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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시혼(詩魂) 이육사의 삶과 문학 / 김 천 우 어쩌면 우리들에게 이미 잊혀진 청포도의 상흔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930년대 후반기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친일로 기울어지거나, 아니면 아예 붓을 꺾고 침묵해 버렸다. 일본어가 아니고는 발표조차 할 수 없었던 극한 상황 속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절박한 민족문학의 위기였다. 하지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항거하면서 겨레의 얼을 지킨 시인이 있었다. 겨레의 사상적인 지표가 흔들리고 단절되려는 시기에 이육사는 목숨으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한 마지막 시인이었다. 이육사, 그는 40세의 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쳐 열열이 살아간 민족의 풍운아였다. 그의 겸허한 얼굴은 언제나 폭풍우 속의 정적과 같은 고요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혼의 불꽃을 시로 불태우고 시로 승화시키는 처절한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야>는 그에게 있어 절명사의 느낌을 주었다. 육사라는 아호는 그가 스물 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 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진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독립 운동을 한 운동가이다. 그러나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 등단하였으나 작품수가 많지 않고 문단 활동도 별로 없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정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육사는 문단의 어느 유파나 동인에 가담하여 작품 활동을 한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짧은 전 생애를 통해서 오직 독립 투쟁에 바쳐 왔다는 사실은 그가 문단 생활에 전념할 만큼의 정신적 겨를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시작(詩作)을 위시한 일련의 작품들은 대륙을 내왕하면서 품었던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 아니면 조국 광복에 대한 애타는 정의의 재현일 것이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를 생각한다. 그가 남긴 계절을 생각하고 광야를 생각하고 죄수번호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를 지금 다시 만난다. 현재 알려져 있는 34편의 이육사 작품 가운데 대부분의 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자에 대한 울분과 한으로 응결되어 있다. 1944년에 옥사하기까지 편안할 날이 없이 쫓겨다녀야만 했던 그로서는 34편이 결코 과작(寡作)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열일곱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1943년 6월에 동대문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압송되었다가, 그 이듬해 그 곳 감옥에서 조국의 옹글음과 자유를 갈구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채 아깝게도 숨을 거두었다.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흰돌맑음 / 섬하나>
시인 李陸史 탄생 100주년 … 외동딸 沃非씨 단독 인터뷰
입력 : 2004.08.01 18:21 16' / 수정 : 2004.08.01 18:45 03'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44)는 강직한 성격에 작은 체구였는데, 외동딸 이옥비(李沃非·63)씨도 아담한 모습이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딸은 내내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감옥을 열일곱 번이나 드나들고, 수인 번호 264를 이름 삼을 만큼 강직했던 아버지는 엄동설한의 이국(異國) 북경 감옥에서 광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어린 딸은 ‘육사의 딸’로 한평생을 살고 있다. 3년 전부터 일본에 있는 한국 공관 관저에서 요리와 꽃꽂이를 맡아 해주며 지낸 그녀는 육사 탄생 100년 기념행사 ‘광야에서 부르리라’에 참여하러 잠시 귀국했다.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사양하는 그녀를 온통 ‘육사’에 묻혀 있는 경북 안동에서 만났다. ―‘육사의 딸’로 살아온 육십여년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긍지도 있지만 부담도 많았어요. 국어 시간에 저에게 아버지 시에 대해 묻는 것도 싫었고… 글을 쓰고 싶어도, 학교에서 백일장 같은 게 열려도 피해 갔어요. 전 아버지 시(詩)중 ‘꽃’이 제일 좋았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정말 강인하고 독립투사로서 어려운 삶을 사셨구나 생각해요. 어머니가 참 쓸쓸했겠다, 그런 생각도 갖게 되고요. 이번 축제를 보니 기뻐요. 내가 아버님께 덕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부끄러움도 있고요.” ―어머니가 홀로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집안이 좋았지요. 삼촌들 말씀이 ‘형수님은 교육 걱정 하지 말아라. 우리가 다 시켜서 형님 앞으로 세우겠다’고들 하셨지요. 그런데 6·25 때 작은아버지 이원조씨 등이 많이들 월북하시고, 다섯째 삼촌은 잠시 나갔다 오마 했다가 행방불명됐지요. 어머니는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고 저한테 매우 엄격하셨어요. 저는 결혼하기 얼마 전까지도 매 맞고 컸어요. 딸이 하나니까 혹시나 삐뚜로 나갈까 봐. 돌아가신 지 이제 10년 가까이 되네요. 하숙도 치셨고…, 밥 못 먹은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어요.” ―육사는 여섯형제 간의 우의가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형 있는 데 아우 있고, 아우 있는 데 형 있다고 하더군요.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 났을 때도 4형제가 다 잡혔지요. 큰아버님(원기), 아버지, 원일, 원조, 두 작은아버님 모두요.” ―그 여섯 형제 중 육사 포함해서 세 분이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셨지요? 외숙뻘 되시는 이병각 선생까지 하면 모두 네 분이네요.
―기자 시절의 아버지는 아주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양복에 나비타이를 늘 하셨다고요? “아이보리 색깔이었어요. 내가 그게 기억이 나서 어머니에게 맞냐고 물어보았는데 맞다고 하시데요. 서울 시구문 밖 문화촌(현재의 신당5동) 살 땐데, 지금은 그 양옥 집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술을 많이 드시고 늦게 들어오셔도 이불 밑에다 양복을 깔아야 주무셨대요.” ―아버지가 이옥비 여사를 낳을 때는 나이가 드셨을 때죠.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되던 해였지요? “아버지가 열여덟, 어머니가 열여섯에 결혼하셨고 저를 늦게 낳았어요. 두 분이 당최 만나지를 못했으니까요.(웃음) ―육사는 일제 때 감옥을 17번이나 가면서 온몸을 불태워 조국에 바쳤고, 광복 이후엔 여러 정권이 훈장을 추서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도움은 없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아무 것도 없었고…, 3·1절에 은수저 한 벌이 고작이었지요. 박정희 대통령 후반기에 어머니 앞으로 연금이 나왔어요.”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이원조씨의 친형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이시죠.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 사업에 대한 사명감은 안 가지셨는지요? “딸이니까 생각을 못했어요. 진성 이씨 우리 가문이 여자들이 나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사실 내가 컸다면 아버지 관련 자료 같은 것을 많이 보관할 수 있었을 텐데….” ―통일되면 이원조 선생이 가지고 가신 자료도 찾을 수 있겠네요? “있겠지요. 그분도 그쪽에서 삼 남매를 두셨다는데 사촌들이 제법 갖고 있겠지요.” ―옥비(沃非)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아버님요. 제 백일날 그 이름을 발표하셨데요.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것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기름질 옥, 아닐 비인데, 간디 같은 욕심없는 사람 되라는 뜻이래요.” |
광야에서 통곡하기
- 이육사의 저항시 속의 서정성 찾기 -
1. 저항성과 서정성
사회 비판시나 혁명시들은 대개 직절한 호소와 즉흥성과 격렬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마야코프스키나 브레히트, 네루다가 그랬듯이 우리 시문학사에서도 카프 시인들 거의가 이런 선동성에 리얼리즘적 창작방법론의 기반을 두었다. 당대적인 급박한 역사 상황과 민중들의 미학적 감수성을 고려하면 성공한 혁명시는 선전 선동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초보적인 기법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특정한 역사적인 정황 아래서는 오히려 선동성이 약한 시는 오히려 서정성의 과잉으로 비판의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일제의 가렴주구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에 박목월의 <나그네>가 무슨 수작이냐고 추궁하는 분노한 목소리는 너무 익히 들어온 터인데, 그럼 이육사의 <청포도>는 이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지 않는가. 임화를 비롯한 열렬한 투사 시인들이 열심히 투쟁가를 부르고 있던 한켠에서 <성불사의 밤>이 나왔는가 하면 <귀촉도>같은 신음에다 <기상도>같은 세련된 작품도 나왔는데, 이런 작품들을 분석 평가할 때 그 시대적인 배경을 도외시해 버리면 엄청난 오류를 빚을 것이다.
당연히 작품에 대한 정확한 객관적인 접근은 시대상과 작가의 생애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야 되며, 그런 의미에서 <나그네>와 <청포도>는 엄연히 다르며, 작품의 기개 또한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터이다.
다만 여기서 따지고 싶은 건 투쟁시 지상주의적인 평가에 대하여 이육사와 같은 서정주의 시가 어떻게 해석 평가되어야 하는가란 문제이다. 근대 시문학사에서 이미 정설처럼 굳어진 민족시인인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5명의 경우, 이들은 당대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고발 비판하는 기능으로만 보면 카프 시인들에게 분명히 뒤지고 있다. 고작해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도가 그 직정적인 선동성으로 삭제 처분을 받았는데, 대개의 경우에는 이 위대한 민족시인들이 서정시의 범주에 머물렀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이들은 조금씩 그 삶과 투쟁 양식이 다르다. 김소월이 민족적 정한을 표출하는 순수시인의 생애였다면, 만해는 독립운동가와 승려의 신분이었으며, 이상화는 울분과 회한의 일생이었고, 윤동주는 끊임없는 진리 탐구의 구도적 자세로 일관했다. 그런데 이 다섯 중 독립운동사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시인은 이육사였는데, 희한하게도 시에서는 가장 민족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쪽이었다는 게 매력을 더한다.
육사는 지하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던 신분이면서도 문학활동에서는 전혀 그런 낌새는커녕 당대의 시인들 시선으로는 그야말로 순수 중의 순수시인이라 홀대받을 소지도 있는 작품만을 남겼다.
이육사는 세계문학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위대한 저항시인이야말로 위대한 순수시인이다'는 명제를 입증해준다. 흔히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란 시가 사치스러운 감상벽으로 평가 절하하기도 하는데, 실은 당시 이 시인은 추방당한 고난의 연속 속에서 변혁을 열망했던 시기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텍트주의자들로서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문학의 향기다. 푸시킨이 이 시에서 삶에 속는다는 것은 소시민적인 사랑의 배신이나 명예, 진급, 가난 따위가 아니라 역사와 조국과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팽개쳐진 민중적 고통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맥만으로 본다면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즐기는 나그네가 은쟁반에 모시수건을 걸어두고 청포도를 먹는 풍경이 더 타매해야 될 시인일 수도 있으나, 박목월이 소시민적인 서정적 주체에 섰다면 육사는 민족해방투쟁의 기개와 이상을 품은 서정적 주체였다는 점에서 현격한 변별성을 드러낸다. 물론 이런 전기적인 요인 말고도 각 시인들이 지닌 시세계 전체가 지닌 이미지와 주제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요컨대 저항시는 서정성이 약하다는 명제에 대한 반론으로 이육사의 시를 거론하고 싶은 것이다. 서정시야말로 가장 저항성이 강한 투쟁시가 될 수도 있다는 명제를 입증해준 게 이육사로, 그는 민족시인 5명 중에서도 가장 민족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기개와 절조로 민족적 기상을 기품 있게 강조했던 것이다.
2. 고향 상실, 그리고 별 찾기
우리 시문학이 고전시에서 근대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가 자연에 빙자한 인생무상을 노래하던 풍조에서 '향토의 시'로의 변모라고 이우성은 지적했다. 근대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관념적인 자연이 구체적인 향토로 변모하는 에는 많은데, 이게 다시 더 구체적인 고향의식, 향수로 대체되는 것이 이른바 근대의 표징이라는 진단이다(이우성 <고대시와 현대시의 교차점>).
그런데 여기서 한 발 자욱 더 나아간 것이 국토와 고향 상실과 그로 말미암은 절절한 향수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향수를 노래한 시가 많은 것은 이런 시대적인 특징인데, 이를 이육사는 특정한 자신의 고향의식이 아닌 민족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국토의 개념으로 고향을 설정한다.
육사의 시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제기하기 마련인 <청포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의 고향 어디에 바다가 있느냐, 그러기에 이 시는 바다가 있는 어디라는 식의 초등학생 문법시간 수준의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그는 고향을 '고장' '마을'이란 술어로 많이 쓴다. 고향 혹은 고장 등의 개념으로 쓴 시는 유명한 <청포도> 말고도 <연보(年譜)>, <자야곡(子夜曲)>, <파초>, <반묘(班猫)>, <해후(邂逅)>, <초가>, <서풍> 등등이 있다.
(1) 나는 진정 강 언덕 그 마을에 / 벌어진 문바지였는지 몰라(<연보>)
고향을 그린 묵화 한 폭 좀이 쳐(<초가>)
(2)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자야곡>)
(3)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안뇨(<반묘>)
지금 놀이 나려 선창에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해후>)
(1)은 육사의 실제 고향을 노래한 대목이며, (2)는 유서 깊은 자신의 가문과 마을 전체를 빗대어 민족적 기개를 상징하고자는 의도가 있다. (3)은 방랑길 어디서든 아니면 어떤 대상을 만나서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이런 여러 형태의 고향을 노래한 항목 속에다 <청포도>를 대입시키면 도시 안 어울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육사가 자신의 고향을 특정적인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식민지적 수탈의 대상인 국토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는 게 오히려 그의 시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사에게 고향은 민족에게 국토와 같은 정착할 대지인지라 그걸 빼앗긴 상태에서 그는 유랑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다. 그의 시에는 유랑하거나 아니면 유랑 중인 대상을 기다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바로 이런 정황을 형상화한 것이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닲은 몸으로 /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청포도>)는 유명한 구절이나, "다시 千古의 뒤에 / 白馬타고 오는 超人이 잇어"(<광야>), "한 밤에 찾아올 귀여운 손님을 맞이하자"(<海潮音>) 등의 이미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형국인데, 이건 고향 상실과 함께 사라진 민족 구성원의 상징이다. 즉 국토만 빼앗긴 게 아니라 민족조차도 빼앗긴 실향민 의식이 이런 구절에 절절히 스민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실제의 고향 회상기는 오히려 시에서 보다는 수필 <계절의 5행>이나 <전조기(剪爪記)>, <산사기>, <연륜>, <은하수> 등에 훨씬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유랑하면서 시인이 절절하게 추구한 대상은 주로 하늘과 별이었다. 하늘이란 육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해외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서울의 자랑을 무척도 하였겠지마는 오늘의 서울은 아주 그 모습을 볼 숫가 없는 것이오, 거리를 나서면 어느 집이라도 으레 지금(地金)을 판다거나 산다거나 금광을 어쩐다는 간판들이 죽 내리 붙어서 이것은 세계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서울과 알라스카의 위치를 의심쩍게 할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사실인즉 내 마음에 간직해온 서울의 자랑도 이제는 그 밑천을 잃어버린 셈이오. 그러나 아직 얼마동안 저 하늘만은 잃어버릴 염려는 없는 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서울의 하늘을 사랑하고 그 밑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가 때로는 그 기억에 먼지를 털어 두는 일이 있소.
<계절의 5행>
왜 육사가 하늘을 향수와 일치 시켰던지 밝혀진 셈이다. 땅은 빼앗겨도 하늘은 아직도 우리 것이라는 그 암담한 자부심이 시인으로 하여금 어딜 가나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고향처럼 여겼다.
특히 별은 육사에게 고향의 상징이자 희망이며 위로요 투지의 깃발이었다.
먼 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 잊었던 季節을 몇 번 눈 우에 그렷느뇨(<파초>)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 별들 춥다 얼어붙고 /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소년에게>)
船窓마다 푸른막 치고 / 초ㅅ불 鄕愁에 찌르르 타면 / 運河는 밤마다 무지개 지네(<독백>)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 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 우리들과 아-주 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 아름다운 未來를 꾸며 볼 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地球를 갖는 것 /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 한 개의 새로운 地球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이밖에도 하늘과 별은 더 많이 등장하는데, 유독 힘이 주어지는 성좌는 '동방의 별'임은 말 할 나이도 없다. "한 성좌의 명칭이라든지 그 별 한 개 한 개에 대한 전설들을 동년(童年)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날을 회상"(<수필 <은하수>)해 본다는 대목은 별과 향수의 관계를 분명히 일러준다. 유랑 속에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각성제는 언제나 닭 우는 소리로 표현된다. 닭 우는 소리는 육사에게 별을 바라보는 마음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투지와 사랑을 다지는 자세의 바로잡음으로 상징된다.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이육사의 시는 전체가 하나의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그 줄거리는 고향(국토)를 쫓겨난 유랑의 무리(혹은 방랑자)가 강가나 바닷가 혹은 광야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별에서 새로운 투지를 다지는데 닭 우는 소리, 곧 새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계시가 내리는 가운데 그때에 올 손님을 기다리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마치 만해의 시가 애인과 강제 이별을 당해 기어이 만나야겠다는 투지로 일관하듯이 육사도 강제 추방 당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별로 향수를 달래는 고통 속에서도 투지를 더 강하게 다지는 새 시대의 예언(손님의 등장)으로 이뤄져 있다 하겠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시가 바로 육사의 대표적인 <절정>과 <광야>이다.
3. 서정성의 근원 찾기
육사의 시에도 현실적인 비판의식이 매우 강한 작품이 있다. <실제(失題)>는 육사 시 중에서 가장 암담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며, <편복( )>은 민족의 운명을 박쥐에 의탁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직설적인 현실 비판시보다 육사의 위대성은 오히려 <절정>이나 <광야>같은 서정성에 있는데, 어째서 그는 이런 투쟁시의 최고 단계로서의 서정적 리얼리즘 미학을 얻었을까.
그 원인으로는 우선 이육사의 집안이 지닌 전통적인 선비상으로서의 절조를 들 수 있다. 그는 고전문학의 풍부한 교양 위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한 절도 높은 선비형 인간상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무엇보다 이런 요인이 그로 하여금 몸은 투쟁의 대열 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문학은 고매한 서정성의 원칙을 지키도록 훈련시킨 것이리라.
투쟁의 시인들은 대개 시만으로 투쟁을 하는 경우와, 행동과 시 둘 다 투쟁하는 경우, 그리고 투쟁은 하되 시는 전혀 투지를 안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임화의 경우가 둘째라면 셋째는 이육사의 경우로 세계 레지스탕스문학사에서도 극히 드문 현상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문인들은 저항활동을 하면 예외 없이 저항적인 작품을 썼으며, 한국 근대 식민지 시기나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임화와 같은 경우에는 카프와 각종 사회운동 단체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면서도 투쟁시를 썼는데 이게 저항문학인의 정통적인 한 유형이라 하겠다.
시적 재능으로 본다면 충분히 더 투쟁적인 시를 쓸 수도 있었는데 왜 육사는 서정시에만 몰두했던가에 대한 의문은 그만큼 지하활동의 위험성이 높았다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뮤즈>나 <강 건너 간 노래>에서 고백하듯이 "내가 부르던 노래는 강 건너 갔소"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자신의 절조를 다지는 자기 성찰적인 시작품으로 쓸 뿐이었던 것이다.
육사은 어렸을 때 한시 짓기(수필 <은하수>참고)를 했는데, 이게 오히려 신시를 통한 문학수업보다 더 본격적인 시창작 수업에 도움이 된 듯하다. 성장하면서 육사는 문학서적보다 영웅전과 사회과학에 더 심취했는데, 이런 요인도 그이 시 세계 형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특히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의 유학과 무장투쟁의 훈련이 서릿발같은 기개를 꺾이지 않도록 만들어 겨울 날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시를 남길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시 <절정>이나 <광야>에 나타난 극한의식을 이해하기 이해서는 반드시 수필 <계절의 5행>을 일거야 할 것이다.
그 처절한 극한의식을 낳은 의식의 저변은 답답한 속을 달래려고 피우던 담배가 늘어서 골통대로 변했는데, 그걸 태우면서 슬그머니 머릿속은 로마를 방화한 네로에게로 전개된다. 누구나 폭군이란 딱지를 부친 네로, 그의 로마 방화를 시인은 은근히 부추기면서 자신도 네로와 같은 방화범이 된고 만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의 한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중략)
초가삼간이 다 타도 그놈 빈대 죽는 맛이 좋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통쾌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내 머릿속에 타고 있는 내 집은 그 속에 은촛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縣額)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한 집이었나이다.
이 집은 그나마 한쪽이 기울어서 어느 때 어떻게 쓰러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폴fp옹이 우리 집을 쳐들어 오면 나는 그것을 모스코 같이 불을 지를 집이어늘, 그놈의 빈대한 흡혈귀를 전멸한다면 나는 내 집에 불을 싸지르고 로마를 태워 버린 네로가 되오리다.
<계절의 5행>
이 처절성, 빈대 때문에 온갖 보물도 아까워하지 않고 방화를 자행하겠다는 투지는 빈대가 누구였겠는가란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통쾌 무비한 이육사 다운 발상인데, 시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어서 한 친구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향한 한 친구가 산 속에서 채벌하여 숯을 굽는데, "숯가마에 불을 싸지르고 그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이때까지 아무에게나 호소할 곳 없던 내 가슴 속 아앙한 울분이 한 반은 풀리는 듯하고, 복수를 한 때와도 같고..."라고 쓴다.
이 처절성은 어디서 왔을까? 이것은 분명 루쉰(魯迅)의 문학적 영향이다. 루쉰의 <약>이나 <주검(鑄劍)>에서 느끼는 극대화된 분노와 보복심을 그린 대목이 곧 이런 네로의 범죄조차도 미화될 수 있는 지경으로 몰아간 것이다.
기실 루쉰은 이육사에게 영원한 큰 스승이었지 않는가. 루쉰은 한때 젊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인들로부터 부르주아적이라는 심한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정작 루신을 비난했던 인사는 변절했거나 숙청 당했는데, 루쉰은 영원한 혁명문학인으로 추앙받지 않는가. 루쉰의 소설 역시 직접 당대의 사회적 혁명의식을 고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혁명을 수행 할 수 있는 투혼을 가지도록 그 영혼을 단련하는 작품을 썼다.
루쉰과 마찬가지로 이육사도 직접 혁명의 노래를 쓴 게 아니라 그런 노래를 쓸 수 있는 영혼, 그런 혁명에 투신할 수 있는 영혼을 개조하는 기개 높은 시를 쓴 것이다.
이 시인은 1930년대의 혼란을 극한 중국 현대사를 너무나 정확하게 꿰뚫어보면서 당시 일제 통치 아래서 얼핏 빠지기 쉬웠던 장지에스(蔣介石)노선을 맹종하지 않은 채 시종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부정부패성을 부각시킨 안목은 가히 국제시사 평론가 급이라 할만 하다. 중국에 관한 육사의 글을 읽노라면 뭔가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 털어놓지 못하고 검열의 필화에 걸려들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읽노라면 진상을 짐작케 하는 명문이란 느낌이 든다.
시나 산문도 마찬가지다.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이 시인이 얼마나 할 말을 참아가며 서정성을 가미해 노래했던가를 절절히 깨닫게 된다. 투쟁시보다 더 훌륭한 투쟁시라는 평가가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그는 저항의 통곡을 했으되 아무도 그 울음을 들을 수 없도록 저 광야에서 홀로 목 놓아 울었던 위대한 투사였다.
(이육사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발제문)
<사계동인회 / 떠다니는섬>
이육사 작품 분석
-<광야>를 중심으로, 윤동주
광 야
/ 이 육 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陸史詩集), 서울출판사, 1946>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배경의 웅대함으로 처음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아득하게 넓은 평야, 시간적 배경은 천지가 처음 열리는 까마득한 태초에서부터 머나먼 미래에로 이어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게 나누어 보면, 제1∼3연이 과거를, 제4연이 현재를, 제5연이 미래를 각각 노래하고 있다.
제3연까지의 부분에서는 광야의 원시적 순수성에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흘러 강물이 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제2연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산맥들의 모습을 살아 있는 동물의 움직임처럼 인식하면서, 그것들이 차마 침범하지 못한 광야의 광활함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웅장한 터전에 마치 꽃이 피고 지듯 무수한 계절이 지나간 뒤 비로소 강물이 흐르고 길이 열렸다.
만물이 눈에 덮여 있는 가운데 이 넓은 광야에 매화의 향기가 그윽하고 은은하게 풍겨 온다. 이 분위기는 앞 부분에서 전개되어 온 광야의 모습을 좀더 숭고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서 그 안에 선 인물의 외로움을 암시하여 준다. 그는 아무도 없는 광야, 더욱이 눈 덮인 겨울의 광야에 서서 무한한 과거의 시간과 먼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고독한 것이면서 그의 강인한 의지를 더욱 곧게 세우도록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독감과 긴장된 의지의 경지가 `매화 향기"라는 사물을 통해 암시된다.
강인한 의지로 외로움과 추위를 이기며 서 있는 이 자리에 `나"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일체의 생명이 용납되지 않는 냉혹한 시련의 상황에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혼자서 뿌리는 씨앗이기에,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혹한 현실 상황)를 무릅쓰고 뿌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가난한 노래의 씨앗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광막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억센 의지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연한 결의가 담기어 있다.
그러면 그가 뿌린 외로운 노래의 씨앗은 누가 거둘 것인가? 그것은 대체 싹이나 틀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냉혹한 시련만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로 모든 고통을 이기며 싸워야 했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성패(成敗) 여부가 아니라 달리 선택할 길이 없는 그 필연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연에서 노래한다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해설: 김흥규]
윤동주와 함께 일제 암흑기의 2대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육사는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는 등,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성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작 발표는 주로 『조광(朝光)』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 않게 독립 투쟁에도 헌신,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으며, 40세에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1935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 중에 씌어졌는데, 이때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던 때인 만큼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침울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 정서가 작품에 깃들어 있다. 대표작인 <광야>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운(悲運)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 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 시는 육사의 확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 의지가 예술성과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자기 극복의 치열성에 바탕을 둔 초인 정신과 투철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지사(志士) 의식, 그리고 순환의 역사관에 뿌리를 둔 미래 지향의 역사 의식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15행의 5연시로 과거(1∼3연), 현재(4연), 미래(5연)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데, "까마득한 날"에서 "다시 천고의 뒤"까지의 시간의 흐름은 조국의 현실을 "광야"로 상징한 역사 의식의 표출이다.
1연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태초의 상황을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부정적 설의법을 이용하여 광야의 원시성과 신성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2연에서는 활유법을 구사하여 광야의 광활하고 장엄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3연에서는 신성한 공간인 광야에서 태동한 우리 민족사의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라는 동적 이미지로써 보여 주는 한편,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에서는 시간적 개념인 "계절"을 "피어선 지고"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감각화하고 있다. 4연에서는 일제의 압제를 상징하는 "눈"과 조국 광복의 기운이자 온갖 폭압에 맞서 싸우는 절조(節操)인 "매화 향기"를 대립시킨 가운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는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의 "아득하니"는 "멀다"의 뜻이 아니라, "그윽하고 은은하다"의 의미이며, "노래의 씨"는 가혹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생명의 의지로, "씨"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 희생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극복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가난한"이라는 수식어는 자기 겸손의 표현이기보다는 냉혹한 현실 상황에서 홀로 행하는 행동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5연에서는 새 역사에 대한 소망이자 조국 광복에 대한 굳은 확신을 통하여 미래 지향의 확고한 역사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암담한 현실 상황에 화자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를 수확하여 "목놓아" 노래 부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불행했던 역사를 몰아내고 온갖 질곡과 고통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여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 피울 인물이다. 그런데 그 "초인"의 도래는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꽃>에서의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과 같은 확고한 믿음임을 "초인이 있어"에서의 "있어"를 통해 알게 해 준다.
따라서 이 시는 "광야의 원시성,신성성" → "광야의 광막성" → "민족사의 태동과 개척" → "현실 인식과 선구자 의식" → "초인 정신과 예언자적 역사 의식"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육사의 투철한 역사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사적·예언자적 기품과 단호하고 강인한 남성적 어조로써 신념에 찬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민족시의 정화(精華)라고 할 것이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항일 저항시의 해석
구체적으로 이 작품에서 자기 희생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출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 개념인 동시에 절대적 심상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육사 자신으로서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 몸의 희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개념으로 그에게 절대를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육사가 외곬으로 믿고 섬긴 조국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이 부분이 단순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조국 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선 절대의 국면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과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육사의 「광야」는 항일 저항시의 압권인 동시에 그 언어의 밀도로 보아도 단연 다른 작품의 추종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의 수작임을 알 수 있다. 이러 사실 하나만으로도 육사는 한국 현대시사를 장식한 빛나는 성좌로 평가되어야 한다. (출처 : 김용직, 「변혁기의 시와 문화」,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92)에서)
이 시에 나타난 비극적 자기 확인
「광야」는 웅장한 목소리와 비전으로 때묻지 않은 역사의 신성한 미래를 노래한다. 주목되는 것은 여기서 육사가 보여주는 고절(孤絶)의 의식 ― 시간적으로는 장구한 과거의 천고(千古)와 미래 사이, 공간적으로는 만물이 눈 덮인 광야 위에 홀로 선 자기의 인식이다. 이 고절의 자리 ― 어쩌면 절절한 고독감으로 그를 절망케 할 수도 있었을 자리에서 육사에게 행동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리하여 그를 구제하는 것이 장엄한 미래에의 기대이다. 이 때문에 극한적 상황의 압박에서 정신의 의연함이 획득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해명하는 핵심은 넷째 연에서 드러난다. 즉, 그는 자신을 아득한 과거와 미래의 연속을 매개하는 창조의 계기로 자임(自任)하는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가난한 노래의 씨"라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명(言明) 속에는 거대한 역사의 중력(重力)을 감히 지탱하겠다는 오연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육사가 「광야」에서 기도했던 것은 타인에게 향한 발언이기보다 자기 스스로에게의 다짐이라고 여겨진다. 즉, 역사적·문화적 혼돈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절대한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세계 내적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결의는 번민의 음울함도 절망적 침통함도 넘어섰지만 `기다림"의 의미 때문에 여전히 비극적인 자기 확인이다. (출처 : 김흥규, 「육사의 시와 세계 인식」)
육사의 시 중에 "광야"외에 속죄양 모티프가 나타난 시
속죄양 모티프는 "희생정신"과 상통하는 정신이라 볼 수 있겠다.「꽃」에서 "꽃"이 개화되는 것도 시련을 이겨낸 의지의 표상이요,「청포도」에서 "고달 픈 몸으로 오는 손님"의 모습,「절정」에서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교목」에서 "호수 속에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지 못 해라"는 굳센 의지의 모습 등은 암울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희생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육사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가. 이육사의 삶과 역사 인식
육사 이원록(또는 이활)은 1904년 경북 안동의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엄격한 양반 교육과 함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시대적인 추세와 함께 개화한 조부는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등 일찍이 반봉건 인간 해방의 실천적 삶을 육사에게 보여 주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육사는 항일 의식이 강한 외가, 친가의 영향을 받아 1925년(22세), 항일 무장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후 북경,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반일제·반봉건·민족 해방·인간 해방의 선봉에 서서 17회의 옥고를 치르며 머나먼 이국땅 북경에서 옥사하면서까지도 일제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조선 남아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1930년대는 예술지상주의, 주지주의, 풍자, 전원 문학 등 주로 현실 도피적인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육사는 반 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이게 하는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고 온 겨레의 살 길인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고 수십 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독립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민족 해방과 인간 해방에 대한 믿음과 전망을 제시하고자 함에 노력하였다.
나. 이육사 시 속에 나타난 저항 의식
민족 해방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미래 지향적인 육사의 역사 의식은 친일하지 않으면 절필해야 했던 암울한 문학적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제에 대한 문학적 아부를 일절 거부한 채, 오로지 민족 현실에 대한 염려, 이를 어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질책(방황), 더 나아가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과 결연한 의지 등으로 시 속에서 발전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는 독립 운동가로서의 자신을 단련시키고 절망하고 있는 민족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어 식민지적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힘이 되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우리는 민족 해방을 가로막는 일제에 대한 적극적 저항 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가. 윤동주의 삶과 역사 인식
윤동주는 1917년 배일 의식이 강한 간도 명동촌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고 개화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가정, 지역적으로 민족 해방에 대한 자기 분열의 경험이 그리 크지 않았음에 반해, 서울, 일본등지에서의 학창 시절에는 식민지적인 상황이 주는 고통에 몹시도 괴로워한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교육의 영향으로 평생 자신을 반성하고 내적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1943년(27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꽃다운 나이로 옥사하기 전까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창 시절 동안 동주가 독립 운동을 참여했다는 기록이나 행적은 없다. 다만 그가 죽은 뒤 발표된 많은 시작품들을 통해서 그가 식민지적 상황속에서 남다른 번민과 고통의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육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동주는 육사처럼 역사 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없었으나 자기 성찰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민족 해방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이고도 적극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기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동주의 역사 인식은 미래 지향적이되 자기 속으로 침잠해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고자 함으로써 억압의 역사를 해방시키기에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나. 윤동주 시 속에 나타난 저항 의식
민족성조차 말살시키고자 했던 식민지적 억압 속에서 동주 또한 일제의 아부함을 거부한 채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자신의 역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며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하나 힘찬 소리로 이어지지 못한 채 혼자의 고민에 그친 소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육사, 윤동주 시에 나타난 저항 의식 비교 및 평가
역사는 보다 완전한 것으로 진보 발전한다는 과학적 인식하에서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갖고 온몸으로 실천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이를 시 속에 반영시킨 육사에 비해서 동주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자리 매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방향성 찾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 인식의 차이 외에 두 사람의 성장 환경, 성격의 차이 등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형제들 모두 독립 운동에 참가한 항일 의식이 강한 선비 집안에서 대쪽같은 성격으로 자란 육사와 일찍이 개화된 기독교 집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내성적인 성격의 동주가 선택한 삶과 시의 표현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누가 잘났고 못났고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표현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만 역사가 깨어있는 지식인들에게 무엇인가 분명한 역할을 요구할 때에 육사보다 동주에게서 미흡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동주 시(삶)에서는 육사 시(삶)에서보다 시대적, 민족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족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두 시인의 궁극적인 믿음과 이 믿음의 실천을 위한 자기나 세계와의 싸움은 1940년대를 돌아보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임을 우리는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 저항시의 개념과 범주
일제 강점하의 개념은 단순히 시대, 역사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기보다는 시인의 현실적 삶과 작품에서의 태도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즉 이상화의 경우는 낭만적인 울분과 토로로, 한용운의 경우는 형이상학적 소망의 구현으로, 이육사의 경우는 혁명적, 지사적 의지의 표출로, 윤동주의 경우는 내면적 갈등과 의지의 성찰로서 저항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파워봉 / 담임박길환>
서정주와 이육사의 생애 비교
시인 서정주의 생애
서정주의 삶
전북고창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에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첫 번째 '화사집'을 발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으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한국의 보들레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해방 후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발간, 이시기부터
그의 경향은 초기의 악마주의적인 생리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사상으로 접근하여 심화된 정서와 세련된 시풍으로
민족적 정조와 그 선율을 읊었다. '신라초' 이후부터는 불교 사상을 기조로 한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본격적인 진리의 세계인 영원주의의의 이념과 선적인 정서를 부활시켰으며,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리어졌다. 그의 사상적 기조는 영원주의, 영생주의이며, 문화사조상의 배경은
주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이다. '신라초' 이후에 더욱 진경을 보인 작품 50여편을 모아
시집 '동천'을 발간, 신라와 불교의 세계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그를 종합적으로 대표하는
작품 '국화옆에서'는 한국 시사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시론의 분야에서도 활동하여 '시창작교실' '시문학개론' '한국의 현대시' 등의 저작이 있다.
1972년 서정주 문학전집 전 5권이 발간되었고 세계기행시집 '서으로가는 달처럼'이 있다. <한국문예사전>
서정주의 문학세계
서정주(徐廷柱, 81)시인이 시력(詩歷) 60년을 맞았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돼
나온 徐씨의 문단생활 60년을 맞아 최근 출간된 [시와 시학] 가을호는 특집으로 "미당문학 60년"을 꾸몄다.
이 특집에서 徐씨는 "나의 문학인생 7장"이란 장문의 글(2백자 원고지 60장)을 통해 시라는
한송이의 국화꽂을 피우기 위해 가슴 조였던 젊음의 뒤안길, 그 사상적 편력을 진솔하게 밝혀놓았다.
徐씨는 10대 중반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때
이 나라의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균배(均配)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가죽구두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의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하숙도 학교 근처의 좋은 집에서 빈민촌으로 옮겨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다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사선(死線)까지 돌파했다. 1930년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에는 중앙고보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투옥됐다.
그러다 16살때 읽은 톨스토이의 "물질적 균배로서 인생의 행복을 두루 좌우하다니 그 무슨 엉터리 소리냐"는 외침에
감명받아 자유사상의 넓은 벌판으로 나아갔다." 넓다면 한정없이 넓고 깊다면 또 한정없이 깊은 인생에서
경제적인 균배만으로 그 해결책을 삼는 사회주의의 좁은 이해력"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18살 때는 니체의 사람과 신을 일치시키는 인신(人神)이라는 초인격과 모든 비극의 철저한 극복의지에 빠져들었다.
또 니체의 "그냥 지나쳐 가기"가 "천하고 저속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동화하지 않고 인생의 순수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아주 필요한 일"로 생각됐다고 밝히고 있다. 20대 후반인 일제말기에는 "거북이처럼 끈질기고
유유하게 이 난세의 물결을 헤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인생관을 갖게 됐다. 그와함께 이조백자를 바라보며
한정없는 체념 속의 달관을 깨우치고 동양사상으로 회귀했다고 밝히고 있다. 徐씨는 또 "친일적이라는
시 몇 편이 있지만 그것은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국민 총동원연맹의 강제명령에 따라 어쩔수 없이
쓴 것들이니 이 점은 또 이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임을 누구나 시인하는 徐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역사성, 탈현실성을 공격받는
徐씨에게도 역사와 현실에 괴로 워하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은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 이육사의 생애
정렬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듯한 육사 이활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수난을 겪는 민족을 위한 광명에의 염원과
그 예언으로 시종일관한다. 그는 북경의 싸늘한 감방에서 40평생의 짤막한 생을 닫을 때까지 그 태반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에
끌려 다녔음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었던 사상적, 행동적 투사였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이까?" 1938년 세상을 떠나기 6년 앞서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썼던 그는
언제든지 죽음을 곁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현실의 행동배경에서 승화하여 폭넓은 서정시의 감동을 자아낸다.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의 유행에서 벗어나 한국의 고유성 회복과 고전적 전통에의 복귀로 향한 그의 노력은 후대를 위한 문학사적 가교를 이룩했다.
교동의 어린 시절
육사는 1904년 음력 4월 4일 이 마을에서 아은 이가호를 아버지로 범산공 허형의 딸 김해 허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한말 의병장 허위는 육사의 어머니의 숙부가 된다. 그는 부계의 한학과 모계의 기개를 받음으로써
후일 그의 문학과 항일의 행동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이육사는 어려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육사에 대한 어머님의 가르침이었다.
이육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생활태도를 입증하듯이
원천마을에 살고 있는 당숙 이훈호는 이렇게 회고했다. "성격이 대쪽 같아서 어른이 야단쳐도 자신은 잘못했다 항복하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은 나름대로 옳게 판단한 뒤에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땅을 떼어 나누어 준 사람이다. 육사는 이처럼 변해가는 집안의 정황을 보았고 이것을 실천했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가 결혼한 것은 17세 때였다. 배우자는 순흥 안씨 일양이었다 1922년 육사이 일가족이 대구로 나왔다.
그는 그로부터 항일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의열단 3형제
육사의 다섯 형제는 모두 인물됨이 출중한 사람들로 그 이름은 원기, 원록, 원유, 원조, 원창이었고
육사는 본명 원록, 원삼, 개명인 활을 썼다. 뒤에 원기는 한학으로 원유는 서예로 원조는 문학평론으로
원창은 언론인으로 그 재주를 보였다. 육사는 1925년 21세 때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동경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플루타르크 시이저 나플레웅 등의 영웅전을 읽었다. 그리고 6개월만에 돌아왔다.
그해 9월 독립운동 집단인 의열단에 가입한 육사는 밀명을 받고 중국을 다녀온다. 그러나 1927년 육사는
장진홍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폭탄 반입자로 연좌되어 체포 3년형 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원기,
원유와 함께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수인번호 64번이 아호가 되었다는 얘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29년의 일이다. 그해 아들 동윤을 보았으나 일가의 안녕과 행복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의 의지는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 올라 다시 북경행, 그리하여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든 것은 1930년의 일이다.
1933년 가을에 그는 다시 고국에 돌아왔다. 그 시기부터 육사 또는 활을 사용하며 세상에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육사의 최후
육사는 형제 가운데서도 인품이 무겁고 점잖은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한시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친구에게 경제적인 무리를 시키더라도 장안에서 가장 잘하는 양복점을 찾아가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시대적 환경이 좋았다면 유명한 멋쟁이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인상은 독립 운동하는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가을하늘 달덩이 같았고
넥타이 한번 구기는 일이 없었고 단정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시 읊기를 잘하고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갑갑하면 양말을 벗는 버릇이 있었으나 술 주정은 하지 않았고 원조처럼 수다스럽지도 않은 공손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적으로 외유내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4년 이래 서울에 살면서 작품을 발표했다.
유작으로 발표된 '광야'는 그가 1940년을 전후하여 썼던 작품들 중의 걸작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은 범(汎)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본경찰의 철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관할 줄 몰랐다. 겨레에 비칠 서광에 대한 희원으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그 초인을 불러오고 싶었던 것일까 1943년 초 아직 적설이 하얗던 어느 날 육사는 또 북경행에 나섰다.
그리고 4월에 돌아와서 고향에 내려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신분증명서를 몸에 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북경을 오고 갔음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동대문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명륜동 집에 들이닥친 것이 6월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지 6일만에 북경에서 그를 압송할 사나이들이 왔다.
부인 안씨가 죽을 끓여다 들여민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육사 이활은 1944년 1월 16일 북경 옥사에서 4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으니
그의 유해가 돌아온 것은 그 15일 뒤이다.
그는 지금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던 그 원천 뒷산 낙동강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
<죽계구곡 / 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