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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계시된 안식에 있지 않고서 인간에게서 행복한 미래가 있는가?
누가복음 14장 1-6절 /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로마서 11장 36절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장로교회는 성도의 신앙에 필요한 중요한 삼대표준 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가 그것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 문서의 하나인 대. 소교리문답에는 각각 첫 번째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답합니다.
대교리문답 : 사람의 제일 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교리문답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함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함에 있는 것인지요. 우리는 그 해답을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자신이 만드신 창조물과 함께 안식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이란 용어가‘쉼’,‘휴식’등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성경에서의 안식은 단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안식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예가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 고유의 명절이 있습니다.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인 설, 5월 5일의 단오절, 8월 한가위인 추석이 그것입니다. 이중에서 설과 추석에는 민족 전체의 대이동이 있습니다. 고향의 귀성 길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명절에 온 가족이 명절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냅니다만, 이러한 것에서 정작 중요한 본질은 부모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이죠. 부모는 자식을 곁에 둠으로써 평안합니다. 자식 또한 부모와 함께 함으로써 편안합니다. 세상에 매여 있던 모든 것이 부모의 품 안에서 비로소 다 내려놓아져 있기에 평안하며 편안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모든 만물을 다 지으시고 안식하시니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러한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들의 주님으로서 그 만물들이 지어진 목적대로 존재해 나가도록 다스리시는 주권을 행하여 가시는 것에서 안식에 계시며, 지음 받은 만물은 각각 존재하는 위치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행하여 가는 것에서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드러내어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즐거워함에 있는 안식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어 거룩하게 하심이 그러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받은 선악과 금령법을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여 타락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는 관계가 깨짐으로 이 안식에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만,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품으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하게 하실 뜻을 실행하여 나가셔서 하나님의 안식에 있게 해 나가십니다. 그것으로 있는 것이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그리고 마귀라고도 불리는 사단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그래서 죄값인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일 계명이 있는 십계명과 이와 관련한 제사법, 절기법, 성전법에 의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모두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이 굽어 있는 여인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며, 또한 수종병 든 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에서 드러내신 안식일의 본의는 죄로 인해 흑암의 세상에서 사단의 매임에 있던 자를 풀어 자유하게 함으로 우리 믿음의 주님과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안식하는 생명에 있게 하실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영원토록 안식하는 생명에 있을 때 인간에게서는 비로소 추구하는 행복이 실현됩니다. 과연 그런가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이 굽어 있는 상태에서의 여인에게서나 수종병 든 자에게서나 이러한 상태는 죄의 비참한 상태의 한 현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몸이 굽지 않았어도, 수종병 들지 않았어도, 그래서 몸이 정상이어도 인간의 상태는‘죄인’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서, 그래서 죄의 종 되어 있는 인간에게서 이것으로부터의 벗어남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이 복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행복에 있게 되는지요. 사단의 종 되어 있어 그 사단과 함께 영영한 불못에 내던져져 죄값인 죽음의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운명에 있는 자에게 행복이 존재할 수 있는지요.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참 안식에 있는 것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을 알지 못하며, 그래서 이 행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행복에서가 아닌 다른 것에서 행복을 사람들은 찾고 또한 그러한 것에서 행복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며 시대가 지나갈수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참 안식을 바라봄에서 행복의 진정성을 생각하는 자들을 보기가 힘들어지며 쉽지가 않습니다. 교회가 텅텅 비고 참으로 적은 분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은 다른 나라에 한 한 말만이 아닌 우리네의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선은 말입니다. 교회에서 어린이를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과거엔 부모님들이 먹고 살기에 빠듯하고 벅찬 살림살이로 돈을 벌 수 밖에 없어서 정작 자신들은 교회에 나가지 못해도 자신의 자녀들만은 교회에 보냈었으며, 그 아이들이 성도들의 자녀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이들이 자라서 또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만, 오늘날에 이르러선 성도의 자녀 외엔 믿지 않는 부모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나와 성도들의 자녀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아이들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의 자녀들도 교회에서 이탈하며 빠져나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속도가 마치 급물살 타듯이 그렇게 빠릅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어린이와 학생과 청년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지만 지금에서는 어린이만 아니라, 학생들도 청년들도 소위 머리가 점차 커갈수록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며 장년들과 노년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형편입니다.
왜 이러는지요. 이는 단지 통계에서도 보듯이 자녀들의 결혼 적령기가 높아지며 자녀의 저출산에 있어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어 인구가 삼각 구도에서 항아리 구도로, 그리고 항아리 구도에서 이젠 역삼각구도로 흘러가기 때문인지요. 이는 말이죠. 교세 현황으로만 본다면 한 원인이 될 수 있기도 하겠습니다만, 본질적인 이유와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이죠. 믿지 않는 가정의 자녀들에게서든지 또는 믿는 가정의 자녀들에게서든지 공통되는 것인데, 신(神)을 믿어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에 따라서 신을 믿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믿지 않는 가정의 자녀들에게서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만, 믿는 가정의 자녀들에게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믿음에 서 있는 부모는 경계하며 주의를 가져야 합니다.
왜 그래야겠는지요. 이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이 해 온 역사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존재를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인간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에 있지 못하니 그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과 만물을 아는 지식에도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있게 된 출처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과거에는‘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곧‘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란 물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관심사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이방종교에서는 주지 못했었습니다. 이방종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현세와 내세의 관점을 갖고 있으면서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지배자에 있는 추상적인 신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해와 달과 별을 비롯한 자연에서 신을 찾으려고 했으며, 이는 모든 자연에는 신이 깃들어 있어 자연 하나 하나가 모두 신의 속성을 띤 범신론 사상으로 가져나갔습니다. 이러한 신관은 신을 만들어내고 신의 존재를 인식 해 나가려고 한 것에서 자연 앞에서 자연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일 뿐이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종교요 기독교에서의 성경에서만이 신의 실체적 존재와 함께 인간의 기원과 그 유래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가 아닌 자연의 상태에서 인간 자신들에 대한 이해를 가져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의 추상에 의한 학설로 자신들의 존재를 말해나가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가설이 발전된 진화론입니다. 일반적으로 진화론은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에 의한 진화론(On the origin of Species, 1859)에서 봅니다만, 다윈의 진화론이 주장되기 전에도 진화론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으로부터 인간으로까지의 진화를 주장한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에 의해서 인간은 유인원에서 출발하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에스의 등장이 있게 되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현대인에 가장 근접한 인류이며,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가 더욱 고등화로 진화되어서 현대인에게 이르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 진화론이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한 인간의 등장은 창조론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 둘의 논쟁 속에서 창조적 진화론이 말해지기도 하는데 절충과 타협 또는 발전된 이론 속에서 창조론과 이에 대립되는 진화론에 의해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 왔습니다. 이 속에서 학교의 수업은 창조론을 종교적인 문제로 제한하여 배제하고 진화론을 가르쳐 오면서 어린 학생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와 함께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에 따른 인식을 갖지 못하는 문제에 있어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하여 물음에 대하여서도 그동안의 인간 역사는 대답해 왔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말해오면서, 이 구원이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을 말해왔습니다만, 인간 자신은 철학적인 이해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에서 이해를 갖고 그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인간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동물이다’등 등이 그러합니다. 이와 함께 인간은 힘(에너지)의 발전 속에서 서로 통합하며 기아, 역병, 전쟁이 갖는 문제를 해결하며 행복을 추구해 나간다고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말이죠.‘인간에게 미래는 있는가?’이며, 그 추구하는 미래의 과제는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행복한 미래는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기아를 해결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수렵에 있을 때는 식물을 채취하고 동물을 사냥해서 사유 소유의 개념이 없이 공동으로 해결해 나갔기에 하루에 4시간 열심히 뛰고 나머지는 쉬며 평안을 누렸습니다. 하루하루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농업혁명이 왔다고 합니다. 씨를 뿌리고 농사한 곡식을 수확하였습니다. 이는 각종 과실수를 기르면서도 있게 되고, 또한 가축을 기르면서도 그러합니다. 이는 인간이 수렵 생활할 때보다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행복이 왔는가 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입니다. 다수가 행복해야 하는데, 권력자, 지주 등의 소수만이 독차지하고, 대부분의 소작인은 예전에 하루 4시간 노동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하루 종일 일해도 일한 것에 따른 댓가를 정당하게 소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도한 세금 등에 의해 착취당함 등으로 오히려 굶주림에 있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기아로 죽은 사람이 100만 명이라고 하면 너무 잘 먹어서 비만으로 죽는 사람은 300만 명으로 몇 배에 이르니 잘 먹는 자들에게도 궁극적인 행복에 있지는 못합니다. 바퀴의 발명으로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산업혁명을 가져오고, 전기의 발명, 석탄과 그 뒤를 잇는 기름의 사용과 이에 따른 과학의 발달은 오늘날에 이르는 현대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원자폭탄 발명에 이어 인공지능을 말하는 AI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둘은 과학의 발명과 그에 따른 인간 문명에 혁신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재앙으로 평가됩니다. 원자폭탄은 1919년 리더퍼드에 의해 질소를 분열시켜 원자핵 분열의 가능성이 실험된 이래 1938년 독일의 오토 한이 우라늄 분리 실험을 시행하고 1941년 오펜하이머가 즉석 연쇄반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우라늄 235의 양을 발견하고 1942년 엔리코 페르미가 원자로에서 반응 실험을 한 이래 1945년에는 시험 폭파가 시행되고 마침내 그 해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됨으로써 가공할만한 폭파력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방사능 오염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소련(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중국,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핵폭탄 보유 국가가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와 대치되어 있는 북한도 개발하여 소유 단계에 있으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소유하고 있는 원자폭탄,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수소폭탄의 개발에서 세상의 온 나라는 핵전쟁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AI 시스템의 개발은 더욱 심각합니다. AI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AI의 발전을 우려하는 사람은 이것이 사람의 두뇌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인간 정복으로 나아갈 것을 예상합니다. AI가 인간을 능가하는 힘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전자에서 AI를 앞설 수 있는 유전자는 빼버리고 또는 변형시키며 AI에게 복종하는 유전자만 남겨 인간을 지배해 나갈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AI의 노예로 전락하는 인간에게서, 그리고 AI의 노예로 남은 인간에게서 행복이 있게 되는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과학과 함께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 또한 예전에 비해 많이 길어졌습니다만 이것이 행복이란 공식으로 성립되지 못하며, 행복 지수를 끌어올려 주지 못합니다. 과거엔 무서웠던 병인 흑사병, 천연두가 해결되었으며, 페니실린의 발견 등을 비롯한 끊임없는 신약의 발명, 나노로봇의 등장 등은 인간의 육체에 발생하는 질환을 해결해 나가 수명을 예전에 비해서 크게 늘렸습니다만 인간이 이렇게 됨으로써 참으로 인간은 행복한가 할 때, 불행지수가 더 큽니다. 무엇보다 말이죠. 인간은 죄 값은 사망이란 불행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죽음마저 해결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남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보고서 말입니다. 이를 의학과 과학의 기술을 통해서 해 나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자연수명의 마지노선을 최대 120년으로 보고 의학과 과학의 발전에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나라의 경우 옛날에는 60세를 넘기고 80세를 살면 장수한다고 했으며 이를 호상을 치른다고 했는데, 지금은 80세를 넘겨도 장수하였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당연한 나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60세부터 청년의 때를 산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앞으로는 더 달라집니다. 인체 구조 과정 재설계, 세포 및 인체의 기관과 조직 재생산을 통해 인간에게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써 불멸로 나아간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이며, 단지 추상에 불과했던 것인데, 이것이 현실화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를 통해서‘호모 데오스’(Homo Theos)가 실현된다고 봅니다. 즉,‘인간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진행과 그 전개에 있어 나가는 것에 있으며, 그 교육 과정과 실현에 있어 나가니 신을 부정하며 거부하는 세상으로 점점 바벨탑이 되어 가는데, 교회로 어린 학생들이며 청소년들이며 청년들이 교회로 들어오냐구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 이제까지의 인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사피엔스’와 미래의 인류의 이야기를 말하는‘호모 데오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교수)입니다. 그는 신(데오스)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앞으로는 신을 만든 인간이 신(호모 데오스)이 되는 인간 신, 곧 호모 데오스가 되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렇게 인간이 자신을‘호모 데오스’를 실현해 나갈지라도‘인간에게 미래는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인간은‘호모 데오스’가 되어가는 것을 통해서 더욱 더 힘을 소유하려고 하고, 이것으로 지배하며 성취하는 것에서 쾌락에 있는 한에는 일시적인 행복감을 갖지만 그러나 그 행복은 그때 뿐으로서 지속되지 못하고 더 많은 만족감을 얻기 위해, 그래서 이것으로 또 행복하기 위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힘을 써야만 합니다. 이러는 한에는 인간은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취득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인간에게서 남은 미래는 행복인데, 인간은 결코 힘으로서는, 그리고 그 힘으로 통합을 해나가며 자신들을‘인간 신’인‘호모 데오스’를 만들어갈지라도 그러한 인간으로 있는 것이 인간이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마지막 남은 과제로 삼고 있는 행복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진정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열쇠는 힘도 통합도 이를 통한 쾌락도 아닌‘자신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이지만 인간은 이 단순한 해결의 열쇠로 자신의 행복에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힘을 소유하는데 집착한 나머지 이 진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자신을‘호모 데오스’로 만들어가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에 있지 않는 사람은‘행복한 사람’을 추구함에 있는 미래가 결코 없죠. 이를 무신론자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해답의 답변을 주어 미래에 소망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입니다. 먼저는‘인간에게 미래는 있는가?’에 대한 해답인‘행복’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행복한 인간’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의 행복이란 것은 고작‘자신과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힘에도 통합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기아, 역병, 전쟁을 인간이 힘을 동원하고 의견일치 통합하여 해결하면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는가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욕심 부리지 말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자는 것이잖아요. 결국 인간 자신의 존재를 아는 것에 행복이 있다는 것으로, 불교 등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욕(慾)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또한 무(無)의 세계를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욕의 세계에 있든 무의 세계에 있든 행복에 대한 해결의 대답을 해 줍니다. 그것도 잠시 잠간 누리는 행복이 아닌 끊임이 없는 지속의 행복을 말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하나님의 동행하심에 있는 인간’에게서, 그래서‘하나님과 동행에 있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행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말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에서 보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함이 어떻게 가능한지요. 이게 가능하니까 이렇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잖습니까. 이는 다른 단어로 대체하면 항상 행복하고, 쉬지 않고 행복하고, 범사에 행복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바울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실현된 행복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이죠. 부유한 자는 그의 부유함에 있으면서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함에 있지 않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에서 행복함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에서 행복함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 곧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서 만족스럽지 못한 분으로 계신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에게서 잠시 존재해 계시다가 떠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택한 백성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구원 받은 사람에게 내주 해 계셔서 죄와 사단과 죽음에 의해 누리지 못했던 안식의 평안을 주관해 가십니다. 인간이 자신들을‘호모 데오스’로 만들어갈지라도, 그것이 사건, 사고, 재난 등의 재앙을 통해 겪게 되는 죽음 자체를 해결하지 못함에 있든지, 설사 죽음을 보는 사건이나 재앙 등을 겪지 않아 죽음에 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죽은 자에게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에 있어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죽지 않고 주님을 보게 하여 자신이 보고 있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참된 안식의 평안에 있게 하십니다. 이를 예수님은 죽음에 있었던 나사로의 장례를 슬픔에 잠겨 치름에 있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라고 하였으며, 이에 마르다는 대답하기를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반드시 세상에 두 번째 강림하실 것입니다. 곧 재림하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에 의해서 약속되었으며 또한 사도들에 의해서 주님의 교회에 소망의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행 1:8-11; 계 22:2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1:10; 4:13-18) 행 1:8)(계 22:20)
그에 따라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a)
하며, 주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하며 그 기다림에 있는 믿음에 있으면서, 이 믿음에 약하여지지 않고 함께 굳게 서 나갈 수 있기 위하여 주 예수의 은혜를 구함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해 나갑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b)
이 약속을 받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에 따라서 교회는 주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세상에 오심을 이미 겪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안식일에 계시된 하나님의 안식에 있음으로 인간은 비로소 추구하는 행복의 실현에 있게 되니, 사도 바울이 말한 바에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살고 모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 바칩니다. 아멘. (롬 11:36, 현대어성경)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실현되는 복인 안식을 누림이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