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23-1 20040607 209P-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승려 법달은 홍주 사람으로 七세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조사를 뵈옵고 절을 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를 않거늘 조사께서 꾸짖어 이르시기를 "땅에 닿지도 않는 절을 하는 것은 누구도 절을 하는 것과 같다 하지 못하리니 네 마음 가운데 반드시 한 가지 일(物)이 있기 때문이니 무슨 일을 익혀 쌓았느냐?" 하시니 이르기를 "법화경 외우기를 이미 삼천부에 미쳤나이다" "네가 설사 외우기를 만부에 이르러서 경의 뜻을 얻었다 할 지라도 그것을 훌륭한(자만) 것으로 삼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하려니와 네가 이제 이일을 자부하여 도무지 허물을 알지 못하니 나의 게송을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강설:
깨달음은 일체가 평등함(진공)을 증오하게 되므로 아만의 상을 자연 여의게 되는 것인데 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아상은 오히려 커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절은 하심과 공경의 예인데 머리를 바닥에 닿지 않는 절은 절이라 할수 없는 형식된 아만의 표현임으로, 六조께서 법달의 절하는 모습에서 저가 안다고하는 자만심이 팽배해 있음을 간파하시고 "무엇을 아는 것으로 쌓았는가?" 물으신 것이다.
법달이 법화경을 삼천번이나 읽었다 했으나 삼천이 아니라 만번을 읽어 달달 외우고 뜻을 안다 해도 그것을 알았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無我의 도리를 깨우치지 못하여 아상이 있음이니, 참으로 깨달은 경계가 아닌 지식일 뿐이라 잘못된 공부는 이렇게 아상 만 높여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지도는 반드시 요긴한 것이다.
조사께서 또 이르시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기를
"법달이라 하옵니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 이름이 법달이라 하니 어찌 일찌기 법을 통달했는가?" 하시고
다시 말씀을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강설:
이름은 법달이로되 법화경 3천독을 해서 외울지라도 글에 굴림을 당했을 뿐, 글 가운데 깊은 뜻은 깨달아 이르지 못했으니 글을 굴릴 수 있어야 법을 통달했다 할수있는 것이다.
지극한 도는 말이 아니라 말 밖의 소식이요 말은 방편일 뿐이니, 손가락을 보고 잡아 꺾어도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했다면 얻는 바가 없으니, 3천독을 했다 3천배를 했다 하여 떠드는 것은 자칫 아상만 키울 뿐인 것이다.
이에 6조스님의 게송으로 법달의 아만이 조복되어 꺾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설은 말 있음으로써 말 없음에 이르르고 조사의 돈교는 말 없음(말 밖의 소식)으로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이다.
구경은 하나로되 방편의 길은 다르다.
"부처가 말이 없는 줄 알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이 말 아래 깨쳐 들어야 한다.
연꽃 피는 것을 어느 곳에서 보았는가?
연꽃 피었음을 보지 못하는가?
전광석화같이 지나 갔음을 깨달아 보아야 한다.
법달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사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일체에 겸손하고 공경하겠나이다.
제자가 법화경을 외웠으나 경전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마음에 항상 의심이 있사오니 화상께서는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원하옵건대 간략한 경 가운데의 바른이치를 설해주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법달은 법리는 곧 깊이 이르렀을지라도 네 마음을 통달하지 못한 때문에 경문에는 본래 의심할 것이 없거늘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니라,
네가 이 경을 외움에 무엇으로써 종(근본이 되는 긴요한 뜻)을 삼는가?"
법달이 이르기를 "학인은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전 부터 다만 글에만 의지하여 외우고 생각했을 뿐 이오니 어찌 종취를 알겠사옵니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네가 경을 한번 외우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해 해설하리라"
법달이 곧 큰소리로 경을 외워 비유품에 이르자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만 그쳐라, 이경은 원래 세간의 인연을 뛰어남으로써 종을 삼았으니 비록 여러 가지의 많은 비유를 들어 설하셨으나 또한 이것을 넘음이 없느니라.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경에 이르시기를
"모든 부처님들이신 세존이 오직 일대사(생사를 뛰어 넘는 일) 인연을 위한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셨다" 하시니 일대사란 부처님의 지견(보리)이니라.
세상 사람이 밖(現像)으로 미혹하여 相에 집착하고, 안(心)으로 미혹하여 空에 집착하나니,
만약 능히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곧 안팎이 어둡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이 법을 깨달아서 한 생각 마음이 열리면 이것이 부처님의 지견이 열린 것이니라.
강설:
"법을 곧 깊이 달했다"는 것은 심오한 경 가운데 뜻을 마음에 계합하여 확철하게 깨우친 것이 아니라 글자에 굴려 意解로 헤아려 아는 것으로 법상이 있는 것은, 참으로 증오한 통달이 아니기 때문에 본성인 마음을 통달하지 못한 지식일 뿐인 것이다.
법은 문자에 있지 않으므로 법달이 읽는 묘법연화경을 듣고 경의 종지를 아신 六조께서 법달에게 물었으나 종지를 답할 경계가 아님은 당연한 것이다.
법화경의 근본 뜻인 종지는 세간의 인연을 뛰어남(출세간)이니 즉 일체상을 여의고 본성을 깨쳐 들어 생사를 뛰어나 항상하는 즐거움을 증득함인 것이다.
중생들이 알게 하시고자 이 비유 저 방편 등 갖가지로 교설 하셨으나, 구경의 지시는 이것을 깨우쳐들게 하심인 것이며 부처님의 출현하신 뜻도 오직 이것인 것이다.
여기서 종지로 삼는 인연이란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을 증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상사에 집착함을 여의게 함이니 세상사는 상견으로 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 相이란 마음의 그림자로 본심에서 생각을 일으킴을 因으로 하여 조건이 되는 緣의 결果로 잠시 생겼다가 필경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밖으로 상을 여의고 안으로 공(마음은 빈 것)이라는 것(생각) 마저도 집착하지 않아 공이라고 하는 공도 여의게 되면 안과 밖이 없는 안팎이 비어 사무치게 밝아(내외명철) 理에도 事에도 어둡지 않게 되는 것이 불지견을 증득함인 것이다.
부처님의 출현하신 목적도 이것을 깨우쳐 스스로 부처임을 지시하시고 자 함이니, 본래 부처인 고요한 마음이 나투어 출현하심으로 부처님이 되시어 설해 보이시게 된 것이다.
참독송이란 입으로 읽고(송) 마음으로 뜻에 합하는 것(독)이다.
염불 또한 내 이름(불)을 하나 같이 불러 계합하여 생각(념)을 하는 것이니 타력인듯 하나 또한 자력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아무리 경을 읽고 외워도 그 뜻에 계합하지 못하고 경 가운데 긴요한 뜻인 宗을 깨달아 구경으로 돌아 이르는 趣를 얻지 못하면 헛된 수고일 뿐 자랑 삼을 일이 못되는 것이나 중생들이 목적은 제쳐두고 수단만을 자랑하여 아만만 키워 전도몽상의 삿된 길로 빠져들게 되기 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