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강해(49)
하나님을 믿으라
본문 : 마가복음11: 20-25절
뉴욕의 어느 담벼락에
누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God is nowhere' 라고 써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시다.
그런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지나가다가 유심히 보니까
그 문장이 ‘God is nowhere'로
보이지가 않고...
‘God is now here'로 보이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nowhere라는
단어를 now를 떼어 가지고 보니까
‘아무데도 안 계시다’가 아니고
‘지금 여기 계시다’는 문장으로
자기 눈에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성전 청결 사건 앞서서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너무 시장하니까?
역정을 부린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아주 못된 일을 하면
"저 인간 가다가 꽉 넘어져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실 그러면 안 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화과나무가
말씀하시자마자 죽지 않았습니다
(마21:19에서는 곧 말랐다고 보고).
제자들은 그 일을 쉽게 잊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물론이지만
제자들 역시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구도 건들지 않았던 성역입니다.
즉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고,
누구도 성전의 일에 대하여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전 청결 사건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한 자기 계시적 사건입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다시 베다니로 들어와서 주무시고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그 무화과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
베드로가 보니 어제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입니다(20절).
이때 베드로가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기대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베드로의 놀라는 모습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지나가는 말씀으로 무심코 들었는데...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깜짝 놀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2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성도님들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14절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하여
행동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말씀으로 명백하게
자신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가지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예수님의 말에
복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이 바로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이 시간 저와 성도님들이 !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분명히 믿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자들에게
어떤 능력이 함께 하는지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선언입니다.
여기에서 ‘누구든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누구든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도(권세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예> 옷은 그의 신분을 뜻합니다.
법관이 그 옷을 입는 순간
그의 말에 권위가 섭니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잘잘못을 판단하는 권위 있는
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옷을 입느냐가
그 사람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을 온전히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성도들의 선포에 산이
들이어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무화과나무가
복종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성도들의 선포에 자연이
복종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마도 낫고,
막혔던 문제들도 해결 받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그의 능력을 힘입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입니다.
즉 23절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열매’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비결입니다.
누구나 기도할 수 있지만,
누구나 바른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기도의 전제조건>......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
기도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유창한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 위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어눌한 한마디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기도 할 수 가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믿음이 없는 기도는
신세한탄에 불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보좌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면 .....
기도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둘째, 용서입니다.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올바른 기도의 다른 한쪽 날개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순교의 현장에서 외쳤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행7:59-60>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온전한 기도는 믿음과 용서라는
두 날개로 날아올라 하나님께
응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에 용서가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25절b “```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우리 또한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삶과 별반 다르지 않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서도
이렇게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마 6:14-15>
14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또 마 18:35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
우리의 기도는 미완성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우리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도님들 !
기도에는 ‘믿음’과 ‘용서’라는 이 두 날개가 있습니까?
이 두 날개로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의 땅을 기경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 금산교회의 온 식구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능력을 행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아가 우리의 기도가 기적으로 일으키게 하시고,...
‘믿음’과 ‘용서’라는 이 두 날개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참된 기도를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