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조 전강 영신[田岡永信, 1898~1975]
전강선사(田岡禪師, 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버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스님은 23세가 되던 1921년 드디어 크게 깨달은 후 오도송(悟道頌)을 남겼으며, 이후 당대의 선백들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漢巖)스님을 찾아가자 한암스님이 믇기를 "육조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불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계속해서 용성(龍城)·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을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스님은 처음에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받으면서 선종 제 77대의 법맥을 계승하게 된다. 이후 33세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組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을 차례로 지냈으며, 스님은 이후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普禪院)을 개설하여 15여년에 걸쳐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스님의 선풍은 제자 송담(松潭)스님이 용주사에서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다.
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으며,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 하였다. 끝으로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75년 1월13일 앉은 채로 입적했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 ・ 혜봉 ・ 한암 ・ 용성 ・ 보월 ・ 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 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 - 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峰(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 ・ 경북 수도선원 도봉산 망월사 ・ 부산 범어사 ・ 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한안여천향북비)
何事十年枉費力(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월하섬진대강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 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 ・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 ・ 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