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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집 제20권 / 행장(行狀)
대곡(大谷) 성 선생(成先生) 행장
본관(本貫)은 경상도(慶尙道) 창녕현(昌寧縣)이다. 증조(曾祖) 득식(得識)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부윤(漢城府尹)이고, 증조비(曾祖妣)는 거창 신씨(居昌愼氏) 정부인(貞夫人)이다. 조(祖) 충달(忠達)은 봉정대부(奉正大夫) 김포 현령(金浦縣令)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이고, 조비(祖妣)는 배천 조씨(白川趙氏) 증 정부인이다.
고(考) 세준(世俊)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이고, 비(妣)는 비안 박씨(比安朴氏) 숙인(淑人)이다. 선생의 휘는 운(運)이요 자는 건숙(健叔)인데, 학자들이 대곡 선생(大谷先生)이라 칭한다. 성씨(成氏)는 고려 때의 저성(著姓)으로 몇 대를 내려와서 여완(汝完)이 본조(本朝)에 벼슬하여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는데 시호가 문정(文靖)이다. 문정공이 예조 판서 석연(石䂩)을 낳고, 판서가 의정부 좌찬성 억(抑)을 낳았다.
이분이 바로 선생의 고조(高祖)인데, 가문의 명성과 대대로 쌓은 공덕(功德)은 비갈(碑碣)에 밝게 드러나 있다. 박 부인(朴夫人)은 바로 사간 효원(孝元)의 따님으로 부녀자로서 지켜야 할 덕행을 갖추었다.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정사년(1497, 연산군3) 1월 16일에 서울집에서 선생을 출산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단아하고 순수함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아홉 살 때 비로소 《자치통감(自治通鑑)》을 읽기 시작했는데, 겨우 몇 권을 읽자 갑자기 문리(文理)가 터져서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약간 자란 뒤에는 분발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종사(從事)하면서 효제(孝悌)를 독실히 행하고 겉치레를 버리고 실제에 힘썼다.
간혹 어버이 명에 따라 과장(科場)을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즐기는 바는 이에 있지 않았다.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생원ㆍ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하였으나 이때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류(士類)가 참살된 뒤이라서 선류(善類)들이 기운을 잃어 벗어 던진 유자(儒者)의 옷이 땅을 덮었으므로 선생은 이를 슬퍼하는 시를 짓고서, 드디어 부인의 고향인 호서(湖西)의 보은현(報恩縣)으로 돌아갔다.
속리산(俗離山)의 맑은 경치를 사랑하여, 그 산 밑의 한 구역에 살 곳을 정하고서 ‘대곡(大谷)’이라 이름하고는 돌을 뚫어 샘물이 흐르게 하고, 풀을 베어내고 허름한 집 한 채를 짓고서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계획하였으며, 식량이 자주 떨어졌어도 전혀 근심하지 않고 마음 편히 지냈다.
임인년(1542)에 대신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사년(1545, 인종1)에 사화(士禍)가 다시 일어나서 선생의 중씨(仲氏) 참봉공이 권간(權奸)에 의해 참화(慘禍)를 당하니, 선생은 중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다.
계축년(1553, 명종 8)에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는 하루도 머물지 않고 곧장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다.
명종(明宗) 말년에 간흉(奸凶)들을 제거하고 초야에 묻힌 현자를 선발할 때 선생도 조남명(曺南冥)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경전에 밝고 덕행을 수양했다 하여 부름을 받았으니, 이는 명종이 이들에게 치도(治道)를 자문하기 위함이었다.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스스로 말에 몸을 싣고 서울로 가니, 선생을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제수하고서 등대(登對)를 명하였다. 선생이 병을 핑계로 굳이 사양하니, 성상께서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위로해 타이름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상소해 사례하고서, 경저(京邸)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종적을 거두고서 깊은 골짜기에 다다른 듯이 근신하였다. 대사헌 박공 순(朴公淳)이 늠료(廩料)의 지급을 계청(啓請)하자 성상께서 즉시 허락하고, 또 특별히 중사 내관(內官)을 보내어 술과 음식을 내리고서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옮겨 제수하였다.
선생은 대궐로 들어가 사은한 다음, 재차 진정(陳情)하는 소를 올려 사직하고서 돌아오니, 논평하는 자들은 “거취(去就)가 조용하기로는 선생 같은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정묘년(1567)에 선조가 즉위하여, 선생을 상서원 판관, 의빈부 도사에 제수하고서 연속해 소명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신미년(1571)에 본도(本道)에 명하여 선생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음식물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 6)에 직급을 높여 사섬시 정에 제수하고서, 매우 간절한 내용의 교지(敎旨)를 세 차례나 내려 불렀으나, 선생은 연속해 상소하여 간곡히 사양하였다. 10월에 어떤 연신(筵臣)이 “선생은 빈궁하여 겨울옷도 지어 입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라고 아뢰자, 성상께서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내리고, 또 본도에 명하여 궁핍을 구제할 수 있는 물자를 지급하라고 하고, 또 매 한 마리를 주라고 하였다.
을해년(1575)에 선생의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고 위중해지자, 성상께서는 이를 듣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였다. 무인년(1578)에 사재감 정에 제수하고서, 또 곡식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은 은사(恩賜)를 받을 때마다 번민하고 황송해하는 마음을 여러 날 동안 풀지 못하였으며, 하사품을 가난한 친척과 이웃에 나누어 주어 그 광영을 함께 누렸다.
기묘년(1579, 선조 12) 4월에 병이 생겨 5월 26일에 별세하였으니, 향년(享年)이 83세였다. 임종에 앞서, 매장에 석회를 쓰지 말고, 제사에 제품(祭品)을 풍성히 하지 말고, 무덤 앞에 표석(表石)을 세우지 말라는 경계를 남겼다.
성상께서 선생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것을 듣고 또 의원을 보내어 달려가 병을 살피게 하였으나, 의원이 도착해 보니 선생은 이미 서거한 뒤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성상께서 탄식하고 슬퍼하며 즉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賻儀)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였으니, 전후의 은사(恩賜)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해 8월 17일에 보은(報恩)의 종산(鍾山)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옛집에서 몇 마장 거리이다.
배위(配位)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 증 승지(承旨) 벽(碧)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었으나, 선생은 자신이 종가(宗家)의 적자(嫡子)가 아니라 하여 후사를 세우지 않고서, 부인의 오빠인 군수 천부(天富)의 아들 가기(可幾)를 데려다가 기르고 가르쳤다.
또 중씨(仲氏)의 독녀(獨女)가 일찍이 어버이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가엾게 여겨, 가기를 조카사위로 삼고서 뒷일을 부탁하였다. 가기는 선생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선생을 위해 기년복(期年服)을 입었으며, 그 아들 대(代)까지 제사를 지냈다. 사자(士子)들이 선생을 삼산서원(三山書院)에 봉향(奉享)하겠다고 조정에 아뢰니, 조정에서 ‘상현(象賢)’이란 액호(額號)를 내렸다.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계해년(1623)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고서 유학(儒學)을 존숭(尊崇)하고 장려하니, 연신(筵臣) 오공 윤겸(吳公允謙)이 아뢰기를, “성모(成某)는 실로 조식(曺植)과 명망이 대등한 사람인데, 조식은 이미 대관(大官)에 추증(追贈)되었으나 성모만은 추증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유림(儒林)의 흠이 되는 일입니다.”라고 하자, 성상께서 추증을 윤허하고서, 선생을 통정대부(通正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자상하고 온화하며 마음이 화평하고 순수하여, 거친 마음과 조급한 기운이 조금도 없었다. 7, 8세 때 이미 도(道)에 뜻을 두었고, 자란 뒤에는 더욱 덕성(德性)을 수양하고 기질(氣質)을 교정(矯正)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이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내면을 살펴보면 실로 조행(操行)이 확고하였다.
수양이 깊어져서 덕행(德行)과 기국(器局)이 이루어진 뒤에는 덕을 숨기고 세속 사람들과 섞여 지내며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풍도(風度)와 의표(儀標)가 고결하여 물외(物外)에 초연하여,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지푸라기처럼 여겼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곁에 있으면서 삼가고 조심해 일마다 모두 친히 보살피며 봉양하였다. 부정공(副正公)은 성품이 엄격하여 섬기기 어려웠으나, 선생은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도하여 부정공의 환심을 얻었으니, 여러 형제들로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연세가 90에 가까운 모부인(母夫人)이 항상 잠이 적은 것을 괴로워하자, 선생은 조석으로 올리는 음식과 잠자리와 옷, 이불 등을 모두 직접 점검하고, 밤이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서 어머니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 없이 다 하다가 어머니가 잠이 든 뒤에야 비로소 물러났다.
상사(喪事)에 미쳐서는 선생의 나이가 이미 높았으되, 몸이 훼손되도록 슬퍼한 것이 정한 제도(制度)를 넘어서 거의 몸을 지탱하지 못할 뻔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모두 극진하여 백형(伯兄)을 아버지처럼 섬겼고, 형님이 병을 앓을 때에도 아버지를 돌보듯이 봉양하였으며, 상사 때에도 아버지 상사 때처럼 통곡하였다. 그리고 중씨(仲氏)가 비명에 죽은 것을 슬퍼하여 중형을 말할 적이면 번번이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선생의 학문은 자신을 반성하여 자신에게 연관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아, 보고 들을 수 없는 즈음에도 항상 장경(莊敬)의 마음을 보존하고 한가로이 홀로 있는 사이에도 태만한 용모를 드러내지 않고서, 항상 방안에서 거처하며 묵묵히 팔장을 끼고 단정하게 앉아, 고명(高明)의 경지에 마음을 쓰고 함양(涵養)의 자리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고요하여 조금의 동요도 없었으니, 이른바 “그 문을 지나면서 보면 텅 비어 사람이 없으나, 그 장막을 헤치면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참으로 선생을 이른 것이다. 선생이 독서할 때는 책상 앞에 앉아 깊이 생각할 뿐,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지 않았다.
그러므로 뜻이 안정되어 이치가 밝아지고 마음이 전일(專一)하여 생각이 순일(純一)해져서, 조급히 서둘러 대충 보아 넘기거나 많은 것을 탐하여 빨리 이루려는 의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분명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반복해 연구하며 침식까지 잊고서 기어이 통하고야 말았다.
선생은 말하기를, “성명(性命)과 귀신(鬼神)의 이치는 정미(精微)하고 유묘(幽妙)한데, 성현들께서 간혹 은미(隱微)하게 말씀하시어 그 이치를 다 설명하지 않은 것은 바로 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여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마음을 광대하게 하고 안목을 높게 가져 스스로 생각하여 깨닫지 않는다면 구두(句讀)ㆍ훈고(訓詁)의 학문에 그칠 뿐이니, 상달(上達)의 길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사(人事)를 도외시하고 성명을 담론하는 것도 학문이 아니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으로부터 용모와 언어의 사이에 이르기까지 내외 본말과 정세(精細)하고 추소(粗疏)한 것에 반드시 공력(功力)을 다한 뒤에야 거의 등급을 건너 뛰고 한쪽을 폐하는 걱정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는 기질이 선량한 것이 가장 귀하지만 입지(立志)가 우선이다. 뜻이 세워지면 행실이 뒤따르는 것이니, 모름지기 ‘고무진작(鼓舞振作)’ 네 글자를 가지고 항상 스스로 격려한다면 거의 진전이 있을 수 있지만, 진작하지 못하고 나태한 자는 아무리 아름다운 기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절대로 성취할 수 있는 이치가 없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객쩍은 생각이 함부로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공경하는 마음을 지키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평소 함양에 힘써 이 마음을 정연히 안정시킨다면 외사(外邪)가 용납할 곳이 없어서 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극기(克己)의 단계가 실로 학문을 하는 첫 번째 공부이다. 이른바 ‘기(己)’는 내 마음이 좋아하는 바로 천리(天理)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말하니, 모름지기 일상 사이에 자세히 점검하고 살펴서 잠시라도 사욕(私欲)임을 깨달으면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이 사의(私意)를 잘라내고 마음자리를 깨끗이 씻어 사욕의 싹을 남겨 두지 않으면 자연히 천리가 밝게 드러나서 인욕이 천리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소싯적에 남의 집에 우거(寓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의 딸이 선생을 사모하여 끊임없이 유혹하니, 선생은 즉시 우거를 옮겨 피하고는 항상 말하기를, “내가 평소 삼가는 바가 재물과 여색(女色)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세상의 선비들이 인물의 장단(長短)을 평론하는 것을 능사로 여겨, 비록 선배 장로(長老)라 하더라도 기탄없이 평론하는 것을 가슴아파하며 매양 탄식하기를, “공부가 어찌 타인을 점검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차례는 책에 실려 있고,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은 송유(宋儒)의 해석에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니, 후학들은 성법(成法)을 독실히 지키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논리를 세워 글을 짓는 자가 더러 있으니, 이 어찌 첩상가옥(疊床架屋)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아, 비록 질병이 위독할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80이 된 뒤에도 등불 밑에서 깨알 같은 글자를 능히 보았으므로 일찍이 “하늘이 나에게 밝은 눈을 복으로 주었다.”라고 하였다. 자제가 일찍이 명필에게 ‘수방심(收放心)’ 세 글자를 얻어 벽에 걸고자 하자, 선생은 좋아하지 않으며 “착실한 공부는 내 마음속에 있으니 벽에 걸어 놓고서 표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하였으니, 선생이 내면에 힘쓰고 겉치레에는 힘쓰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집안을 다스림에 엄격하고 법도가 있어, 부인과 더불어 백발이 되도록 하루같이 서로 공경하였으며, 친척을 돌봄에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극진하였으며, 상사의 절차에는 인정과 예문(禮文)을 다하여, 비록 촌수가 먼 친척이라 하더라도 정성과 예를 다하고, 음식과 부의(賻儀)를 각각 정의(情誼)에 따라 알맞게 베풀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공순하여 일에 대해 가부를 따지지 않는 것 같았으나, 의리를 결단함에 이르러서는 태도가 분명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일을 계획함에는 자세히 살피고 치밀하게 생각하여 섬세한 데까지 마음을 썼으므로 빈틈이 없었다.
종적을 숨기고 산속으로 들어가서도 오히려 산이 깊지 않음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실책과 민생의 고통을 들으면 매양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탄식하며, 마치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처럼 괴로워하였다. 사람을 대함에는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 할 것 없이 한결같은 지성으로 화기애애하게 대하여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다.
남의 작은 선행이라도 들으면 칭찬해 마지않고, 불선(不善)을 들으면 덮어 주었다. 그러므로 시골에서 지낸 40년 동안 모두 선생의 덕을 기뻐하고 감화되어, 선비들은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고, 백성들은 선생을 부형(父兄)처럼 사랑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겸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고,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병을 핑계로 사절하였다.
그러나 그중에 성의가 지극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연하고 간절하게 제시해 가르쳐, 기어이 계발시키고야 말았다. 때때로 죽장망혜(竹杖芒鞋)로 혹은 소를 타거나 말에 몸을 맡기고서 정처 없이 홀로 나가기도 하고, 혹은 관동(冠童) 몇 명을 데리고 수석(水石) 사이를 배회하며 술 두서너 잔을 마시고 거문고 몇 곡조를 타기도 하였는데, 그 가락이 맑고 웅장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느낀 정취를 이따금 시로 드러내고 스스로의 생활을 즐기며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 귀가 먹자, ‘허보(虛父)’라고 자호(自號)하고서 찬(贊)을 지어 그 뜻을 붙였다. 선생은 나이가 높을수록 덕이 더욱 높아져서, 마음을 잡아 보존함이 더욱 굳고 지기(志氣)가 더욱 강하였다.
항상 이르기를, “선비는 규중처녀(閨中處女)처럼 몸을 지켜야 하지만, 만년의 절조(節操)를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사양함과 받음에 엄격하여 작은 물건 하나도 구차히 받은 적이 없었고, 인물을 식별하는 안목이 매우 밝아서 사람의 현부(賢否)와 일의 성패를 예단(豫斷)한 것이 들어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진복창(陳復昌)이 젊었을 때 당시의 인망이 있었으므로 중씨(仲氏)가 그와 서로 왕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와 상사(上舍)에 함께 있으면서도 한 번도 만나려 하지 않고 ‘선인(善人)’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뒤에 중씨가 마침내 그의 손에 죽었다. 선생은 선비를 사랑하고 현자를 좋아하는 것이 천성이었으나, 매양 경솔히 허여하는 것을 깊은 경계로 삼았고, 덕(德) 있는 사람에게 덕 있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삼았다.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우계(牛溪 성혼(成渾)) 같은 당시의 현인이 모두 선생의 일문(一門)에 모였고, 또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 이토정(李土亭 이지함(李之菡),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 같은 분들이 모두 동시대의 벗으로 함께 서소(書疏)를 강론하기도 하고, 체통(遞筒)해 가며 시문(詩文)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선생은 남명과 가장 친하였다. 대체로 남명은 인품이 뛰어나서 실로 벽립천인(壁立千仞)의 기상이 있었고, 선생은 순진하고 성실하며 공평하고 온화함으로 수양하여 자신의 덕을 더욱 넓혔다. 남명이 이를 보고서 기뻐하며 “도(道)가 이곳에 있다.” 하고는, 매양 “건숙(健叔)은 정금미옥(精金美玉)처럼 아름다워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다.”라고 칭찬하였다.
선생이 당세의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청송을 제일로 여겼다. 동주가 삼산 현감(三山縣監)으로 있을 적에 남명이 찾아와서, 세 벗이 한 자리에 모였던 즐거움과 학문을 강론해 연마하고 서로 도와 절차탁마(切磋琢磨)했던 논의를 그곳 사람들이 아직까지 부러워하며 전일의 일처럼 전하고 있다.
화담, 토정도 함께 와서 침상(寢床)을 맞대고 며칠 밤을 이야기로 보내니, 상공(相公) 이준경(李浚慶)이 이 소식을 듣고서 “그때 하늘에는 응당 덕성(德星)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선생의 문장은 성정(性情)과 자득(自得)에서 나왔으나, 시에 더욱 능하여 자세하고 적절함과 질박하고 담박함과 간결함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를테면 기묘제현(己卯諸賢)을 애도한 시에, “지하에선 은원을 잊었는데, 인간에선 시비를 말하네.〔地下忘恩怨 人間說是非〕”라는 시구와, 심회(心懷)를 서술하여 울적함을 달랜 작품에, “새옷 몸에 맞지만 두 소매 짧고, 옛 거문고 손에 익지만 일곱 현 너무 기네.
십 년 동안 산중의 약 다 맛보았기에, 손님 와서 때때로 입에서 나는 향기 맡네.[新服稱身雙袖短 古琴便手七絃長 十年嘗盡山中藥 客至時聞口齒香]”라는 시구와, 또, “하늘 높은데도 머리 숙이고, 땅 좁은데도 오히려 무릎 펴네.〔天高頭肯俯 地窄膝猶舒〕”라는 등의 시구가 세상 사람에게 회자(膾炙)되고 있으니, 그 시를 읊어 보면 선생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공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는 일찍이 어전에서 “성모(成某)는 금구(金甌 쇠항아리)와 같아서 행동 하나도 이지러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칭찬하였고, 퇴계 선생(退溪先生)은 “건숙(健叔)의 청신(淸新)하고 은은한 정취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데, 시인(時人)들이 심할 정도로 그의 고상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선생의 인품을 더욱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아, 우리나라에는 기묘ㆍ을사 연간(年間)보다 인재가 많았던 때가 없었고, 화(禍)의 참혹함도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충현(忠賢)과 지사(志士)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상심하게 한다. 그러나 선생은 뛰어나고 밝은 식견으로 멀리 떠나 은거하며 세상 밖에 홀로 서서 산수(山水) 사이에서 물고기, 새들이랑 함께 놀며 세상일을 다 잊었다. 그러므로 화난과 함정이 모두 미치지 않았다.
그 조예(造詣)의 천심(淺深)과 고하(高下)는 말학(末學)으로서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 없으나, 여러 노선생(老先生)의 평론한 말을 가지고 선생을 상상해 보면,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은거해서는 앞으로 세상에 나아가서 펼칠 뜻을 찾는다.”라는 것과, 《예기(禮記)》에 이른 바 “빛이 은은하게 날로 드러나서 담박하되 싫지 않고 간략하되 문채가 있고 온후하되 조리가 있다.”라는 것과, 《시경(詩經)》에 이른바 “밝고 슬기로워 그 몸을 보전한다.”라는 것을 선생이 거의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 선생은 덕과 재주를 속에 품고서 텅 빈 골짜기에서 일생을 마치고 끝내 세상에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선생의 불행일 뿐이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고상한 풍도와 청결한 절조가 백세를 진동시켜 속리산 한 굽이에 끼친 향기가 시들지 않아, 지금까지 듣는 자들이 상상해 사모하고 떨쳐 일어나서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자립하지 않음이 없고 보면, 선생의 도(道)가 비록 당시에는 행해지지 않았으나,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풍성(風聲)이 미쳤으니, 세상에 공명(功名)을 세우고 작록(爵祿)을 누린 자가 죽은 뒤에는 새가 날아가고 구름이 흩어지듯이 모든 명성이 다 없어지고 칭송되지 않는 자들과 비교하여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아,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 하겠다.
나 준길(浚吉)은 뒤늦게 태어나서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못했으므로 한갓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만을 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근자에 사우(士友)와 제군자(諸君子)들이 모두 “선생이 서거한 지 이미 주갑(周甲)이 지났는데도 행실과 덕을 찬술한 문자가 없는 것은 아마도 기다림이 있어서인 듯하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선생의 사실을 채집해서 자세히 기록하여 금세(今世)와 후세에 알리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이 일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감히 사양하지 않고서, 삼가 선생의 당질(堂姪) 우계 선생(牛溪先生)과 조카 판곡공(板谷公)의 기술을 참고하여 이상과 같이 행장을 지어서, 입언군자(立言君子)가 채택하여 필삭(筆削)하기를 기다린다. <끝>
[註解]
[주01] 위기지학(爲己之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배우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의 반대로, 지식을 축적하고 심성(心性)을 수양하여 자
기를 완성하기 위해 배우는 것을 말한다.
[주02] 등대(登對) :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03] 보고 …… 즈음에도 : 마음이 사물에 느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사물을
접하지 않아 사려(思慮)가 일어나지 않아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미발(未發)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미발의 상태를 말한다.
《中庸章句 第1章》
[주04] 고명(高明)의 경지 : 성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을 간단(間斷)없이 항상 마음속에 보존하면 밖으로 징험되는 것이 광박(廣博)하고 심
후(深厚)하여, 하늘처럼 고대(高大)하고 광명(光明)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中庸章句 第26章》
[주05] 함양(涵養)의 자리 : 몸을 닦고 성품을 수양하여 마음자리를 허명(虛明)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06] 체통(遞筒) : 지은 시문(詩文)을 말아서 죽통(竹筒)에 넣어 전한다는 뜻으로, 체는 여러 곳에 차례로 전하는 것이고, 통은 종이를
말아서 넣는 죽통이다.
[주07] 벽립천인(壁立千仞) : 천 길의 높은 절벽이 우뚝 서 있다는 말인데, 범할 수 없는 고결한 인품을 뜻한다.<끝>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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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谷成先生行狀
本貫。慶尙道昌寧縣。
曾祖得識。嘉善大夫漢城府尹。
妣居昌愼氏。貞夫人。
祖忠達。奉正大夫金浦縣令贈資憲大夫吏曹判書。
妣白川趙氏。贈貞夫人。
考世俊。通訓大夫繕工監副正。
妣比安朴氏。淑人。
先生諱運。字健叔。學者稱爲大谷先生。成爲高麗著姓。累傳而有名汝完。仕本朝。爲府院君。諡文靖。文靖生石䂩。禮曹判書 。判書生抑。議政府左贊成。於先生爲高祖。家聲世德。班班見於碑碣。朴夫人。卽司諫孝元之女。婦德純備。以弘治丁巳正月十六日。生先生于漢城之第。生而端粹異凡。九歲。始讀通鑑。數卷纔了。而文理驟進。不煩師承。稍長。慨然發奮。從事於爲己之學。敦行孝悌。斂華就實。間以親命出入於公車。而所樂不存焉。嘉靖辛卯。中生進兩試。時承己卯斬伐之餘。善類氣喪 。儒服弊地。先生作詩悼之。遂歸婦鄕湖西之報恩縣。愛離山淸勝。就其下卜一區。名曰大谷。鑿石疏泉。誅茅采椽。以爲終焉之計。簞瓢屢空。晏如也。壬寅。大臣尉薦。授社稷參奉。不就。乙巳。士禍復作。先生之仲氏參奉公。亦被權兇所螫。先生哀傷慘切。益無意於世。癸丑。拜光陵參奉。謝命不日。徑歸故山。明廟末年。翦去奸穢。簡拔遺逸。先生與曹南冥諸人。俱以經明行修被召。將訪以治道。先生辭不獲免。自載至京。拜通禮院引儀。命登對。先生固辭以疾。上遣醫診視。慰諭備至。先生上章陳謝。留邸一月。閉戶斂迹。若臨淵谷。大司憲朴公淳啓請廩給。上卽從之。又別遣中使賜酒饌。遷義盈庫主簿,造紙署司紙。先生詣闕謝恩訖。再上疏。陳情乞骸而歸。論者以爲去就從容。餘人不如。隆慶丁卯。宣廟嗣服。拜尙瑞院判官,儀賓府都事。召命連下。皆辭不就。辛未。命本道存問賜食物。萬曆癸酉。超拜司贍寺正。三下書召。辭旨甚勤。先生連章懇辭。十月。筵臣有白先生貧不能授衣者。特賜表裏一襲。又命本道給周急之資。且賜鷹。乙亥。先生有疾彌留。上聞之。遣醫齎藥救之。戊寅。拜司宰監正。又命賜粟。先生每得恩賜。輒惶恐悶蹙。數日而不能解。分諸親戚隣里之貧者。與之共享。己卯四月。疾作。以五月廿六日。易簀。享年八十有三。遺戒葬勿用石灰。祭毋豐饌。墓道勿立表石。上聞先生疾革。又遣醫馳視。至則先生已歿矣。訃聞。上爲之嗟悼。卽遣官賜祭及賻庀葬事。前後恩禮。迥出尋常。用其年八月十七日。葬于報恩之鍾山坤向之原。在舊舍數里許。媲曰慶州金氏。新羅敬順王之後。贈承旨碧之女。無子。先生自以非宗嫡。不立後。取夫人之兄郡守天富之子可幾。養而敎之。又哀仲氏一女早孤無依。以可幾妻之。托以後事。可幾承遺敎。服先生以期。祭至其子之身。士子等以先生奉享于三山書院 。聞於朝。賜以象賢之號。有文集數卷行于世。天啓癸亥。仁祖反正。崇奬儒學。筵臣吳公允謙啓言。成某實與曹植齊名之人。植旣贈以大官。而某獨闕焉。誠儒林之欠典。上允之。於是贈先生以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先生天資慈祥溫雅。樂易精純。絶無麤心浮氣。髫年志道。長益涵揉。外若不爲崖異。而內實操履如結。及其充養旣深。德器渾成。和光混迹。惟恐人知。而風標介潔。超然於物外。視世之所屑者。不翅如草芥也。事親至孝。左右就養。油油翼翼。副正公性嚴難事。先生起敬起孝。得其歡豫。諸昆弟莫敢望焉。母夫人年近九袠。常苦少睡。凡朝晡旨甘枕席衣衾。先生必皆親自撿理。夜則不離於側。凡可以慰悅者。無不爲之。竢就睡始退。及喪。先生年旣高。毀戚踰制。幾不能勝。孝友兼至。事伯兄如事父。疾養之亦然。喪哭之亦然。痛仲氏非命。言及輒涕淚沾衣。先生之學。以反躬切己爲務。誠實無僞爲主。莊敬之心。恒存于不睹不聞之際。惰慢之容。不形乎燕閑幽獨之中。常端居一室。拱默危坐。玩心於高明之域。專精於涵養之地。方寸靜寂。微瀾不起。所謂經其戶。闃其無人。披其帷。其人則在者。眞先生之謂也。其讀書也。對案潛思。口不作伊吾之聲。意定而理明。心專而慮一。無躁易涉躐貪多欲速之意。少有疑晦處。則反復硏究。至忘寢食。必求融釋通透而後已。其言曰。性命精微。鬼神幽妙。聖賢或微其辭。不盡說破者。正欲學者自思而得之也。於此。若不大着胸高着眼有所領悟。則句讀訓詁而止耳。其於上達路頭。豈能有望。然外人事而談性命。非學也。自事親敬長。以至容貌辭氣之間。內外本末精粗巨細。必交致其功。然後庶無凌躐偏廢之患矣。又嘗曰。學者氣質良善最貴。而立志爲先。志立而行隨之。須將鼓舞振作四箇字。常自激昂。庶可有進。委靡偸惰者。雖有美質。決無有成之理。又嘗曰。有患客念妄起者。是由持敬之工不至耳。若涵養有素而此心整然凝定。則外邪不容而妄想無自作矣。又語學者曰。克己一段。實爲學第一工夫。所謂己者。吾心所好不合天理之謂也。須於日間。仔細撿察。纔覺己私。一劍兩段。淨洗心地 。不留苗脈。則自然天理昭著。人欲退聽矣。少時嘗僦寓人家。其室女慕悅之。鑽窺不已。先生卽移避之。常曰。吾平生所愼財與色。病世之爲士者必以長短人物爲能事。雖前輩長老。亦無顧忌。每歎曰。豈有工夫點撿他人也。又謂爲學次第。著在方冊。而其微辭奧旨。宋儒解釋已盡。後學但當篤守成法而已。今或立言著書者。豈不爲疊床架屋之歸耶。好學不倦。雖疾病危困。手未嘗釋卷。大袠之後。燈下能看蠅頭字。嘗曰。天公以是餉我乎。子弟嘗得名筆收放心三字。欲揭諸壁上。先生不喜曰。着實工夫。只在我心裏。墻屋標榜。徒漫耳。其務內而不務外如此。治家嚴而有法。與夫人白首相敬如一日。撫恤親黨。恩義周洽。死喪之威。情文備至。雖功緦之戚。必盡其誠禮。飮食賻襚。各稱其情。平居恂恂。於事若無可否。而至其斷以義理。截然有不可犯者。凡有規畫。詳審縝密。纖悉曲盡。置水不漏。藏蹤屛跡。入山惟恐不深。而然每聞朝政闕失。民生病戚。輒惕然憂歎。如身任其責者。待人無貴賤賢不肖。一以至誠。和氣藹然。接之各盡其道。聞人一善。嗟賞如不及。其不善則掩覆之。鄕居四十年 。人無不悅其德而感其化。事之以師而愛之如父兄。性謙退。不欲以師道自居。其有請學者。輒辭以疾。若其誠意憤悱者。必爲之提誨。循循懇懇。期使啓發而後已。有時芒鞋竹杖。或騎牛信馬。飄然獨出。或携冠童數輩。倘佯於水石間。酌酒三兩行。彈琴數曲。調韻淸壯。其自得之趣。往往發諸吟詠。悠然不知老之將至也。晩歲病聾。自號曰虛父。作贊以寓意。先生年益高德益邵。操存益固。志氣益強。常謂士之守身。當如室女。晩節尤不可不愼。嚴於辭受。一毫不苟。鑑賞甚明。人之賢否。事後成敗 。無不懸斷若符契。陳復昌少時譽。仲氏亦與交往。先生曾同上舍。而不肯一見。以爲非吉人。後仲氏竟死於其手。愛士好賢。出於天性。每以輕許可爲深戒。德有隣爲至樂。一時如東洲,聽松,牛溪諸賢。咸萃於先生一門。又若徐花潭,李土亭,曹南冥 。亦皆並世相友。書疏講論。遞筒酬唱。而先生最與南冥爲莫逆。蓋南冥高邁卓絶。實有壁立千仞底氣象。而先生以醇實平和濟之。南冥目擊而喜曰。道在是矣。每稱健叔如精金美玉。吾所不及也。若先生之論一世人物。則以聽松爲第一云。東洲嘗宰三山 。南冥命駕相訪。其鼎坐簪盍之樂。講磨偲切之論。其地人尙艶傳如前日事。花潭,土亭。亦嘗聯袂而至。作連床數夜話。李相公浚慶聞之。歎曰。當時應有德星動於天矣。先生文章。發於性情出於自得。尤長於詩。精切沖澹。簡潔具焉。如悼己卯諸賢云 。地下忘恩怨。人間說是非。遣懷之作云。新服稱身雙袖短。古琴便手七絃長。十年嘗盡山中藥。客至時聞口齒香。又有天高頭肯俯。地窄膝猶舒等句。膾炙于世。誦其詩。亦可以知其人矣。蘇齋盧相公嘗於上前。稱成某如金甌無一行虧缺。退溪先生稱健叔淸隱之致。令人起敬。惜時人不甚知其高耳。觀於此。尤足以想先生之爲人矣。嗚呼。我朝人才之盛。未有若己卯乙巳之間。而得禍之慘。亦未有酷於其時。迄今使忠賢掩泣。志士摧腸。若先生卓識明見。高蹈遠引。獨立塵垢之表。與魚鳥相忘於山水之間。駭機危阱。皆不能加焉。其所詣之淺深。所造之高下。非末學所敢窺測。而竊以諸老先生所平論者想像之。夫子所謂隱居以求其志。記所謂闇然而日章。淡而不厭。簡而文。溫而理。詩所謂旣明且哲。以保其身者。先生庶幾焉。噫。以先生之德之才。卷懷空谷。終不得展布於世。斯豈但先生之不幸。然其高風淸節。聳動百世。離山一曲。遺芬不沫。至今聞者無不想慕而興起。頑廉而懦立焉。則先生之道。雖不得行於當時。而其風聲之及人者遠矣。視世之樹功名享爵祿。如鳥沒雲散。湮滅而不稱者。何如也。噫。其亦天意也夫。浚吉生也後。不及摳衣於函丈之間。徒抱高山景行之懷。間者士友諸君子咸謂先生歿已甲子周矣。紀行譔德猶闕焉。蓋有待也。俾不佞摭實備書。以諗於今與後。雖不敢當。亦不敢辭。謹就先生堂姪牛溪先生若從子板谷公所識述者。參互考訂而爲之狀如右。以竢夫立言之君子採擇而筆削云。<끝>
ⓒ한국문집총간 |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