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가난한 소년은 12살 때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토끼·염소를 키웠고 여름엔 미꾸라지 잡이, 겨울엔 폐품수집으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가난하다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았고 묘하게도 중학교에 올라가 처음 접한 ‘농업’이란 과목이 어린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이후 줄 곳 ‘난’에 매달렸다. 수많은 어려움과 쓰디쓴 실패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오뚝이와 같이 일어섰다. 한국춘란에 표준화 작업을 완성하고 12년째 한국형 신재배기술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있는 이대건 대표. 지금 그의 가슴에는 농업부문 1호 ‘대한민국명장’이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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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건 (주)이대발춘란 대표 ⓒ2013 CNB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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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됐습니다”
이대건(47, 이대발춘란 대표) 대한민국명장은 어린 시절 가난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과자와 껌팔이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엿 볼 수 있었다.
가난 속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한 ‘농업’ 교과서였다. 그의 어릴 적 별명은 ‘초록이’였다. 초록색을 너무 좋아했기에 농업이 적성에 맞았던 것이 아닐까?
국내최고의 난 스승을 찾아 타 과목과 달리 농림·축산·원예 시험에서는 언제나 100점을 받았고 이를 눈여겨본 농업 선생님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을 권유했다. 부모님이 공업계 혹은 인문계를 원했지만 그는 대구농고 진학을 결심하고 전공으로 원예를 선택했다.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니 소풍가는 마냥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물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고2때 ‘우수 농고생’으로 뽑혀 100만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아 흑염소 7마리를 키우기도 했다. 고3때는 흑염소 대신 한우를 키웠고 원예종묘기능사자격증도 취득했다.
1988년 방위병으로 입대했고 사령관 관사의 원예병으로 복무했다.
“사령관 숙소 정원의 난과 분재를 담당했는데 상관이 난을 죽이면 영창을 보낸다고 겁을 주기에 살기 위해서(?) 관련 책을 사서 보며 원예공부를 많이 했습니다(웃음). 죽어가던 난도 이 상병이 관리하면 살아난다는 칭찬을 받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난’을 미래의 업으로 삼을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 후 24살, 조그마한 가게를 차렸다. 군 시절 실력만 믿고 창업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때 첫 실패를 겪었다. 특히 고객에게 “난을 너무 모른다. 나한테 와서 배워라”라는 말까지 듣자 바로 가게 문을 닫고 난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다가 국내최고의 스승을 찾아다니게 됐다.
“난계의 대가로 알려진 정정은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었지만 섣불리 찾아가면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 궁리를 짜냈습니다”
먼저 정정은 선생님이 볼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볼링장에 취직했다. 볼링장에 정 선생님이 오면 먼저 자리를 마련해주고 VIP로 모셨다.
“6개월이 흘러 낯을 익혔을 무렵 난 관련 책을 들고 일부러 선생님과 부딪쳤습니다.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자네가 왜 난초책을 가지고 있느냐면서 깜짝 놀라시더군요. 선생님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제자가 돼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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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일 고용노동부 주최로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7회 인적자원개발 컨퍼런스’에서 이대건 농업명장이 ‘대한민국 명장이 풀어내는 숙련기술명장으로서의 발자취’란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는 모습. (사진 = 정의식 기자) ⓒ2013 CNB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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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분실로 도둑 누명까지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제자가 됐지만 가르침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선생님은 제대로 된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몇 달간 돌만 씻도록 했다. 힘이 들기도 하고 기술은 언제 배우나 하는 생각에 막대기로 돌을 휘 젓고 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났다.
“스승이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라고 불호령을 내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돌이 반이나 닳을 때까지 씻고 또 씻었습니다. 나중에야 돌이 뾰족하면 뿌리에 상처가 나 결국 난이 병들게 돼 돌 세척이 대단히 중요하단 것을 알았습니다”
차츰 정 선생님에게 신임을 얻어 난초 감별과 키우는 법을 배우고 고객도 관리하게 될 무렵 사고가 났다.
단골이 맡겼던 700만원 상당의 난을 도둑맞은 것이다. 난 주인이 이대건 씨를 도둑으로 몰았고 쫓아낼 것을 요구해 결국 억울하게도 난가게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손님자격으로 계속 출근, 오히려 30분 먼저 나가서 스승을 기다렸다. 본체만체하던 스승도 결국 보름이 지나자 “너 같이 지독한 녀석은 처음이다. 난 값은 물어줬으니 다시 나와라”라고 했다.
이대건 대표는 최근 분실된 난 주인을 다시 만났고 3년 전 훔쳐간 범인도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에 난이 없어지자 스승도 내가 훔쳐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제 끈기에 스승님이 마음을 열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낌없이 본인의 기술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최고의 난 전문가가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1995년 결혼과 동시에 스승의 곁을 떠나 창업을 하게 된다. 스승은 제자하고 한 업에 같이 종사하면 안 된다며 창업자금과 기자재 등을 대주고 업계를 떠났다.
중국산 감별법 가르쳐주다가 살해 위협 특히 제자에게 앞으로 꼭 명심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첫째 난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할 것, 둘째 신용을 목숨처럼 여길 것을 주문했다. 이 2가지는 지금까지 이대건 명장이 지켜오고 있다.
4평 남짓한 차고를 빌려서 시작한 사업은 번창했다. 당시에 이미 그에게 마땅한 경쟁상대가 없었던 것으로 25평 규모의 건물로 확장·이전했다.
그러나 옆 신축건물 화장품가게에서 인테리어를 하면서 시너 냄새가 흘러들어와 난이 모두 죽었다. 더군다나 중국산 춘란이 값싸게 국내에 유입되면서 원산지가 국산으로 바뀌는 등 고난이 다시 시작됐다.
“보증금 2500만원만 겨우 받아서 주변야산으로 비닐하우스 하나를 얻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돈을 아끼려고 직접 지은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날아가 돈을 빌려서 새로 지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그곳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나가라고 해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발 원산지 둔갑이 심각했다. 정품을 파는 곳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정직하게 우리의 것을 고집한 그는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원산지를 속이면 함께 다 죽는다”며 1인 시위를 하고 다녔지만 욕만 먹고 중국산 감별법을 가르쳐주다가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절망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2002년 이대건 씨의 열정 그리고 기술을 지켜본 한 애호가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제 모습을 지켜본 애호가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이리 일이 안 풀리냐 안타까워하면서 투자를 하겠다고 억대의 돈을 쥐어줬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난계에는 정설·정론이 없으니 반드시 한국 난을 체계화 시켜야 한다고 부탁하며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권유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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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농업 명장 1호 이대건 (주)이대발춘란 대표 ⓒ2013 CNB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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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1호 대한민국명장 칭호 받아 이대건 대표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원래 탐구열이 높았던 그는 구미1대학 원예조경과를 마치고 대구가톨릭대에 편입한 뒤 조직배양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춘란의 DNA분석을 통한 한·중 원산지 판별법으로 국내 동양 난 농가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샘플 채취를 위해 중국 산골에 숨어들어가 목숨을 걸고 난을 캐왔고 제주도~ 울릉도까지 전국을 돌며 채취한 국산과 비교해 데이터화해 표준을 만든 것이다.
‘춘란 품종에 대한 SSR DNA마커의 복합유전자형 결정과 운용’이라는 논문은 난으로는 처음으로 SCI논문에 게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