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기행
지난 23일(일) 늦은 5시 즐거운 마음으로 평촌을 출발하여 7시간 사투 끝에 거창땅 작은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연휴가 길어 귀성객이 흩어져서 다른 때 보다는 편할 꺼라 생각하고 좀 느긋하게 출발 했는데 그것은 큰 오산 이었다.
밤 12시가 넘어 도착하여 콩고물, 팥고물, 깨 들을 넣고 만든 송편과, 밤보다 맛있는 고구마, 그리고 엿기름을 많이 넣고 금방 끓여 만든 밥 알갱이가 동동 뜨는 뜨거운 단술(식혜의 경상도 방언)을 후후 불며 먹는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후식으로는 거창 사과를 먹었다. 거창 사과는 지리산과 덕유산이 서북쪽으로 위치해 추운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사질양토에 자라 그 맛은 세계에서 제일이 틀림이 없다.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필요 없는 가을비가 장마처럼 내렸다.
앞마당에 왕버들 정자나무는 비에 젖어 더욱 싱싱해 보였다.
내가 어릴적 나무위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여름이면 딱새가 날아와 식구를 늘리기도 하는 나무였는데 지금은 너무 나이가 많아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싹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옛날 우리집 장독대옆 감나무는 베여지고 없었다.
게다가 뒷곁에 있는 동이감 나무도 개화기에 비가 잦아 열매가 몇 개 달려 있지 않았다.
우리는 어릴적 멱을 감든 개천에서 고기를 잡을 요량 었렀으나 어제밤 내린 비에 물이 불어 고기잡이는 포기하고, 산에 가서 조상님 묘에 벌초부터 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산소를 관리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나도 그런데 하물며 후손들은 얼마나 하기 싫어할까 생각하니 차라리 다 모아 선산 양지 바른 곳에 납골당을 하나 마련함이 좋을 것 같았다.
산소옆 나머지 빈 땅에는 공원을 만들고 사과, 배, 감, 은행 등 유실수를 심을까 한다. 그것들이 익으면 재미 삼아서라도 많이 찾아 올 것이 아닌 가 생각해서이다.
차를 몰아 코스모스 꽃길을 지나 국내최고의 게르마늄온천수로 유명한 '가조온천'에 갔다. 그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인간시장이 따로 없었다.
온천을 포기하고 40여년전의 추억이 담긴 모교 초등학교에 들러 보았다.
운동회 때 만남의 장소였든 그때 그 우물가와 플라다나스 그늘은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최신식 실내체육관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선친께서 설립하신 '가조중학교'를 들러 공도 차고 철봉에도 한 번 매달려 보고 ‘히말리아시타’ 그늘 밴취에서 잠시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고 왔다.
어머님의 권유로 돌아가신 이모님 딸이 사시는 가북으로 갔다.
가북중에서도 하늘아래 첫동네 공수동(空水洞) 말그대로 하늘과 물 밖에 없는 동네다. 몇일을 비워 문을 열어 놓아도 먼지 하나 없는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한 곳이었다.
내가 어릴때 이모님이 초카 왔다고 창호지에 고깃고깃 싸고 또 싸서 고쟁이 속에 넣어 두었든 돈 30원을 꺼내주셨든 분의 따님이시다.
이제 그분이 이모님의 나이가 되어 내앞에 어께에 ㅇㅇ정형외과 라는 글귀가 씌어진 맬빵을 두르고 서 계셨다.
지난 5월 단오날 동네 사람들은 외국여행 갔을 때 돈이 아까워 못가셨던 날, 고추모 심으러 다랭이 밭에 경운기를 타고 언덕빼기를 오르다 낡은 경운기가 고장을 일으키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어께에 골절 상을 당하셨다고 한다.
나는 이모님에게 그때 진 빗을 갑는 심정으로 그 분의 따님에게 5만원을 쥐어 드렸다.
그때 심은 그 고추가 벌써 익어 이를 수확하여 내차에 한 푸대를 실어 주셨다. 나는 빗을 갑은게 아니라 도리어 또 빗을 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한 분을 만났다.
집안에 누나 뻘이다.
누나 내외는 정년퇴직을 하시고 귀향하여 농사일도 하시고 취미생활도 하시면서 여생을 사시는 분들이다.
이제 일흔이 훌쩍 넘어셨으니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어머님이 안계시면 이분들도 상노인들 이신데 -----
이 분은 우리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시고 젖을 때기 전의 일이다.
내 바로 아래 쌍둥이가 들어 서는 바람에 젖이 말라 내가 울고 있을 때, 30리 떨어진 읍내에서 살고 있든 누나를 어머니께서 불러 나에게 젖을 주셨든 일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누나에게 용돈 을 드렸다.
그때 젖값 드리는 것이라고 하니 누나는 옆구리를 쿡 찌르며 겨면쩍게 웃으시면서 받으셨다.
그때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에서 아들딸 놓기 시합을 할 때인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 했다.
누나가 작년에는 잘 띄운 청국장과 된장 간장을 보내주셔서 맛있게 잘 먹었다.
올해도 추수해서 만들어 보내 줄테니 어머니와 잘 먹으라고 하신다.
고향을 뒤로하고 요금만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고속도로라고 하지 않을 국도 보다도 못한 88고속도로를 따라 한 시간 반을 달려 전라도 남원에 있는 지리산온천에 닿았다.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 따끈한 야외 온천욕은 일본의 어느 온천장 못지않았다.
일찍 핀 나뭇잎이 온천수에 떨어져 맴돌고,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들이 목화송이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고, 멀리 지리산자락에는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저녁은 시설단지에 내려가 청국장과 재첩국으로 먹었다. 오는 길에 전국 제일의 산동 산수유마을에 들러 빨갛게 익어가는 산수유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는 호텔이 들어와 새벽2시까지 비, 풍, 초, 통, 팔, 삼, 어께가 빠져라 고스톱을 치고, 3시간도 못자고 어머니 기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추석날 아침이 밝았다.
커튼을 열어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구름 덮인 지리산이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스러웠다.
해발 1500m 가 넘는 준령들이 산허리에 솜이불을 두르고, 거만하게 봉우리들은 모조리 구름속에 감추고 있었다.
나는 잠시 엊저녁에 보아둔 뒷산 밤나무에서 밤을 주어 왔다. 아니 털어 왔다. 아직 산골이라 밤송이가 덜 벌었기에 막대기로 두들겨 따서 발로 밟고 밤송이껍질을 벗겨 밤알을 골라 왔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아래층 편의점에서 라면이랑 만두를 사다 양파 넣고 계란 넣고 끓여 추석날 아침식사를 거룩하게 ? 해결했다.
수 십년전 큰형님께서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하고 어렵게 지네고 있을 때, 설날이 다가와 아침에 라면을 끓여 먹는데 교회에서 쌀을 갖다 줘서 고맙게 다시 밥을 지어 먹었든 일이 있었다.
오늘 추석날 아침에 우리는 차마 웃지 못 할 그때 예기를 하며 고맙게 그리고 맛있게 라면을 먹었다. 우리 가족의 지난 역사를 예기를 할 때는 잠시 침묵이 흘렀었다.
지금 우리는 행복하다.
11남매(4남7녀)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아흔이 넘는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급히 밤을 삶아 비닐주머니에 담고 다음 여행지인 지리산 노고단으로 향했다.
오르는 길이 너무도 가파르고 굽이져 속리산 ‘문장대’ 올라가는 말띠고개 보다 더 높아 보였다.
구름이 발아래서 양 때 들이 노니는 듯, 목화송이를 따다 놓은 듯 그 아름다움은 형언 할 길이 없었다.
이따금씩 구름속으로 차가 달리면 차창 밖으로 내민 손에, 머리카락에 은구슬이 아침이슬 처럼 대롱대롱 달렸다.
차가 숨을 헐떡이며 삼성재에 닿아 주차를 하고 노고단으로 올랐다.
초가을의 우리강산 풀내음과 바람소리, 계곡물소리, 그리고 풀벌레소리 정말 내가가본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길 바가 아니란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불규칙하게 쪼갠 화강암 돌로 마음대로 포장한 길을 40여분 올라가니 노고단대피소가 나왔다.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하였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 중에는 파란눈의 외국인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들이 진 등짐은 머리꼭대기 보다 더 높게 지고 있었다. 수 십년전 나도 친구들과 건너편 천왕봉을 등반할 때 그랬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뭉클함이 솟았다.
10여분 더 올라가니 백두대간 종주하는 코스가 나왔다. 왼쪽 만개하지 않은 억새숲을 옆으로 하고 쌓은 수 많큼이나 많은 크고 작은 수 만 가지의 소망을 간직한 돌맹이들을 주어 모은 돌탑이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잘 가꾸어 놓은 능선이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훼손된 자연을 다시 잘 복원하여 자연학습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5월 되면 야생화가 만발한다. 그때는 이곳을 찾는 이들의 혼을 다 뺏어 가버릴 정도로 아름다워진다. 이 풍경을 보기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에 평소에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이 길을 따라 10분여 올라가면 노고단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정상에 서니 멀리 구름속으로 해발 1950m 천왕봉 정상이 보이고 아래로 세석평전이 비스듬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른쪽 아래는 하동과 구례가 보이고 그 더 멀리는 광주 무등산이 아스라히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구름과 위에서 지나가는 구름이 서로 만나 시골 방앗간떡시루에 피어나는 수증기처럼 힘차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는 추석을 맞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맛있는 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중에 젊은 부부가 늙은 부모를 모시고 올라와 가지고온 음식을 돌위에 펼쳐 놓고 두 손 모아 고개 숙이며 간절히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였다.
아쉬운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잘 단장된 탐방로를 따라 맨발로 걸어서 내려왔다.
저 멀리 뱀사골이서 솟는 구름이 누렁이 황소 소죽 쑤는 연기처럼 번져 오르고 있었다.
다시 차는 88도로를 지나 대진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잠시 함양을 지나자 굼뱅이 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허기가 져서 식당을 찾아도 국도변에 식당들은 추석 명절이라 영업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속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했다. 귀성인파가 장난이 아니다. 많은 인파를 뚫고 줄서기를 10여분 겨우 우동 한 그릇씩을 차지 할 수 있었다.
다시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어제부터 오기 시작한 문자가 급기야 핸드폰 베터리 눈금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 지드니 드디어 허리가 뒤틀리고 어께까지 아파온다.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경부선에 들어서자 정체는 더욱 심해 졌다. 중부고속도로로 방향을 틀어 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오창 부터 막히기 시작하여 내내 그 지경의 연속 이었다.
껌을 씹어보고 라디오를 크게 틀어 봐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천휴게소를 들어가다 “꿍”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내가 앞차의 뒷꽁무니를 들이받고 말았든 것이다. 그제 서야 잠이 확 달아나고 정신이 들었다. 차에서 내려 정중히 사과를 하고 별일이 있으시면 연락주시라고 호두과자봉지를 찢어 차넘버와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일단 마무리를 지었다.
차는 하남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외곽순환도로는 뻥 뚫려있었다. 오랜만에 엑셀레이터에 힘을 불끈 주어 보았다.
차들이 도시에 들어오니 어디론가 다 스며들고 없었다.
이것이 도시의 무서운 흡인력인가? 아니면 이것이 도시의 따뜻한 포용력인가?
아파트 정문을 들어오니 맥이 풀렸다.
터렁크속의 홍시감도 곤죽이 되어 있었다.
핸드폰 시계는 새벽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2박3일의 추석기행은 끝이 났다.
그런데, 이 여행은 아직은 끝이 아니다.
핸드폰에 발신자 표시가 없는 전화가 걸려오면 마음이 졸인다.
2007. 9. 28.
11남매 8번째 권 재 홍
어릴적 소풍터, 병산솔밭
산소앞 도로변 코스모스밭.
울엄마
화엄사 뒷쪽에서 본 노고단.
지리산 계곡.
노고단을 뒤로하고.
노고단에서 내려다본 자연 탐방로, 우측아래가 뱀사골이다.
맨발로
|
첫댓글 먼길 고생많으셨습니다 모친께서 아직은 정정하신것 같네요 무병장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 글은 2년전 추석에 고향을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울 어머니는 올해 93세이십니다. 올 해 추석에는 딴짓한다고 고향을 가지 못했습니다. 이달 말쯤 고향갔다 이번에는 담양 소쇄원(瀟灑園)에 들러올까합니다.
어머님이 자태가 넘 고우셔요~~~
*^^* 감사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신명이 많으신 분인데 요즘와서는 기력이 많이 쇠잔해 지신것 같아 걱정입니다.. ----- 님의 가정에도 하늘의 축복이 차고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