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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泉里
회천동은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동회천인'새미'와 서회천인 '가는새'가 그것이다. 또한 세은쇄리, 세은촌리로 표기되어오다가 1955년9월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함에 따라 회천동이 되었다. 이곳에는 삼양초등학교 회천분교가 있었는데 1996년 2월말로 문을 닫아 현재는 제주도 위탁 회천환경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폐기물처리장,동신레미콘,제주산업,제주콘크리트등의 사업체가 위치하고 있다. 회천마을주민의 80-90%가 감귤농사를 짓고 있어 제주감귤의 맛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환경
이곳에는 새미물이라고 하여 삼양초등학교 회천분교에서 약400미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물이 있다. 새미물에서 새미는 샘(泉)을 의미하며 이곳의 물은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여 마을사람들의 식수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새미물 옆에는 화천사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동회천 동네어귀에서 왼쪽으로 끼고 이 마을에 들어서서 구불구불 길을 걷다보면, 쉽게 화천사를 찾을 수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살짝 여쭈어 봐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유명한 절도 아니고, 찾는 사람이라야 마을사람들과 외부에서 치성을 드리러 오는 분들 밖에 없는 조그마한 한국불교 태고종 계열의 사찰이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사찰을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지라 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가운 기분마저 드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코끼리쇼를 하는 회천관광타운이 있어 많은 관광객 및 도민이 찾고 있다.
회천동(回泉洞) 유래
- 회천동을 세은쇄리, 세은촌리로 표기되어 오다가
- 1914년 4월 1일 : 군면 통폐합에 따라 제주면에 속하게 되고
- 1955년 9월 1일 : 제주읍의 제주시 승격에 따라 회천동이 되었다. 봉아오름·명도암은 봉개리로, 새미·가는새는 회천리로,
웃무드내는 용강리로 각각 개편된데 이어,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의 봉개동으로 편입된다.
- 1962년 1월 1일 : 말단구역의 정비강화에 따른 임시조치로 봉개동회의 관할이 되었다.
새미물
‘용천수 걷기’ 여행코스 개발
땅에서 솟아나는 물인 ‘산물’을 따라 걷는 여행코스가 개발됐다. 제주발전연구원은 2009년 10월부터 작년 6월까지 현장답사를 거쳐 제주시에 산재한 90여 개소의 용천수를 찾아가는 총연장 66.5㎞의 걷기코스를 개발했다고 21일 밝혔다. 상수도가 보편화되기 이전까지 제주사람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던 용천수는 ‘산물’로 불리며 전통적인 생활문화상을 보여줘 왔다.
제주발전연구원은 코스별로 전통어촌, 야간관광 등 다양한 체험아이템을 곁들여 관광상품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5코스는 회천동 새미물에서 시작해 화천사∼조로새미∼명하물∼절물휴양림∼장생이숲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14㎞다. 오름과 숲길, 제주4·3평화공원 등이 있다. <경향신문 201. 10. 21 기사 발췌>
회천동 ‘화천사’
오랜 역사 품은 석불도량,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전소된 듯
‘석불암’ 창설이후 1912년 창건, “제주불교 정체성 대해 고민해야”
‘本 寺刹은 自古로 釋迦世尊을 崇拜處로 과거 累百年前 寺刹이 存在 하니 李朝 燕山君當時 命 제주목사 하여 消却之後 本洞 人士들이 石佛菴을 創設하여 崇拜하다가 1912년 壬子年에 馬龍其가 寺刹을 創建하여……本寺는 예부터 영험한 石佛道場으로 傳하여 累代에 香花와 기도가 끊이지 않다가 서기 1968년 故 雲空스님과 宋 도원정 化主의 願力으로 創建되었다….’
이상은 화천사 일주문안 우측에 나란히 세워진 비문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비문의 첫머리에서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이 전소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후 본동주민들에 의해 암자를 창설하였고 1912년에 사찰을 창건하게 된다.
예부터 영험한 석불도량으로서 주민들의 귀의처가 되어 향화와 기도가 끊이지 않다가 1968년 故 雲空스님에 의해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다만 역사적 기록이 없어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져 옴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영험한 도량이어서 그런지 주민들에 의해 사찰 부지가 희사되고 중창불사를 하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신도들의 불심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에도 이렇게 유서 깊은 사찰들이 있으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료가 없어 그 사실 입증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유교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전통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에 이르러서 후학들이 제주불교에 대한 역사의 진실을 파악하고자 하나 사료가 없어 불가능 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찰들은 오래 전부터 지역주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역사를 함께 지켜 왔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화천사는 그러한 전통이 아직까지도 이어져 200여 세대가 넘는 불자 가족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건물도 퇴락하여 신남 신녀의 정성에 의해 다시금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대웅전, 요사체, 범종각, 산문 등이 새로 건립되었다.
봉개동에서 116번도로(중산간도로)를 따라 조금 진행하면 서회천을 지나 동회천이 나오는데 커브 길에서 좌측편에 화천사의 입간판이 보인다.
안내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서 400여 미터를 계속 진행 하다보면,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여 마을사람들의 식수로도 활용되었던 새미물을 옆으로 해서 단정하게 정리가 잘된 한국불교 태고종 화천사를 만날 수 있다. 화천사가 소재한 회천동은 세은쇄리 혹은 세은촌리로 표기되어오다가 1914년 4월 군면 통폐합에 따라 제주면에 속하게 된다. 그 후 1955년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이 되면서 회천동이 되었으며 1962년 말단구역 정비강화계획에 따라 봉개동회의 관할이 되었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스님을 찾으니 계시지 않아서 경내에 세워진 비문을 읽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자그마한 체구에 안경을 끼고 안경너머로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스님이 앞밭에 고추가 넘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들어왔다. 화천사 주지인 복혜(福慧)스님이다. 느낌으로 고추농사를 짓고 있구나 생각하며 사찰에서 심은 고추인지를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남의 것임에도 고추묘목이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고있는 모습에 스님의 성품을 읽을 수 있었다.
비문 읽는 것을 접어두고 스님과 인사 한 후 방문연유를 알렸더니 마당 한편에 놓인 탁자 쪽으로 안내를 했다. 탁자를 가운데로 하여 스님과 마주앉아 제주불교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며 화천사의 유래 등을 물었더니 유래에 대해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비문내용 대로이지만 그 기록을 뒷받침 할 만 한 사료가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제주불교의 현실에 대한 질문에 “이제는 제주불교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며 현재의 제주불교의 모습을 정확히 진단하여 부족한 부분과 지향해야 할 부분을 분명히 정립하여 체계적인 포교 활동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도 알 수 없게 기복신앙으로 흐르는 제주불교에 혁신적인 지표 설정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스님은 “불교 지도자(스님)들 스스로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도내에 이미 설립되어 운영하고 있는 불교 대학들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과과정도 대부분 피상적이면서 개론적인 것에 불과 할 뿐만 아니라, 교육기간도 짧아 이에 대한 개선을 통해 법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싹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보다 체계적인 포교양식 개발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도내에서 활동하는 많은 불교 신행단체들 역시 정체성 확립이 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진단하여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 보완 해 나갈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스님은 9세에 절에 들어와 살면서 불교공부와 학교공부를 병행하면서 성장한 후 원광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는 등 높은 학구열과 진취적인 사고를 소유하고 있음을 대화 중에서 느낄 수 있었다.
81년에 화천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외유를 하게 되었는데 2000년에 다시 화천사 주지로 취임하여 소임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스님은 현재 태고종 제주종무원 부원장을 맡고 있고 태고종에서 운영하는 제주불교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야기 중에 바른법, 바른신행에 대한 대화 속에 속 시원히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궁금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묻는 질문에 전통적으로 기복적 신앙이 고착화 되어있는 상황에서, 사찰운영과 바른 법을 세우는 일과의 관계는 스님들이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 없이는 풀어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스님은 실토한다.
불자들의 눈과 귀를 막고 오로지 기복적 신앙을 권장해야 사찰운영이 될 수 있다면 불행이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신행단체들이 사찰 운영에 따른 불자들의 사고의 전환을 선도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바른 불법이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에 한가한 시간에 차라도 함께 마시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자는 스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일주문을 나서는 마음은 왠지 무겁다. 2005. 8. 26 김보균 재가법사 <제주불교>
새미물 곁의 화천사 뒤편에 마을의 특수한 신앙석으로 알려진 다섯 개의 석불이 있습니다. 300여 년 전부터 마을에서는 매해 정월 첫 정일(丁日)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회천동(回泉洞) 석불(石佛)
제주시 회천동에는 화천사라는 현대 사찰이 있다. 이 사찰의 대웅전 뒤쪽에는 ‘석불’이라고 불리는 높이 65㎝ 정도의 佛像 5기가 모셔져 있다. 삼각을 이루면서 길쭉한 현무암들을 이용하여 얼굴형태를 자연스럽게 형상화한 것이다. 주로 윗부분에 긁은 음각선을 이용하여 눈이나 코, 입 따위를 조각한 것이다. 5기 모두 다른 형상을 하고 있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표현을 하고 있어서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한 감정을 준다.
이 일대는‘새미’라는 용천수,‘절동산’이라는 절터, ‘지새왓’이라는 건물지 등이 밀집되어 있다. 대략 고려, 조선시대경에 해당하는 사찰들이었는데 조선 후기경에 쇠퇴해버리자 이 석불만 남아 전해졌던 것이 아닌가한다.
도원성 보살님(여,78세)의 말에 의하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일대는 사찰들이 여럿 있었다. 이형상 목사 당시 당오백 절오백을 부숴버리자 이 석불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도원성 보살님이 아주 어렸을때도 절도 없고 풀만 우거졌는데도 이 석불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약 오십년 전에 지금의 사찰을 짓고 이십년 전에 화천사를 중건하자 매년 구월 초사흘부터 초일레(5일)까지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불공을 드리며, 이외에도 사월 초파일, 정월보름, 백중, 시월보름에도 불공을 드린다고 한다.
동회천 석불제단은 마을 북쪽에 자리잡은 사찰인 화천사 울 안 뒤쪽에 있다. 커다란 팽나무 아래 비교적 널찍한 祭場을 마련하였다.
이곳에는 다섯 개의 석불과 이들을 보좌하는 산신, 용왕 등 일곱 개의 석불을 모시고 있다. 석불은 모두 현무암 자연석으로, 석불 현상을 뚜렷이 갖추지 못하였다. 그 앞에 시멘트로 제단을 축조하였다. 祭場 주위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장방형으로 울타리를 둘렀다. 이 곳에서 치성을 하면 득남하게 된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이곳에서 石佛祭를 지낸다. 석불제의 대상신은 石佛列位之神이다.
回泉洞 寺址
제주시 회천동 새미마을 화천사 북쪽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터이다. 이 지역 일대는 현재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절터왓’ 혹은 ‘절왓’이라 불리는 곳이다. 지형은 원만하게 경사가 졌고 남고북저 형태를 띠고 있다. 북쪽 방향의 ‘절동산’ 동쪽에는 기와 편과 자기 편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은 ‘새미’라는 용천수를 중심으로 마을과 절이 들어섰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에는 고려시대 사찰이 있었는데, 고씨와 양씨 등이 새미물을 중심으로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발굴 조사 결과 분청사기와 백자, 그리고 도기와 어골문의 기와 등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폐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에는 화천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화천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사찰이 폐사되자 마을 주민들이 부처님 대신 만들어 모셨다는 오석불이 남아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오성)
2009년에는 아래 사진의 중간 부분으로 새로 길이 뚫려 절터가 대부분 길에 들어가 버렸다.
회천동 새미하로산당 마불림제
굿은 신앙대상인 신령을 모셔놓고, 의례의 전문가 샤먼인 '심방'이 개인 또는 가족, 마을의 행운·풍요·다산 등을 기원하는 의례이다. 제주의 굿은 그 규모에 따라 '큰굿', '족은굿'으로 나눌 수 있고, 굿을 하는 범위로 보아 '집안굿', '마을굿'으로 나눌 수 있다. 집안굿은 큰굿으로 할 수도 있고 족은굿으로 할 수도 있으며, 마을굿도 이와 같다. 큰굿은 신앙하는 모든 신령을 청하여 의례를 하는 것으로 적어도 3~4일간 소요되며, 심방의 입무의례인 '신굿'의 경우는 13~4일이 소요된다. 족은굿은 단 하나의 대상 신령만을 청하여하는 의례로 보통 하루 안에 끝난다. 이 의례 행위는 종교적 행위와 주술적 행위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시 회천동(回泉洞) 동회천 마을의 본향당. ‘새밋당(세밋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회천마을의 옛 이름이 새미(세미)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005년 4월 6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9-2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도 제주시 회천동 1058번지에 있다.
당집 등의 특별한 시설이 없다. 수령이 많은 팽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고, 왼쪽 편에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었다. 팽나무 뒤쪽에는 마을에 시집 온 여성들이 자기 마을에서 가지 갈라 온 당들을 모시는 곳이 있다. 제단 주위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새미하로산당은 제주시 회천동 동회천 마을의 본향당이다. 마을 주민들의 생산(生産), 물고(物故), 호적(戶籍)을 관장한다. 당 안내문이 있는 입구에서 과수원이 있는 방향으로 약 100m 정도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당 인근에는 과수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신(堂神)은 새미하로산또이며, 송당본향당 소로소천국의 여덟 번째 또는 열두 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아직도 당굿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새미하로산또는 사냥을 하는 산신일월조상(山神日月祖上)이기 때문에, 당굿을 할 때는 후반부에 산신놀이를 한다. 제일(祭日)은 1월 14일(신과세제), 7월 14일(백중마불림제)이다. 당의 본풀이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가운데 현용준이 채록한 본풀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회천 동백길, 어느 처절했던 영혼의 핏물인가, 해가 바뀌어도 매해 붉다!
동회천 마을 안길에서 약 200여m를 가다가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물통 왼편 길로 들어서면 동백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덕구의 흔적
이덕구는 제주4·3 민중항쟁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1920년 북제주군 조천읍 신촌리 출신인 이덕구는 일본 교토(京都)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고, 해방 뒤 귀향해 조천중학원에서 역사, 체육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덕구는 1948년 8월 당시 군사총책이던 김달삼이 해주인민대회 참가를 위해 월북하자 무장대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이덕구는 1949년 6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으며 시신은 당시 관덕정 앞에 며칠간 ‘전시’되기도 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대부분 4·3 와중에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부인과 다섯 살 아들 진우, 두 살짜리 딸도 4·3 당시 죽었다. 어린 아들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관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제주4·3연구소 한 관계자는 “이덕구 선조의 꺾어진 비석은 4·3의 역사적 비극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며 “그래도 매해 이곳에 대한 벌초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던 회천지역 역시 4·3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남겨야 했다. 희생터인 ‘소낭굴’을 비롯해 소규모 마을공동체였던 ‘드르생이’, ‘새가름’ ‘산물랑우영’ 등 잃어버린 마을로 변모하고 말았다. 소낭굴은 1949년 2월 제주읍 동부 8리 토벌작전 당시 무차별 총을 난사하고 전투기에서 기총소사가 이뤄지는 등 전형적인 양민학살의 실태를 보이면서 주민피해가 컸다.
서회천 자연마을이던 드르생이는 15호 가량이 살고 있었으나 초토화작전 이후 주민소개 잇따랐다. 따라서 드르생이 지역은 대부분 과수원 터로 변했으며 방앗간 집담과 연자방아가 남아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20여호가 살았던 새가름은 1948년 11월27일 군경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초토화됐다. 현재 감귤원으로 변모해 당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7가구가 거주했던 산물랑우영 역시 11월 초토화된 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주민들이 살았던 곳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일부 자취가 남아있다.
이 밖에도 은신처였던 ‘석구왓궤’와 희생터인 ‘감낭우영’ 등이 4·`3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덕구의 비
제주 4·3 민중항쟁의 최전선에 섰다가 1949년 6월 9일 623고지에서 총살되어 나무에 꿰어진 채 산을 내려와 민중의 소망같은 숟가락 하나 유산으로 남긴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이덕구의 비입니다.
화천사 입구에 세워진 4·3 희생자 위령비
가운데 동강난 비석이 소낭밭에 있던 이덕구의 할머니 강씨의 비석
감낭우영
회천마을 입구에서 200여미터 남쪽으로 올라가면 세갈래 길이 나오는데 바로 그 왼편 지경이 감낭우영입니다. 1948년 1월 10일 삼양주둔 군경토벌대가 급작스럽게 공격해오자 마을 사람들은 산을 향해 달아납니다. 그중 17명의 주민이 저 길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합니다.
산물낭우영 마을
소낭굴 가는 길
소낭굴
동회천 마을에서 약 2.9km 올라간 곳에는 1949년 2월 4일 토벌대의 제주읍 동부 8리 토벌로 이 마을 주민 40여명이 희생당한 소낭굴이 있습니다. 쇠먹이는 물통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가족묘지 옆으로 옴팡한 밭이 보이는데 그 너머에 있는 언덕을 소낭굴이라 부릅니다. 이곳에 조그만 소낭굴이 있어 언제부턴가 이 등성이를 소낭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안개낀 소낭굴
안개걷힌 소낭굴 전경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46)이덕구 가족 비석
일가족 희생… 태양은 떠도 깜깜한 세상
2008. 5. 27 <세계자연유산해설사회>
▲토벌대의 총질에 훼손된 이덕구 조모 비석(옮겨지기 전의 모습)
이덕구의 가족 비석이 세워진 회천동으로 가는 길엔 오월의 훈풍과 하얀 찔레꽃 향기가 역사의 부활을 소망하듯 진한 향을 뿜어낸다.
지난 2007년 음력 10월 20일 귀한 생명의 핏줄로 살아 남은 손녀와 손자들에 의해 흩어져 있던 영혼의 처소들을 한 곳에 모아 14기의 비석에 20여명의 영혼들을 모신 이덕구 일가의 비석이 건립되었다. 뒤이어 지난 2월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손녀와 외손, 그리고 제주도의 손녀에 의해 이곳에서 60년만의 귀향풀이 굿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외침 헛되지 않으리
4·3으로 인한 이덕구의 가족사는 거의 절멸이었으며, 행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하더라도 거의 숨어서 살아야 했던 분단시대의 비극이기도 했다.
"진드르 껴안은 신촌리엔 선지자 네 분 계셨다.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피어 한라산 골짜기마다 산새 지저귀고 물오른 나무 이파리 푸르름 가득하여 평화와 희망을 목청껏 노래하던 그해 무자년 사월 초승, 제주 온 섬 아수라장 누가 우리 부모 형제를 범하는가. 누가 우리 친구 이웃을 범하는가. 이건 아니야! 친구여, 형제여, 이웃이여, 당하고만 있을 쏜가. 분연히 일어나 불쌍한 백성 함께 하자. 59년 전, 산에서 들에서 골짜기에서 제주백성에게 외치던 그들의 함성 들립니다. 온 몸을 불 사른 신촌마을 네 분 선지자. 이호구 선생, 이좌구 선생, 이덕구 선생, 이순우 선생, 이제는 구천에서 고이 내려오소서. 맺힌 원혼을 푸소서. 살아 있는 우리가 앞에 나서 저 산새들 울음 멈추게 하리오. 아! 어찌 이들 네 선지자를 잊으리오. 이민족을 사랑했고 온 백성을 다독이던 그 정신 그 애국심 후세에 남기려 작은 정성 모아 여기 작은 돌에 이름석자 새겨 영원히 기리리라."
이승익 시인의 쓴 쓸쓸한 역사의 비애와 정의로운 정신과 생명을 노래한 비장한 비문이다.
"공은 일본 오사카 일신상업학교, 입명관대학을 졸업, 군 임관 제대 후 해방전 귀향하여 청소년 및 민중지도에 힘쓰셨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교편 생활 중 4·3민중항쟁이 발발하자 3·1지대 지휘관으로 민중봉기의 선두에 섰으며 이후 총지휘관으로 추대되었고 1949년 6월 9일 16시, 623고지에서 서거하셨다. 배 제주양씨 후상은 1948년 12월 26일 4·3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이덕구와 그의 부인 양후상의 비석에 씌여 있는 비문이다.
비극의 가족사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 출신으로 해방 전 일본으로 건너가 입명관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학병으로 입대,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어 복무 중 일본이 패전하자 제주로 귀향하였다. 미군정 하의 해방조국은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갈등의 심한 가운데 조천면 민청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새로 설립된 조천중학원의 역사·체육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5·10 단선 반대를 위한 봉기를 일으키자 5월 말경에 입산하여 무장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무장대 군사총책 김달삼이 해주 인민대회에 참가 차 월북함으로써 이를 이어받아 무장대의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1949년 6월 9일,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옆에 전시되어 사실상 4·3의 종식을 알리는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조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총살된 어머니를 비롯하여 이덕구의 가족, 친척들은 수십명이 화를 당했다. 1948년 10월 25일, 여순사건 직후 경찰이 마을에 와서 이덕구, 이좌구, 이호구의 집을 방화했다. 이호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그의 아들 이순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경찰은 삐라를 만들어 이덕구의 항복을 촉구했다. 즉 "이덕구가 항복해 내려오면 가족들은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전부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바로 뒷날 조천과 신촌에 무장대의 습격이 들었으므로 이덕구의 가족들은 살아날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일본에서 4·3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섰던 강실 재일본 4·3유족회장은 이덕구의 외조카이다. 그는 울음을 삼키며 증언한다. "1948년 12월 26일 이덕구 가족·친인척 20여명이 몰살되었습니다. 결국 48년 12월 20일경 경찰은 우리어머니를 포함해 이덕구의 가족과 친인척 20여명을 연행했습니다. 처음에 끌려간 곳은 조천지서이고 곧 읍내 제1구서로 옮겨졌다가 약 일주일만인 48년 12월 26일 별도봉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특히 이덕구의 셋아버지 가족 3명도 희생되었는데 이 중 한명은 조천중학원생으로서 불구자인데도 불구하고 바닷가 고깃배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죽었습니다. 조천리에서는 외할머니의 친척들이 친지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최근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이덕구 가족 비석 전경
훼손된 비석이 전하는 말
1949년 2월 4일 제주시 동부 8리 대토벌 시 봉개 인근 주민 40여명이 토끼몰이식 수색을 피해 동회천 남쪽에 위치한 소낭굴에 숨었으나 토벌대에 걸려 학살되었다.
이덕구의 조모 묘지가 이 지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묘지에 있는 비석은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2등분으로 부러진 채 최근까지도 그대로 서 있었다. 비석에는 총질을 한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비운의 길을 걸어간 혁명가의 비극적 가족사를 그 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훼손된 비석은 하단부만 남아 있으나 '강씨의 묘(姜氏之墓)'란 비명과 비문 중 이덕구 항렬의 이름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왕조시대에 있었던 부관참시의 비정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4·3의 비극적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이등분으로 쪼개져 있던 이 비석은 최근에 건립된 가족비석으로 옮겨졌다.
강실 회장의 증언은 계속된다.
"우리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기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직감을 했는지 매일 진수성찬으로 우릴 먹였고, 좋은 옷만을 입혔다. 경찰이 우리집에 들이닥친 것은 새벽 2시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나(11)와 여동생(9)을 가리키며 '저것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책임자는 '이것들은 씨나 전하게 내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쫓아가려 했으나 경찰이 우리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죠. 경찰은 어머니가 업고 있는 2살난 누이동생도 떼어놓아도 좋다고 했으나, 어머니는 '저것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밥을 빌어먹을 수 있지만, 이 아이까지 살리려고 하면 결국 모두 죽게 된다.'며 그냥 업고 가셨습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회천동 예술창작창고
물드리네·회천 공방·껌은돌 등 열린 창작실
굳게 잠긴 문화의 집 창작실 뜻대로 쓰여야
▲창작실은 예술가만의 공간을 뛰어넘어 작가와 지역주민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사진은 제주시 회천동 예술창작창고 <김영훈씨 제공>
"예술인마을이 있다고 하지만 젊은 작가들에겐 높은 벽으로 비쳐진다. 이런 곳이 하나둘 생겨난다면 새로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문화 지도를 만들어 창작공간을 순례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지난 18일 제주시 서회천마을에서 만난 김영훈씨. 한국화, 도예,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작가다.
그는 제주도의회 오옥만 의원과 제주민예총이 공동으로 시행한 '예술창작창고' 대상자로 선정돼 지난해 3월 회천동에 창작공간을 마련했다. 115㎡(35평) 규모로 조립식 건물을 지었다. 전체 사업비중 20%를 떼어내 가마를 구입하고 난 뒤 나머지 비용으로 공간을 조성해야 했지만 신이 났다. 때만 되면 작업실 짐을 싸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술창작창고의 등장은 반길 일이었다. 예술가들에겐 마음놓고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지역주민들에겐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목표 아래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제주시 회천동 도예 공방, 한경면 낙천리 물드리네가 예술창작창고로 조성됐고 올해는 제주시 조천읍과 삼양동에 추가로 문학·미술 작업실 등이 들어선다.
이들 공간은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문화나눔을 벌이는 '열린 창작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김영훈씨는 "올해 상반기중에 토우제작 실기 등 누구나 부담없이 흙을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설할 계획"이라면서 "작가의 작업공간을 뛰어넘어 주변의 삶과 동화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회천동 코끼리랜드
회천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물 자연휴양림이 있습니다.
(중앙상단에 았는 배경음악을 끄시면 눈 내리는 소리, 바람소리,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