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없다면 똥을 어디서 눌까? 이계선 글 (계림)
1. 최초의 국산차 1955년 최무성씨가 제작한 지프형 승용차로 이름은 '시발' 이었다. 처음에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나 걸렸고 값도 비싸서 사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때 '시발'승용차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널리 알려졌고 '시발'은 1963년까지 3천 여대를 만들어 시판한 최초의 국산차였다.
2. 최초 안경이 들어온 해 우리 나라에 안경이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전인 1580년경, 중국을 통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규광의 저서 <지봉유설>과 <정조실록>에 안경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다.
3. 전화가 처음 들어온 해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6년으로 궁궐 안으로 자석식 교환기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그 뒤 1902년 서울(한성)과 인천 간에 전화가 개통되어 한성 전화소를 통해 일반인들도 전화를 쓸 수 잇게 되었다. 1935년 자동식 전화기가 도입되고 전화는 꾸준히 발전되었지만 여전히 일제의 행정 도구와 일부 특권층의 사치품으로만 쓰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반부터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에 전화가 들어오고 얼마 안되었을 때 백범 김구 선생님이 일본 형사를 죽인 혐의로 인천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을 며칠 앞두고 있었을 때 고종 황제께서 감옥의 책임자에게 전화로 사면을 알려 사형 집행을 정지했다는 역사적이고 의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4. 처음 신호등이 등장한 곳 1914년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였는데 이 때는 빨간불과 초록불 밖에 없었다. 1918년 비로서 빨강, 초록, 노랑으로 이루어진 삼색등이 뉴욕에서 처음 선보였다. 지금과는 다르게 경찰관이 버튼을 조작하는 신호등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3색 자동신호등이 등장한 것은 1928년 영국의 햄프턴시였고 우리 나라는 광복이후 미군이 들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신호등이 나타났다.
5. 수세식 화장실 로마제국에서는 발달된 상하수도 시설을 이용해 변기 아래에 항상 물이 흐르도록 하는 자연 수세식 방법으로 오물을 처리했다. 로마 시대 후 중세가 되자 화장실은 다시 원시 시대로 돌아가 정원이나 거리마다 오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콜레라나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생겨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근대에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조차 화장실이 없어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일을 볼 수 밖에 없었고, 겉으로는 아름다웠던 베르사이유의 위생상태는 심각했다고 한다.
1596년 영국의 헤링턴경이 처음으로 인공적인 수세식 화장실을 발명하고 1775년 영국의 알렉산더 커밍이 악취를 차단시키는 화장실을 개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인공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놈들의 강점시기때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나 특급 호텔, 백화점에 설치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미군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되어 일반화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6. 최초의 전구 "건달불" 1879년 에디슨이 처음 전구를 발면하고 몇 년 뒤, 미국을 방문했던 우리 나라 통상 사절단니 밝고 환한 전구를 우리 나라에 들여왔다. 그리하여 경복궁 안에 전구를 밝히기 시작했는데 이 전구를 '건달불'이라고 했다. 당시 향원정에 세워졌던 전구가 자꾸 깜박깜박 켜젺다 꺼졌다를 반복하는데 기계 소리가 시끄러워 일을 제대로 안하고 돈만 잡아먹는 건달과 같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7. 팔미도 등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항로 근처의 산이나 섬에 봉화를 올려 등대의 역할을 했으며 인천에는 해관등대국을 설치하여 1903년 팔미도를 비롯한 인천항에 처음으로 서양식 등대가 건설되었다. 2005년 건립 102주년을 맞이하는 팔미도 등대는 6·25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을 무사히 이끈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서해안의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와 여러 악조건으로 성공확률이 거의 없었던 인천 상륙 작전에서 위험을 무릅쓴 한국인 부대원들과 미군 클라크 대위는 9월 14일 팔미도 등대로 잠입하여 등대의 불을 밝혔다. 그리하여 10만 병력과 수백척의 함대가 팔미도 해안에 집결, 다음 날 새벽 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8. 치약이 들어온 것은? 치약에는 탄산칼슘, 인산칼슘, 황산칼슘, 탄산마그네슘, 염화마그네슘 등이 들어 있어 이 성분들이 이를 깨끗하게 해준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꿀과 재와 달걀 껍데기 태운 것, 작은 돌가루 같은 것을 섞어서 이를 닦았다고 한다. 중세에는 동물의 뼈나 조개 껍데기 가루가 치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소금으로 이를 닦았다고 한다. 치약이 처음 들어 온 것은 1889년으로 일본 라이언사의 가루 치약이 그 주인공이다. 치약은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판매가 시작되었는데 1954년에 최초로 튜브 안에 있는 크림같은 치약이 만들어졌다.
9. 우리가 쓰는 지폐 우리가 지금 쓰는 지폐인 1,000원, 5,000원, 10,000원권의 크기는 세로가 76㎜로 일정하고 가로는 돈의 액수에 따라 5㎜씩 늘어난다. 우리 나라 돈에 나타난 인물로는 이승만, 세종대왕, 이순신, 이이, 이황 등이 있다. 제일 먼저 은행 돈에 나타난 인물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다. 1950년 7월에 발행한 1,000원권에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10. 중국인이 싫어하는 숫자 14 미국 사람들은 숫자 '13'을 유난히 싫어해서 건물마다 13층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4층이 아예 없거나 '4'대신 'F'로 표시된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4자가 한자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미국이 '13'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판 가롯 유다가 최후의 만찬 때 13번째 손님이었다는 이야기, 그리스도가 죽은 날이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은 '14'를 싫어하는데 이것은 14의 발음이 중국어로 '야오스'인데 이 발음은 '아사(我死)와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라는 무서운 뜻이다.
11. 숫자에 담긴 의미 숫자가 모든 물질을 이룬다고 생각하며 숫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둔 피타고라스 학파사람들이 숫자에 담은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가장 존경받는 숫자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이다. 2: 여성을 나타내는 숫자로 다양한 의견을 의미한다. 3: 남자를 나타내는 숫자로 조화를 의미한다. 4: 정의를 의미한다. 5: 여성과 남자가 결합한 숫자로 결혼을 의미한다. 6: 창조의 수를 의미한다.
12. 밀레(1814∼1875)와 루소(1844∼1910)의 우정
만종, 이삭줍기, 종치는 사람, 양치는 소녀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천재 화가 밀레는 몹시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먹을 것도 떨어지고, 땔감도 떨어져 차가운 방에서 식구들끼리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쫓으며 허기를 참고 있을 때 밀레의 집에 친구 루소가 찾아왔다. 밀레와는 달리 루소는 당시 인기를 얻고 있는 신진 화가였다. 루소는 밀레의 손을 잡으며 어떤 미국인이 밀레의 그림을 사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밀레는 크게 기뻐하며 사인한 그림을 건네주었다. 밀레는 이 돈으로 추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는데 사실 밀레의 그림을 사 간 것은 루소 자신이었다. 친구 밀레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도와주려고 한 일이었다.
13. 텔레비젼 1925년 영국의 전기 공학자인 '베어드'가 발명하였고 그 뒤 1937년 영국의 BBC방송에서 처음으로 흑백 텔레비젼 방송을 시작했다.. 우리 나라는 1956년 5월 12일 세계에서 15번째로 텔레비젼 전파를 발사했으니 상당히 앞선 편이다. 최초의 국산 텔레비젼은 1966년 금성사에서 만든 흑백텔레비젼으로 한 달에 500대가 생산되었다. 1961년 12월 31일 한국방송공사 TV가 방송을 시작하고 나서 텔레비젼 중계소가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1964년 12월에 민영 텔레비젼 방송국으로 동양TBC TV가 1969년 8월에 문화방송 MBC TV가 문을 열었다. 1982년 흑백텔레비젼 수상기 분야에서 우리 나라가 세계 제1의 수출 및 생산국이 되기 이르렀다. 컬러 텔레비젼 은 1974년 아남산업과 일본 마쓰시다 전기가 생산을 하였으나 판매는 1980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14. 우리 나라 최초의 학교 역사상 최초의 학교는 고구려 소수림왕2년(372년)때 세워진 '태학' 이다. 태학은 전국에 세워진 국립 학교로 상류 계급의 아들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경학과 문학, 무예를 가르쳤다. 사립학교로는 경당이 있었는데 태학이 세워진 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다음 세워진 이 학교는 평민의 자녀들에게 문학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이 밖에는 신라에는 '국학'이 고려에는 '국자감'이라는 학교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균관'과 '향교'가 있었다.
15. 나무의 소중함 가로 세로 100m 넓이의 숲이 1년동안 만들어내는 산소의 양은 무려 12톤. 한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산소량이 약 0.75㎏이니까 이 숲이 만들어내는 산소는 44명이 1년동안 숨을 쉴 수 있는 양이며 도심지 공기 정화, 산사태 방지, 광합성 작용등을 하는 소중한 나무를 잘 보살펴야겠다.
16. 최초의 은행 1897년 세워진 한성은행은 최초의 우리 나라 은행으로, 지금의 조흥은행이다.
17. 대전에서 최초로 만든 것 연필의 기원은 약2천년 전, 그리스에서 납덩어리로 노루가죽에 기호를 표시한 것이 최초이다. 14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납과 주석을 섞은 것을 심으로 만들어 나무판 사이에 끼워 썼다. 1795년 프랑스의 화가이자 과학자였던 콩테가 연필만드는 법을 실용화시켰다. 우리 나라에는 19세기 후반에 연필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46년 대전에서 처음으로 국산 연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 지우개 달린 연필 미국의 하이만은 가난한 화가 지망생으로 그림 그리면서 지우개를 찾느라 늘 애를 먹던 차에 양철 조각으로 연필 뒤에 지우개를 아예 묵어 사용한데서 시작되었다.
19. 필요에 따라 다른 연필 연필의 'H'는 'hard'의 머릿글자로 '단단하다'라는 뜻이고 'B'는 'Black'의 머릿글자이다. B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진한 검정색이 나오고 H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단단하다.
20. 거울 유리로 사용된 거울이 보급된 것은 12∼13세기의 일이며 16∼17세기를 거치면서 금속 거울 대신 유리 거울이 전 유럽에 널리 보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구리로 만든 거울인 '다뉴세문경'이 남아 있다. 중국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나라 국보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21. 인간 시계 세계에서 시계처럼 가장 정확했던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로 알려져 있다. 비가 오나 늘 똑같은 시간에 마을에 산책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칸트가 나타나는 걸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칸트가 가장 정확한 인간 시계였다면 지금 가장 정확한 시계는 1991년 휴렉팩커드가 만든 원자 시계이다. 160만년 동안 1초 정도의 오차가 난다고 한다.
22. 사막 지구 육지의 1/10이상을 차지하고 있을만큼 넓고 크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막은 건조사막으로 위도 15∼30°사이에 분포하는 열대사막과 위도 40°부근에 분포하는 중위도 사막이다. 이외 한랭사막이라는 곳은 연평균 강수량이 125㎜이하의 지역을 말한다. 암석사막에는 자갈사막도 들어 있는데 세계적인 분포로 볼 때 암석사막이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모래사막은 북아메리카의 2%, 사하라 사막의 11%, 아라비아 사막의 30%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23. 인공위성의 최후 우주 공간으로 보내진 인공 위성은 지구의 관제 센터의 지시에 따라 작동을 하는데 자신의 임무를 다한 인공위성은 점차 속도가 느려지면서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대기에 진입하게 되고, 점점 뜨거워지면서 결국에는 타서 사라지게 된다.
24.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3년에 창간된 '한성순보'이다. 그러나 이 신문은 바로 이듬해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폐간되었다. 그 뒤 1886년 다시 한성순보가 창간되어 1888년까지 발행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은 서재필 선생님이 1896년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은 한글로만 만들어진 신문으로 우리 민족의 계몽과 자주 독립 사상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25. 플랑크톤은 '방랑자' 그리스의 '방랑자'라는 말에서 유래한 플랑크톤은 운동능력이 전혀 없어 떠돌아 다니는 아주 약한 생물이라는 특징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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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물,공기,나무......자연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