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포 엘리펀트>의 로버트 패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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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포 엘리펀트>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서스펜스 스릴러영화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IMDb는 1930년대 대공황시대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라던데요?” 그 설명도 틀린 건 아니다. <워터 포 엘리펀트>는 분명 사라 그루엔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멜로시대극이다. 오직 한 사나이가 이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둔갑시킨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불멸의 연인, 로버트 패틴슨이다.
패틴슨은 <워터 포 엘리펀트>에서 대학을 중퇴한 뒤 서커스단에 합류해 동물을 돌보다가 서커스 단장(크리스토프 왈츠)의 부인(리즈 위더스푼)과 사랑에 빠지는 수의학도 제이콥을 연기한다. 그가 주인공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마다 서스펜스는 찾아온다. 임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딜레마를 표현해야 할 때, 패틴슨은 이도저도 아닌 우물쭈물한 표정을 짓는다. 위악적인 서커스 단장에 대한 분노를 표출해야 할 때도 그는 벽을 한번 치고는 찌그러진 벽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카메라가 패틴슨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이번 장면에서는 <워터 포 엘리펀트>의 제작진이 도대체 어떤 비책으로 패틴슨의 발연기를 덮을 것인지 마음을 바짝 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뱀파이어의 송곳니 없이…
이쯤에서 새로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감독들은 도대체 로버트 패틴슨을 왜 캐스팅하는 것일까?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촬영이 없는 기간을 틈타 짬짬이 크고 작은 영화에 출연해왔다. <리멤버 미>(2010)에선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재력을 빌려 살아가는 문학청년을, 모파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벨 아미>(2011)에선 부유한 여성의 권력과 재력을 빌려 승승장구하는 젊고 가난한 남자를 연기한다. 그리고 <워터 포 엘리펀트>가 있다.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패틴슨의 부족한 연기 역량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품마다 족족 주연 자리를 꿰차는 건 패틴슨에게 기꺼이 목덜미를 내어줄 <트와일라잇>의 소녀팬들을 겨냥한 것일까? 혹은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빅 네임’으로 투자자들을 현혹시킬 생각인 걸까. 두 가지 짐작 모두 정답은 아닌 듯하다. <리멤버 미>는 북미 지역에서 오직 19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패틴슨이 2010년 한해 동안 혼자서 벌어들인 수익만 2700만달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트와일라잇> 바로 이전에 개봉한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은 제한된 몇몇 상영관에서 개봉해 극장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정리하자면 뱀파이어의 송곳니와 불멸의 생명을 잃어버린 로버트 패틴슨은 연기도 흥행도 담보하기 힘든, 난해한 선택지다.
<워터 포 엘리펀트>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 또한 패틴슨을 주연배우로 캐스팅하기에 앞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힌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무척 스타일리시한 영화다. 그런 영화에서는 배우가 굳이 뭘 하지 않아도 멋져 보인다. 패틴슨을 만나기 전에는 도대체 그가 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패틴슨은 제이콥 그 자체였다. 청년에서 남자로 성장하지만, 그런 변화를 스스로 인정하기가 아직은 불편한 그런 사람 말이다.” 로렌스 감독의 설명대로 <워터 포 엘리펀트>는 제이콥이라는 인물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생계 전선에 뛰어든 제이콥은 어른이 되려면 겪어야 할 모든 경험과 과정을 건너뛴 채 의젓한 성인 남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전세계적인 흥행으로 벼락스타가 된 로버트 패틴슨의 행보와도 겹치는 지점이다. 2005년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모범 소년, 케드릭 디고리를 맡아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 패틴슨은 잡지 <베니티 페어>에 이름 모를 들러리 모델로 출연했다가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는 불운을 겪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2004년 <베니티 페어>에 모델로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리즈 위더스푼의 아들 역할로 바짝 긴장해서 촬영했는데, 나중에 잡지를 보니 내가 없더라. 내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편집부에서 잊어버릴 만큼 존재감이 없었던 거다. 나와 함께 출연했던 동료 모델이 잡지에 실린 걸 보고 몇년간 그를 질투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로부터 7년 뒤, 패틴슨은 곁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로도 벌벌 떨었던 톱 여배우와 영화에서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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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제 연기는 재앙이에요”
흥미로운 건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에드워드 역할로 스타덤에 오른 지 3년이 지났음에도 패틴슨이 여전히 자신을 스타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워터 포 엘리펀트> 현장의 로버트 패틴슨이 마치 “영화과 학생” 같은 모습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매일 킨들(전자책 기기)을 옆에 끼고 다니며 수십권의 책을 읽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프로듀서 윅 고프리는 패틴슨이 스스로의 연기에 굉장히 가혹한 평가를 내린다고 말한다. “그는 매 장면을 촬영한 뒤 이렇게 외친다. ‘오, 주여. 제 연기는 재앙이에요.’” 이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건대 로버트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그에게 선물한 ‘만인의 연인’의 달콤한 지위를 누리기보다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단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트와일라잇>의 마지막 시리즈 <브레이킹 던> 1, 2부를 남겨둔 그에게 할리우드는 아직 가혹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로버트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막을 내린 뒤에도 사람들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함께 떠올릴 거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난 언제나 매니저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트와일라잇>을 잊는 데 10년은 걸릴 거라고. 앞으로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이처럼 로버트 패틴슨은 뱀파이어 프랜차이즈 왕국을 지난 3년 동안 이끌어온 ‘얼굴’이면서도 여전히 갓 연기를 시작한 초보 연기자의 긴장감을 잃지 않은 청춘배우다. 그런 그의 언밸러스한 모습이 감독들에게는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 게 아닐까.
<브레이킹 던>의 뒤를 이을 패틴슨의 ‘중요한’ 선택은 영화계의 컬트 아이콘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코스모폴리스>다. 돈 드릴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번 영화에서 패틴슨은 맨해튼에서 하루를 보내는 스물여덟살 억만장자로 출연한다. “시나리오가 미친 듯이 난해하고 어렵지만… (중략) 크로넨버그라면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비꼬듯) 촬영 시작 이틀 전에 15세 관람가 장면을 청소년 관람불가 장면으로 수정하는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이 시대 존재하는 몇 안되는 작가다. 크로넨버그는 진짜 영화를 만들어낼 거다.” 물론이지 젊은이. 자네는 지금 에드워드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해줄 크로넨버그행 지옥열차 티켓을 구입한 줄도 모르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