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벽암록(碧巖錄)> 제45칙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 중기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제시한 화두이다.
한 수행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것이 마침내는 한 군데로 돌아간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이에 대한 조주 선사 답이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뜻은 무엇일까?
원칙적으로 화두는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지면 안 된다.
화두를 화두라고 인식하는 순간 이미 죽은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진실한 화두란 듣는 순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때 성립된다.
즉, 머릿속에 오로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것만 남았을 때
화두가 된다.
따라서 화두를 이러쿵저러쿵 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말 밖에 일이므로 그렇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이야 말밖에 모르니
조금은 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와
「포삼중칠근(布衫重七斤)」, 둘 다 화두이다.
모두 같은 의미로서, 쓸데없는 관념에 빠지는 걸 경계하라는 뜻이다.
이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따질 일이 아니라,
그 자체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법(萬法)이란 모든 존재를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만물과 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일체사가 포함된다.
만(萬)이란 무한이라는 숫자의 함축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일체, 제행, 제법을 망라한 삼라만상, 우주만상으로
색(色)과 심(心)에 걸친 모든 차별법, 즉 분별심과 집착에서 비롯돼
일어나는 모든 현상까지를 다 포함한 말이다.
그리고 ‘일귀하처(一歸何處)’에서 하나(一)란 본체(本體)로서
만법의 근본바탕이다.
물론 불교에서 이 ‘한 군데’는 부처에의 귀일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일 수도 있고,
절대 진리, 근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체 모든 행위는 절대 진리 ― 부처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상대적 인식을 버리고 절대적 인식 세계에 들어가야 진여(眞如)를 볼 수 있다.
이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一心思想)과도 같은 맥락이다.
원효 대사는 「만법귀일(萬法歸一)․ 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었다.
원효 대사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에 나타난다.
원효 대사는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ㆍ극락으로 봤고,
대승ㆍ불성ㆍ열반이라 봤다.
그는 인간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해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귀일심원(歸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 실천을 강조했다.
귀일에서 일(一)은
일제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마음(心)을 뜻하기도 하며,
모든 것은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음은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내가 청주에서 베옷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이다.
조주 선사는 삼베라는 엉뚱한 대답을 함으로써,
말의 논리란 인간이 공리적 활동을 위해 만들어낸
잔꾀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베옷 한 벌이 무게가 일곱 근이라는 것은
괜한 관념 속에 빠져 어리석은 생각에 맴돌지 말라는 말이다.
베옷 무게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거기에 매몰되지 말라,
이 게 ‘일귀하처(一歸何處)’의 답이다.
쓸데없는 일에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일(一) 즉 궁극처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시대에 동산(洞山守初, 910~990) 선사에게
어떤 수행승이 “무엇이 부처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수초(守初) 선사 답이 “마삼근(麻三斤 - 삼베 세근)”이었다.
마삼근(麻三斤)이나 포삼중칠근(布衫 重七斤)이나 모두 격외(格外)의 대답이다.
불법 대의를 숫자로 환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마(麻)가 세 근, 포(布) 일곱 근이라고 정확한 숫자를 들이대고 있다.
이 어이없는 일, 그래서 그것은 격외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대부분 숫자에 얽매여 삼천대천세계라는 숫자,
혹은 마 삼근, 포 칠근이라는 숫자의 차별상에 얽매여 집착해 버린다.
이 역시 우리가 통념의 상식적 숫자 개념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가를 시험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러니 만 가지 번뇌 망상을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지 말고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고, 서두에 말한 것처럼
엉뚱한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쓸데없는 관념에 빠지는 걸
경계하라는 말이다.
애초 만법과 하나는 둘이 아니다.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 관념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겨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감을 깨우쳤지만,
법과 하나는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는데,
관념으로 분리시켜 허우적댄 것이다.
어찌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을 수 있으랴?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라(佛卽是心),
마음 밖(心外)에 부처가 없는데,
“마음이 어디로 돌아갑니까.“ 라느니,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묻고 있냐 말이다.
따라서 만법은 필시 하나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하나의 몸체 속에 존재하는 각각의 개별자들이다.
이를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는 이에게만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언어의 의미가 살아난다.
그리고 그 때라야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아는 것과 이를 깨달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앎은 언어의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단지 길을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앎을 통해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 앎은 온전한 앎이 될 수도 없다.
“일귀하처(一歸何處)!” 이는 분리된 심상을 넘어 하나(一心)이거늘
어디로 돌아가고 말 것이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여기 말고 달리 또 돌아갈 것이 어디 있을 것이 없다.
실상을 꿰뚫지 못하고 잡념에 매달려 있으니 갈 곳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이는 하나의 몸체에서 분리된 서로 다른 하나이다.
그리고 분리된 서로 다른 그 둘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있다.
그것은 서로서로 교감하기 때문이다.
교감하고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그 아픔을 함께 느끼며
아이가 웃으면 엄마는 함께 웃는다.
둘이 서로 깊이 교감하기 때문이다.
교감과 하나 됨의 극치에서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 하는 것이다.
사바세계의 인간들은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삶의 양식도 다르고
생각하는 입장도 다 다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세계는 무수한 각자의 특성을 지닌
개별자들이 일으키는 생존방식의 경연장이다.
그러니 지지고 복고, 속고 속이고, 난리 법석이다.
지옥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가 그런 것이다.
그래도 결국에는 하나로 모아지고 하나로 가게 된다.
하나로 가야 한다.
부처님 세계로 가게 될 것이다. 그 길 말고는 갈 길이 없다.
거기로 안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해도
결국에는 - 죽을 때가 되면, 숨넘어갈 때,
“부처님…” 하고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귀일처(歸一處)’이다.
다 다른 모습의 인간들(만법)이지만 넓게 보면
그들이 곧 같은 인간이고, 다 부처님의 자식이다.
그러니 갈 곳도 같은 수밖에 없다. 부처님 곁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