 동안거사 이승휴, 가정 이곡,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미수 허목 등 쟁쟁한 선비들의 이름이 나그네의 눈에 띈다. 지금은 시가지 한편에 붙어 옹색한 공원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송강이 들렀던 조선 때만 해도 자연 속의 풍광이 대단했을 것 같다. 송강도 이렇게 읊조렸던 까닭이다.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남산)에 닿고 싶네.
두타산에서부터 오십 굽이나 굽이친다고 해서 오십천인데, 죽서루에 오른 송강은 오십천 속에서 태백산의 그윽한 산 그림자까지 보고 있다. 가사문학의 대가다운 절창이다.
어린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 … 매년 10월 ‘다례제’
두타산 산중에 살던 이승휴가 죽서루를 찾은 것은 관리들의 초청을 받아서였거나, 아니면 불법에 심취했던 그가 차 한잔 마시기 위해 죽서루 북서쪽 대숲 속에 있던 죽장사(竹藏寺)를 가던 길이 아니었나 싶다. 죽장사의 풍광은 이승휴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안축의 ‘관동별곡’에 나타나 있다.
웅덩이에 솟은 누각 수부(水府)에 임했고/ 담을 격한 선당(禪堂) 바위를 기댔네/ 스님을 좋아하는 참뜻 아는 이 없고/ 십 리에 뻗친 차 달이는 연기/ 대숲에 이는 바람에 나부낀다.
죽서루에서 보이는 산 그림자 담긴 오십천뿐만 아니라 대숲 너머로 피어오르는 죽장사의 차 달이는 연기(茶煙)도 시인 묵객들의 눈에는 한 폭의 그림이었으리라. 이승휴가 차를 좋아하게 된 까닭은, 어린 시절 원정국사(圓靜國師)가 주석한 절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스님들의 차 살림 분위기가 평생 동안 각인됐지 않나 싶다.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자와 호 모두가 불교용어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산부(현재 경북 성주군) 가리현에서 태어나 12세 때 희종의 셋째 아들인 원정국사의 절로 가 명유 신서에게 ‘좌씨전(左氏傳)’과 ‘주역’을 배우고 14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종조모인 북원군 부인 원씨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한다. 늦은 나이인 29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 길이 막혀 두타산 구동의 용계 옆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10여 년간 은거한다. 이후 지인들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가 서기나 녹사 등 문서를 다루는 관직을 맡다가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따라나선다. 다음 해 또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서장관으로 가는데,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인질로 가 있던 세자가 호복을 입고 곡을 할까 염려되어 고려식의 상복을 입도록 권유한다. 능력을 인정받아 충렬왕 때는 우사간을 거쳐 충청도안렴사가 되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좌천되고, 뒤에 전중시사에 임명된 뒤 충렬왕의 실정을 간언하다가 파직된다.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호를 ‘동안거사’라 하고, 삼척 구동으로 들어가 당호를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한 뒤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했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잠시 개혁정치에 동참하나 70세가 넘어서는 다시 야인으로 돌아와 대장경(大藏經)을 보았던 자신의 독서당인 용안당마저 간장사(看藏寺)라는 절로 만들어, 출가한 둘째 아들인 담욱(曇昱)이 머문다.
바로 그 간장사가 오늘날 두타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은사의 전신이라고 한다. 천은사에서는 매년 10월에 ‘이승휴 선생 다례제’를 올린다고 하니, 다인 이승휴의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강릉으로 가서 다시 동해시를 거쳐 삼척 시가지(태백 방면)에 들어서면 바로 죽서루에 이른다.
가을비가 멎기를 기다릴 겸 하룻밤을 광주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무등산을 오른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등산객을 상대하는 가게를 지나 증심천의 첫 다리를 지나니 의재의 유적들이 나타난다. 다리 이름부터 의재교다. 증심천 왼쪽으로 의재가 만년을 보냈던 춘설헌과 그의 묘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의재미술관, 그리고 위쪽 무등산 산자락에 5만여 평의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인이 일궈놓은 차밭을 의재가 광복 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고 한 것이다.
호남 남종화단 이끈 거목 … 만년엔 차에 심취
이른 아침이라 푸나무들이 촉촉하다. 한적한 산길을 혼자 오르는 맛도 맑은 차 맛과 견줄 만하다. 춘설헌은 원래 띳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다. 노산 이은상과 의재는 다우였던 것 같다. 서로 만나 밤새 차를 마신 뒤 노산이 지은 다시(茶詩) ‘무등차의 고향’이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내어/ 초의선사 다법(茶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茶道)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그림과 차밖에 몰랐던 의재는 고종 때 진도에서 태어나 8·15광복 전후의 격동기를 살다 간 호남화단의 거물이자 단군신앙의 신봉자였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가문의 영향이 컸다. 소치 허유[뒤에 연(鍊)으로 개명함]가 종고조뻘이다(실제로 의재는 11세에 소치의 아들인 미산 허형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다).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법정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3년 수료 후 미술로 진로를 바꾼 것도 그런 사연 때문이었다. 의재는 도쿄에 머무는 6년 동안 일본의 남종화 대가인 고무로(小室翠雲)에게 인정받아 그의 화실에 기숙하며 영향을 받는다.
귀국한 그는 1922년 서울로 올라가 도쿄 유학시절 가깝게 지낸 동갑지기 인촌 김성수를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서 기숙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수화를 출품, 1등 없는 2등에 입상하며 각광받는다. 1927년 이후에는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고 광주 무등산에 정착,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견지하며 호남의 남종화단을 이끈다.
그는 남종화뿐만 아니라 초의선사의 다맥도 잇는다. 초의선사의 다맥 중 한 갈래가 호남의 남종화맥을 따라 소치-미산-의재의 춘설차로 이어져온 것이다. 육당 최남선도 광주에 들르면 꼭 의재의 춘설헌을 찾아 차를 마시고 갔다. 육당의 ‘무등차(춘설차)’라는 연시조 중에 두 번째 시조는 차를 마시면 나라가 흥한다는 음다흥국(飮茶興國)의 주제가 느껴진다.
차 먹고 아니 먹은 두 세계를 나눠보면/ 부성(富盛)한 나라로서 차 없는 데 못 볼러라/ 명엽(茗葉·찻잎)이 무관세도(無關世道)라 말하는 이 누구뇨.
두말할 것도 없이 차야말로 세상의 도(道)와 무관치 않다고 의재가 육당에게 말했을 터다. 평소에도 의재는 제자들에게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국민들의 성질이 급해져서 나라가 망하고, 차를 많이 마시면 정신이 차분해져서 나라가 흥한다’고 당부하곤 했던 것이다.
육당에게 영향을 받았음인지 만년에 의재는 그림과 차 말고도 단군신앙에 심취, 옛 기록을 좇아 무등산 한 봉우리에서 천제단(天帝壇) 터를 발견하고 사재를 털어 단군 신전을 지으려다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의재가 자신의 화업을 잇고 있는 손자 허달재에게 “내 그림이 최고로 보일 때는 손이 앞서 간 것이고, 작게 보일 때는 눈이 앞서 간 것이다”고 경책했다는데, 손과 눈을 떠나 마음으로 그리라는 말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비단 그림뿐만 아니라 차를 만드는 일도 그러한 마음이라야 다인의 혼이 담길 것이기 때문이다.
☞ 가는 길
광주 시내에서 증심사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증심사 가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의재의 유적지에 다다른다.
의재 허백련 묘소
사명대사의 혼이 서린 밀양의 표충사를 들른 뒤 해인사로 가는 길이다. 밀양은 사명대사의 고향이자 차의 고장이다. 다죽리(茶竹里), 다원동(茶院洞), 다촌(茶村), 사명대사의 생가 터 이웃마을인 다례리(茶禮里) 등 차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곳이다.
지금 나그네가 가는 곳은 사명대사가 열반한 해인사 홍제암이다. 호국의 수행자로 잘 알려진 사명대사가 다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가 남긴 다시(茶詩) 한 편을 보면 다선일여(茶禪一如) 수행자였음을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조계(혜능)를 이어 나온 먼 손(孫)/ 행장 이르는 곳마다 사슴과 벗을 삼네/ 사람들아, 헛되이 날을 보낸다 하지 마오/ 차 달이는 틈에 흰 구름 본다네(係出曹溪百代孫 行裝隨處鹿爲群 傍人莫道虛消日 煮茶餘閑看白雲).
‘지호선백에게 주다(贈智湖禪佰)’란 제목의 다시인데, 차를 달이는 동안 흰 구름을 응시하며 인생을 관조하는 선적인 정경이 손에 잡힐 것 같다.
스님의 법명은 유정, 당호는 사명이다. 중종 39년(1545)에 태어나 15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잃고 직지사로 출가한다. 2년 만에 승과에 합격한 뒤,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다. 이후 32세 때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나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 용맹 정진한다. 이후 운수납자가 되어 10여년 동안 만행을 했고, 43세 때 옥천 상동암에서 소낙비에 떨어진 꽃을 보고 무상의 도리를 깨달았다.
49세 때 임진왜란을 맞았는데, 고성의 적진에 들어가 왜장을 감화하기도 하고 영동의 아홉 마을을 참화로부터 벗어나게도 한다. 더 나아가 사명은 재약사(현 표충사)에서 의병들을 모아 이끌고 서산대사(휴정)의 휘하로 들어간다. 그 무렵 서산대사는 왕명으로 승병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이듬해 정월, 사명은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운다. 선조 26년(1593)에는 선교양종판사가 되며 뒤이어 전공을 인정받아 숭유배불의 분위기 속에서 벼슬이 당상직(堂上職)에 오른다.
선조 27년에 사명은 울산 서생포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으로 들어가 적정을 탐색한다. 그때 사명은 가토 기요마사와 대화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먼저 “당신네 나라에 보배가 많지요?” 하고 물었다. 이에 사명은 “우리나라에는 별달리 보배가 없고 오로지 장군의 머리를 보배로 여깁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묻자 사명은 “우리나라에서는
1천 근의 황금과 1만 호의 식읍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장군의 머리를 구하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라고 말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명을 존숭(尊崇)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사명은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을 세 번이나 드나들었던 것이다.
선조 37년 사명의 나이 62세 때에는 쓰시마섬을 거쳐 왜 본토로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화친을 맺는다. 이와 함께 동포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여 선조에게 복명하자 선조는 사명에게 가의대부 품계를 내린다. 그해 10월, 사명은 묘향산으로 가 스승 서산대사의 영탑을 참배하고 선조 40년에는 치악산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한다. 병이 더 깊어지자 사명은 해인사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 광해군 2년(1610)에 입적한다.
사명대사가 남긴 다시 중에는 왜국에서 지어진 것들이 있는데, 고국을 그리워하는 대사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국 이별한 지 해가 지났는데/ 멀리 하늘 끝에 노니누나./ (중략)/ 사미가 찻잔을 내놓고/ 호백은 방석을 펴내.
사명대사가 요양 중에 열반한 홍제암에 드니 막 저녁 범종소리가 난다. 마음에 불을 당기는 듯한 종소리가 마치 담대한 대사의 음성 같다. 나그네는 대사의 부도 앞에서 범종소리가 끝날 때까지 합장한 채 걸음을 멈춘다.
☞ 가는길
남해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에서 해인사로 직진하면 홍제암에 이른다. 홍제암은 해인사 산문 밖 왼쪽 길 끝에 있다.
호남 일대에 산재한 절을 가보면 진묵 대사 전설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전북의 봉서사와 구암사, 월명암과 성모암, 전남의 백양사, 운문암 등이 그렇다. 이중에서 차와 직접 관련된 절은 운문암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각(茶角)이란 ‘차를 달여 여러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진묵은 운문암에서 법당 부처님들과 정진하는 대중 스님들에게 차 공양을 했던 것이다.
나그네는 운문암과 인연이 깊다. 운문암에 계시면서 선승을 지도하셨던 서옹 스님을 뵙기 위해 백암산을 오르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옹 스님을 뵐 수 없다. 이른바 ‘좌탈입망(坐脫立亡)’앉아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이다. 다만 운문암 초입 차밭에 핀 차꽃 향기가 향기롭고, 서옹 스님께서 들려주셨던 진묵 대사 이야기만 귓가에 맴돈다.
진묵이 일곱 살에 봉서사로 출가하여 사미승이 된 뒤, 운문암으로 와서 다각의 소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대중 스님들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진묵이 하루는 신중단(神衆壇)에 차 공양을 했다. 그날 밤 대중 스님들이 모두 같은 꿈을 꾸었는데, 한 신중(神衆)이 나타나 말했다.
일생 동안 기인 면모 … 호남 일대 전설 산재
“우리들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인데 부처님의 예를 받으니 마음이 황공하구나. 그러니 다각의 소임자를 바꿔달라.”
다음 날 대중 스님들은 간밤의 꿈을 서로 얘기하며 의아하게 여겼다. 그런데 때마침 아랫마을에 사는 나무꾼이 일옥(一玉·진묵의 법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금 전에 부추를 뜯고 있었습니다. 그때 두 남녀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운문암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내려왔습니다. 두 남녀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아 올라갔지만 일옥 스님이 맹화(猛火)로 저희들을 지져 화독(火毒)을 이겨내지 못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대중 스님들은 진묵 대사가 불(佛)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두 남녀가 ‘마군魔軍)’이었으므로 그들을 화광삼매(火光三昧)로 내쳤던 것이다. 마침내 대중 스님들은 암자의 불사(佛事)를 마치게 되었을 때 진묵 대사를 증명으로 삼았다. 그때 진묵 대사는 대중 스님들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와서 불사를 하기 전에는 불상에 손을 대지 말라.”
이후 운문암에서는 불상의 금물이 벗겨져도 개금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그네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진묵 대사가 다각의 소임을 맡으면서 부처님의 예를 받게 된 배경이다. 다각이 된 공덕으로 바로 부처가 된 경우는 진묵 대사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차로써 부처가 됐으니 다선일여를 보여준 셈이다.
명종 17년(1562)에 김제 만경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기인의 면모를 보이며 유학에 밝았던 진묵 대사. 행적이 너무나 기이하여 전설로 남아버린 그는 술도 곡차라 하여 마시고는 늘 대취하여 만행했다고 전해진다.
진묵 대사는 술을 마셔도 술에 걸리지 않았던 것일까. 술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깨어 있음을 잃지 않는다는 뜻일 터다. 그렇다면 그에게 술은 차나 다름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술을 곡차(穀茶)라 했던 것일까. 술에 취하여 부른 그의 노래도 깨달음의 세계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 삼아/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하노라.
그는 이승의 인연이 다한 날 개울물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시자에게 말했다. “이것이 석가불의 그림자니라.”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자 그는 “너는 고작 내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의 참그림자는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 홀연히 입적해버렸다. 이로써 그는 72세의 일생을 마치게 된 것이었다.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백양사 산문으로 들어 3km 정도 산길을 오르면 운문암에 이른다.
함허 스님이 수행했다고 해서 계곡 이름이 함허동천인 모양이다.
함허동천을 지나자 정수사가 나온다. 정수사 어귀에는 동동주에다 떡을 파는 아주머니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며 소나무 가지 위의 헌 집을 수리하는 까치도 여전하다.
산신각 밑에 있는 석중천(石中泉)으로 가 먼저 샘물 한 모금을 마신다. 다인들이 찻물로 부러워하는 물이다. 가을 물은 비가 자주 오는 여름보다 물맛 좋은 것이 상식이다. 일찍이 초의는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몸’이라 했다. 차와 물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조선 배불숭유에 맞서 수많은 저서 남겨
함허 스님이 조선 초 정수사(淨修寺)를 물 수(水)자를 넣어 정수사(淨水寺)로 바꿨을 정도라면 이곳의 물맛은 이미 검증된 것임이 틀림없다. 물가에서 맑은 물소리를 듣고 자란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최고로 친다고 했던가. 다인들에게 물은 악기와 같아서, 달고 무거운 물맛을 거문고의 저음 같다고 표현한다. 나그네는 정수사를 다시 찾으면서 큰 소득을 하나 올렸다. 지금까지 중국의 고불(古佛) 조주 스님의 다시로 알고서 다실 벽에 붙여놓고 감상하곤 했는데, 정수사에서 그것이 잘못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함허 스님의 다시라니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습니다/ 마땅히 이 차 한 잔 한번 맛보십시오/ 한번 맛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납니다(一椀茶出一片心 一片心在一椀茶 當用一椀茶一嘗 一嘗應生無量樂).
차를 권하는 권다시(勸茶詩)라고나 할까. 함허 스님이 사형인 진산(珍山)과 옥봉(玉峰)의 영가 앞에서 향과 차를 올리며 지었다는데, 한 수가 더 전해지고 있다.
이 차 한 잔에/ 저의 옛정을 담았습니다/ 차는 조주 스님의 가풍/ 사형께 권하노니 한번 맛보십시오(此一椀茶 露我昔年情 茶含趙老風 勸君嘗一嘗).
충주 출생인 함허의 법명은 기화(己和), 호는 득통(得通), 함허(涵虛)는 그가 잠시 머물렀던 평산의 연봉사 작은 방 이름에서 연유한 당호다. 그는 일찍이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관악산 의상암으로 입산한다. 이후 회암사로 가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 절을 만행한 뒤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깨달음을 이룬다. 현등사와 정수사에 부도가 있고, 봉암사에 비가 있는 것만 봐도 그의 만행 흔적을 알 수 있다. 그는 봉암사를 크게 중수하고 난 뒤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드니 시방 세계 푸른 허공은 중유(中有)의 길이 없는 서방극락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다.
함허의 불교사적 위치는 조선 초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수호한 고승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선사이면서도 유교에 대응하기 위해 ‘현정론(顯正論)’,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 스승 무학대사와 달리 저서를 많이 남겼다. 불교와 유교, 도교가 하나로 회통한다고 주창한 것을 보면 당시의 불교탄압을 시정하고자 노력한 그의 호법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그의 저서로 ‘원각경소’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함허화상어록’ 1권 등이 전해지고 있다.
숭유배불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함허 선사가 선열(禪悅)의 오롯한 시간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한 잔의 차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속에도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략) 화로에 차 달이는 연기 향기로운데/ 누각 위 옥전(玉篆)의 연기 부드러워라/ 인간 세상 시끄러운 일 꿈꾸지 않고/ 다만 선열 즐기며 앉아서 세월 보내네.
시비 많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차 한 잔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오늘 우리들이 귀감을 삼을 만하다.
☞ 가는 길
강화도에서 전등사 어귀까지 승용차로 30여분 거리, 다시 정수사까지는 6km 거리다. 강화도행은 차가 밀리지 않는 평일이 좋다.
신라 구산선문 사자산파의 개산조인 철감선사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우리나라 차의 비조(鼻祖)를 들라면 철감선사를 꼽는다. 천년 고찰 쌍봉사 창건주이기도 하지만 나그네의 관심은 우리 다맥(茶脈)에서 차지하는 철감선사의 위상이다. 쌍봉사에는 우리나라 사찰 사리탑 조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오솔길 가에 야생 차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다승이었던 철감선사를 더욱 떠올리게 하고 있다. 요즘은 차꽃이 만발해 향기가 가랑비라도 되어 옷에 묻는 듯하다. 선사들은 향성(香聲) 또는 문향(聞香)이라 하여 향기의 소리를 귀로 듣는다지만, 나그네는 혼탁한 세속인이어서인지 차향을 코로 맡는 것만도 행복하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안휘성 차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다고 했는데, 동국차는 다 겸했느니라”라고 했다. 안휘성과 몽산은 중국의 지명이다. 특히 안휘성은 철감선사가 유학을 가 남전 회상(會上)에서 조주 스님과 함께 정진했던 땅이다. 남전은 ‘평상심이 도(道)’라는 가르침을 폈던 고승이다. 도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의 무심 속에 있다고 설파했던 것. 또한 남전의 정신을 이은 조주는 불법을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차나 한 잔 마시게(喫茶去)’로 자신의 가풍을 일으켜 화두로 정착시켰다.
남전과 조주에게 茶禪 정신 이어받아
남전 회상에서 조주와 함께 공부했던 철감선사는 어떠했을까. 평상심이 도라고 외친 스승 남전뿐만 아니라 끽다거 정신을 일으킨, 스무 살 위였던 사형(師兄) 조주는 철감선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터이다. 더구나 남전은 열반하기 전 이미 철감선사에게 ‘우리 종(宗)의 법인(法印)이 몽땅 (너로 인해서)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하였던 것이다.
‘우리 종의 법인’이란 넓게는 중국의 6조 혜능 선맥을, 좁게는 자신의 가풍을 말하고 있는 바, 남전이 일으키고 조주가 완성한 다선(茶禪)의 정신을 말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나그네가 작년 겨울에 철감선사와 조주스님이 함께 정진했던 안휘성의 남전사지를 찾아가 확인한 사실이지만 절터 주변 야산에는 야생 차나무들이 산재해 있었다. 차나무를 보고 그 옛날 수행승들의 차 마시는 정경이 떠올라 가슴 벅찼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철감선사(798~868)의 속성은 박씨이고 한주(漢州) 사람이며, 집안은 대대로 호족이었다고 전한다. 18세 때 화엄십찰의 하나인 김제 귀신사로 출가, 10년 동안 화엄학을 익히다가 교종에 회의를 느껴 ‘원돈(圓頓)의 방편이 어찌 심인(心印)의 묘리만 하겠는가’라고 말하고는 28세 때 사신 일행의 배를 타고 당으로 건너가 남전의 문하로 들어갔다.
마침내 그는 스승 남전에게 인가를 받고, 스승이 열반한 뒤에도 13년 동안이나 당나라에 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한다. 22년 동안이나 유학생활을 한 셈이니 그의 차 살림도 중국인의 그것처럼 일상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귀국한 그는 먼저 금강산 장담사로 들어가, 훗날 사자산문을 융성하게 한 제자 징효와 대중에게 가르침을 펴다가 남도 쌍봉사로 내려와 경문왕의 귀의를 받고 열반 때까지 머문다. 그래서 경문왕의 지원을 받아 쌍봉사에 정교하고 웅장한 그의 부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올봄부터 여러 종류의 차를 마셔보았지만 쌍봉사 야생 찻잎으로 덖은 차맛이 가장 뛰어났던 것 같다. 쌍봉다원에서 비매품으로 제다하였는데, 쌍봉사 주지스님이 나그네에게 선물하여 함께 마셨던 것이다. 조주에서 발원한 승가의 다맥이 신라 때 철감선사에 의해서 해동으로 건너와 고려 때는 진각국사가, 조선 때는 초의선사가 중흥시켰던 것이 아닐까. 맑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게 된 것에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든다.
☞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에서 광주 나들목으로 나와 화순 방면으로 직진하다가 보성 장흥 방향으로 들어서 이양면소재지에서 보성 방향으로 5분쯤 달리면 쌍봉사 이정표가 나온다.
서산대사는 왜 제자인 유정(사명당)과 처영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대흥사에 보관하라고 유언했을까. 그의 말대로 대흥사가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자리’여서 그랬을까.
대흥사 부도들은 경내 초입 오른쪽 산자락에 있다.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부도도 수십 기의 그 부도들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란 붓다의 한역(漢譯)이다. 비슷한 한자음을 차용한 말로 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조형물인데, 중국과 우리나라는 고승의 사리를 봉안한 곳도 부도 혹은 사리탑이라고 부른다.
청허당(淸虛堂)이라고 음각된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왼편 바로 뒤에 초의선사 부도가 있다는 것이 나그네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다승이었던 두 분이 사후에도 차 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서산대사는 ‘승려의 일생은 차 달여 조주(趙州)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조주란 조주의 가풍, 즉 조주선(趙州禪)을 말한다. 서산대사가 살아 생전에 다선일여 경지를 읊조렸던 다시(茶詩)다.
낮에는 차 한 잔 하고/ 밤이 되면 잠 한숨 하고/ 푸른 산 흰 구름/ 더불어 무생사(無生死)를 말함이여.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이고 서산대사는 별호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명은 운학이었다. 9세 때 어머니를, 이듬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다. 총명한 운학은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와 성균관에 입학해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다. 그러나 과거에 낙방, 친구들과 지리산을 여행하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법열에 빠져 산중 절에 기거하며 여러 대승경전을 읽어 마침내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한다.
임진왜란 승병장 … 생전에 조주禪 가풍 추구
이후 명종 4년에 승과에 급제한 뒤 선교양종판사가 된다. 그러나 대사는 선승의 길을 걷고자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 두륜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에 있는 절로 찾아가 보임에 힘쓰고 제자들을 가르친다. 이때 대사는 불교 중흥을 위해 선과 교를 제도적으로 통합하고자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한때 정여립 모반사건 연루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석방되는데, 선조가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손수 그린 묵죽 한 폭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에 대사는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올렸고, 선조 또한 시 한 수로 화답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면서 신하를 묘향산으로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대사에게 알렸다. 대사는 전국의 절에 격문을 돌려 승려들이 구국에 나서도록 했다. 싸움에 나선 대사와 제자들은 명군과 함께 평양을 탈환했다.
이에 선조는 대사에게 팔도도총섭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대사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제자 사명에게 물려준다. 대사는 묘향산으로 물러나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적고는 가부좌를 한 채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들기 전 묘향산에서 지은 듯한 이 다시가 대사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스님 몇 명 있어/ 내 암자 앞에 집 지었구나/ 새벽종에 함께 일어나고/ 저녁 북에 함께 잠든다/ 산골 물 달과 함께 길어/ 차 달이니 푸른 연기 나고/ 염불과 참선일세.
둥근 달은 초저녁의 산골 물에도 떠 있고, 대사는 그 물을 달과 함께 길어와 차를 달여 마시고는 염불과 참선에 들고 있다. 염불의 구절은 부처님 말씀일 것이고, 참선은 부처님 마음을 응시하는 일일 것이다.
이 다시 속의 산골 물에 비친 둥근 달은 대사에게는 조주선, 즉 화두일 터다.
☞ 가는 길
전남 해남읍에서 대흥사까지의 거리는 12km이고, 8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직진하면 절에 이른다. 해남읍에서 대흥사 가는 버스가 수시로 운행되고 있다.
허준의 호를 빌려 지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을 거닐며 예전에 보았던 허준의 일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떠올려본다. 허준은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면서 자신의 의술을 완성한다. 유교 국가에서 사람의 몸에, 그것도 스승의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물론 구전되는 설화를 소재로 엮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실재한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체를 해부했던 사람은 참판 전윤형이다. 그는 허준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전윤형이 ‘시신을 세 번 해부한 뒤에 의술이 정통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전윤형은 ‘이괄의 난’ 때 사형을 당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시신을 해부해 천벌을 받았다고 손가락질했다. 유교 윤리와 의술의 갈등을 말해주는 일화로서 선구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 짐작케 한다.
동의보감에 ‘차는 만병지약’ 기록 … 한국 첫 茶醫
옛사람들은 차를 약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당나라 진장기는 저서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 “온갖 약은 각병지약(各病之藥)이지만, 차는 만병지약(萬病之藥)이다”라고 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차나무의 성질은 약간 차고, 맛은 달고 쓰면서 독이 없는 식물이다. 그 성질이 쓰고 차면서 기운을 내리게 하고, 체한 음식을 소화시켜주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한다. 또한 소갈증을 멈추게 하고 잠을 적게 해주며, 화상 입은 곳에서 독을 없애준다.”
또한 차나무의 여러 가지 이름도 소개하고 있다.
“차나무는 치자와 같고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딴 것을 차라 하고 늦게 딴 것을 명(茗)이라 하며, 그 이름은 다섯 가지가 있다. 차(茶), 가( ), 설( ), 명(茗), 천( )이다. (중략) 어린 싹을 작설(雀舌)·맥과(麥顆)라고 하는데, 이는 싹이 아주 어린 것으로 납차(臘茶)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 싹을 따서 찧어 떡을 만든 뒤 불로 구운 것이 좋다. 입수곡궐음경(入手足厥陰經)에 반드시 뜨겁게 마시라 했다. 차게 마시면 담(痰)이 모이고, 오래 마시면 사람에게서 지방을 빼 여위게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의서에 ‘작설차’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동의보감이 최초가 아닌가 싶다. 그뿐만 아니라 동의보감 고다(苦茶)편은 차의 종류와 성질, 효능을 집대성하여 정리해놓고 있다. 그러므로 허준을 우리나라 다맥에서 다의(茶醫)라 부르면 어떨까.
허준의 본관은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이고, 자는 청원이다. 그는 양천에서 명종 1년(1546)에 출생하여 광해군 7년(1615)에 죽는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무과 출신이다. 허준은 29세 때 의과에 급제해 의관직에 나아간다. 어의가 되어 왕의 신임과 명성을 얻은 뒤 당상(堂上)의 품계를 받고 사헌부, 사간원의 상소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며,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의인(醫人)들과 함께 동의보감 편찬에 들어간다. 그러나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이 흩어져 중단되고 허준 혼자서 광해군 2년(1610)에야 25권 25책으로 완성을 본다. 실로 10여년 만에 이룩한 당시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한방의학서로서 내편·외형·잡병·탕액·침구 등 다섯 편으로 편집되었고, 보감은 곧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다인들에게 물은 차의 몸(體)이라 하여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허준 역시 ‘물은 생로병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라고 근원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찻물의 으뜸으로는 천기(天氣)가 충만한 새벽에 처음 긷는 정화수, 그 다음으로 한천수(寒泉水)를 들고 있다.
☞ 가는 길
서울 가양대교를 지나 첫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이정표가 보이는데, 거기서 800m쯤 가다 보면 허준 동상이 있는 구암공원이 나온다. 주변에 한의사협회건물 및 허준 박물관 등이 있다.
일찍이 나그네는 이규보의 ‘우물 속의 달을 읊다(詠井中月)’란 시가 너무 좋아 시의 내용을 소재 삼아서 동화를 한 편 쓴 적이 있다. 주제는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여주 출신인 이규보가 왜 강화도에 묻혔는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오늘은 그의 묘소를 찾아가면서 동화를 쓰게 했던 그 시를 흥얼거려본다.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 모퉁이 돌아와 마땅히 깨달았으리/ 병을 기울이니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山僧貪月色 幷汲一甁中 到寺方應覺 甁傾月亦空).
이규보를 일컬어 ‘해동의 백낙천(白樂天)’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가 지은 ‘백운소설’에 ‘당나라 백낙천과는 음주와 광음영병(狂吟詠病)이 천생 같아 낙천을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시주(詩酒)를 즐겼고, 거기에다 거문고까지 애지중지하여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동국이상국집’에 다시(茶詩) 40여 편을 포함하여 2000수가 넘는 시를 남겼으니 가히 ‘해동의 백낙천’이라 할 만한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에 茶詩 40여 편 귀중한 자료
40여 편의 다시는 당시 차 살림의 모든 것을 소재로 써 차를 연구하는 다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다시에는 잔설 속에서 따는 조아차(早芽茶·올싹차)가 나오는가 하면, 찻잎을 불에 쬐어 말려서 덩어리가 되게 하는 떡차 만들기 방법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맑은 향기 미리 새어날까 두려워하여/ 옥색 비단으로 굳게 감싼 상자를 자줏빛 머루덩굴로 매었네’라며 차의 포장에 대해 언급하거나, 차 상자에 보관해도 장마철에는 차가 변질된다고 하는 내용을 통해서는 차 살림에 쓰이는 다구(茶具)들도 엿보게 한다. 어떤 다시에서는 잔설 속에서 딴 유차(孺茶·젖먹이차)라고 속여 파는 장사꾼이 있었다는 내용이 보이고, 차세(茶稅)를 두어 차 산지 백성들을 괴롭히는 데 비분강개하여 지방 군수에게 일갈하는 글도 있다.
‘흉년 들어 거의 다 죽게 된 백성,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았는데 몸속의 살이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죄다 긁어내려 하는가. 네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백성의 살을 겁탈해 먹는 건가.’
여주에서 태어난 이규보는 어린 시절부터 시를 잘 지어 문사들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으나 과거를 위한 글공부는 등한시했다. 그런 탓에 그는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한 끝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그러나 관직은 얻지 못했다. 25세에 개경 천마산으로 들어가 장자의 경지를 흠모하여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짓고 다인으로서 차 살림을 하다가 1년 만에 개경으로 나와 독서로 소일했다. 그때 그는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었다. 서문에서 그는 “‘구삼국기’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기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鬼)이고 환(幻)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이나 다시 음미하고 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이 성(聖)이며 귀가 신(神)이었다”고 말하면서 ‘우리나라가 본디 성인의 터임을 알게 하려 할 따름이다’라고 당시 중화 중심의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문사들과 견해를 달리했다.
나그네는 그의 다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수를 읊조려본다.
납승이 손수 차 달여/ 내게 향기와 빛깔을 자랑하네/ 나는 말하노니 늙고 목마른 놈이/ 어느 겨를에 차 품질을 가리랴/ 일곱 사발에 또 일곱 사발/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衲僧手煎茶 誇我香色備 我言老渴漢 茶品何暇議 七梡復七梡 要 巖前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마지막 구절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리라. 바위 앞 찻물을 다 말리고 싶을 정도로 차를 사랑했던 다인 이규보인 것이다.
☞ 가는 길
강화도로 들어서 전등사로 가다 찬물 약수고개를 지나면 목비고갯길 오른편에 ‘백운이규보선생묘’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300m쯤 가면 묘소가 나온다.
겨울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태고사로 가는 산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태고사를 창건한 태고 보우선사는 우리 선종사(禪宗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임제선사 17세손인 석옥 청공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해동의 선맥(禪脈)을 발흥시킨 고승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보우가 태고사에 머물면서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 19수 중에서 한 수를 읊조려본다.
맛없어도 음식이며 맛있어도 음식이니/ 누구든 식성 따라 먹기에 맡겨두네/ ‘운문의 떡’과 ‘조주의 차’여/ 이 암자의 맛없는 음식에 어이 비기리( 也 也 任爾人人取次喫 雲門糊餠趙州茶 何似庵中無味食).
이는 보우스님의 스승인 석옥의 눈을 한층 밝게 한 시다. 석옥은 보우의 태고가를 보는 순간 중국 선객들이 읊조리는 현란한 게송과 달리 차와 같은 한가하고 맑은 맛을 느꼈던 것이다.
13세에 출가 … 우리 禪脈 발흥시킨 고승
홍주에서 태어난 보우의 법명은 보허(普虛)이고 호는 태고, 시호는 원증국사(圓證國師)다. 13세에 출가, 양주군 회암사에서 광지화상에게서 불법을 배우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도를 닦았다. 충숙왕 12년(1325)에 승과에 급제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용문산 상원암과 개성 감로사에서 고행하였다. 33세 때 감로사에 머물며 일대사를 성취하지 못하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7일 동안의 용맹 정진 끝에 첫 깨달음을 얻었다. 38세에는 사대부 채중원의 장원(莊園)에서 무자 화두를 들고 오매일여의 경지로 나아가 오도송을 터뜨렸다.
(전략) 관문을 쳐부수고 나니/ 맑은 바람 태고에서 불어오네(打破牢關後 淸風吹太古).
이후 보우는 남양주 초당으로 돌아가 한 해 동안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1700가지의 화두를 점검하며 보임하다가 삼각산 중흥사 주지로 주석한 뒤,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5년 동안 산거 정진한다. 이때 보우는 태고가를 부르며 유유자적하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할 스승을 찾아 46세 때 중국으로 건너간다. 이후 중국의 고승을 찾아 2년 동안 만행하게 되고, 마침내 석옥 청공을 만나 보름 만에 인가를 받는다.
48세에 귀국한 보우는 용문산에 소설암을 짓고 정진하던 중 56세에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봉은사에 주석하면서 왕사로 책봉된다. 왕이 나라 다스리는 일을 묻자 이렇게 아뢴다.
“인자한 마음이 바로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춰보십시오. 그리고 시절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왕사가 된 지 14년 만에 왕은 다시 보우를 나라의 스승으로 삼고자 국사로 책봉했다. 보우는 국사로 책봉된 지 12년 만인 82세에 용문산 소설암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긴 뒤 눈을 감았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죽음에 다다라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袋 一輪紅日下西峰).
표지판에 그려진 약도로는 1시간 정도는 산길을 올라야 태고사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깝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나그네의 눈길을 가장 먼저 잡는 것은 대웅보전 왼편 위쪽의 영천(靈泉) 약수다. 보우스님은 영천의 찬물을 길어 차를 달였던 것이다.
(전략) 늠름한 추위는 뼈에서 생기고/ 소소한 눈발은 창을 두드리는데/ 깊은 밤 질화로에/ 달이는 차 향기가 다관을 새어 나오네(凜凜寒生骨 蕭蕭雪打窓 地爐深夜火 茶熟透甁香).
대웅전 뒤편 계단을 따라 오르니 보물 제749호로 지정된 사리탑이 나온다. 뒤돌아서 보니 삼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허공을 오가는 솔바람 소리에 귀가 씻기고 삼각산의 기세에 머릿속이 헹궈지는 느낌이다. 이런 명당에서 차 한잔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 가는 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 매표소를 지나 승용차로 15분 정도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거기서 30여분 산행을 하면 태고사에 이른다
개암사에 도착하니 겨우 눈이 멎는다. 원효스님이 수도한 동굴인 원효방을 오르려면 산행을 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것 같다. 절 경내를 오가는 발도 쌓인 눈 속에 묶이곤 한다. 지장전에서 사시(巳時) 예불을 마치고 나오던 스님이 산행을 만류한다.
“원효방 가는 바위에 돌계단을 만들어놓았습니다만 오늘같이 눈이 쌓인 날은 큰일 납니다. 실수하면 최소한 중상이고 황천행일 수 있으니 아예 포기하십시오.”
나그네가 원효방을 순례하려고 한 것은 스님께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흥미롭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23권에 수록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한 대목에 나온다. 당시 이규보는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 兼 掌書記)라는 첫 벼슬을 받아 전주로 부임, 의욕적으로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바를 수필 형식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남행월일기’인 것이다.
‘높이가 수십 길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발을 포개고 매우 조심하여 걸어서 도달하였더니 뜰의 층계와 창이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자니 범과 표범이 살지만 아직은 당겨서 올라온 놈이 없다고 한다. 원효방 옆에 한 암자가 있는데 사포성인(巳包聖人)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았기에 사포 또한 와서 스님을 모시었는데 차를 달여 스님께 올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근심할 때 물이 문득 바위틈에서 솟아났으니 물맛은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사포는 차를 점다(點茶)했다고 한다.’
화쟁(和諍) 부르짖은 반전주의자 … 민족의 聖師
높이가 수십 길이라면 현기증이 나 다리가 후들후들했을 텐데, 굳이 원효방에 오르고 싶었던 이규보의 심중은 무엇이었을까. 물이 젖과 같았다는 원효방 유천(乳泉)의 물맛을 보고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올랐을 것 같다. 다인이라면 차의 맛을 좌지우지하는 물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법이다.
원효가 이 남향의 바위동굴에서 수도한 때는 아마도 백제가 멸망한 통일신라 시대일 것이다. 화쟁(和諍)을 부르짖은 반전주의자였던 원효이고 보면 백제 땅을 찾은 목적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백제인들의 해원(解寃)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사상을 지닌 스님이었기에 한국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말 그대로 민족의 성사(聖師)로 불리고 있는 것이리라.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고, 아명은 서당. 불지촌(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화랑이 되었다가 진덕여왕 2년(648)에 황룡사로 출가한다. 34세에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고구려군에 잡혀 귀향한다. 10년 뒤 다시 해로를 이용해 유학길에 나섰지만, 밤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튿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깨달아 의상과 헤어져 돌아온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정을 나눠 설총을 낳게 되는데 이때의 파계는 원효의 사상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원효는 자신을 복성거사라 칭하고 광대 복장을 하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다닌다. 원효의 무애행은 당시 수행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여 백고좌(百孤坐) 법회에 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훗날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의 강설을 듣고는 모두가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원효는 입적 때까지 저술에 전념,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100여부 240권(10부 22권만 현존)을 남긴다.
개심사 스님들은 뒷산의 울금바위(禹金巖) 중에서 왼쪽 동굴을 장군방, 오른쪽 동굴을 원효방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원효방은 정남향으로 5평이 될까 말까 하고, 장군방은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동굴입니다.” 나그네는 문득 고개를 끄덕인다. 분열을 지양하는 원효의 화쟁이야말로 다인들이 실천해야 할 차원 높은 다도(茶道)가 아닐까도 싶기 때문이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부안나들목으로 나와 고창 방면 23번 국도를 타고 10여분 가다 보면 개암사 진입로와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개암사까지의 거리는 2.4km이다
김육(1580~1658)의 흔적이 익산 땅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는 중이다. 다행히 눈발은 그치고 도로에 쌓인 눈은 어느새 녹아 있다. 왜 김육의 불망비(不忘碑)가 연고도 없는 익산시 함라면에 세워져 있는지 궁금하다. 불망비라 하면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민들이 세워준 것이 분명하다.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실학자이자 개혁정치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개혁적 성향은 집안 내력의 영향이 크다. 그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사사당한 김식의 3대손이자 대쪽 같았던 참봉 김흥우의 아들이다.
대동법이란 잘 알다시피 수천 가지의 공물 대신 쌀로 통일하고 가호에 따라 무조건 받아왔던 세금을 토지 결수의 기준으로 받자는 것. 따라서 땅이 없는 사람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김육은 줄기차게 대동법 시행의 이익을 들어 효종에게 주청했다.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
더불어 김육은 교활한 아전과 방납(防納·관리와 결탁한 업자가 공물을 파는 일) 업자들의 횡포도 고발했다.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색목(色目·공물의 가짓수)의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들이 방납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할 것이니, 신은 이 점이 염려됩니다.”
대동법 시행 관철 … 백과사전 유원총보 저술
그의 ‘옛 역사를 보며(觀史有感)’란 시를 보면 그의 지극한 애민정신이 더욱 느껴진다.
(전략) 삼대시대 이후로 오늘까지/ 하루도 제대로 다스려진 적 없다오/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 있으리/ 저 푸른 하늘의 뜻 알 수가 없네/ 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오늘의 일이야(從來三代下 不見一日治 生民亦何罪 冥漠蒼天意 旣往尙如此 而況當時事).
김육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선조 38년(1605)에 사마회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동료들과 광해군 1년(1609)에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고 가평 잠곡에 회정당(晦靜堂)을 짓고 은거하게 된다. 이후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가 되고 이듬해 음성현감이 된다.
이때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다시 안변도호부사로 나가 청나라 침입에 대비했으며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예조참의 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간다. 도정을 펼치면서 대동법 시행을 관철했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했다. 김육을 실학자라 한 것은 백성들의 살림에 도움이 되는 화폐를 유통시키고 수레를 제조했으며, 시헌력(時憲曆)을 제정하고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인 유원총보(類苑叢寶)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나그네가 그의 저술 중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유원총보다. 유원총보는 47권 22책으로 권37은 음식을 집대성한 음식문(飮食門)인데, 차(茶)편이 나오고 있다. 차편에는 ‘다경’의 저자인 육우, 차의 효능, 차의 일화, 차세에 얽힌 얘기 등이 총 1730여 자로 기록되어 다인들에게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정보를 주고 있다.
그렇다. 다인들에게 김육의 유원총보가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목의 ‘다부’와 초의선사의 동다송이 차를 개인의 정서에 접목시킨 문학적인 다서(茶書)라면, 김육의 차에 관한 다양한 지식은 사전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망비 앞에 당도한 나그네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주변이 너무도 어수선하여 불망비가 초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불망비를 세웠을 터.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를 잊은 채 살고 있다. 나그네는 그런 마음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난감하기만 하다.
☞ 가는 길
익산시에서 황등을 거쳐 함라면 면소재지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영의정 김육의 불망비는 함라파출소 뒤에 서 있다.
이제현의 영정이 봉안된 영당에서 발길을 멈춘다. 문장의 종조(宗祖)라고 칭송받았던 익제 이제현의 영당치고는 초라하다. 누각의 문은 녹슨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 줄기는 거미줄 같다. 그나마 나그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영당의 이름이다.
염수재(念修齋). 직역하자면 생각을 닦는 집이다. 마음을 닦는다(修心)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생각을 닦는다는 말은 처음이다. 이제현은 문장의 종조답게 다시(茶詩)를 많이 남겼다. 그의 다시 중 가장 애송되는 것은 이렇다.
주린 창자는 술 끊으니 메스꺼워지려 하고/ 늙은 눈으로 책 보니 안개가 낀 듯하네/ 누가 두 병을 말끔히 물리치게 할까/ 나는 본디 약을 얻어올 데가 있다네/ 동암은 옛날에 녹야의 벗이었고/ 혜감은 조계산의 주지 되어 갔네/ 빼어난 차 보내오고 아름다운 서찰 보내오면/ 긴 시로 보답하고 깊이 사모했네/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불의 으뜸이고/ 백년의 생사가 오직 아침저녁 같구나.(하략)
차를 보내준 송광(松廣) 화상에게 답례하는 형식의 이 시에 동암(東菴, 이제현의 부친)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부자에 걸쳐 송광사 선사들에게서 차를 선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불의 으뜸이고’의 구절은 당시 선비들이 누리는 최고의 풍류는 차 살림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뛰어난 문장 실력 원나라와 외교 분쟁 해결사
이제현의 처음 이름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하고 15세에 병과를 급제한 뒤 과거를 감독하던 권보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하급 관리인 판관 및 녹사를 거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어 관료로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다. 이후 외직인 서해도안렴사로 나갔다가 28세 때 상왕인 충선왕의 명을 받아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간다. 충선왕은 연경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원나라 선비들을 출입하게 했던 바, 이제현은 자연스럽게 학사 원맹선, 글씨로 유명한 조맹부 등과 교유할 수 있었다. 차 살림이 이때 깊어졌을 것이고 견문도 키워졌다. 충선왕을 따라 중국 쓰촨(四川)성 서남쪽의 어메이 산(峨眉山)과 저장 성의 푸퉈 산(普陀山)을, 충선왕이 간쑤 성으로 유배를 가자 거기까지 다녀왔다. 충선왕의 유배로 이제현은 귀국했다가 37세 때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나자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상소를 올려 철회시킨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합하(執事閤下)께서는 여러 황제가 우리나라의 공로를 생각한 도리를 본받으시고, 세상을 훈계한 중용(中庸)의 말을 명심하시어 그 나라는 그 나라에 맡기시고 그 나라의 백성을 백성끼리 살게 하십시오.’
이처럼 완곡하게 시작하는 이제현의 상소는 원나라 중서도당(中書都堂) 관리들을 감동시켜 결국 입성책동을 중지시킨다. 과거를 주재하는 책임자를 지공거(知貢擧)라 하는데, 이제현이 급제시켜 뽑은 인재 중에는 이색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원나라를 멀리하고 명나라를 가까이하자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으로서 수습에 나서지만 여의치 못해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차 살림을 즐긴다. 앞의 다시 중에서 생략된 한 부분인데 차 살림의 안목(眼目)이라고 할까, 한 잔의 차에 자족하는 삶이 생생하다.
향 맑으매 일찍이 적화(摘火) 전의 봄에 딴 잎이라네/ 부드러운 빛깔은 아직 숲 아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우우 솔바람 소리 울리고/ 오지사발에서는 어지러이 맴돌아 젖빛 거품을 토하네.
차가 떨어져가는 한겨울에 다시를 음미하자니 차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특히 이제현의 다시는 봄날 곡우 전후의 맑은 차를 그립게 만든다.
☞ 가는 길
충북 보은에서 상주로 가는 25번 도로를 8km쯤 달리면 502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하면 보덕초등학교가 나오고 3분 정도 직진하면 이제현 영당이 있는 탄부면 하장리 마을이 나온다.
서거정은 운길산 수종사에 올라 ‘동방의 절 중 첫째가는 전망’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기 때문이었다. 양수리(兩水里·두물머리)란 지명도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다인들은 수종사의 풍광도 풍광이지만 절 물맛에 더 주목해왔다. 정약용이 57세 때 귀양에서 풀려나 강진 다산초당에서 양수리 부근 고향집으로 돌아오자, 정약용과 친교 있는 다인들도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물맛이 좋은 수종사에 올라 차를 마시며 시회(詩會)를 열었다. 초의선사나 추사 김정희, 김정희 아우 김명희와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 정약용의 아들 학연 등이 그들이다. 이른바 차문화를 꽃피운 차꾼들이었다.
일지암에서 올라온 초의도 스승인 정약용을 만난 뒤 다우(茶友)들이 기다리는 수종사를 꼭 찾았던 것 같다. 그의 다시(茶詩)를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꿈에서 깼는데 누가 나서 산차(山茶)를 줄까/ 게을리 경전 쥔 채 눈곱(眼花)을 씻는다네/ 믿는 벗이 산 아래 살고 있어/ 인연을 좇아 수종사(白雲家)까지 왔다네(夢回誰進仰山茶 懶把殘經洗眼花 賴有知音山下在 隨緣往來白雲家).
두말할 것도 없이 초의선사의 벗들이란 앞에서 얘기한 다우들이다. 겨울바람이 차가워도 차꾼들은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리며 추위를 견디게 마련이다. 홍현주의 다시 ‘수종사를 바라보며(望水鍾寺)’도 그런 심사를 나타내고 있다.
(전략) 다만 종소리는 맑은 세상에 남아 있고/ 공교루 그림자 찬 강물에 떨어지네/ 행장 속에 산중 물건 아직 남아 있어/ 들고 온 작은 옹기항아리에 차 달여 마신다(只有鐘聲遺淨界 空敎樓影落寒江 行狀猶有山中物 茗飮携來小瓦缸).
홍현주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그의 문집인 ‘해거재시초’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정조 둘째 딸 숙선옹주와 혼인해 영명위에 봉해졌고, 순조 15년에는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그의 집안사람은 모두 다인이었다. 우의정을 지낸 형 석주, 어머니 서씨, 아내인 숙선옹주 등도 차를 즐겨 마시며 다시를 남긴 것이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당대 세도가들과의 교우관계가 넓었으며, 특히 초의선사와는 차로써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가 우리 차(東茶)를 찬양한 ‘동다송’을 지은 동기도 사실은 해거도인 홍현주가 초의에게 차 만드는 법을 물은 데서 연유한다. 초의는 ‘동다송’ 제1절 앞에 “해거도인께서 차 만드는 법에 대해 물으시기에
마침내 삼가 동다송 한 편을 지어 올림”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수종사란 절 이름 또한 물과 관련이 깊다. 세조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던 길에 절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했는데 종각도 없는 절 쪽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와 사람을 시켜 그곳을 살펴보게 했다고 한다. 종소리는 16나한이 모셔진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는 것. 세조는 절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고, 그가 다녀간 뒤부터 절 이름을 수종사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설화 속의 동굴은 온데간데없고 약사전 아래에 물맛 좋기로 소문난 옹달샘이 하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샘물을 길어 홍현주 등의 차꾼들이 차를 달여 마셨으리라. 나그네는 차갑게 반짝이는 두물머리 풍광을 접고 샘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마치 차 한 잔을 하듯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그러고 보면 차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명상과 사색의 징검다리가 된다.
☞ 가는 길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 생가 앞에서 61번 국도로 나와 가평, 양평 방면으로 3km쯤 가면 진중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왼쪽 45번 국도로 2km쯤 가면 수종사 이정표가 보이고, 다시 2km 정도 가면 수종사가 나온다. 승용차로 절 어귀까지 갈 수 있다
봉선사 어귀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한글대장경 초석을 세운 운허(雲虛) 스님의 부도가 있고,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서 있다. 다른 삶을 산 고인들이지만 묘하게 조화가 느껴진다.
춘원을 얘기할 때마다 두 가지 평가가 충돌한다. 현대문학의 거봉이라는 관점과 친일 지식인이었다는 그것이다. 그의 양면성은 또 있다. 천주교 신자였다가 광복 전에 불교로 귀의했다는 점이다. 춘원은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곳의 절이나 암자에 머물면서 불경을 접한 뒤 장편소설 ‘원효대사’를 썼고 ‘법화경’의 매력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춘원은 금강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던 운허 스님을 만난다. 운허는 춘원의 삼종제(三從弟), 즉 팔촌동생으로 그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게 된다. 이때 운허는 춘원이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청담에게 만류를 부탁한다. 불경의 이해가 깊지 못한 상태에서 오역하여 세상에 내놓을 경우 그 피해가 클 것인 데다, 춘원은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 소설가였던 까닭이다.
결국 청담은 자하문 밖에 사는 춘원을 찾아가 일주일간 격론을 벌인 끝에 번역을 중단케 하고 불교에 귀의시킨다. 그때 청담은 춘원에게 ‘원각경’과 ‘능엄경’을 먼저 공부한 다음 번역하라고 권했는데, 3년 후 청담을 만난 춘원은 “내 고집대로 ‘법화경’을 번역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춘원이 광복 후 친일 변절자라 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경기 남양주 봉선사로 몸을 숨긴 것은 그곳에 운허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춘원은 봉선사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차를 만난다. 그가 묵었던 방은 다경향실(茶經香室)이었다. 차와 경전의 향기가 가득한 방이다. 이때 춘원은 차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1946년 9월18일 ‘산중일기’에 연시조 형태의 다시(茶詩)를 지어 남긴다.
“화로에 불붙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이 있으니 차맛인가 하노라.
내 여기 숨은 물을 알릴 곳도 없건만은/ 듣고 찾아오는 벗님네들 황송해라/ 구태여 숨으 아니라 이러거러 왔노라.
찬바람 불어오니 서리인들 머다하리/ 풀잎에 우는 벌레 기 더욱 무상커다/ 저절로 되는 일이니 어 무삼하리로.”
풀벌레 우는 초가을 밤에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마시는 춘원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그도 한때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일에 일조했다 해서 옥살이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 정책에 동조하는 친일 지식인이 되고 만다. 그렇게 살아온 그의 눈에 세상은 번뇌의 불이 붙은 ‘불타는 집(火宅)’으로 보였으리라. ‘산중일기’ 9월20일자에는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화로에 물을 끓여 미지근히 식힌 뒤에/ 한 집음 차를 넣어 김 안 나게 봉해놓고/ 가만히 마음 모아 이분 삼분 지나거든 찻종에 따라 내니/ 호박이 엉킨 듯 한 방울 입에 물어/ 혀 위에 굴려보니/ 달고 향기로움이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두 입 세 입 넘길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 미미한 맑은 기운 삼계에 두루 차니/ 화택 번뇌를 한동안 떠나려나/ 차 물고 오직 마음 없었으라/ 맛 알리라 하노라.”
얼마나 향기로웠으면 차를 마시지 못하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을까. 차맛이 외로움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나그네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차맛이란 외로워야만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는 길
경기 의정부에서 포천 방면으로 43번 국도를 이용해 축서령을 넘자마자 오른편으로 10여분 가면 봉선사에 이른다.
청평거사 이자현
옛 선비들이 일군 개인 정원을 세 곳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그네는 이자현의 청평계곡과 양산보의 소쇄원계곡, 그리고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계곡을 들겠다. 모두 자연풍광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은 신선 같은 다인이었다. 이자현의 사적을 새긴 문수원중수비(文殊院重修碑, 동국대 박물관 소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고려 예종과 인종이 차를 하사했다(賜茶)는 내용이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용이 종횡무진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饌香飯 渴飮名茶 妙用縱橫 其樂無碍).’
부귀공명 버리고 은둔 … 자연과 禪, 차 벗 삼아
이자현은 노장사상에 심취했던 것 같다. 예종이 그를 두 번째 불렀을 때 그는 진정표(陳情表)에서 ‘호량(濠粱)의 물고기’ 고사를 들어 사양했다. 장자와 혜자가 물가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장자가 “물고기가 조용히 노는 것이 즐겁구나” 하고 말하자 혜자가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면서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고 말했던 것. 이에 장자는 “자네는 내가 아니면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리라고 어찌 아는가”라고 했는데, 이자현은 이 고사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진정표를 올렸던 것이다.
‘신이 듣잡건대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수풀에 있고, 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에 있다 하옵니다. 고기가 물을 사랑한다고 하여 새를 깊은 연못에 옮기지 못할 것이요, 새가 수풀을 사랑한다고 하여 고기를 깊은 숲에 옮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새로서 새를 길러 수풀의 즐거움을 맘대로 하게 맡겨두고, 고기를 보고 고기를 알아 강호(江湖)의 즐거움을 느끼게 내버려두어 한 물건이라도 제 있을 곳을 잃지 않게 하고 군(君)의 정(情)으로 하여금 각기 마땅함을 얻게 함이 곧 성제(聖帝)의 깊은 인(仁)이요, 철왕(哲王)의 거룩한 혜택이옵니다.’
부귀공명을 버린 은둔거사 이자현의 사상이 잘 함축된 글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 벗이 있다면 오직 자연과 선(禪), 그리고 차뿐이었다.
이자현의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 청평거사, 희이자(希夷子). 선종 6년(1089) 과거에 급제,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 아버지가 지은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친 뒤 당(堂)과 암자를 짓고 은거한다. 예종이 차와 향, 금과 비단을 보내 불렀으나 “신은 처음 도성 문을 나올 때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감히 조서를 받을 수 없나이다”라며 거절한다.
사촌 이자겸이 세도를 부리고 예종이 자신을 총애했음에도 왜 이자현은 권문에 나가지 않았을까. 예종 왕비 문경태후(이자겸의 딸)가 죽기 전까지 이자겸을 비롯한 이씨 일족은 100년간 세도를 부렸다. 이자현은 27세 때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을 보고 세상사 덧없음을 깨닫고 속세를 벗어났던 것은 아닐까. 이자현이 만들었다는 네모난 모양의 영지(影池) 아래쪽에 있는 이자현의 부도는 말이 없다.
예종이 남경(南京·서울) 행차 때 그를 부른 적이 있는데, 예종이 ‘천성을 기르는 묘법’을 묻자 그는 “고인이 말하기를 천성을 기르는 방법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무슨 일이든 성취하려면 욕심을 줄이고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다인의 삶을 말해주는 금언이 아닐 수 없다.
☞ 가는 길
춘천에서 소양강댐까지 가서 배를 이용(10여분 승선)하거나 서울에서 46번 국도를 이용, 오음리 방면으로 가다가 간척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고개 너머 주차장에서 내려 1km 정도 걸어가면 된다.
송광사 16국사 중에서 다시(茶詩)를 가장 많이 남긴 분이 원감(圓鑑)국사 충지(沖止, 1226~1292) 스님이다. 스님의 문집에는 무려 20편의 다시가 전해지고 있다. 스님은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에 6세 사주로 주석하면서 감로암도 창건했다. 감로암이 송광사 법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스님의 수선실(修禪室)이 아니었나 싶다. 감로암 앞에 서 있는 스님의 탑비가 그런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나그네는 감로암 가는 산길 중간쯤에 있는 옹달샘 물을 표주박으로 떠서 ‘아, 이 물이 바로 감로수군’ 하고 목을 적신다.
전에 법정 스님과 감로암에서 국수를 먹었던 일도 떠오른다. 불일암과 감로암은 이웃해 있다. 감로암 비구니 스님들이 국수를 먹는 날에는 법정 스님도 모시곤 했다. 나그네는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감로암으로 건너가 들깻가루를 탄 고소한 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감로암의 국수 맛보다는 젊은 법정 스님의 칼날 같은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잘 먹었다’는 의례적인 말을 생략한 채 “국수 대접 받았으면 됐지 ‘차 드시고 가시라’는 인사까지 받기는 번거롭고 미안하다”며 나그네에게 조용히 자리를 뜨자고 했던 것이다.
송광사 6세 사주 … 스님 문집에 20여편 茶詩 남겨
현재 감로암에는 비구 스님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비구 스님 한 분이 산책 삼아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나그네는 감로암 원감국사 비 앞에서 충지 스님의 다시를 한 수 중얼거려본다.
새벽에는 미음 한 국자로 요기하고/ 점심은 밥 한 그릇/ 목마르면 차 석 잔뿐인데/ 알든 모르든 아무 상관 없다네(寅漿一杓 午飯飽一盂 渴來茶三椀 不管會有無).
원감국사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속성은 위씨. 9세부터 공부를 하여 17세에 사원시(司院試)에 합격했고, 19세에는 춘위(春 )에 나아가 장원급제하여 영가서기로 부임했다. 이후 사신이 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벼슬이 금직옥당에 이르렀다. 29세에 출가하여 주로 교학을 탐구하여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수선사에 이르러서는 원오국사 회상에서 참선정진을 하게 된다. 이때는 원나라 장수 흔도( 都)가 탐라를 정벌한 뒤 수선사도 군량미 명목으로 세금을 내게 되었는데, 원감국사는 원나라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빼앗긴 논밭을 되돌려 받는다. 이를 계기로 세조는 국사를 흠모하게 되어 초청하지만 거듭 거절하다가 마침내 원경에 도착하여 빈주(賓主)와 스승 대접을 받는다. 귀국할 때는 세조에게서 금란가사와 벽수장삼, 흰 불자 한 쌍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국내로 돌아온 국사는 여러 절을 거쳐 원오국사의 추천으로 수선사 제6세 사주가 된다. 국사는 입적에 이르러 문인들에게 “생사는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라는 말을 남겼다.
나그네가 지금 보고 있는 스님의 비는 열반한 지 22년 만에 문인 정안(靜眼) 등이 세웠으나 병화로 파괴돼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시안(時安), 찬현(贊玄) 등이 중건했다고 한다.
문득 스님의 시 한 편이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에 든 스님의 내면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람 지나간 뜰은 빗자루로 쓴 듯/ 비 갠 경계와 만물은 다투어 곱기만 하다/ 보이는 것마다 작은 누 한 점 없나니/ 온몸으로 늘 깊은 선에 잠겨 있다네(風過庭除如掃 雨餘景物爭鮮 觸目都無纖累 全身常在深禪).
스님은 선정에 잠겨 있다가 목이 마르면 차솥에 찻물을 넣고 솔방울에 불을 붙여 손수 차를 달였으리라. 스님에게 차 한 잔은 심선(深禪)의 맛이 아니었을까.
☞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에서 송광사 나들목으로 나와 송광사 산문을 지나면 왼편 농막 위쪽으로 5분 거리의 산길 끝에 감로암이 있다.
현재 가볼 수 있는 야은(冶隱) 길재의 유적지는 두 곳이다. 한 곳은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경북 선산이고, 다른 한 곳은 아버지가 금주지사로 부임했던 충남 금산(옛 금주)이다. 두 곳 중 선산이 더 유명한 것은 길재가 낙향해 김숙자(김종직의 부친) 같은 후진을 양성, 영남 사림의 비조(鼻祖)가 됐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금산은 길재가 31세에 결혼한 곳이며, 지사로 부임한 아버지가 2년 만에 별세하자 시묘살이를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나그네는 금산 청풍서원으로 가고 있다. 길재의 영정이 봉안된 청풍사(淸風祠)를 둘러보고 싶어서다. 청풍사는 불이영당(不二影堂)이라고도 부른다.
사철 푸른 차나무는 뿌리가 곧게 뻗는 직근(直根)의 성질이 있다. 차 꽃은 모든 꽃이 시드는 가을에 피기 시작, 한겨울에도 볼 수 있다. 차 잎은 흐린 정신을 깨어 있게 하고 향은 그윽하고 향기롭다. 그래서 충절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선비들이 차나무를 좋아했던 것일까.
고려 기울자 선산으로 낙향 … 후진 양성 진력 영남 사림의 비조
길재는 고려의 운명이 기울자 가족을 이끌고 낙향, 산가(山家)에서 노모를 봉양하며 산다. 산가는 세 칸 정도의 초라한 초가였으리라. 산가를 지어 은둔한 지 10여년 뒤 그는 산중 은둔 사계를 노래한 ‘산가서(山家序)’라는 산문을 짓는다. 나그네가 ‘산가서’를 주목하는 것은 차 살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회오리바람 일지 않으니/ 비좁은 방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에 다가오니/ 홀로 느리게 거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이따금 베개를 높여 꿈을 꾸고/ 산눈(山雪)이 펄펄 흩날릴 땐/ 차 달여 혼자 마신다
(飄風不起 容膝易安 明月臨庭 獨步徐行 饋雨浪浪 惑高枕而成夢 山雪飄飄 惑烹茶而自酌). ’
길재는 어린 시절부터 차를 알았던 것 같다. 11세에 도리사로 들어가 글을 배웠다고 하니 그 나이라면 노스님들이 차를 마실 때 차 심부름을 하는 다동(茶童)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해평 길씨인 길재의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과 말년에 은거했던 산 이름을 붙인 금오산인(金烏山人). 도리사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해 18세에는 박분에게 ‘논어’와 ‘맹자’를 익힌다. 그리고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 정몽주, 권근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깊이를 더한다. 공민왕 24년(1374) 생원시에, 우왕 9년(1384)에는 사마감시에 합격한다. 2년 뒤 진사시에 급제해 청주목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같은 마을에 살던 이방원(조선 태종)과 두터운 교분을 쌓는다. 이후 성균학정(成均學正),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어 태학 생도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창왕 1년(1389)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이듬해 노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제수를 받았으나 은거할 뿐이었다. 나라가 바뀌어 정종 2년(1400) 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소를 올리고 거절한다.
‘(전략) 나가고 물러남을 생각하매 실로 명분과 예의의 경중에 관계된 일이오라 신이 비록 두터운 낯짝으로 영광을 받잡고자 한대도 남들이 반드시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옵니다. (하략)’
청풍사가 자리한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不二里)에 도착하니 길재의 충절이 다시 느껴진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청풍서원의 편액 글씨를 보는 순간 길재의 도학정신과는 어딘지 동떨어진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쿠데타로 집권했던 박 대통령의 공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길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다.
☞ 가는 길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에서 금산 나들목으로 나와 금산에서 무주 방향으로 15km쯤 가면 왼쪽 길가에 길재의 영당인 청풍사가 나온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가 성장했던 유적지를 오랫동안 찾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가 완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추자도로 유배 간 것은 알았으나 정작 그의 성장지가 관악산 부근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기 때문이다. 나그네가 남도 산중으로 들어오기 전 서울 생활 시절 일요일마다 올랐던 산이 관악산이고 보니 더욱 그렇다.
지인에게서 서울대 캠퍼스 산자락에 신위 조부의 문인석(文人石)이 있다는 것과 관악산 호수공원 가에 신위의 흉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신위의 호가 왜 자하인지도 풀렸다. 지금도 과천의 시흥향교 쪽에서 연주암 가는 계곡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순탄치 않은 벼슬길 … 시서화에 능해 ‘삼절’로 불려
다인들은 신위를 가리켜 차에 일가(一家)를 이뤘다고 해서 그의 이름 앞에 다가(茶家)를 붙인다. 그의 다시(茶詩)에는 차의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되고 있다. 가령 떡차(餠茶 혹은 茶餠)로 차를 달이는 풍경을 소재로 한 ‘이천 사람이 돌냄비를 선물하기에 방두샘물을 길어 용 등뼈 모양의 떡차를 달이며 짓다(伊川人贈石 汲方泉煮龍脊茶餠有作)’라는 다시가 있다.
돌냄비에 차 달이니 떡차 향기 나고/ 구리병에 길은 물은 금옥 부딪치는 소리 낸다/ 문서(案牘)들로 몸이 피로하여 하품과 기지개 켤 때/ 이미 솔바람 소리(물 끓는 소리) 나고 두 번째 찻물이 끓네(石烹茶貢餠香 銅甁汲水佩聲 勞形案牘欠伸頃 已過松風第二湯).
신위의 자는 한수(漢), 호는 자하 또는 경수당(警修堂)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며, 그는 정조 23년(1799)에 알성문과에 급제해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된다. 순조 12년(1812)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때 신위는 벌써 차 마시기에 익숙했던 듯하다. 만주를 지나다 동정수(東井水)를 길어 찻물로 이용했다는 다시가 보인다. 신위는 청나라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학문의 눈이 열렸다. 이후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불렸는데 신위 사후에 김택영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림은 시에 버금가는데, 묵죽화에 더욱 묘하여 중국인들이 다투어 보배로 삼았고,
글씨 또한 그림에 버금가므로 세상에서는 삼절이라고 말한다.’
중국인들이 신위의 묵죽화를 욕심냈던 것을 보면 그림의 품격을 짐작할 만한데,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치 못했다. 요직에 들지 못하고 내직과 외직을 들락거린다. 병조참지에서 곡산부사로, 다시 승지에서 춘천부사로, 병조참판에서 강화유수로 나간다. 1870년 7월 시흥 자하동천(현 과천)으로 물러나 은거하기도 하지만 한 달 뒤 강화유수 때 국가재정을 남용했다는 윤상도의 모함을 받고 추자도로 유배를 간다. 신위는 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가면서도 차 도구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차에 인이 박인 차꾼이었다. 유배지 추자도에서 지은 듯한 다시에 차 도구인 차 화로와 구리병이 나온다.
‘비 그치자 벌레소리 나고/ 안개 자욱하니 온갖 풀이 젖네/ 방울 져 떨어지는 소리 치자나무 담 집에 맴돌고/ 남은 물기는 베개풀에 스미네/ 작은 쑥집에 머무르려면/ 여울 지나걸랑 짧은 노를 멎으시게나/ 차 화로에 불이 있는 듯 없는 듯/ 또르르또르르 구리병이 우네(雨止蟲聲作 空 百草濕 淋鈴在 宇 餘潤枕 襲 如寄小蓬屋 過灘停短楫 茶爐有火否 銅甁泣).’
1831년 4월 귀양에서 풀려나는 길에 신위는 초의선사가 주석하는 해남 대흥사 북선원(北禪院)에 들러 초의시고(草衣詩藁)의 서문을 써준다. 초의와는 구면이었다. 초의가 자하동천에 은거하던 신위를 찾아와 그의 스승인 완호삼여탑명(玩虎三如塔銘)의 서문과 글씨를 써달라고 했던 것이다. 다인으로서 재조명할 인물이 있다면 나그네는 단연 신위를 먼저 꼽는다. 그는 어디서나 차 도구를 펼쳐놓고 풍류 삼아 홀로 차를 마시며 차에 심취했던 차꾼이었던 것이다.
☞ 가는 길
경기 과천 시흥향교 쪽에서 연주암 가는 길에 자하동천이 있고, 서울대 캠퍼스 안에 신위의 별장 터라고 알려진 자하연이 있다.
중국의 4대 불교 명산 중 하나인 안후이 성 구화산을 다녀온 일이 있다. 단순한 명산 순례가 아니라, 신라 왕족 신분으로 구화산에 들어가 고행 정진 끝에 지장보살이 된 스님의 행적을 밟아보기 위해서다. 눈으로 확인해보니 구화산은 스님의 발원에 의해 지장신앙의 성지로 성역화돼 있었다. 또한 지장 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간 금지차(金地茶)가 1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지장불차(地藏佛茶) 혹은 구화산차(九華山茶)로 제다, 판매되고 있었다. 구화가(九華街) 상점마다 ‘지장보살’을 외는 스피커의 창불(唱佛) 소리와 차 상품으로 넘쳐나는 것이 나그네의 눈에 비쳤다. 시선(詩仙) 이백이 구화산에 들러 지장 스님을 찬탄한 시도 전해지고 있었다.
‘석가모니 입멸하니/ 일월이 부서져 내리는데/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의 큰 힘 내려주셨네/ 보살님 대자대비의 힘/ 끝없는 고해에서 구해줄 수 있나니/ 홀로 오래고 오랜 겁을 지내며/ 고해를 소통시켜/ 중생을 구해주는데/ 이 모든 것은/ 지장보살의 덕성이어라. (하략)’
나그네가 지장 스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다시(茶詩)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시는 운율을 갖춘 한시(漢詩)로도 우리나라 최초일 것이다. 중국의 ‘전당시(全唐詩)’에 스님의 ‘동자를 산 아래로 보내며(送童子下山)’란 제목의 시가 수록돼 있다.
‘절이 쓸쓸해 너는 집 생각 하는구나/ 나를 떠나 구화산 내려가려나/ 나 혼자 대난간 아래 죽마에 기대어/ 알뜰히 수행할꺼나/ 시냇가 늪에 달을 볼 생각이며/ 차 달이고 꽃도 꽂지 않으리/ 눈물을 거두고 내려가거라/ 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노승이란 시를 지은 지장 스님이고, 동자는 아마도 절에서 잔심부름하던 다동(茶童)일 것이다. 지장 스님의 행장은 특이하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으나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에는 나온다. 지장 스님과 동시대 사람이자 구화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비관경(費冠卿)의 ‘구화산창건화성사기’에도 지장 스님의 행장이 보인다. 여러 사료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행장이 아닐까 싶은데, 눈에 띄는 대목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라 왕족 신분 … 자신이 가꾼 차 마시며 고행 정진
“신라국 왕자인 그는 구화산에 들어와 동굴에서 고행을 했다. 그의 고행은 구화산 촌민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들은 스님의 신도가 되었다. 그들은 절을 짓는 데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등 스님을 도왔다. 스님은 그들을 위해 산에 도랑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논과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에 지방 관리나 주의 목사, 현인들이 찾아와 지장 스님을 스승으로 섬겼다. 스님에 관한 소문은 고국에까지 퍼져 많은 신라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지장 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마침내 스님은 99세가 되던 해 여름 제자들을 불러놓고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들었다. 3년이 지난 뒤 함을 열어보니 스님의 얼굴빛은 산 사람과 같았고 팔다리를 들어보니 뼈마디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등신불이 된 것이었다.”
신라 삽살개를 데리고 간 스님이 고행한 동굴은 현재의 노호동(老虎洞)을 말한 것이다. 스님은 불법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 금지차와 황립도(黃粒稻·볍씨), 오차송(소나무 일종)의 씨를 가지고 가 구화산에 퍼뜨렸다고 한다. 자신이 가꾼 차를 마시며 고행 정진해 마침내 등신불이 되었으니 지장 스님이야말로 ‘차의 부처’, 즉 다불(茶佛)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다맥(茶脈)은 지장 스님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 가는 길
중국 난징으로 간 뒤 안후이 성 우후(蕪湖) 시까지는 버스를, 우후 시에서 구화산까지는 승용차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