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8
‘세 번째 수난 예고’
마가복음10:32-45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3)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마가복음을 보며 복음이 무엇인가 공부하고 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3년간 공생애 사역을 하시며 무엇을 하셨는가? 말씀으로,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셨다. 그 정점이 십자가였고. 그 십자가 사건에 대해 예수님은 세 번의 수난예고를 하시는데 세 번 예고했다는 것은 성경이 기록한 것이고 실제로는 세 번만 이야기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 아마도 수십 번도 넘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 수난 예고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조용한 가운데 신중히 가르치려 하시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수난예고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였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16:22-23)
베드로는 도무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이 수난에 대해 다시 가르쳐야할 듯 보인다. 두 번째 수난예고는 9장 3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32절을 보면,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두 번째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그 세 번째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계속 설명하는 것일 텐데 결과적으로는 세 번째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이고, 제자들이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잊지 않게 해야 하기에 반복하는데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니 더 많이, 기회가 되는대로 말씀하셨을 것이란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수난예고의 중요성인데 예수의 수난을 모르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겼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또한 나의 죄를 위함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사죄의 은총이 들어오는데 그 이유를 모르면 나와의 상관도 모르기에 예수님이 목숨 걸고 하신일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수난예고는 중요한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대조를 볼 수 있다. 예수와 제자들의 모습이다. 세 번째만 있는 말씀이 있는데, 32 절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이르시되’
예수님이 고난받기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다. 죽음의 길을 가는데 누가 안 두려울까. 그런데 ‘앞서 가시는데’라고 했다. 제자들과 같이 가는 것인데 왜 하필 앞서 가셨다고 되어있을까? 앞서간다는 표현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걸어가셨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그럴듯한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앞서가시며 가시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뒤의 설명을 보면 좀 더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는 두려워하더라’
사람들이 놀랐고 심지어 두려움까지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도면 예수님이 그냥 몇 발짝 앞에 걸어가신 정도가 아니다. 이 정도의 분위기라면 예수님의 눈도 충혈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신학자도 있다. 열정에 대한 집착으로. 예수님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곧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같다. 제자들은 이를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봤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 사고치려나? 이렇게 보셨을까? 비록 죽음을 향해가고 십자가 못 박히지만 그 길을 가며 이 순간에 예수님은 당당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둘만의 언어로 충분히 소통하셨을 것이고 그렇게, 격려하시고 격려 받으시며 걸어가셨을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수난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사명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나이야기를 안다. 니느웨에 가서 죄에 대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 안가겠다고 도망가는 요나의 모습과 예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어떤가. 크게 대조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니까 가능하고 안하고가 아니다. 누구나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이런 당당함이 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의 모습이 해같이 빛났다. 그리고 자기에게 돌을 던진 이를 위해 도리어 중보기도를 하는 모습은 하나님과 스데반만이 아는 소통에서 오는 용기였다. 죽음을 뛰어넘는 그 자리에서 느끼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순교자만이 누리는 복인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갈 때 사람들로부터의 만류가 있었다. 결박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예언을 듣고도 사도바울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주저함 없이 오로지 달려갈 길을 바라보며 달음질 하듯 그렇게 신앙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하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막을 수 없는,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사람의 위로나 물질 같은 이 세상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위로 가운데 있는 예수님은 어땠는가. 행복했다. 33절을 보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 고난의 에언이 그대로 이뤄졌다. 너무 사실적인 표현이어서 혹 예수님이 미리 예언한 것이 아니라 일이 벌어진 후에 성경기자가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만큼 예수님의 자기 삶에 대한 통찰은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지 않으셨다.
이 예수님과 대조되는 두 사람이 이어서 등장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이다. 35-38절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하게 여기고 서로간에 다툰다. 어찌하면 높은 자리에 앉을까 애쓰는 그들과 예수님을 비교하면 뭘 느끼나. 야고보와 요한이 ‘야.. 내가 예수님 우편에 앉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서 과연 행복한가? 두 제자의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좋은 것으로 구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구하고 있고 생명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이끄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설령 주의 영광을 차지(?)하고도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42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권물십년이라고 권력이 10일을 넘어가지 않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이고 험한 세상인 것이다. 앞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했었다. 모든 율법을 지켰다는 그에게 예수님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 하셨다. 가난해지라는 게 아니라 물질을 따르는 삶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다. 어떤가. 재산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았는데 천국 문 앞에서 오히려 아주 골치 아프게 발목을 잡는 것이 된 것이다.
부자가 예수보다 행복한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명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목표를 가질지 오늘 말씀하신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살아야 하고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죽음의 길조차도 행복하게 한다.
여러분, 요즘 입시철이다. 우리 아이들이 좋은 고등하교 대학교 가면 좋겠다고 한다. 경화도 대학을 가야 하기에 어디 갈지 고민이 많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어떻게 키우는가. 엄마가 원하는대로 아이들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고3, 대학생이 되면 으레 반항이 시작된다. 엄마는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근데 아이는 엄마가 말하니까 들어준 것이다. 머리가 크니까 더 이상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나도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하겠다고 한다. 한판 붙는다. 엄마는 자기 헌신이 속상하다. 내가 고생한 것은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의 자존심을 위해 한 것이 아니냐 한다. 엄마도 억울하고 애도 지난 세월이 억울하다. 무엇인가. 우리가 첫 번째 경계할 일이 내가 원하는대로 자식을 끌고 가는 것이다. 사권사님은 밥차려 놓고 부르는데 금방 안 오면 못 견뎌하신다. 권사님께는 음식을 입에 갖다 대야 사랑이지만 그 표현이 사실 내 중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애들이 원하는대로 할 것인가? 사도바울서신인 디모데전서 1장 1절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도바울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본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이다. 엄마가 계속 시키면 아이는 자기 결정권이 없어 결혼 상대자 결정도 못한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답답한 아이가 된다. 그러면 자기 결정권을 주면? 자기는 아는데 하나님은 모른다.
‘너 그거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니?’, ‘네가 원서 넣는 곳이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달란트에 맞아?’, ‘하나님이 그 길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해?’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가 있는 것이다. 제자들을 앞질러 열심히 걸어가시던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이렇게 하므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이게 예수 믿는 것이다!
기독교는 계시종교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신다. 그 계시를 가지고 우리는 나아가고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기독교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다. 천주교와 불교가 왜 친하지 않는가. 동시대 같이 사는 종교인으로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불교는 진리를 찾아가는, 성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나는 이 길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당신은 저 길을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이다식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면서 진리를 찾는 사람끼리 서로 이해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다원주의를 내세운다..
진리? 그런데 기독교는 그 진리가 이미 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요한복음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4:12). 기독교인은 구도자가 아닌 것이다. 진리의 완성을 이루신 예수가 계신다.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기 전에 로마는 다신론 국가였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리한 신은 어느 신이든 받아들였다. 피정복 국가의 신도 받아들이고 필요한대로 쓰고 필요 없으면 잊고 그랬다. 심지어는 부부 싸움을 돕는 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왔다. 우리가 로마 시대의 황제 숭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천주교도 그런 성격이 있어 신교가 나온 것이다. 왜 구교가 진리가 아니니까. 큰집이 아니다. 카톨릭과 길이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우리 하나 하나에게는 사명이 주어져 있다.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오늘 세 번째 죽음과 부활의 예고에 대해 말씀을 봤는데 세 번씩이나 같은 말씀을 했다는 것은 그 말씀을 특별히 나누고픈 예수님의 열정인 것이다. 그 열정을 생각하며 우리가 복음을 내것으로 만나길 축원한다.
두 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앞서가는 모습의 의미다. 예수님의 모습과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부자, 예수님과 스데반,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에 있어 스데반과 바울처럼 사명이 주장하도록 키우자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 말씀이 새롭게 다가가시길 축원한다. 오늘 우리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이 혹시 답답해 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우리가 되길 축원한다.
<푸른 초장 맑은 물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차례 수난 예고를 하셨다. 성경 기자가 세 번 기록했기 때문에 세 번이 된 것이지 사실은 더 많이 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말렸다(8:32).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했다(9:30).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예고하신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예고하시는 이유는 꼭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는 모습을 “앞에 서서 가시는데(32절)”로 표현한다. 같이 가시지 않고 앞서가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명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과 당당함,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시고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다.
예수님은 작심하고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이해정도를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이다.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분노한다. 자리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방인의 집권자처럼 권세를 부리길 원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안타깝다.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우리는 어떤가? 제자들과 우리는 다른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답답하시지 않을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14:6). 천하 인간에 구원을 주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분이다(행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