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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홍성 63코스 역방향
궁리항-속동전망대-속동마을-장동마을-어사리노을전망공원-남당노을전망대-
남당항-꽃섬-신리교차로-모산도공원-홍성방조제-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
20230823
1.천수만 하늘의 잿빛 구름 바다
서해랑길 62코스와 63코스를 탐방한다. 보령시 오천항에서 출발하여 천북굴단지 앞에서 62코스를 마치고, 홍성으로 넘어가 홍성 궁리항에서 63코스를 마치는게 정상적인 탐방 과정인데, 서해랑길 안내트레킹 팀에서 역방향 탐방을 진행한다. 그래서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 서부면(西部面) 궁리(宮里) 궁리항(宮里港)에서 63코스부터 역방향으로 탐방할 예정이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항에 도착하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오늘이 여름의 무더위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처서(處暑) 절기, 비는 폭염으로 달구어진 대지와 뜨거운 바다를 제자리로 돌리기에 충분할 것 같다. 궁리항에서 출발하니, 이번 탐방은 궁리(窮理)에 몰두해야 하는 탐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지명(地名) '궁리'는 '궁리(窮理)'가 아니고 '궁리(宮里)'이다. 마을 설명에서는 지형이 휘어진 활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궁리(宮里)'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궁리(宮里)'가 아니고 궁리(弓里)라고 적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상했던지 홍성문화원에서는 '궁리(宮里)'의 유래를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宮家)'나 '궁방(宮房)'으로 이해하고, 이 지역의 왕족이 소유한 토지와 염전 등 산림천택(山林川澤)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63코스와 62코스 전체 거리 27.1km, 주어진 시간은 9시간, 트레킹 안내팀 버스는 오후 6시 보령시 오천항에서 서울로 출발한다. 이번 서해랑길 63코스 11.2km 역방향은 홍성군 서부면 지역 천수만 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서부면(西部面)의 궁리, 상황리, 거차리, 어사리, 남당리, 신리 지역을 거쳐 홍성방조제를 건너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에서 마치게 된다. 주요 탐방지는 궁리항 풍섬, 속동전망대와 모섬전망대, 어사리 노을전망공원, 남당 노을전망대, 남당항, 소도(小島, 꽃섬), 모산도공원, 홍성보령방조제와 홍성호 등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서해랑길 63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 궁리할 것이 많은 궁리항으로 나가서, 궁리포구 북쪽 홍성군 서부면 궁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를 잇는 천수만 서산 A지구 방조제와 간월호를 어림하고, 천수만 서쪽 태안군 안면도를 가늠하였다. 여름 장맛비처럼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시야가 흐릿하여 풍경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위치는 충분히 가늠된다. 궁리선착장 남쪽 방파제 바깥의 풍섬이 앙증스럽다. 바람에 날릴 것 같은 쬐그만 풍섬은 그 옆의 바위와 벗하여 천수만의 영원한 증인처럼 서있다. 눈비와 바람과 파도에 깎여도 풍섬과 바위는 아랑곳 없이 서로를 위로하며 긴긴 세월 동안 천수만을 지켰으며, 앞으로도 이 자세로 천수만의 변화를 견뎌낼 것이다.
궁리항 풍섬을 바라보며 '궁리포구 자전거길'로 들어섰다. 길동무와 둘이서 트레킹 일행의 꼬리가 되어 멀리 앞서가는 일행을 뒤따라간다. 오늘 양재역에서 길동무들과의 만남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걸어 서울 도착 시각을 앞당겨야 한다는 길동무의 말이 머리에 무겁게 떨어진다. 늘 꼴찌로 도착하는 우리 일행이 제한 시간 단축의 최대 관건이다. 으흠, 쓸데없는 수작은 되도록 줄여야 하겠군. 그래, 최선을 다해 탐방 시간을 줄이자.
비가 잦아지며 구름이 살짝 걷히자 바다 건너 천수만 서쪽에 안면도(安眠島)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가느다란 몸을 보여준다. 비구름과 해무 속에 잠들어 있다가 처음으로 제 모습을 보여주는 안면도가 반갑다. 안면도는 태안군 안면읍과 고남면 지역을 품고 있는 섬으로, 북쪽에서는 태안군 남면과 안면대교로 이어지고, 남쪽에서는 원산안면대교를 통해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와 이어진다. 안면도는 원래 태안반도와 이어져 있었는데, 조선 인조 때 조운의 편의를 위해 절단하여 운하를 만들어 섬이 되어 태안반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후 1970년대 말 안면도와 태안반도를 잇는 연육교가 놓이게 되어 안면도는 연육도가 되었다. 자동차로 태안반도에서 연육교를 건너 안면도 남쪽 끝 영목항까지 가본 지 30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을 건너와 천수만 동쪽 서해랑길 63코스를 탐방하며 천수만 서쪽 안면도를 바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안면도는 서해랑길 63코스 탐방 내내 시야에 들어와 아득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궁리포구 자전거길'은 남당항로와 만나 동행한다. 남당항로 건너편 궁리 원당마을을 지나 서해랑길은 남당항로와 헤어져 해안의 모섬으로 이어지는 뎈길로 진입한다.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보슬비가 내리고 아침의 숲은 흐린 날씨와 안개 때문에 활짝 열리지 못하여 고적하다. 뎈길을 따라 모섬으로 내려가지 않고 속동전망대 앞으로 이어간다. 2층 구조의 속동갯벌체험관 옆에 속동전망대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입구가 어수선하다. 모섬전망대에 내려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며 공사장 입구를 빠져나오면 홍성 승마체험장 입구 남당항로와 재회한다.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상황교(上黃橋)가 앞에 보이니, 궁리에서 상황리(上黃里)로 넘어왔음을 알겠다. 처서(處暑) 절기를 맞이하는 비는 더위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세차게 내리다가 이제 내리는 듯 멎는 듯 가을 분위기를 흠뻑 내려준다. 바닷바람은 산들산들 옅은 갯내음을 실어와 코끝을 간지럽히고, 동쪽 푸른 들녘은 가을의 풍요에 젖어들게 한다. 상황교를 건너면 해안에는 풍차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속동해안공원, 내륙의 푸른 들녘은 상황리 느르실 지역일 것이다. 이 지역 출신의 성기조(成耆兆, 1934~) 시인은 자신의 고향 마을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엔/ 하늘이 높고/ 흰구름이 피어 올랐다.// 흰구름 그 뒤엔/ 남댕이 푸른 바다가/ 널렸고/ 간월도 건너, 안면도/ 소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보리 누름에/ 살랑이는 바람은/ 짙은 고향 냄새를 날리고/ 느르실 논두렁엔/ 개구리도 울었다.// 서낭당 고개 넘어/ 배나무골은 오리/ 갈미 장터 가는 길엔/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인정이 구수하기/ 고구마 같은데/ 콩서리 모닥불에 입술도 검고// 고향으로 가는 길엔/ 피어 오른 구름처럼/ 마음이 부풀었다."(성기조의 '고향으로 가는 길' 전문) 홍성 지역의 지명 '남댕이, 느르실 논두렁, 서낭당 고개, 배나무골, 갈미 장터'가 나온다. 남댕이는 남당항, 느르실은 상황리 들녘일 것이다. 길손은 시인의 고향 마을길을 따라 마음이 구름처럼 부풀었다.
남당항로 어사교(於沙橋)를 건너 서해랑길은 남당항로와 헤어져 어사리 해안으로 내려간다. 어사리 해안길은 어사리 회타운을 지나면 해안 굴곡진 언덕에 어사리 노을공원, 바다에는 어사리 노을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어사리 해안의 명품은 이곳일 것이다. 무엇이 명품일까? 노을공원의 조형물 '행복의 시간'이 첫 번째 명품이다. 어사리 해안에 노을이 물드는 때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노을에 물드는 연인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로 물든다. 가을비 내리는 아침 시각에 이 명품을 감상할 수는 없지만 상상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 명품은 예술과 자연의 조화가 이루는 명품이다. 두 번째 명품은 천수만의 노을 풍경으로 어사리 해안 으뜸 명품으로 꼽힐 것이다. 그 풍경 감상은 어사리 노을전망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천수만 자연이 이루어내는 풍경, 인간의 창조적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오직 자연의,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위대한 풍경화가 천수만에 펼쳐진다. 길손은 노을 감상할 수 없는 지금 시각 노을전망대로 올라가지 않고 그 풍경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노을공원에 설치된 홍성군 종합관광안내도를 보면 홍성12경에 한용운 선생 생가지, 이응노 생가 기념관, 김좌진 장군 생가지, 성삼문 선생 유허지가 포함된다. 고려 말의 홍성 출신 최영 장군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홍성이 외가인 조선의 사육신 성삼문은 포함시켰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고암 이응노의 '군상', 백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매죽헌 성삼문의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시조 등이 길손의 머리를 스쳐간다. 홍성 지역을 답사할 때 이 네 곳을 탐방하던 시절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길손은 앞서 떠나간 일행을 좇아 어사리 해안길을 따라간다. 어사마을과 어사선착장을 지나 해안을 돌아나가 남당리로 넘어갔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 구절처럼 일행들은 파란 바닷물빛을 깨치고 남당항을 향하여 난 해안길을 걸어서, 길손과 길동무 두 사람을 떨치고 떠나갔다. 길손과 길동무는 그 임들을 찾아가듯 탐방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해안길을 달음질친다. 양재역 길동무들과의 만남을 위하여 발버둥치는 꼴이다. 그렇다고 남당 노을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남당 노을전망대에서 풍경을 조망하지 않으면 천수만 풍경의 절정을 놓치게 된다. 길동무와 함께 남당 노을전망대에 올라서 천수만 동남북 풍경을 조망하였다. 죽도, 안면도, 원산도, 보령엘엔지터미널, 천북굴단지와 홍성방조제, 모산도, 남당항 방파제, 어사항방파제, 천수만 서산방조제 등이 흐린 날씨 때문에 희미하지만, 파노라마 풍경으로 펼쳐져 천수만의 가슴을 열어 놓는다. 천수만 남당항, 궁리 해안과 어사리 해안이 내륙 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서 살짝 보이지 않지만, 천수만의 활짝 열린 풍경은 길손의 마음을 흔든다. 저기 홍성방조제 건너편 천북굴단지 앞 63코스 시작점인 목적지가 보인다.
남당항(南塘港)으로 들어갔다. 주어진 시간은 충분한데, 길동무들과의 양재역 만남을 위해 남당항(南塘港) 바깥쪽을 살피지 않고 남당회타운 앞 남당자전거길을 따라, 남당해양공원 공사 현장 앞을 곧바로 지나간다. 이 지역 이름 남당리(南塘里)가 궁금하다. 남당(南塘), 남쪽의 연못, 이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南塘里)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정착하여 살면서 남당(南塘)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한원진(韓元震)이 이 지역 남당(南塘)을 호로 삼았는지, 아니면 한원진(韓元震)의 호 남당(南塘)을 지명으로 삼았는지 그 선후관계는 불분명하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학통을 이어 정통주자학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켰으나, 변화하는 현실에 보수적으로 대응한 성리학자라고 한다. 그는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인간의 사회적 상하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중화적 세계관과 신분질서 강화를 바탕으로 현실에 보수적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실학자들은 토지개혁과 새로운 학문 도입을 통해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눈에 오늘의 시대 현실은 어떻게 보일까? 사상을 뿌리로 하여 문화의 꽃은 피어난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중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의 사상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문화 또한 어떤 사상의 뿌리를 가지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한민국 문화의 르네상스는 철저한 대중민주주의와 평화를 바탕으로 꽃피우고 있다. 이에 맞서는 것은 구시대적 사고일 것이다.
남당리 해안 남쪽 끝에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지금은 매립되어 육지가 된 소도(小島)가 있다. 소도(小島)는 예쁜 섬이라고 하여 미인도라고도, 꽃섬이라고도 불린다. 소도(小島) 당산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는 제단이 있고 그 입구에는 오래된 팽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꽃섬을 더 아름답게 꾸민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아주머니는 소도마을을 지나 남당관광로 소도교차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곳에 자리한 펜션식당 사장님이시다. 탐방길에 만나는 그 지역 주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탐방객에게 노다지 보물이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 여러 가지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탐방길에서 현지 주민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또 만난다 하더라도, 시간에 쫓겨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도 크다.
남당리 해안길을 따라오다가 남당관광로와 합류하였다. 이제부터 긴 해안도로를 따라 목적지로 향한다. 남당리에서 신리로 넘어와 신리교차로에서 홍성과 보령을 잇는 홍보로, 국도 제40호선을 따라간다. 비는 멎었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남쪽 모산도 정상에 풍력발전기가 솟아 있다. 모산도는 섬이었지만 홍성방조제에 의하여 연륙되었다. 이 모산도를 중심으로 하여 북쪽과 남쪽에 제방이 두 개 있다. 보통 남쪽의 홍성배수갑문교가 있는 제방만을 홍성방조제라고 통칭하는 것 같은데, 홍성군 서부면 신리 신리교차로부터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천북굴단지 앞까지를 모두 홍성보령방조제라고 불러주어야 할 것 같다.
모산도 해안에 조성되어 있는 모산도공원으로 들어가니 다시 비가 세차게 내린다. 천수만 바다는 동서로 길게 뻗친 천수만 동서 해안에 갇혀서 호수처럼 고요하다. 천수만 바다에는 죽도가 천수만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떠있다. 비는 가을비처럼 내리다 여름비처럼 쏟아진다. 갑자기 나른함이 몰려온다. 여름날의 천수만 바다를 바라보는 듯 마음이 늘어졌다. 길동무가 전해주는 두유팩을 따서 두유를 마시고 나른함을 밀어냈다. 잠시 나갔던 넋을 되찾아 얼마 남지 않은 서해랑길 63코스 시작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홍성방조제 배수갑문교 홍성교를 건넌다. 홍성군 금리천(錦里川) 하구를 막은 홍성방조제는 드넓은 홍성호를 형성해 놓았다. 풍력발전기와 홍성보령방조제 준공탑이 세워져 있는 모산도 정상에 올라간다면 홍성호와 천수만을 더 잘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룡항 포구 남쪽 방파제를 지나면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지역이다. 정상 코스를 밟아 보령 지역 탐방을 마친 뒤 홍성 지역으로 넘어와야 보령과 작별하는 아쉬움과 홍성을 맞이하는 감격에 젖을텐데, 역방향으로 탐방하다 보니 다시 보령으로 넘어가는 꼴이 되었다. 잠시 홍성 지역을 벗어나 보령 지역을 탐방한 뒤, 다음의 64코스에서 홍성 궁리항에서 홍성 탐방을 이어가게 된다.
홍성이란 어떤 곳일까? 홍성군에 충청남도청이 들어오면서 홍성군에서는 홍성의 옛 이름인 '홍주'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홍주의 옛 지명'에서는 홍성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후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 초기에 홍성은 '운주'라 불렸다. 운주(運州 )는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고을'이란 뜻이다. 운주가 고려를 지지한 후 고려의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운주는 1018년(현종 9) 홍주로 지명이 바뀌었다. 홍주(洪州)는 '큰 고을'이란 뜻이다. 운주의 호족 '홍규'의 딸인 '홍복원부인'이 태조 왕건의 열두 번째 왕비가 된 큰 고을이다. 홍주는 1914년 일제강점기에 '홍성'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홍주(洪州)'의 '홍(洪)'자와 '결성(結城)'의 '성(城)'자를 합하여 '홍성(洪城)'이 되었다. 일제가 일등급 고을인 '주(州)'를 아랫등급인 '성(城)'으로 바꾼 것이다." 과연 홍성군이 홍주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까?
홍성방조제 제방길에서 동쪽의 홍성호와 서쪽의 천수만 바다를 이리저리 살피며 발길을 내닫는다. 안면도는 제 이름처럼 편안히 잠들어 길게 누워 있다. 하늘에는 잿빛 비구름이 가득하고 멀리 천수만 남쪽 하늘에 철새들이 군무를 이루고 있다. 여름비인 듯 가을비인 듯 비가 내리고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번지다가 때때로 검푸른 모습으로 빛난다. 머리 위로 날아오는 철새 무리를 살피니 갈매기들이다. 갈매기들이 잿빛 구름의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은 님을 찾아가는 모습 같다. 님은 어디에 있는가?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알 수 없어요'에서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라고 노래했다. 검은 구름 속에서도 언뜻언뜻 터져 나오는 푸른 하늘은 님의 얼굴이다. 님의 얼굴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암흑의 시절에도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천수만 하늘의 잿빛 구름을 헤치는 갈매기는 님의 얼굴을 본 듯 희망의 날갯짓으로 잿빛 하늘을 날아간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1.6km
전체 소요 시간 : 2시간 34분
광장 북쪽 끝에 홍성군 관광안내도와 서해랑길 63·64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왼쪽 건물은 보령해양경찰서 궁리파출소, 오른쪽 건물은 화장실 건물이다. 화장실 건물 오른쪽에 서해랑길 64코스 시작점 표지가 있다.
'남당항로'가 왼쪽 홍성회타운 앞을 돌아가고, 서해랑길 63코스는 왼쪽 뒤 흰 건물 오른쪽 궁리포구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왼쪽 화장실 건물 뒤쪽 궁리어판장 광장으로 가서 서해랑길 63·64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출발한다.
서해랑길 63코스는 홍성군 서부면에서 보령시 천북면으로 넘어간다. 거리 11.2km, 소요 시간 4시간, 난도 쉬움으로 적혀 있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서해랑길 63·64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63코스 역방향 탐방을 출발한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항 궁리어판장 옥상에 낚시질하는 사람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궁리항으로 나간다.
궁리포구 북쪽에 홍성군 서부면 궁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를 잇는 천수만 서산 A지구 방조제가 희미하게 가늠된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宮里)는 서부면에서 서북부에 있는 마을이다. 서해안 천수만과 인접한 바닷가 마을로서 마을의 지형이 휘어진 활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궁리 서쪽 해안은 서산 A지구 방조제 공사로 인하여 간월호와 넓은 들판이 인접해 있으며, 서산으로 통하는 방조제가 마을 앞을 통과한다. 또한 궁리포구와 함께 홍성 해안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당곡, 산막, 원당, 하리의 네 개 큰 마을이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당곡(堂谷), 산막, 궁갓(또는 궁지宮枝), 하리, 원당 등이 있다. 궁리의 주변 마을로는 동쪽에 광리, 남쪽에 상황리가 있고, 서쪽과 북쪽은 바다와 연결된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궁리항 방파제 오른쪽으로 안면도가 비구름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궁리선착장 옆에 앙증스런 '풍섬'이 있으며, 남쪽 중앙에 속동전망대가 솟아 있다. 속동전망대 오른쪽 섬은 모섬이다.
'궁리포구 자전거길'로 들어서서 궁리항 앞 광장을 뒤돌아본다. 건물 왼쪽 궁리 선착장 앞 해안을 돌아왔다. 궁갓마을이 보인다.
궁갓은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해서 궁갓 또는 궁지(宮枝)라고 부른다. 그런데 '궁갓'과 '궁지'는 같은 표현으로 보인다. 한자로 宮枝는 '궁+가지'이고 '가지'를 줄여 발음할 경우 '갖' 또는 '갓'으로, 이를 다시 묶으면 '궁갓'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枝'는 '가지'라는 뜻 외에 '분가(分家)의 의미도 있다. 그리면 궁지(宮枝)는 '궁의 분가(分家)'와 관련된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나아가 '궁방(宮房)'과 관련된 용어는 아닌지 조심스럽계 짐작해 본다. 왜냐하면 宮房이 조선시대 왕실의 일부었던 궁실(宮室) 또는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宮家)의 통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큰 무리가 없다면 현재의 궁리(宮里) 가운데 '궁갓' 마을은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기보다는 '궁방(宮房)'과 관련된 곳으로 이해된다. 궁방에게는 왕족으로서의 생활기반과 품위 유지를 위한 토지, 어전(漁箭), 염분(鹽盆), 산림천택(山林川澤) 등을 절수(折受,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받음)의 형태로 지급되었다. 그런데 1919년 당시의 궁갓 마을의 지도를 보면 지금의 지형 모습과 많이 다르다. 지금에 비해 농경지가 매우 적고 3면이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궁방과 관련된 것이 있었다면 궁방전(宮房田)보다는 어전(漁箭)이나 염분(鹽盆)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더구나 궁갓 동쪽에 있는 '산막(山幕)'의 지명 유래가 뒷산에 산막을 짓고 앞바다에 친 어살을 감시하던 마을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전(漁箭)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왼쪽 마을은 궁리 원당마을, 중앙의 속동전망대와 그 오른쪽 모섬, 모섬 뒤쪽 바다로 돌출한 곶(串)은 어사리 해안이다.
비구름 속에 숨어 있던 태안군 안면도가 가느다랗게 이어진 몸매를 보여준다.
'궁리포구 자전거길'을 따라오다가 뒤돌아서서 풍섬과 궁리항을 다시 바라보았다.
'궁리포구 자전거길'과 '남당항로'가 만나는 곳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남당항로 건너편은 궁리 원당마을 입구이다.
남당항로에서 해안뎈길로 진입하여 해안으로 내려간다.
해안뎈길에서 출발지인 궁리항, 선착장 방파제와 풍섬을 뒤돌아보았다.
일반적으로 '속동전망대'라고 이르는데, 전망대 옥상에는 'HONGSEONG SKY TOWER'라고 영문으로 적혀 있다. 해안으로 내려가는 뎈길을 따라가 모섬전망대에서 조망하여야 하는데, 그대로 속동전망대 앞으로 이어간다.
모섬으로 내려가지 않고 속동전망대 앞을 거쳐 궁리에서 상황리로 넘어와 '남당항로'로 나왔다. 앞의 상황교를 건넌다.
궁리에서 상황리로 넘어왔다. 왼쪽에 '홍성스카이타워'가 솟아 있고, 남당항로 언덕 오른쪽에 홍성군 승마체험장이 있다.
해안 쪽에 속동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는홍성군 서부면 상황리 지역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상황리(上黃里)는 서부면에서 서북부에 있는 마을이다. 가을에는 기름진 논에서 익은 벼가 황금 들녘을 이루어 '느리실'이라고도 부르며, 마을 서쪽에 위치한 속동 마을은 안면도가 건너다 보인다. 바닷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상황리, 당마루, 뒷굴(또는 후동), 장재울, 느르실, 속동, 뫼갓 묵굴염전, 장벌뜰 등이 있다. 상황리의 주변 마을로는 동쪽에 이호리, 남쪽에 거차리가 있고, 북쪽에 궁리가 있고, 서쪽은 바다와 연결된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들녘에 있는 마을과 해안에 있는 마을, 두 마을을 묶어서 속동(束洞) 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속동 마을은 옛날부터 두 마을이었으나 합쳐서 한 마을이 되었다 하여 묶을 '속(束)' 자를 사용하여 속동(束洞)이라고 부르며 또한 마을을 묶어서 '묵동'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속동 마을은 1914년 충청남도고시 제46호에 따라 홍성군 동·리 구역 및 명칭이 변경되면서 홍성군 서부면(西部面) 상황리(上黃里)로 시작된 마을이다. 당시 속동 마을은 결성군 상서면에 속했던 '속동'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속동은 '결성현지도', '호구총수', '여지도서'에서 볼 수 없고, 1914년 홍성군 동·리 구역 및 명칭에서 찾을 수 있어 1872년 이후 1914년 이전에 형성된 마을로 짐작된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남동항로 왼쪽 들녘과 해안 쪽 마을은 모두 서부면 상황리 속동마을이다. 속동해안공원을 거쳐 거차리로 향한다.
홍성군 서부면 상황리에서 거차리(巨次里)로 넘어와 장동(長洞) 마을 입구 남당항로를 따라 이어간다.
거차리(巨次里)는 서부면에서 중서부에 있는 마을이다. 산이 동서남북을 가로막고 있다. 마을 지형이 골짜기가 깊고 주변 지역에 비해서 지대가 높은 편이며 옛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거차, 장동 두 개 큰 마을이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거차(巨次, 거칠라니), 장동(長洞, 진굴), 연샛골(또는 延沙洞), 국사동(國沙洞, 국사랭이), 양촌(陽村, 양지편), 비룡산(飛龍山) 등이 있다. 거차리의 주번 마을로는 동쪽에 이호리, 남쪽에 어사리, 북쪽에 상황리 등이 있고, 서쪽은 바다와 연결된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진골, 장동(長洞), 진동이라고도 불리는데, 긴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뒤쪽의 산은 비룡산인 듯. 해발 103m의 나즈막한 산인데 마치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하여 비룡산(飛龍山)이라 불린다고 한다.
서부면 거차리에서 어사교를 건너 서부면 어사리(於沙里)로 넘어간다.
어사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천수만으로 유입된다. 왼쪽 산이 비봉산이고, 맨 뒤쪽이 거차마을인 것 같다.
서부면 거차리 거차(巨次, 거칠라니) 마을은 옛날부터 피난처로 알려진 마을인데 조선시대에 벼슬을 버린 선비들이 이곳에 들렀다가 오래 쉬었다 가곤 해서 마을을 '선비의 주막'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더구나 한성판윤을 지낸 선비도 이곳에 들려서 수년간 쉬었다 갔는데 그 선비가 이 마을을 떠날 때에 '거칠라니'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으며 그 후 변해서 '거차'라고도 부른다 한다. 한편 거차 마을은 지명 변천의 기록으로 볼 때, 1914년 충청남도 제46호에 따라 '홍성군 동·리 구역 및 명칭'이 변경되면서 결성군 상서면 거차리로 시작된 마을이다. 당시 거차 마을은 결성군 상서면에 속했던 거차리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 거차 마을은 결성현 상서면에 속했다. 이와 관련하여 1872년(고종9)에 작성된 규장각본 '결성현지도'에서 현재의 거차 마을과 연결된 지명을 살펴보면 상서면의 거차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호구총수'와 '여지도서'에서는 관련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이는 기록으로 본 거차 마을이 19세기 즈음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케 한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서해랑길은 어사교를 건너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어사리 해안으로 이어간다. 위쪽에 보이는 마을이 송촌마을일 것이다.
어사리(於沙里) 어사 회타운 앞을 거쳐 중앙의 어사리 노을공원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태안군 안면도가 길게 이어진다.
어사리(於沙里) 어사 회타운 앞을 거쳐 어사리 노을공원으로 이어간다.
어사리 노을공원 입구에서 북쪽을 조망한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를 잇는 천수만 서산 A지구 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확인된다. 중앙 속동전망대에서 남당항로를 따라 상황리 속동해안공원과 속동마을을 거쳐왔다.
거차리 장동마을과 오른쪽의 비룡산이 보인다. 남당항로 어사교를 건너 어사리(於沙里) 어사회타운 앞으로 들어왔다.
어사리(於沙里) 어사회타운 앞을 거쳐 어사리 노을공원 앞으로 이어왔다.
어사리(於沙里) 노을공원 앞 조형물을 거쳐 해안을 따라 노을전망대 앞으로 이어간다.
어사리(於沙里) 노을공원 앞 바다에 노을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천수만 서쪽에 태안군 안면도가 이어지고 있다.
어사리(於沙里) 노을공원의 '행복의 시간' 조형물은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나누는 모습이다.
'행복의 시간' : 1.작품의도 - 작품이 놓이는 곳이 만남의 장소가 되도록 누구나 알 수 있고 특색 있는 공간 구성에 노력하였다. 공원의 특성상 젊음의 생동감이 살아있는 곳이므로 연인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포토존 기능을 추가하여 작품과 관람자가 공감할 수 있게 하였다. 2.작품설명 - 전체적인 형태는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나누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작품을 투조 형태로 제작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에는 푸른 하늘빛을 담고 저녁에는 노을로 붉게 물드는 남녀의 얼굴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벤치에 앉아 연인이나 가족들이 바다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하늘빛을 담은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여 기존의 고정된 부조 개념의 작품을 넘어 포토존을 추가하여 생활 속 현대적인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홍성12경에 한용운 선생 생가지,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김좌진 장군 생가지, 성삼문 선생 유허지가 포함된다.
어사리 해안의 어사마을을 지나 어사선착장으로 이어간다.
어사리 어사마을 앞 어사선착장에 세 개의 방파제가 설치되어 있다.
어사리(於沙里)는 홍성군 서부면에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모래사장이 길게 이어진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반 농업 반 어촌 마을이었다. 마을의 안쪽에 있는 송촌 마을은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컸고, 해안가에 위치한 어사마을은 어촌이었다. 현재는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해안가 어사마을은 음식점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송촌, 어사 두 개 큰 마을이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송천, 소약동, 중리, 엄리, 어사리 등이 있다. 어사리의 주변 마을로는 동쪽에 양곡리, 서쪽에 바다, 남쪽에 남당리, 북쪽에 거차리가 있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홍성군 서부면 어사리(於沙里) 어사선착장 앞에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북쪽 방파제와 중앙 방파제 사이로 선박이 출입한다. 북쪽으로 서산 A지구 방조제와 궁리항, 속동전망대가 조망된다.
남쪽 방조제와 중앙 방조제 사이로도 선박이 출입한다. 바다 건너 태안군 안면도가 길게 이어져 있다.
서부면 어사리에서 남당리로 넘어왔다. 앞에 보이는 남당 노을전망대에 올라가 조망한다.
오른쪽에 케렌시아 카페, 중앙에 어사선착장 방파제, 맨 뒤에 천수만 서산 A지구 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다.
중앙에 천수만 서산 B지구 방조제가 있을 것이라 가늠한다.
앞에 홍성군 서부면 죽도리 죽도 섬이 있고 그 뒤에 태안군 안면도가 길게 이어진다.
홍성군 서부면 죽도리(竹島里) 죽도 섬은 서부면에서 서남쪽에 있는 섬마을이다. 남당 앞바다 천수만 한복판에 위치한 섬이며 홍성군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유인도이다. 섬에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 죽도라고 부른다. 죽도 둘레에는 올망졸망한 8개의 섬이 달라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 '열두댓섬' 이라고 불리며 본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해돋이와 해넘이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으며 홍성군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본섬, 오가리, 당구미, 동바지, 큰달섬, 작은달섬, 전재기 등이 있 다. 죽도리의 주변은 모두 바다이지만, 동쪽에는 가깝게 남당리와 신리가 있고, 서쪽에는 안면도 남쪽에 추도와 효자도, 북쪽에 황도와 간월도가 있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중앙 오른쪽에 안면도와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 중앙 뒤에 원산도와 대천항을 잇는 해저터널을 어림한다. 중앙 맨 뒤에 보령LNG 터미널과 그 뒤 보령항과 보령화력발전소가 확인되며, 앞은 남당항 방파제, 왼쪽 뒤는 모산도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왼쪽 해안길을 따라 중앙의 곶(串)을 돌아가면 남당항, 오른쪽에 남당항 방파제, 중앙 뒤에 모산도 풍력발전기, 그 오른쪽 뒤 홍성방조제와 천북굴단지, 맨 오른쪽 뒤에 보령LNG 터미널이 확인된다.
서부면 남당리(南塘里) 남당어촌계 위판장 입구를 지나 남당항(南塘港) 주차장으로 나간다. 남당리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정착하여 살면서 남당(南塘)을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학통을 이어 정통주자학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켰으나, 실학자들과는 반대로 주자학의 입장에서 변화하는 현실에 보수적으로 대응한 성리학자라고 한다.
남당항 앞쪽에 회타운과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남당리 '만당포'라고도 불리는 '남당이개' 지역일 것이다
맨 오른쪽에 보령수협, 중앙에 남당관광안내소, 맨 왼쪽에 남당여객터미널이 있다. 남당항 해양공원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중앙 뒤 원산도 앞 보령항 사이로 천수만이 시작된다. 중앙 오른쪽에 원산도와 안면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를 어림한다. 왼쪽 모산도에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그 오른쪽 뒤에 홍성방조제와 천북굴단지가 있다. 오른쪽은 남당항 남쪽 방파제 공사 중이다.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이어지는 남당항로와 헤어져 오른쪽 해안길을 따라간다. 앞에 소도(小島), 그 오른쪽 뒤에 모산도가 있다.
남당항 앞 남당회타운과 남당해양공원 공사 현장을 거쳐 남당항로를 따라오고 있다. 남당해양공원 공사 현장이 앞에 보인다.
남당리(南塘里)는 서부면에서 서남부에 있으며, 해안가에 위치한 대표적인 해안 관광 마을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정착하여 살면서 남당(南塘)을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해마다 새조개와 대하 축제 등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남당 한적골(또는 한사동), 정말, 소설, 대사동, 장개 등이 있다. 남당리의 주변 마을로는 동쪽에 양곡리, 남쪽에 신리가 있고, 북쪽에 어사리가 있고, 서쪽은 바다와 연결된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남당항 남쪽방파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바다에 죽도, 그 뒤에 안면도가 있다. 천수만은 북쪽 서산 지역으로 파고 든다.
왼쪽에 소도(小島), 그 오른쪽 뒤에 모산도, 그 뒤쪽에 홍성방조제와 천북굴단지, 중앙 뒤 천수만 입구, 오른쪽은 안면도이다.
천수만(淺水灣)은 안면도와 충청남도 해안선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만(灣) 지형이다. 천수만(淺水灣)과 인접하는 지자체는 충청남도 서산시, 보령시, 태안군, 홍성군이며, 수십 개의 항구가 천수만 연선에 존재한다. 간월호 및 부남호 남단에는 방조제를 통해 4차선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나무위키)
왼쪽에서 오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서 알았다. 남당리 해안 끝에 '꽃섬'이라고도 불리는 '소도(小島)'는 지형이 작은 섬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당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으며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보티벌들'은 소도 (小島)에 바닷물이 들이오던 곳을 이르는데, '도톳돈'이라고도 부르며 현재는 논으로 변했다고 한다.
왼쪽에 소도교차로가 있으며, 서해랑길은 방금 만난 아주머니가 사장님이신 펜션식당 오른쪽으로 꺾어 나간다.
왼쪽 뒤에 소도(小島, 꽃섬)가 있으며, 소도교차로에서 이어오는 남당관광로를 따라오고 있다.
서부면 남당리에서 신리로 넘어왔다. 중앙의 모산도에 풍력발전기가 솟아 있고, 그 오른쪽 해안에 모산도공원이 있다.
남당관광로에서 동쪽으로 '부흥들'이 펼쳐져 있고, 중앙에 보이는 마을은 신리 '안흥마을'이라고 추정한다.
홍성군 서부면 신리(新里)는 서부면에서 서남부에 있는 마을이다. 300여 년 전에 한산 이씨가 정착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하여 새터 또는 신대(新垈)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폐교된 옛 천수초등학교 삼거리에서 남당리 방향으로 모산도까지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신리, 안흥동 두 개의 큰 마을이 있다. 현재 살펴볼 수 있는 지명은 명호티, 사구시, 신대리, 안흥동, 어등산 등이 있다. 신리의 주변 마을로는 동쪽에 판교리, 서쪽에 남당리, 남쪽에 홍성호, 북쪽에 양곡리가 있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신리교차로를 향하여 남당관광로를 따라간다.
모산도 뒤에 홍성방조제가 있는데, 앞의 제방을 포함하여 홍성방조제라고 불러야 한다. 홍성방조제는 모산도를 중심에 두고 2개의 제방을 축조한 것이다. 모산도는 연륙되었고, 섬 위에 풍력발전기가 솟아 있고 해안에 모산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제방길 국도 제40호선 홍보로(홍성-보령)를 따라 모산도 방향으로 이어간다.
63코스 종점 9.1km, 시점 2.1km 지점이다. 이정목 뒤 천수만 바다에 죽도와 그 뒤에 안면도가 보인다.
남당항으로부터 소도(小島, 꽃섬)를 거쳐 홍성방조제 제방으로 이어온 길이 한눈에 보인다.
모산도 꼭대기에 풍력발전기가 우뚝하고 홍성방조제 준공탑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오른쪽 모산도공원에서 잠시 휴식한다.
모산도(茅山島)는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남부에 자리하는 섬이다. 홍성군의 동부에서 황해로 유입하는 금리천(錦里川)이 황해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홍성방조제가 건설되고 방조제를 통해 보령시 천북면과 홍성군 서부면을 연결하는 40번 국도가 지남에 따라, 모산도는 육지와 연결된 연육도가 되었다. 그 서쪽으로는 소허도(巢許島)와 죽도(竹島)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는 무인도였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모산섬'이라고도 불리고 지역 주민들은 '모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섬과 죽도에는 구렁이가 많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두산백과)
모산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없고, 천수만을 찾아오는 철새들인, 가창오리, 큰고니, 큰기러기, 원앙을 소개하고 있다.
천수만 남당항으로부터 이어지는 남당리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걸어온 천수만 신리 해안과 방조제 제방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 뒤에 홍성군 서부면 신리 안흥마을이 보인다.
비구름과 해무 때문에 흐릿하지만 정면의 죽도와 그 뒤 안면도가 가늠된다.
죽도는 삼별초의 항몽지로 알려져 있다. 삼별초의 항쟁은 1270년부터 1273년 사이에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몽고와 고려의 친몽세력에 반대하여 일으킨 항몽투쟁을 말하는데 고려와 몽골 원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뒤 몽골 및 고려 왕조에 대항한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기도 하였으며, 진도로 남행하던 삼별초가 이곳 죽도에 와서 죽도를 뒤덮은 시누대로 화살을 만들었다고 한다. 육지와는 달리 이 죽도에서는 까치가 오히려 흉조로 여겨지고 있으며, 까마귀를 오히려 길조라고 여긴다.('홍주의 옛 지명'에서)
홍성방조제 배수갑문과 천수만 건너편의 원산도, 그 오른쪽의 안면도를 가늠한다. 해변에서 주민들이 바지락을 캐고 있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홍성-보령 도로)'를 따라 홍성방조제 배수갑문교 홍성교로 향한다.
홍성방조제 배수갑문교 홍성교 북쪽 입구에 한국농어촌공사 천수만사업단 홍성유지관리사무소가 있다.
홍성군 서부면 신리에서 홍성방조제 배수갑문교 '홍성교'를 건너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로 넘어간다.
홍성군 서부면 신리 수룡항 포구가 방조제 북단에 있으며 그 입구에 보령해양경찰서 수룡동파출소가 있다.
모산도 정상에 풍력발전기가 솟아 있고, 홍성방조제 준공탑이 그 뒤에 보인다. 왼쪽에 홍성방조제 배수갑문이 있다.
홍성군 금리천(錦里川) 하구를 막은 홍성방조제에 의해 넓은 홍성호가 생겨났다. 담수호 조성을 위한 홍성방조제 공사는 1991년에 착수하여 2001년도에 완공하였으며, 홍성호는 총저수량 944만㎥, 만수면적 313ha이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홍성-보령) 제방로를 따라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로 향한다.
홍성방조제로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를 따라오다가 홍성군 서부면 신리 수룡선착장을 뒤돌아보았다. 중앙 뒤는 남당항이다.
방파제 뒤에 홍성군 서부면 죽도, 그 뒤에 태안군 안면도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태안군 안면읍과 고남면에 속하는 안면도가 길게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오른쪽에 홍성군 서부면 죽도가 있다.
중앙 뒤쪽의 원산도 맞은편 보령항으로부터 천수만이 북동쪽으로 파고든다. 태안군 안면도가 남쪽으로 내려와 맞은편 중앙에서 원산안면대교에 의해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와 이어진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를 따라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로 향한다. 천수만테마파크 뒤쪽에 천북굴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홍성-보령)에서 홍성호를 바라보았다. 중앙 뒤에 보이는 산이 두로봉이 맞을까?
갈매기들이 잿빛 비구름을 뚫고 천수만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고 있다.
천북굴단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앞에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가 있다. 왼쪽 뒤 구름 가린 산은 봉화산이 맞을까?
비를 함뿍 머금은 잿빛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국도 제40호선 홍보로는 왼쪽 보령시 궁포리 방향으로 이어가고, 서해랑길은 직진하여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로 진입한다.
홍보로(홍성-보령)는 왼쪽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직진하여 천북굴단지 앞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로 진입한다.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는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 잔디광장으로 올라간다.
천북굴단지 앞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에 천북굴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에 사랑의 하트와 천북굴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안면도가 지척이다. 표석의 '천북굴 유래'를 옮긴다.
천북굴 유래 : 바다로 둘러싸인 천북면 지역은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곳 장은리 앞 바다는 깨끗하고 조류(潮流)가 빠른데다 갯벌이 잘 발달하여 예부터 많은 굴이 자생하였고 그에 대한 채취가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을 50여 년 전부터 주민들이 갯벌에 돌을 넣거나, 나무를 꽂는 방식으로 굴을 양식하면서 현재와 같은 큰 굴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1990년대 교통의 발달로 서해안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장작불에 구워먹는 독특한 맛과 향의 천북 굴맛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 뒤 적극적인 굴구이의 상품화가 이루어져 70여 호의 굴구이 전문업소가 생겨났고, 천북굴의 명성을 증명하듯이 전국에 “천북굴 구잇집"이라는 상호가 유행하게 되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많이 사라졌으나 굴 양식업은 계속되고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굴구이, 굴회, 굴밥 등 굴요리를 즐기려는 관광객의 발길 또한 끓이지 않고 있다. 2003년 7월 보령시장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 수산물&건어물 판매장 뒤에 서해랑길 62·63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63코스를 정방향으로 출발했어야 하는데, 63코스 종점에서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63코스 출발점에 도착했다.
탐방 거리 11.2km, 소요시간 4시간으로 적혀 있는데, 탐방 결과 11.6km, 2시간 34분이 소요되었다. 탐방지를 상세히 살피지 않고 마구 달려왔음을 탐방 시간이 증거한다.
서해랑길 63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며 서해랑길 62·63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의 조형물 잔디광장을 올려본다.
천수만농어촌테마파크에 무대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뒤쪽에 홍성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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