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1절 -24절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 네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고 모범을 보이신 기도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따르며 적용하는 자라면 모든 기도의 순간마다 시험과 악에 대한 고민, 애통함, 나아가 구원에 대한 간절한 요청과 기다림을 고백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은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다룹니다. 우리는 본문을 마치 불이 난 건물 속에 뛰어들어 화재 시작점을 찾는 소방관의 절박감으로, 흥건한 물을 차박차박 지나며 물을 뱉고 있는 수도꼭지를 찾아 잠그는 집주인의 마음으로, 죄악의 잡초가 숲처럼 자라버린 오늘의 세상을 말씀과 기도로 헤쳐 나가겠다는 결단으로 묵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1절은 이 모든 시작에 뱀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계20:1-2). 성경의 시작에 등장했던 뱀이 무엇인지는,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에서 ‘마귀요 사탄’이라고 정확히 설명합니다. 죄악에 대해 기도하기 위해서는 1) 가장 먼저 사탄 마귀가 우리 중에 있음을 항상 기억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 마귀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1절) 합니다. 들짐승이라는 단어를 원문으로 직역하면 ‘땅에서 살고 있는 것들’ 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존재 중 나쁜 쪽에 있어선 가장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 뱀이 ‘질문’을 통해 ‘대화’ 함으로 인간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2) 악의 세력이 나보다 간교함을 인정해야 하며 대화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에 대해서 여지를 두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 어느새 선을 넘은 자신을 볼 것입니다. 마귀는 배척의 대상이지 설득의 대상이 아닙니다. 양심, 도덕, 그리고 지금까지 축적되었던 신앙지식이 위험신호를 보내면 일단 멈추고 막아야 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와 싸우겠다고 말하며 ‘타인에 대한 존중심’을 잃어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셨지만 사람을 위해서 독생자를 제물 삼을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립니다(8절). 남편이 아내를 정죄하고 고발합니다(12절). 상호존중 속 보완이 아닌 힘의 지배가 부부관계에 시작됩니다(16절). 다른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도 단절되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산을 막습니다(18절). 그 영향 아래 사는 우리이기에, 악에 대한 단호함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중간의 균형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한 오늘입니다.
죄악에 대한 세 번째 교훈은 사단이 왜 여성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볼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남성이 여성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여성의 잘못으로 남성까지 피해를 받았다는 식의 성차별적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2장 15절부터 17절입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이 구절 다음에 돕는 배필 이야기가 나오며 여자가 창조됩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을 통해 그 명령을 들었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 틈을 노린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은 원문으로 ‘엘로힘’입니다. 당시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단 이스라엘만이 아닌 중동의 모든 곳에서 신을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동일한 창조기사를 적으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한 표현인,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창세기는 1장에서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가 존재하는데 2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시작하셨고 이뤄 가시는 ‘여호와’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나아가 3장에서는 이 ‘여호와 하나님’을 그저 ‘하나님’으로 말하며 관계 맺지 못하던 한 명으로 인해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경고합니다.
아직 타락 이전이기에 ‘여자’라 불러야겠지만, 모든 여성을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에 ‘하와’라 칭하겠습니다. 3) 하와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교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가 뱀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친밀했다면 즉시 하나님을 대화의 장에 초청했을 것입니다. 대화에 하나님을 배재함으로 그녀는 스스로의 상태를 증명했습니다. 하와는 아담이 받았던 명령이 아닌, 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 속에서 존재의미와 사명을 깨달아야만 했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과는 그 열매에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 아니라, 인간이 모든 창조의 축복을 누리지만 결국 창조주의 은혜 안에 거하는 피조물임을 증명하는 징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말씀의 본의를 깨닫지 못했고,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도 없었습니다. 결국 2장 17절에서 ‘반드시 죽으리라’ 던 명령이 3절에서 ‘죽을까 하노라’ 고 희석하고, '먹지 말라' 고 한 것을 ‘만지지도 말라고’ 확대하며, 날마다 보던 나무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처럼 봅니다. 대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 틈을 파고든 마귀는 4절에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부정하고 5절에서 문제를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의 틈이 엄청난 균열로 확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의 시작점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말씀이 지식과 감정과 삶에 녹아들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불길 중심에 있음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말씀 속으로 몸을 던져 피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말씀을 왜곡하고 오용해 질문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고(눅4:4),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고(눅4:8),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고(눅4:12) 말씀을 선포하고 물리치셨습니다. 그 말씀들은 단순한 정보가 아닌, 광야에서 금식하며 갈고 닦아 체화된 고백과 결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인터넷을 접속하면 수많은 설교와 자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거나, 별세한 목회자의 설교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편지를 돌리며 메시지를 전했던 초대교회보다 거룩하다 말할 수 없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료가 있어도 그것을 자기 삶에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성경을 구입할 수 있음에도 구전으로 이어가던 때보다 말씀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7일 168시간 중 1퍼센트 밖에 안 되는 두어 시간을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회에 등록했다는 것이 좋은 사람이라는 면죄부를 받은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SNS에 설교들을 좋다 누르고 공유하지만, 자주 듣고 적용하려는 것이 아닌, 나는 이정도로 품격 있는 신앙인이라 우쭐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하게 차린 음식을 먹지 않고 온몸에 덕지덕지 칠하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은 아는 척 뽐내는 것 아니라 적용하라 주신 것입니다. 전하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연구하고 최선을 다해 전해도, 이것이 제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저 헛소리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 한다고 말합니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경을 몇 번 읽고 설교를 얼마나 들었는지가 아닌, 말씀의 날선 칼질을 얼마나 받아내었는가를 기준 삼아야 할 것입니다.
험난한 세상입니다. 마귀는 말씀을 왜곡하고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오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뱀과 대화할 때가 많습니다. 욕망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 없이 먹습니다. 서로에게 죄를 전염시키고 정죄하며 원망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듯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9절, 15-19절). 이것이 죄악을 대항하는 마지막 교훈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실망하셔서 인간을 포기했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오히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를 주셨습니다. 저주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 사명을 기억하기 위한 각인이었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생명을 향한 수고를 잊지 않도록, 내조의 고통은 가정의 회복을 위해 애써야 함을, 땅의 수고는 우리가 경작해야만 하는 곳이 어딘가 존재함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주셨음을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증거로 여기며 감사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 길에 고통과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사명을 이루기 위한 징검다리로 믿고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가 먼저 죄를 지었지만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그가 말씀을 직접 받은 자로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게 하신 성령님께서는 세상과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누군가는 힘겹지만 죄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매순간 동행함으로 마귀 사탄을 이겨낼 뿐 아니라, 죄악으로 물든 상황을 향해 진격해 에덴을 회복하는 하루되길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와의 대화 자리가 아닌 마귀와 마주하려는 저를 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귀의 존재를 항상 기억하고 주의할 뿐 아니라, 말씀의 칼에 자신을 맡기고 복음의 용광로에 삶을 던지며 시험을 이기길 소원합니다. 타인을 통해 듣는 하나님이 아닌,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 기도에 ‘시험과 악’에 대한 깊은 고민과 애통함, 나아가 구원에 대한 간절한 요청과 기다림을 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 하루를 보내는 동안, 오늘도 영적 전투의 현장에 서 있다는 증거를 적어봅시다.
3. 죄에 여지를 두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시다.
4. 타인의 고백을 정보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나의 고백으로 체화하기 위해 말씀을 어떻게 보고 묵상하며 적용해야 할지 계획하고 실천합시다.
5.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작성: 이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