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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초고] 왕안석과 사마광, 그리고 백낙청 —'변혁적 중도'가 위태로운 이유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 AI Claude Opus5
먼저 밝혀둔다. 필자는 백낙청 교수의 최근의 발언을 비판적으로 본다. 하지만 이 글은 그의 뿌리가 되는 '변혁적 중도'라는 개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진단에 상당한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일리 있는 진단이 왜 자꾸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되는지, 그 구조적 이유가 궁금하다. 이 글은 그 이유를 탐색한다.
900년 전에 같은 일이 있었다
1069년 북송의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해 신법을 시작했다. 당시 송은 심각한 위기에 있었다. 관료와 군대는 비대해졌고 재정은 고갈됐으며, 토지는 호족에게 집중되어 자영농이 고리대에 시달리다 땅을 잃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왕안석의 진단은 명확했다. 구조의 문제이니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내놓은 청묘법은 춘궁기에 관이 농민에게 저리로 곡식과 돈을 빌려주는 제도였다. 민간 고리대가 연 60퍼센트를 넘나들 때 20퍼센트 안팎으로 정했다. 오늘의 언어로 하면 신용의 공적 배분이다. 담보 없는 이에게 생산을 위한 신용을 공급하겠다는 발상은 훗날 그라민은행이 다시 시도한 것과 원리가 같다.
사마광은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런데 그의 반론은 취지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집행이었다. 지방관들에게 대출 실적이 내려갈 것이고, 실적을 채워야 하는 관리들은 돈이 필요 없는 농민에게까지 강제로 빌려줄 것이며, 결국 고리대를 없애려던 제도가 관에 의한 새로운 수탈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그대로 맞았다. 조정이 대출 실적을 집계하고 그것으로 관리를 평가하기 시작하자, 청묘법은 농민을 구제하는 제도에서 실적을 채워야 하는 과제로 성격이 바뀌었다. 연대보증이 붙고 수수료가 얹히면서 실제 부담은 원래 정한 이자를 훨씬 넘어섰다.
그런데 사마광의 승리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085년 신종이 죽자 사마광이 재상으로 복귀했다. 그가 한 일은 신법을 하나씩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이때 같은 편에서 반대가 나왔다. 소식이 모역법에는 취할 점이 있으니 폐단만 고쳐 유지하자고 진언했다. 지방에서 실무를 겪어보니 농번기에 농민을 부역에 끌어가지 않는 것, 그리고 전에 면제받던 계층에게도 부담을 지우는 것에 효용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사마광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서늘한 아이러니가 생긴다. 그가 왕안석을 비판한 핵심 논거가 "급하게 바꾸면 집행 과정에서 백성이 고통받는다"는 것이었는데, 15년간 시행되어 뿌리내린 제도를 1년 만에 통째로 뒤집는 것 역시 급격한 변화였다.
1362년의 흥망을 정리한 《자치통감》을 쓴 사람이, 재상의 자리에 앉자 자기 책의 교훈을 지키지 못했다. 15년간 물러나 있으면서 그를 냉철하게 만들었던 거리감이 권력의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일
두 사람은 1086년 같은 해에 죽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이름으로 싸우는 후계자들이었다.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신법당이 돌아와 보복했다. 1102년 재상 채경은 원우당적비를 세워 구법당 인사 309명의 이름을 돌에 새기고 전국에 세웠다. 이름이 오른 자는 벼슬을 잃고 자손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사마광은 죽은 뒤 관작을 추탈당했고 소식은 해남도까지 유배됐다.
정책 논쟁이 인물 숙청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 왕복이 계속되는 동안 북방에서 여진이 일어났다. 1127년 개봉이 함락됐다. 개혁도 이루지 못하고 보수도 지키지 못한 채 나라가 없어졌다.
변혁적 중도가 짚은 것
백낙청 교수가 '변혁적 중도'를 말하며 내놓은 정식이 있다. 변혁 없는 중도는 현상 유지의 알리바이가 되고, 중도 없는 변혁은 또 다른 극단의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900년 전 60년의 역사를 정확히 요약한다.
왕안석은 중도 없는 변혁이었다. 방향은 정당했으나 반대를 설득하는 대신 배제했고, 그 배제가 훗날 자기 개혁을 통째로 지우는 반격을 불렀다. 사마광은 변혁 없는 중도였다. 집행의 위험을 정확히 예측했으나 그 예측을 개선의 근거가 아니라 폐기의 근거로 썼다.
여기까지는 일리가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첫째, 좌표가 없다
권력의 크기는 위임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리고 위임은 언제나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이루어진다. 유방에게 위임이 쌓인 것은 함양에 입성하며 약법삼장이라는 구체적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고, 상앙이 신뢰를 얻은 것은 나무 한 그루를 옮긴 자에게 실제로 오십금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혁적 중도'는 좌표가 아니라 자세다. 그리고 자세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누가 자기를 "변혁 없는 중도"라고 부르겠는가. 누가 자기를 "중도 없는 변혁"이라 자처하겠는가.
모두가 자칭할 수 있는 개념은 식별 기능을 잃는다. 그리고 식별되지 않는 것에는 위임이 붙지 않는다.
둘째, 방향은 있으나 선택이 없다
의사결정은 기승전결의 순서를 밟는다. 기(起)와 승(承)이 방향을 세우는 단계라면, 전(轉)과 결(結)은 구체적 선택으로 좁히는 단계다.
변혁적 중도는 기승의 언어다. 그런데 정치는 결국 전결에서 판가름난다. 여덟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다.
원전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 소선거구제를 유지할 것인가 바꿀 것인가. 기본소득을 어떤 재원으로 얼마나 지급할 것인가. 이 순간 변혁적 중도는 답을 주지 못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것을 변혁적 중도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짓는 것도 현실을 고려한 변혁적 중도이고, 짓지 않는 것도 기득권 체제를 넘어서는 변혁적 중도다.
그래서 이 개념은 전결의 부재를 비판하는 데 쓰일 수도 있고, 반대로 전결을 미루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셋째,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이다 — 누가 판정하는가
어떤 개념이 실천적 힘을 가지려면 무엇이 그것이고 무엇이 아닌지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변혁적 중도에는 그 판별 기준이 개념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면 판별 권한은 어디로 가는가.
그 개념을 제창한 사람에게 남는다.
이 순간 이론이 권위가 된다. 같은 사건을 두고 어떤 이는 변혁적 중도의 실현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 반대라 한다. 그 판정을 가를 객관적 기준이 없으면, 결국 누가 말하느냐가 무엇을 말하느냐를 대체한다.
여기에 하나가 더 겹친다. 지식인의 권위도 결국 위임받은 것이다. 그의 글을 읽고 그의 판단을 신뢰하기로 한 사람들이 위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위임에는 갱신 절차가 없다. 선출된 권력은 임기가 끝나면 재신임을 받아야 하지만, 지식인의 권위에는 그런 절차가 없다. 한 번 쌓인 명망은 상당 기간 그대로 유지된다.
철회 절차가 없는 위임은 견제받지 않는다. 그리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좌표 없는 명명은 뛰어난 지성일수록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그랬다. 쥘부채와 도시락과 분재와 하이쿠와 트랜지스터를 하나로 꿰어 "일본은 줄이는 쪽으로 간다"고 이름 붙인 것은 강력한 통찰이었다. 흩어져 보이던 현상들이 그 이름 하나로 정렬됐다.
그런데 왜 줄이는 쪽으로 갔는가. 그는 언어와 심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심성은 어디서 왔는가를 다시 물으면 답이 없다. 문화를 문화로 설명하는 순환이다.
좌표는 다른 데 있었다. 일본열도는 강수량이 많고 산이 높으며 하천의 경사가 급하다. 여름마다 수해가 난다. 농사를 지키려면 제방과 수로와 저수지를 관리해야 하는데 이건 개인이 할 수 없다. 무라(村) 단위에서 촌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해야 한다. 오랜 세월 수직적 분업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각자 자기 자리를 정확히 지키는 것이 규범이 되고, 그 규범이 정밀함과 완성도와 소형화로 발현된다. 지리에서 시작해 문화에 이르는 사슬이다.
한국은 달랐다. 홍수도 있지만 가뭄의 피해가 더 컸다. 물을 댈 수 있을 때 온 마을이 동시에 달려들어 모를 심어야 했다. 두레가 중시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힘없는 사람도 농번기에는 귀한 손이 됐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그 생존 조건이 키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어령은 이런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지 않은 채 현상만을 조명한 것이다. 백낙청도 유사한 패턴이다.
이어령은 현상을 명명했으나 원인의 좌표를 비웠다. 백낙청은 긴장을 명명했으나 절차의 좌표를 비웠다.
그리고 좌표가 비어 있으면 같은 일이 벌어진다. 무엇이 그것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판정할 권한이 명명한 사람에게 남는다. 무엇이 축소지향이고 무엇이 아닌지, 무엇이 변혁적 중도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개념이 스스로 가리지 못하면 사람이 가릴 수밖에 없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이어령의 경우 그 권한이 남아도 해가 크지 않았다. 문화비평이니 무엇을 축소지향으로 볼지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고, 틀려도 누가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변혁적 중도는 실천의 개념이다. 원전을 지을 것인가, 선거제를 바꿀 것인가를 판정하는 데 쓰인다. 그러면 판정 권한이 남은 것이 그대로 정치적 권력이 된다.
같은 형식의 미완이라도 실천의 영역에서는 훨씬 위험하다.
변절이라는 규정은 답이 아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어떤 지식인이 30년 전과 다른 판단을 내렸을 때, 그것이 타락인지 갱신인지는 그 판단의 내용으로 따져야지 변화 자체로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30년 동안 한 번도 입장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이 사유의 정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견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언어를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를 지성의 붕괴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같은 언어의 다른 방향일 뿐이다. 논박이 아니라 낙인이다.
북송의 60년이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이 이것이다. 처음에 왕안석과 사마광은 서로를 존경했고 논쟁도 정책을 두고 이루어졌다. 그것이 인물의 숙청으로 넘어가는 순간 양쪽 다 졌다. 원우당적비에 이름이 새겨진 309명과, 그 뒤 다시 뒤집혀 관작을 추탈당한 신법당 인사들. 그 왕복 속에서 정작 살려야 했던 나라가 무너졌다.
그렇다면 그 절차는 어디에 있는가
태도를 구조로 번역해야 한다. "변혁적 중도의 자세를 갖자"가 아니라 "그 개념이 검증되는 절차를 만들자"로.
정치권력에는 선거가 있고 경제권력에는 시장이 있으며 사법권력에는 심급이 있다. 지식권력에는 무엇이 있는가. 언론이다. 정확히는, 있어야 한다.
어떤 주장이 나오면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이 같은 무게로 실리고, 제창자가 다시 답하고, 그 왕복이 기록으로 남는 것. 그래서 후대의 독자가 양쪽을 다 읽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지식권력에 대한 견제다.
사마광이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 30권을 따로 남긴 이유가 여기 있다. 사료가 엇갈릴 때 자신이 무엇을 택했고 왜 택했는지, 판단의 근거를 통째로 공개한 것이다. 후대가 그 판단을 검증하고 필요하면 뒤집을 수 있도록 열어둔 것이다. 실제로 주희는 훗날 그의 정통론을 뒤집었다. 열어둔 기록만이 제대로 반박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언론에 그 기능이 있는가
원로에 대한 비판적 서평은 사실상 사라졌다. 서평란은 대체로 홍보의 연장이 되었고, 정면 반박은 학술지 안에 갇혀 대중에게 도달하지 않는다.
지상 논쟁의 형식도 없어졌다. 한때는 신문 지면에서 논쟁이 여러 회에 걸쳐 오갔고 그 기록이 남았다. 지금은 각자 자기 채널에서 말할 뿐, 서로에게 답하는 구조가 없다. 그래서 반박이 논쟁이 되지 못하고 진영 간 공방이 된다.
무엇보다 진영에 따라 검증의 강도가 달라진다. 같은 논리적 허점이라도 우리 편이 말하면 넘어가고 저쪽이 말하면 파헤친다. 이러면 검증이 검증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견제 장치가 진영의 도구가 되면 그것은 이미 견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론 종사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공론장이 사유화되면 의제 설정권이라는 무형의 지대가 소수에게 독점된다. 그 지대 구조 위에서는 검증이 아니라 편들기가 수익을 낳는다. 언론이 지식권력을 견제하지 못하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맺으며
변혁적 중도는 진단으로서는 일리가 있으나 개념으로서는 미완이다. 왕안석과 사마광이 둘 다 실패한 이유를 정확히 짚었으나,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태도의 요구에 머물렀다.
그리고 구조가 되지 못한 개념은 결국 그것을 규정하는 자의 권위에 의존한다.
그러니 이 개념이 위태로운 진짜 이유는 개념 안에만 있지 않다. 그것을 검증할 공론장이 무너져 있다는 데도 있다. 어떤 개념도 반박을 통과하지 않으면 단단해지지 않는다. 반박이 도달하지 않는 자리에 놓인 개념은,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결국 그것을 말한 사람의 권위에 기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 개념을 부정하는 것도, 그것을 말한 사람을 판정하는 것도 아니다. 반박이 도달하는 자리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사마광이 고이 30권으로 자기 판단을 열어두었듯이.
거울은 비추어줄 뿐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은 그 앞에 선 자의 몫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 거울 자체가 흐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