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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헌정수리]횃불행진 "시위결정"
김대중 석방등 6개항의 결의문 공시
[시민투].학생 집행부 결성 대열 정비
유인물 인쇄소 제작 조직적 투쟁... 생선 상점 아줌마들도 주먹밥 나르며 동참
시위확산 목포 <3>
[당시 20여만 전시민이 참여했다]고 단언해도 그때 목포시민이었다면 누구도 [아니오]라고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완전히 하나였던 목포항쟁. 평화적인 항쟁으로 8일간 장기투쟁을 계속했던 목포시민들의 바람과 의지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답은 5월 22일자 [목포시민 민주투쟁위원회]와 민주 헌정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명의로 인쇄돼 뿌려진 [우리 겨례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의 결의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목포시민들은 지난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 빛어진 살육참상을 보고 듣고 확인했다. 거세되지 않은 자유시민임을 자부하는 우리들은 이제 ,오늘의광주.목포사태를 보면서 더이상 참을수 없는 우리의 뜻을 한데 묶어 우리 겨례와 세계자유민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광주 살인만행 규탄
1.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의 광주사건을 조직적으로 감행된 변명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양민 학살로 본다.
그날의 광주시는 흡사 인간도살장이었다. 80만 시민이 숨쉬는 도심지에 공수특전대를 투입한 사례를 어느 역사에서 찾아볼수 있단말인가.
1. 우리는 이번 광주.목포사태를 통해서 이 나라 이 민족,우리시민은 총칼등 어떠한 폭력적 탄압으로 억압한다고 해서 눌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다. 녹슨 쇠고리이고 폭압정치의 흉기인 비상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1.이유없이 두절되는 통신의 두절. 기차와 정규노선 버스의 차단은 자유시민을 굶겨 죽이려는 포위공격으로 볼수 밖에 없다. 통신과 교통수단을 이 시간부터 정상화시켜라.
1. 피값은 외상이 없다. 광주 시민이 흘린 피의 삯은 구체적으로 즉시 보상되어야 한다. 그 자유시민의 피값을 보상하기 위해 아니라 국정을 독점 농단하는 정치적 폭력배들을 오늘 장장 몰아내고 민주헌정을 조속히 실현하라.]
안철씨에 따르면 이 문건은 당시 연동교회 전권모 목사(현 제주서부교회목사)가 작성했으며 기독교방송기자 출신이었던 정목사는 이후 나온 다른 유인물도 계속 작성한다. 특히 이 유인물은 처음에는 필경에 의해 인쇄됐으나 23일밤 강수복씨(작고,당시 65세로 정당활동)가 이남결씨(현 62세 .복역후.인천으로 이주)에게 의뢰해 활자로 1만여부 이상이 인쇄돼 시내 전역에 뿌려진다.
23일 오전 11시께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제3차 궐기 대회에서 강수복씨에 의해 공식 낭독된 이 유인물은 계엄사가 공소장에 [선동적이고 극렬한 내용]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시민들을 사로잡는다.
특히 광주지역의 투사회보등 유인물이 수공업적인 동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목포에서 나온 유인물은 인쇄소에서 다량 제작돼 조직적인 작업이었음을 보여준다.
22일 목포 시민민주투쟁위원회와 학생중심의 집행부가 결성되자 목포항쟁은 이제 시민들이 투쟁중심부를 일사불란하게 따르면서 그 열기가 달아오른다.
23일에도 오전 11시부터 목포역 광장에서 제 3차 궐기 대회가 시작되며 참여 인파는 거의 5만에 달한다. 이때부터 연단에는 [시민투]인사뿐아니라 시민이면 누구나 올라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시위대에 음식제공
집행부가 광주의 상황과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예기하고 나면 광주시민이 나와 증언을 하기도 하고 고등학생들도 스스럼없이 연단에 올라 자신들의 뜻을 펼친다. 시민들의 행동은 적극적으로 변한다.
이날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식사를 준비해서 시위대에게 주자]는 안내방송이 나간후 이때부터 이곳저곳에서 먹을것과 성금이 답지한다. 아줌마들은 30인분 또는 50인분씩 밥을 지어 역 대합실로 가져온다.
특히 서창에서 생선행상을 하던 아주머니들은 리어카로 가득 밥을 싣고와 [우리 김대중선생을 어떻게 해서든 지 살려야 합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싸워주십시오]라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모습도 한쪽에서 진행된다.
[나는 대회직전 교회여신도들에게 연락해 목포역에서 철야한 청년,학생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부 목사와 목포대학장에게 다음날 시민대회 연설문 준비를 부탁했으나 [나는 안되겠네]라고 거절해 어쩔수 없었다. JC도 나를 트럭으로 납치하려고 시도 했으며 이들은 차량을 이용해 [질서를 지킵시다]라는 방송을 하고 다니며 시위를 방해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JC를 비난했으며 오후에는 JC회장이 찾아와 사과하면서 학생들 식사값에 보태쓰라고 약간의 돈을 주고 가기도 했다] (안철씨의 증언)
오후 3시께는 청년,학생들의 조직이 강화돼 [학생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돼 투표로 박강규씨 (당시 21세로 목포실전학생,현재 목사로 경기도 광주거주)를 집행부장으로 선출하며 기획실재무 홍보 지역경비등의 부서도 조직한다.
이후 [시민투]의 일정과 계획이 쪽지로 집행부에 전달되면 집행부 논의를 통해 시위가 진행되고 집행부도 요구사항과 논의사항을 역시 쪽지로 [시민투]에 알려와 한층 조직적인 투쟁이 진행된다. 이같은 비공개논의는 사태 수습후에 있을 피해를 최대한 줄이자는 의도였다.
15만 시민 횃불 시위
이날 밤 8시부터는 태극기를 앞세운 장엄한 횃불행진이 캄캄한 목포 시가지를 밝힌 가운데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대동세상이 어떤것인지를 유달산과 삼학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세계에 호소한다.
제 1차 횃불행진을 한 이날 10만 인파는 횃불 4백개 피킷 1백 50개를 움켜쥐고 전 시가지를 누빈다.
밤 10시 40분까지 이어진 역->목양 ->목여고 -> 시민극장 -> 중앙극장 ->중앙시장 -> 목포극장 ->중소기업은행 ->구경찰서 ->항만터미널 ->선창-> 대한통운 -> 역의행진코스 는 자랑스런 목포시민이 만들어낸 민주공동체의 축제 그것이었다.
[그날 밤 8시에 횃불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마침 정전이 되어 시내가 캄캄하자 낮에 체면때문에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만하던 시민들이 모두 동참해 그 수가 약 15만명에 이르렀다. 그 대열이 역전광장에서 2호광장까지 늘어서 함성을 지르는데 시전체가 그 소리에 묻히는것 같았다. ] 안철씨의 이같은 회고와 감회는 목포 시민들 모두의 가슴에 지금도 계속 살아 남아있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