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의 창건에는 통일신라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주장과, 조선시대 중기에 견성사를 중창하여 봉은사로 하였다는 주장이다. 794년 창건설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현재의 봉은사와 연관시켜서 보기 때문이다. 원성왕 10년 7월에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왕에게 바쳤다. 대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794년에 봉은사를 창건하였고, 대궐 서쪽에 세운 망은루도 봉은사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현재 봉은사에 있는 「봉은사사적비명(奉恩寺事蹟碑銘)」도 이에 근거해서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 사적비는 1932년 권상로(權相老) 선생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서 봉은사는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으며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초대 주지로 부임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창건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봉은사와 현재의 봉은사는 같은 사찰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라 때의 이 봉은사는 신라의 7개 성전사원(成典寺院) 가운데 하나로 경주 지역 어딘가에 진지왕(眞智王, 576∼579 재위)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조선시대에 성종 임금의 능침사찰로 중창된 것이 실질적 창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주요 근거로 다음의 내용을 들고 있다.
- 견성사(見性寺)를 지금 유자광(柳子光)과 박안성(朴安性)의 말을 들어 옮겨지으려고 하시는데, 유자광 등은 대비(大妃)의 뜻을 받들어 말한 것이오니 만일 철거하지 못한다면 예전대로 두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 사사(寺社)에서 세(稅)를 거둔 것과 세납한 소금을 옮겨 주라.
위의 두 자료는 모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번째 자료는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인 견성사에 관계된 것으로, 견성사를 이건하려는 왕의 의도에 대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료는 견성사가 중창된 후 봉은사로 사찰이름이 바뀌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선릉의 능침사찰이던 견성사는 중창과 함께 봉은사라는 사찰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자료의 시기는 각각 1498년(연산군 4)과 1499년(연산군 5)에 해당하므로 견성사가 봉은사로 개창된 때는 1498∼1499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창건설에 대해서 지금 당장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봉은사에서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창건과 연혁을 구성하고 있다. 봉은사에서 펴낸 안내책자 등에는 794년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1498년 중건하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바뀌었고, 1562년(명종 17)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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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