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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가는길. 우리는 강진하면 영랑 시인과 다산을 떠 올린다. 남도답사 1번지라고 할 만큼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18년 유배지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학문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 유명한 <목민심서:牧民心書>, 등등 숱한 저술이 여기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유배처에 온 다산은 일정한 거처가 정해지지 않아 네 번이나 옮겨 다니며 살았다. "가경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 하였고,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 고성사(寶恩山房.高聲寺)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학래(學來.李(田+靑))의 집에서 살았다. 무진년(1808) 봄이 되어서야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다, " 처음 왔을 때에는 농민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산 신계> 중에서.. 유배 온 죄인을 사람들은 마치 대독(大毒)으로 여겨 파문 괴장(破門壞墻)하고 달아날 때 그를 가련히 여겨 돌봐준 이는 술집(酒家)이자 밥집(賣飯家)인 오두막 노파였다. 다산은 이 오두막에서 노파의 보살핌으로 무려 4년을 지냈다, 다산은 감사한 나머지 그 집을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지어 불렀다. 아쉽게도 지금 그 집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다산초당의 변천. 다산초당 초입에 있는 마을이 귤동마을인데 주로 윤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다. 귤동마을을 지나 초당이 있는 산으로 오르면 빽빽이 자라 하늘을 가린 대밭과 아름드리 소나무 등 깊은 숲길은 언제나 어둡고 서늘한 분위기를 준다, 이 침침한 길을 가뿐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 보면 경사 길바닥엔 수많은 나무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듯, 뿌리들이 얽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인공으로는 도전히 조형될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의 얽힘,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 특히 보슬비가 내리는 날 오르면 빗물을 잔뜩 머금은 목근(木根)들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최근에는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한단다. 비탈길을 오르다 오른쪽을 보면 제법 펑퍼짐 한 곳에 평범한 묘소가 하나 있다. 비문을 읽어보니 (해남 윤 공종진 지묘:海南尹公鍾軫之墓)라 적혀있다. 이 무덤 주인공의 조부가 윤단이란 사람이다. 정약용 외가 쪽 친척 되는 분으로 다산이 강진읍내로 유배와 절집으로 떠돌다가 초당이 있는 이 산으로 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분이다, 이 윤종진의 묘에 귀엽고 조형감각이 뛰어난 동자석상이 양쪽으로 서있다, 얼굴형이 귀여우면서 아주 야무지고 게으르다 싶을 정도로 단순화 작업으로 현대적 감각을 풍긴다. 귀는 크고 볼은 넓으며 두 눈동자는 밤톨만 한 게 또 코는 삼각산만 하고, 하여튼 이런 형태의 석인상은 강진, 해남, 장흥 지방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각 지방의 토호들은 왕릉의 문신 석상, 무신 석상, 또는 양반 무덤의 호신 석상 등을 흉내 내어 자신들도 문화적 향유 내지는 소비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신분적 상승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각 지방마다 지역적 특성이 있는 석물상을 대량으로 만들게끔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파른 길을 조금 더 오르면 다산초당이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툇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꽤 큼직하다, 말이 초당이지 유배객이 살기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원래 여기는 저 아래 귤동마을 윤씨가 네 조그만 정자가 있었는데 다산은 거기서 살았단다. 그것이 폐가가 되어 무너진 것을 1958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바로 그해에 다산유적보존회가 이렇게 번듯하게 지어놓은 것이다, 다산유적보존회이니까 다산을 기리는 마음이야 의심할 여지는 없다 하겠으나 어찌 좀 씁쓸하다, 우리가 알아야 될 유적 보존의 방법이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상의 보존법이고, 부득이 헐거나 복원 불가능한 것이라면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이 주인공을 위한 일이고 또 후대(後代) 사람들에게 역사적 문화적 교육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다산에 대한 예비지식 없이 여기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별장 아닌가, 죄인이 팔자가 늘어졌네,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내 아들이 여섯 살 때 손을 잡고 처음 이곳을 올랐다. 그때는 입구에 표지판도 없었고 주변이 정리도 되어있지 않을 때였고 방문객이 요즘처럼 많지 않을 때였다. 초당 마루에 앉아 주변을 보면 울창한 숲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단지 뜰 앞에 넓적한 바위 하나 있고 왼쪽에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초당 오른쪽 뒤편 바위에 새겨놓은 "정석(丁石)"과 함께 유배시절의 진짜 유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쯤 1821년, 그의 나이 육순 때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지었다, 이 장문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본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글이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다산초당의 모습은 이러했다.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庵)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서책을 지으며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산 서쪽에 위치한 작은 산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山亭)이었다. 석벽에 "정석(丁石)"도 자를 새겼다." 초당 연못의 석축과, 긴 대통으로 물을 끓어 어른의 오줌발 같은 폭포를 조작한 것이 어쩌면 그때의 모습인 것도 같다, 마당에는 다산이 평소 차를 끓여 마셨던 다죠(茶竈)라는 꽤 널찍한 바위가 있다, 그리고 초당 오른쪽 뒤편에 "정석" 두 글자는 단정한 해서체로 깊게 새겨져 있다, 나는 이 바위에 글자를 보고 있으면, 당대 최고의 석학이 때 묻은 누더기 옷을 입고 댓임으로 백발을 동여매고 손에 망치와 정을 들고 바위에 매달려 망치질을 하며 세월을 꼽씹는, 그래서 외로움을 달래 보려는 정약용을 생각하면 마치 나의 할아버지로 착각되어 가슴이 울컥 해진다. 다산의 "매화와 새" 그림 다산초당 왼편에 조그만 기와집이 한채 있다, 이 집에는 "다산동 암"이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현판이 걸려있다. 바로 이 집에서 탄생한 그림 한 폭만 설명하고자 한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편편 비조 식 아정 매)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유열 기방 혜 연기래)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원지 원서 락이 가실) 이제 여기 머물며 네 집으로 삼으렴 (華之旣榮 有蕡其實. 화지 기영 유분 기실) 꽃이 만발하니 그 열매도 많겠지. 얼마나 외로웠으면 매화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에게조차 함께 살자고 조른다. 그 옆에 씌어 있는 작은 글씨의 사연이 더욱 쓸쓸해 우리의 마음까지 울적하게 한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여 적거 강진 지월 수년 홍부인기폐군육폭) (歲久紅渝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세구 홍유 전지 위사첩 이유이자 용기여 위소장 이유 여아) 매화가지에 앉은 새의 그림을 보면 그 애잔한 분위기가 영 가시질 않는다. 천일각에서 구강포를 바라보며.. 다산초당은 장소가 협소하고 어둡고 습한 곳이라 사람들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모두가 바로 옆 산 중턱에 있는 천일각(天一閣)으로 향한다, 저 멀리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구강포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드리 마신다, 사실 천일각 건물은 정약용 유배 시에는 없었던 누각이다, 다만 그분도 독서와 저술에 지치다 보면 초당과 동암을 나와 이 자리 어느 그루터기나 바윗등에 걸터앉아 저 멀리 구강포를 바라보며 속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또 다산은 이곳에 앉아 바다 저 건너 어디엔가 유배 살 이하고 있는 형 정약전을 그리워도 했을 것이다, 이제는 세상 편의가 대세인 지라 그 자리에 넓고 편한 정자가 세워졌으니 우리는 거기에 앉아 긴 난간에 기대어 그분의 울분을 한 번쯤 헤아려 볼 일이다,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선운사 마애불 주변에서 발견했던 비기(秘機)는 "목민심서"였다는 전설, 월맹의 호지명이 집권 당시 부정부패의 척결을 위하여 조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꼽았던 사실, 또 전두환 전 대통령도 해외출장 때에는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만 봐도 우리는 다산을 존경할만하지 않는가? 천일각을 나와 오른쪽 중턱 길로 접어들면 등 넘어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오르막길 주변은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간간히 서있는 키 큰 편백나무들이 진한 향기로 우리들을 유혹한다. 다산이 본 백성들의 삶. 정약용이 이곳에서 저술한 "목민심서"에는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어러웠는지를 한 편의 시(漢詩)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시는 계해년(1803)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군보에 올라 있어 마을 책임자가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 가자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자르면서 "내가 이 물건 때문에 이런 재앙을 겪는구나." 하였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았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詩)를 지었다." 이때 지은 시가 그 유명한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다. 蘆田少婦哭聲長 (노전소부곡성장) 갈밭 마을 젊은 아낙 통곡소리 길기도 해라 三代名簽在軍保 (삼대명첨재군보) 우리 집 삼대 이름이 군적에 모두 올랐네.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의 불알 까던 형벌도 억울한데 況乃生民恩繼序 (황내생민은계서) 하물며 후손을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 <蠶室淫刑. 잠실음형>===남자는 거세(去勢)를 하고 여인은 음부를 봉함하는 형벌.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밀실에서 불을 계속 지펴 높은 온도를 유지시키는 방이 잠실(蠶室)인데. 궁형(宮刑)에 처한 자는 그 잠실에 있게 하였음. <漢書 武帝記> 민 땅====="민"의 사람들은 자식을 "건"이라 하고 아버지를 낭파(郎罷)라고 불렀는데. 당(唐) 나라 때에 그곳 자식들을 환관(宦官)으로 썼기 때문에 형세가 부호 한 자들이 많아 그곳 사람들은 자식을 낳으면 곧 거세를 하여 장흭(藏獲)으로 만들었다고 함 == <靑箱雜記> 시구 편(=====시경(詩經)으 편 이름. 군자의 마음이 전일하고 공평무사한 것을 찬미한 시. ============================ 남자가 자신의 남근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스스로 자결하는 것과 같다. 남겨진 가족을 참아 외면하지 못해 자결은 못하고 이렇게라도 해서 고단한 삶을 관리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탐관오리들의 만행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다 같은 백성이거늘 부자들은 쌀 한 톨, 비단 한 치도 바치지 않으면서 풍악을 울리며 풍류를 즐기는 반면 백성들은 주린 배를 채울 양식도 없는데 관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전(稅錢)을 뜾어가니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 현실에 다산도 어찌해볼 형편이 아니었다, 정조가 죽은 후 탄핵을 받아 귀양살이를 전전하고 있던 다산은 이 같은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자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며 결국 그 괴로운 마음을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 편이나 거듭 읊을 뿐이었으니 그 심경 또한 어떠했겠는가? <행서를 변형시켜 쓴."다산초당"은 추사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예서를 변형시켜 쓴 "보정산방"은 추사 중년에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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