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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남문화관광해설사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창녕 오종식
다리의 역사
■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4C초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때까지의 기간을 삼국시대로 분류하였다.
이 시기에는 삼국이 고대국가의 골격을 갖추고 중국의 선진문화와 그들의 고유문화를 조화시키면서 각기 개성있는 문명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 신라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하여 초기에는 북의 고구려와 서의 백제의 제약으로 초기에는 직접 중국과의 교류를 갖지는 못했으나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비교적 순수하게 그들의 고유문화를 오래도록 보전하면서 소부족국가의 연합체로서 발족하여 통일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다리에 관한 최초의 역사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보성이사금록에 『십이년 추팔월 신성 평양주대교 … 』 즉 AD 413으로 이 당시 평양주는 현재의 양주라는 설이 위치는 확실치 않고 어떠한 다리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대교 』라 한 것을 보면 당시 상당한 규모의 다리를 축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평양주대교』의 가설 이전에 이미 이 당시에 여러 형태와 규모의 다리가 널리 실생활에 활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26대 진평왕 17년(597)에 비형으로 하여금 귀신을 부려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으라 하였더니 비형이 그의 무리를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으므로 귀교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신원사 북쪽개천 오릉 북쪽으로 현재 콘크리트로 된 문천교하류 약 100m 지점 하상에 십여점의 다리부재가 흩어져 있다.
현재 신원사는 폐사되고 없으나 노출되어 있는 석재유구는 다리 부재임을 알수 있게 한다. 이는 귀신이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하나 우수한 다리였음을 의미하며 앞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더욱 귀교에 관한 사항이 밝혀지리라 기대된다.
한편 이 귀교는 다리의 축조재료 종류가 석재임을 밝혀주는 최초의 기록이어서 주목된다.
한편 주목되는 기록중의 하나는 삼국유사 권사 원효불기조에 문천교(일명 유교)의 다리 이름이 보이는데 이 문천교(유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연이 있다.
원효가 어느날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유교)를 지나다가 떨어져 옷을 적시자 관리가 요석궁에 데려가 옷을 말리도록 하였는 바, 궁에 홀로된 공주와 유숙하여 설총을 낳았다는 것이다. 원효의 출생이 진평왕 39년 (619)이므로 유교는 7C의 다리로 보인다.
이 다리의 유구로 보이는 목조로 된 기초부재가 월정교 하류 약 19m 지점에서 발견되어 여러가지로 주목을 끌고 있다.
■ 백제
백제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할거하던 고구려계통의 한 부족이 점차 반도의 서남부로 진출하여 4C초에 통일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백제는 반도의 서남부에 진출하고 해로를 통하여 중국남조 여러나라와 직접 교류하여 급속한 문화의 발전을 보았다. 백제는 도읍을 처음 한성(지금의 한강 주변)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하다가 문주왕 1년 (475) 수도를 웅진성 (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재기하였는데 이 시기인 웅진시대의 다리가설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498)에 『설웅진교』 즉 웅진교를 건설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위치와 규모는 알 수 없다.
백제는 다시 사비(지금의 부여)로 이도(AD 538)하여 국가부흥에 힘을 썼는데 백제는 부영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을 때 최성기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 백제는 일본에 여러분야의 선진문화를 전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다리 축조기술이 있다.
백제 토목기술자인 노자강이 일본에 건너가 다리가설 기술을 전한 것은 백제인의 다리 축조기술 정도를 가늠케 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백제 다리유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1980 - 현재)해 오고 있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다리유구가 조사되었다.
이 발굴에는 살펴보면 다리구조로는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미륵사지 강당지 중심축사상에서 북측 건물지(승방지)와 금동 건물지간의 연지를 건너가는 다리 통로로 교각은 4개소, 건물기단은 교대로 삼아 원형지대석 위에 원통형 초석과 같은 장주형 교각이 남아 있다.
다리는 교각 간 2.8m , 폭 2.8m , 총 길이 14m 에 이르는 회랑식 교량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외 백제고분중 무령왕릉의 경우 남, 북벽 왜곡시켜 아치를 형성한 것은 당시 교량에서 아치교가설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 고구려
고구려는 삼국중 고대국가로 가장 먼저 체제를 정비하여 문화적인 수준도 다른 두 나라보다 앞섰다. 고구려가 최초로 도읍을 정한 곳은 현재 혼강유역으로 생각되는 비류강 유역의 졸본부여(BC 37)이다. 유리왕 2년 (AD 3) 국내성 (지금의 통교)으로 이도하였고 다시 장수왕 2년 (427) 평양대성 산하로 이도하여 평원왕 28년 (586) 장안성(지금의 평양)을 축조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구제궁에는 통한,연고, 청운, 백운의 사교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그 자리를 찾아 볼 길이 없다.
한편 5C 초의 고구려시대 다리유구인 고구려 대동강 다리터에 대한 발굴조사 보고가 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왕궁인 안학군 전면으로 이 다리는 오늘날 토성구성과 청호동과 사동구역, 휴함동을 연결시켰던 큰 대교였다고 하는데, 이 다리의 규모는 길이 375m, 다리폭 9m로 당시 이 정도 규모의 다리를 대동강에 설치 하였다면 세계적인 규모라고 생각된다.
이 다리의 골조에 해당되는 부재는 골재(38cm x 25 cm)로 발굴조사 결과에 의해 이 다리의 형상을 유추해 보면 다리의 입구부분은 부채살모양으로 깔판을 붙여 깔아 출입에 편하게 하였고 교각위에는 종량과 교량을 놓고 그 위에 두꺼운 판자를 깔아 다니기에 편리하게 한 목교였다고 보고 되어 있다.
그외 고구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612) 기록에 수 양제와 고구려와의 전주시 비록 가설주체는 고구려가 아니었으나 요수에서 부교를 이용하여 도하하여 부교(주교)가 전투시에 이용 수나라가 전쟁에서 패배, 곧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는 부교가 전투시 일찍부터 상당한 기술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구려고분 형식을 살펴보면 궁융식, 부각조정식 평천방식 등 각종 다양한 형식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각종 형식의 고분구조를 통해 보건대 이러한 각종 석조형식은 고분뿐 아니라 성곽건축,교량 등에도 적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최근 복원된 평양의 대성산성 남문에는 Arch는 아니나 성문 개구부에 꺽임형의 성문이 복원된 것과 만주 집안현 사아천장총 석실의 공륭형식은 ARCH전만계로서 아치교 출현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이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교량으로 하북성 조현 남문밖의 교량으로 수 대업년간(AD 605-617)에 이춘이라는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안제교 (일명 대석교)가 있다. 이 석교는 중국의 교량구조 연구에 중요한 유구로 평가되고 있다.
궁형의 대형아치교(길이 37.37M)로 다리 아치양단에 소형의 아치를 설치하여 교량자중을 줄이고 유수를 돕는 수법으로 된 이 형식은 서구보다 앞선 것으로 6~7C의 중국의 앞선 교량기술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당시의 고구려석교가 현존하는 것이 없으나 당시 중국과의 관계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다리가설이 이루어져 활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 통일신라
삼국통일 (AD 668)을 이룩한 신라는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한 시기였다. 특히 수학이 발달하여 사찰건축등에 널리 응용되었는데 신라의 최고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교육이 행하여 졌으며 산박사 제도를 설치하기 까지 하였다. 이렇게 발달된 수학지식은 통일신라신대의 대표적 걸작품인 불국사와 석굴암등 균형미 넘치는 건축물을 낳게 하였다. 성덕왕 10년(751)에 불국사를 건립한 김대성이 경주 토함산에 석굴암을 창건하였는데 신라 토목건축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이때 조성한 불국사의 청운,백운교,연화,칠보교 등은 현존하는 최고의 교량의 우수함을 보여 주고 있다.
기록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교량은 수도 하주 월성해자에 해당되는 문천을 중심으로 그 외곽지역에 대한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교량의 예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구 성덕왕 19년 (760)에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월정교와 일정교가 있다. 이 월정교의 경우 완전한 형태로 남은 것은 아니지만 교각과 교대가 남아 전해져 당시 조교기술의 많은 부분도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오전하게 남아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국보 제23호)와 연화교, 칠보교 (국보 제22호)가 있다. 신라 성덕대왕 (742~765)에 김대성이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이 다리는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이 다리는 계두형식의 다리이다.
청운교, 백운교는 홍예를 중심으로 아래쪽이 청운교, 윗쪽이 백운교로 석두이 2두으로 쌓여지고 계단이 45˚ 경사로 설치되어 있다. 좌우측에는 석주난간이 설치되어 계단석은 중앙의 돌을 경계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교 수법은 당시 목조건축에서 널리 활용되었던 기법을 활용한 석조물로 뛰어난 조형술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기의 유구로 발굴조사 (1988 ~ 1989)로 밝혀진 치임동변 수로의 석교는 2경간으로 길이 4.74m, 폭 3.5m 규모로 추정되는데 간단한 형태의 난간을 갖춘 형교형식으로 보인다.
최근 이 석교의 하류 50m 지점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와 규모의 교지가 또 조사된 바 있는데 앞서의 석교와 같은 형식으로 이 석교에서 새로운 내용은 난간 돌란대가 사각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 외 1985년 발굴조사한 월청교지 하류 19m 지점에서 목교유지가 출토된 바 있는데 이 목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구로 보이며 완전한 형태는 아니나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의 다리유구이며 다리 기초공법이 목조확대기초를 사용한 우수한 다리구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고려
고려시대에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도입되고 지방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981-997) 때이다. 지방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교통로인 역로망을 갖추어 갔다. 전국을 22역도, 55역이라는 방대한 망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지는 알기 어렵다.
교량은 도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구조물로 도로와 함께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다 고려는 도읍을 개성에 정하였으나 건국초기에는 도성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궁성만 있었다.
현종 2년 (1011) 강감찬의 요청으로 19년만인 현종 20년(1029)에 완성하였다.
도성내 궁성인 만월대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 선죽교를 비롯 병부교, 십천교,궐문교,저교 등 다리들이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도성에는 소규모의 다리가 여럿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북한지성의 고려시대 다리로 현존하는 유명한 선죽교가 있는데 이 다리는 화강암으로 형교형식의 석교로 길이 6.67m, 폭 2.54m로 개성시 선죽동 개성 남문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죽교는 고려 충신 정몽주가 피살된 곳으로 유명한데 최근 사진기록에 의하면 주변에 석조의 보호책을 둘려 놓았다.
남한산성의 고려시대 다리로 전남 함평의 고막천석교가 있다.
고려 원종 15년 (1274)에 고막대 가 가설했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일명 독다리라고도 하는데 가설자의 이름이 전해지는 중요한 다리이다. 형교형식의 이 고막교는 나주에서 함평으로 가는길이 고막원마을 앞의 영산강 지류와 조수가 반복되는 하천위에 놓인 다리이다.
다리규모는 길이 20m, 폭 3.5,m로 교각은 장대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50-70cm 장방형의 가공석재를 3-4단으로 겹쳐 쌓아 그 위에 4-5m나 되는 멍에돌(가석)을 받치고 멍엣돌 위에 장귀틀의 돌을 세줄로 깔고 귀틀 사이에 우물 마루 깔듯이 청판석을 귀틀에 끼이도록 하였다. 이는 목조건축의 결교형식을 석조로 교묘하게 축조하였고 그 형식이 고식을 띄고 있다
이러한 다리가 오랫동안 조수와 홍수에 무너지지 않고 온전하게 형태를 전해오는 이유는 고
고려시대 다리중 고식의 형식을 띈 충북 금천의 농교가 있다.
이 농다리는 구조 형식이 징검다리와 형교의 중간형태를 보이고 있어 형식으로 인해 삼국시대 축조설이 있기는 하나. 금천 지방의 구읍지인 당산지(1933)에 의하면 고려 고종때의 교신인 임연 장군이 그의 전성기에 출생지인 구곡마을에 가설한것으로 전한다.
이 다리는 단일 징검돌 대신 여러 개의 자연할석을 서로 엇물리게 축적하여 교각으로 삼고 그위에 길이 170m 내외, 두께 20m 정도의 장대석을 1매 또는 2매로 걸쳐 놓았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홍수시에도 물속에 잠기어도 교각과 시렁돌이 그대로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잇어 오늘날의 잠수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농다리는 당초에는 28칸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양쪽으로 2칸씩 줄어 24칸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교량 이외에도 임진강에 부교를 놓아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 다닐수 있게 부교가설 기록이 보이고 있다.
■ 조선
경국대전의 공전에는 교노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교노는 전반적으로 국가관리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실제에는 교량의 계획에서 설치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계획이 수립되거나 실천된 적이 거의 없었다. 도성내의 교량의 경우 처음에는 공조와 한성부에서 맡아 고찰 . 치수한다고 규정하였다.
육전조예에는 호조에서 도성의 교노를 닦고 관리하였다. 즉 공조는 재정지원을 담당하였으며. 병조는 안보 면에서 참여하였다. 지방의 도노와 교량은 농한기에 이용하여 수리케 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널린 교량 가설은 이루어졌으나 반 연구적인 석교의 가설은 쉽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이도 후 궁성을 조성하면서 궁내에는 우수한 궁궐 교량이 조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정궁인 경복궁의 영월교, 창덕궁의 김천교, 창경궁의 옥주교 등이 그것이다. 이들 교량은 전부 정문에서 정면에 이르는 주통로상에 가로 걸쳐 흐르는 금천이라는 명당 수를 건너는 교량들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이도후 궁성을 조성하면서 도성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여러다리가 가설되었는데 도성외각의 교량은 조선시대 고종을 전후하여 작성된 "한경참명", "수선전원", "서울지원" 등의 사료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 산재한 교량는 성내에 76개소, 성외에 10개소로서 합이 86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이중에서 위치와 교량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69개소 뿐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이름을 모르거나 위치가 불명하다.
도성주변에 위치한 많은 교량중에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수표교가 있는데 이는 옛날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석이 다리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는 마전교라 하였다. 이 수표교의 가설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세종 또는 성종때 가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성동구 왕십리와 뚝섬 사이의 한양대학교 남쪽에 걸쳐진 다리로 서종 2년(1420)에 가교공사를 시작하였다가 성종 18년(1483)에 왕성하였는데 길이 75m. 폭 6m로 조선시대 가장 긴다리였다. 그 외 사방 교찰지성에는 아름다운 홍예교형식의 다리가 많이 남아있고 민간지역에도 각종 다리형식이 일부나마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조선 제22대 정조때에는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으로 배릉을 위하여 한강에 배다리 설치를 하는 주0사 라는 관청을 만들어 운용하였다.
조선전기에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교량숙에 나타나 있는 전국의 교량수는 516개소로 당시의 교량가설 실상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사찰의 다리
예부터 승려 가운데에는 가교 기술자가 많았다. 불교에서 선업으로 생각하는 것 가운데 보시가 있다. 보시는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든가 스스로 자신이 고행하면서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다. 이러한 활동에 가장 적합하게 표현되는 중의 하나가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다리를 놓아 사람이 불편없이 다니도록 하는 것은 불교 사상과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사찰이 있는 위치가 심산 유곡으로 다리의 가설 필요성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기도 하였다. 사찰의 안팎뿐 아니라 민간 지역에서의 가교에까지 승려들이 다수 참여한 사실이 많았다. 현재 사찰 주변에 아름다운 옛 다리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승려들이 우수한 다리 축조 기술자라는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찰 지역에는 구름다리 형식의 다리가 많이 보인다. 이는 다리라는 구조물을 경계로 하여 천상의 불국과 지상의 속세를 잇는 사상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사찰이 있는 위치는 주변의 빼어난 경관에 어울리는 다리의 형식이 널다리보다는 구름다리가 더욱 어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밖에 사찰의 다리에는 누다리와 계단 형식의 다리도 보이고 있다.
■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의 경내는 계단식 돌다리인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로 구분된다. 다리 위에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의 땅이요, 아래는 범부의 땅이다.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제23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다리이다. 이 다리의 조성은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조영할 때 가설한 것이다.
일반 다리와 달리 계단 형식의 다리로 이것을 통해 오르면 다보여래의 불국 세계로 통하는 지하문에 연결된다.
이 다리는 중앙에 와장대석이 설치되어 있어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아래의 계단이 청운교이고 위의 계단이 백운교에 해단된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참의 아래 구성은 홍예로 틀었다. 참은 구품연지로 흘러드는 물이 홍예 아래로 통과하였다고 한다.
백운교 아래의 홍예는 석축 허리에 설치된 통로를 위한 것이다. 난간은 법수에 돌란대를 걸고 중앙에 하엽 동자를 세워 받치도록 되었는데 법수에는 주두와 동자가 조각되어 있다.
이 다리는 일반적인 다리는 아니나 돌다리 설치로 인한 배려와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상징성도 함께 하고 있다고 보인다.
■ 불국사 연화교와 칠보교
불국사 경내의 안양문 앞에 설치된 계단형 돌다리로 청운교, 백운교와 함께 경덕왕 10년(751)에 조성된 것이다. 이 다리를 통해 아미타열의 불국 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된다. 아랫단이 연화교이고 윗단이 칠보교이다. 디딤돌마다 연꽃의 안상을 무늬 놓듯이 아름답게 조작하여 놓았다. 층층다리의 디딤돌은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간에 참이 있고 다시 계단이 시작되어 안양문 앞 석대에 이른다.
다리의 좌우 난간은 직선의 와장대를 설치하고 법수와 동자 기둥으로 돌란대를 받도록 하였다.
국보 제22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창건 이후 1916년경에 일본인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다가 1968년 다시 수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여수 흥국사 홍교
전남 여천군 삼일읍 중흥리 흥국사 입구 계곡에 걸쳐진 아름다운 무지개다리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 다리는 인조 17년(1639)에 가설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수해를 입어 몇 차례 부분적인 수리는 하였으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리는 단칸의 반원형 홍예로 홍예 폭이 11.3미터에 이를 정도로 넓다. 우리나라 옛 구름다리의 전형적인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리 외형이 가운데가 높고 양끝이 낮아 자연스러운 곡면을 유지하고, 홍예틀은 반원형을 이루면서 홍예석은 비교적 큰 화강석으로 하고 그 윗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절석을 쌓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홍예 한가운데에 이무기돌을 설치하여 수해를 막기 위한 민간 신앙적인 벽사 시설을 두고 다리 바닥은 멍엣돌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으로 마감하여 자연스러운 노면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사찰에서의 구름다리는 사찰 경역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다리이기도 하다.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고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운 곡선이 어우러진 가장 한국적인 다리이다. 1972년에 보물 제 573호로 지정되었다.
■ 승주 선암사 승선교
전남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선암사 어귀의 조계산 계류를 건너는 길목에 놓인 다리이다. 이곳에는 무지개 돌다리가 둘이 있는데 절 가까운 곳에 큰 다리가 있고 아래쪽에 작은 다리가 가설되어 있다. 선암사는 우리나라 31대 본산 가운데 하나로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때 대부분 불타고 현종 때 중건했으나 도 화재를 당해 순조25년(1825)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승선교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사찰을 중건할 때 가설한 것으로 숙종 24년(1698)호암대사가 축조했다고 하기도 하고, 순조 25에 해붕 스님이 가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리의 축조 형식은 옛 형식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리의 형태는 아랫부분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 모양은 완전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홍예석은 잘 가공한 장대석을 길고 치밀하게 접합시켰다. 그래서 아치의 양쪽에서 보면 30여 개의 장방석이 짜여서 큰 홍예를 이루고 있다. 홍예 맨 위쪽에는 물로 인한 재해를 막고자 이무기돌을 설치해 놓았다. 다리의 아랫부분 구조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였기 재문에 홍수 때에도 안전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 돌다리 좌우 양쪽의 보수는 이루어졌으나 홍예틀은 원형을 유지한 것이다.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승주 송광사 삼청교
전남 승주군에 위치한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 사찰 가운데 하나로 유서가 깊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고려 명종 27년(1197) 보조국사 지눌이 대가람을 중창하고 처음에는 수선사라 부르다가 오늘날에는 송광사라 부른다. 이 절은 보조국사에서 고봉국사에 이르기까지 16국사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사찰로 현재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국사전에서 모시고 있으며 경내 곳곳에는 국보, 보물 등 국가 지정 문화재가 많다.
이 사찰의 사천왕문을 지나기 전에 계류가 있는 이곳에 단칸의 반원형 홍예로 구성된 아름다운 무지개다리가 삼청교이다.
다리의 구조를 살펴보면 단홍예로 틀어 좌우 장대석을 잘 가공하여 쌓았다. 멍엣돌을 깔라 그 위에 장대갓돌을 좌우 5개씩 설치하였다. 다리 바닥 윗부분에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우화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유래가 흔치 않은 누교 형식이다. 다리 위의 우화각은 한 면은 맞배, 한 면은 팔작 지붕이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대 중건했고 영조(1706)때 중수하였다.
홍교의 구조는 19개의 장대석을 짜올려 반원형의 홍예를 이루고 있으며 양쪽 면도 잘 다듬은 장대석을 쌓아올렸다. 홍예 한가운데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가 돌출해 있다. 이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 부르기도 한다 「능허교 중창기」에 의하면 이 다리는 원래 나무로 된 것을 1707년에 오늘의 홍교로 조성했고 그 뒤 60년이 지난 다음 다시 중건한 것이다.
■ 곡성 태안사 능파교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있는 태안사의 금강문과 누각을 겸한 다리이다.
태안사는 전설에 의하면 경덕왕 원년에 이름모를 신승 세 사람이 이곳에 절터를 잡고 공부하여 그때부터 절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문성왕때는 명승 혜철이 절을 축조하여 그때부터 태안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한다. 태안사는 신라 문성왕 12년(850) 혜철선사가 창건하고 고려 태조 24년(941)에 중수한 적이 있고,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복원하였다. 계곡의 물과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건물을 능파라 했다 한다.
이 다리의 특징은 다리와 누각을 겸한 점이다. 사찰에 들어서면 다리를 건너면서 세속이 번뇌를 씻고 불문에 입문한다고 한다. 계곡 양쪽에 석축을 쌓아 교대로 삼고 그 양쪽에 통나무로 보를 걸쳐 이 보의 직각 방향으로 굵은 바닥판을 갈았다.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지붕의 건물은 통나무를 걸쳐 주초를 대신하는 하인방을 걸치고 원주를 세웠다. 원주 위에는 창방과 주두를 결구하고 주심포와 이익공 형식을 혼합한 포작이 소로와 첨차를 갖추고 있다.
보 위에는 양쪽 중도리에 판대공을 놓고 조그마한 반자를 걸었다. 중앙칸에는 용두를 배내어 장식하였다. 지붕의 구조는 5량 겹처마 맞배 지붕으로 조그마한 문루를 연상하게 하는 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