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3-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
동학농민혁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사대주의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으나
2차 봉기부터는 존왕양이(尊王攘夷), 반외세, '척왜양(斥倭洋)' 즉 왕실을 높이고 일본과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뜻으로 2차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의 구호였다.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는 농민들의 고통이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일본 및 서양 세력의 경제적 침탈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농민군은 부패한 지방관을 몰아내자던 민란의 범위를 뛰어 넘어 전국적인 차원에서 계층과 신분을 뛰어 넘는 다양한 세력의 결집을 추구하였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조선이 개화를 해야 할 시기에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조금 막힌 생각이 아쉽기는 하지만 당시 시대상으로는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동학농민군 입장에서 보는 외세에 일본과 서양세력만 지목하고 있고 청나라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청나라도 분명한 외세이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도 청이 군사를 보내어 진압했고 또 명성황후 측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게 군사를 요청했는데도 농민군이 청을 외세 범위에서 뺀 이유는 무엇일까?
내 추측에는 당시 동학농민군 지도부들이 지니고 있었던 성리학적 의식의 한계였다.
또한 농민군에게도 청의 개입은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건국 때부터 조선의 기본외교정책으로 삼은 사대교린정책(事大交隣政策)의 영향이라 보여진다.
사대교린정책은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확립된 조선 초기의 기본외교정책이다.
여기서 '사대'는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교린'은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즉 사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책이며, 교린은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외교책이었다.
요즈음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이 박근혜 대통령의 올바른 용단이다" 라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사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두 나라가 과거사를 정리하고 건전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해결하고 가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기나긴 협상 끝에 이번에 타결을 봤지만 그 결과에 대한 반응이 극과극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졌다.
보수측 여당.정부는 두 나라 사이의 오랜 갈등이 해결 되었다고 환영하고 있으나 진보측인 야당과 시민단체는 "이번 한일 외교장관 회담은 우리나라에게 굴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극과극 상황에서 정부.여당 편을 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발언이 중립적이고 정당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사실 이 상황을 역사적 시각으로 본다면 정부. 여당 측은 한.일관계를 교린정책 선상에서 보았을 것이고 야당 시민단체는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적 굴욕적 처사로 보고 있을 것이다.
이만큼 현재의 우리에게도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붙어있고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나라이다.
이렇게 작은 나라가 오천년 가까이 한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버텨 오기 위해서는 특단의 외교정책이 필요했다.
바로 그게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 이었다.
사대교린은 조선 전기에 확립되었지만 그 형태는 오래되었다.
고구려도 한나라(32년), 북위, 수나라 등 중국에서 강성한 왕조가 들어서면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외교적 이익을 취하였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와 함께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말 할 것도 없다.
고려도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강성할 때는 이러한 외교관계로서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주변 약소 민족에게 회유와 토벌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외교정책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와 원나라 관계는 조금 모호하지만....)
조공(약소한 나라가 강대한 나라에 정치•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을 헌상 )과 책봉(중국의 황제가 국내외 귀족이나 공신에게 왕 또는 공.후 등의 작위를 주는 것)의 외교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명나라가 조선에 5만명의 군사를 보내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조선의 사대부들은 사대교린의 정책을 넘어선 명나라에 대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맹목적 사대주의에 빠져 든다.
원래 사대정책은 자기 보다 힘이 센 나라와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쇠퇴하고 청이 우세해지면 청에 대한 사대정책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광해는 그렇게 해서 전쟁을 막았다.
광해가 진정한 사대정책을 쓴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사대주의자들인 서인 꼴통들은 광해의 그런 모습에 참지 못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를 쫒아내고 당시 교린상대에 불과했던 여진족인 청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했다가 된통 당하고 만다.
꼴통 사대부들 자기들만 당했다면 모르겠지만 자기들은 별 피해가 없었고 수십만의 백성들만 죽어났고 또 수십만 백성들이 청으로 납치되었고 수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리고, 조선왕이 청황제 앞에서 땅에 머리를 쳐박는 역사상 유례없는 삼전도치욕이라는 국가적 수모를 당한다.
사대주의와 사대교린정책을 구별하지 못한 당시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불러들인 최악의 국가적 참사였다.
사실, 사대교린정책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였다.
게다가 여진과 일본에 대해서도 무역소나 항포 개항과 같은 회유책과 함께 4군 6진 설치와 쓰시마 정벌과 같은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즉 어떻게 보면 공무역, 사무역이 가능한 대외무역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사대교린정책은 외교 정책의 기본일 뿐이었지 한 나라의 정체성을 잃는 일은 아니었다.
또 우리민족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하는 외교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사대교린정책은 사라지고 얼빠진 사대주의만 남았다.
조선의 얼빠진 사대부들은 이미 없어져 버린 명 왕조에 대한 충성으로 소중화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선을 끝없는 나락으로 몰고 갔다.
동학혁명 지도부들에게도 이런 얼빠진 사대주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을 공부하고 조그만 마을이지만 훈장 출신인 전봉준의 한계이기도 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지도자들에게도 청은 타도할 외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썩어빠진 이씨 왕조도 청산할 대상이 아니고 지켜주고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은 단지 외세를 물리치고 부패한 관리를 몰아내려는 반쪽짜리 미완성혁명이었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깊숙히 들어 가 보자.
이어서 동학농민혁명4 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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