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檜巖寺)와 무학대사(無學大師)
이 글은 회원답사기 방에서 언젠가 사라져버린 글을 본인의 답사기를 재 편집하여 구성한 글입니다.
몇 해전 TV사극 열풍이 안방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여인천하` 에서 명종(明宗)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측근인 윤원형. 정난정. 승려 보우(普雨)등과 운명을 함께 했던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를 찾아 나선다.
조선초기 유신(儒臣)들의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국내의 모든 사찰들이 폐찰(廢刹)위기의 운명을 맞지만, 이곳 회암사 만은 이성계의 각별한 은혜로, 도리어 조정(朝廷)의 지원금을 받아 사찰이 운영되었다.
회암사를 어르는 천보산(336m)은 의정부에서 동두천 방향으로 3번 국도를 타고 나가다 주내를 거쳐, 회천 면소재지인 덕정리에서 우회전하여 포천 송우리 방향으로 나가는 56번 지방도로를 타고 6 km 쯤 가다 보면, 도로변으로 회암사 입구를 안내하는 큼직한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여기서 왼쪽으로 회전하여 비포장도로를 타고 500 m 쯤 들어가면 1997년부터 발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광활한 회암사지(檜巖寺址, 회암사 옛터)를 만난다.
여기서 회암사지를 아래쪽으로 두고, 좌측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바깥 세상이 차단되면서, 계곡위로 난 한적한 길이 이방인을 마중하는데, 여기서 1 Km 정도를 도보로 걸어가거나 승용차를 타고 오르면 현재의 회암사를 만난다. 대웅전의 좌측으로 길게 뻗어 나온 능선은, 미끈한 소나무들이 서로 키 재기를 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오르면서 무학대사. 지공. 나옹선사의 부도(浮屠, 스님의 묘)가 약 30 m 간격으로, 서있다.
사찰입구에서 우측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수터로 난 길로 들어서면 밤나무와 참나무, 아카시아가 빼곡한 숲길이 나오면서,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연결되는데, 이 길을 따라 50 여분 정도를 정상을 향해서 오르면 칠봉산(七峰山)과 연계되는 능선을 만난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능선 길로 올라서자 사방으로 전개되는 세상사가 모두 내 발치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곳 능선은 암석이 박환(剝換, 풍수에서 말하는 혈토로 변환되는 풍화작용)되는 과정으로, 능선 위는 항상 흙모래가 수북히 쌓여 미끄럽기 때문에, 초행이거나 등산 초보자들은 주의를 요한다. 북쪽 능선으로 10분 정도를 더 오르면 소나무 군락사이로 세 개의 암봉(岩峰)을 간직한 천보산이 미끈한 자태를 들이밀며 답사객을 영접한다.
회암사는 1328년(고려 충숙왕 15) 인도에서 원(元)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 출신인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창건한 사찰로, 이곳 산세가 인도의 나란다 사원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비슷한 형세를 하고있어 이곳에다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1376년(우왕 2년)에 나옹선사가 불당 262칸을 중창하고,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 본산이 되어,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 여명이 넘을 정도로 대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숭유정책(崇儒政策)을 이념으로 삼은 조선초기, 유신(儒臣)들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태조 이성계는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물도록 하고, 7차례에 걸쳐 순행하였으며, 수시로 신하들을 보내어 참례토록 하였으며, 말년에는 이곳에 거처(居處)하면서 수도를 하였다.
1392년 조선이 창건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에 실망한 이성계는 함흥의 별궁으로 낙향(落鄕)하게 된다. 왕이 된 태종(太宗)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부왕(父王)을 모셔오도록 하였으나 한번 가면 영영 오지 못하는 '함흥차사' 가 되는 바람에 태종은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부왕의 친구인 박순(朴淳)을 보내, 이성계를 설득토록 한다. 그러나 담판을 끝내고 귀경길에 오른 박순도 용흥강(龍興江)을 건너지 못하고, 이성계가 보낸 부하의 칼에 고혼(孤魂)이 되고만다.
그러자 태종은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는데, 평소 이성계와 코드가 맞았던 무학대사를 특사로 보내게 되는데, 결국 무학대사의 설득이 주효(奏效)하여 태조가 환궁 길에 오른다. 그러나 회룡역(回龍驛)어름에서 한양으로 갈 마음이 내키지 않자 이곳을 거처(居處)로 정한다. 그러자 태종은 국가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를 이곳으로 옮겨와 정사(政事)를 의논하였는데, 지금의 의정부란 지명(地名)이 그런 연유에서 생겨난 것이다.
1472년(성종 3), 세조(世祖)비인 정희대비가 `십유삼삭(十有三朔)` 에 걸쳐 회암사를 중창(重倉)하고,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장려정책을 표방,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된다. 그러다가 1565년(명종20)에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능침사(陵寢寺)` 를 지정하여, 스님 보우와 함께 대설무차대회(大設無遮大會)를 준비하였는데, 경기도 일대의 유생들의 상소가 연일 빗발친다. 그러나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던 문정왕후가 무차대회 전날 갑자기 서거(逝去)하는 바람에 모든 행사는 무산이 되고,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러자 이곳 회암사는 인근 유생(儒生)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화재가 일어나면서 폐사(廢寺)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다가 약 250년이란 세월이 흐른 순조(純祖)년 간에 인근의 유생 이응준이, 선친의 유해를 이곳 부도 터에 안장(安葬)하면 발복(發福)이 된다는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의 말을 듣고,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지(浮屠地)가 파헤치고, 대신 민묘(民墓)가 들어서는 수난을 겪었으나, 다행히 7년 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1821년(순조 21), 왕명(王命)에 의하여 세 큰스님의 부도(浮屠)와 비(碑)를 다시 수축(修築)하고, 부도지 옆에다 지금의 회암사를 축조하여, 부도를 보호해온 것이다.
한때 회암사 감주(監主, 주무스님)였던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에 남다른 혜안(慧眼)이 있어 이성계가 한양(漢陽)에다 도읍지(都邑地)를 정할 때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록(實錄)으로 재조명한 무학의 행적을 보면 미미하기 짝이 없다. 1393년(태조 2년2월) 병술일조에 이성계가 계룡산 도읍지를 답사하던 중에, 동행(同行)하던 무학에게 의견을 묻는데, 무학은 "능히 알 수 없습니다" 라는 답변이었고, 1394년(태조 3년8월) 경진일조에, 한양 터에 대하여 이성계가 하문(下問)하자 "여기는 4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결정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소서" 라는 답변이 전부다. 실록의 내용대로라면, 무학의 풍수실력은 무지(無智)에 가까운 조언이었다.
당시 신승(神僧)으로 불리던 무학이 한양에다 도읍지를 결정하면서 왕자들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확실하게 예견했던 것일까?, 또한, 200년 후에 남쪽의 왜구들이 한양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도 천기누설(天氣漏泄)이라 말을 아꼈던 것일까?,
무학대사의 호는 자초(自超)로, 불교에 출가하기 전, 성씨는 박씨이며, 어머니 성씨는 채씨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지금의 합천에 해당하는 삼기군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질 뿐 그의 출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고, 설만 무성하다.
그는 고려 말에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의 왕사(王師)로, 계룡산(鷄龍山)과 한양(漢陽)을 오가면서, 도읍지 선정에 조언하는 등,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었다. 1405년(태종 5) 무학대사가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서 열반(涅槃)에 들자 이성계는 회암사 골짜기(무학이 사후지지로 유언하였다는 설도 있음)에 부도를 세우고, 무학의 유골과 사리를 안치하였다.
무학대사의 숨결이 베어 나오는 부도지에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국세(局勢)를 조망한다. 그런데 특이한 현상 하나가 눈길을 멈추게 한다. 그것은 부도를 중앙에 두고 양측으로 조성된 소나무들이 한결같이 무학대사의 부도를 향하여 고개를 숙인 모습인데,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감과 함께 자연의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부도지를 일군 주룡(主龍)은 천보산 현무봉(玄武峰)에서 좌선룡(左旋龍)으로 진행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남서향(南西向)이다. 물은 주룡의 좌측 몸집을 비집고 흐르는 계곡 물이 음(陰)인 용을 옹골차게 수행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마지막 용맥 끝을 감아주지 못하고 직거(直去)를 해버린다. 대신 세수(細水)인 우선수(右旋水)가 음양상배(陰陽相配)로 경방(庚方)에서 입을 맞추면서 파구(破口)가 되었다. 또한 물의 득수처(得水處)는 정향(丁向)에서 나경의 8칸을 건너뛰면 건방(乾方)에 해당한다.
물이 빠져나가는 목국(木局)의 소수(消水)를 사대국법(四大局法)에 대입하면, 계좌(癸坐)는 관대(冠帶)에 닿아 벼슬이 예고되고, 건득(乾得), 장생수(長生水)는 탐랑성(貪狼星)으로, 문장가(文章家)를 배출하는 길격(吉格)이다. 그리고 경방(庚方) 파구(破口)는 녹존유진패금어(祿存流盡佩金漁)가 되어, 등조승직(登朝昇職)으로, 금어(金魚, 관리들이 관복에 차던 붕어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찬다는 합당한 이법(理法)이다.
그리고,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에 의한 길흉여부(吉凶與否)는 과궁수(過宮水)가 되어, 간혹 부귀(富貴)를 누리기도 하지만, 길흉(吉凶)이 상반(相半)되는 향법(向法)이다.
그런데, 세분 큰스님 모두 손(孫)이 전무(全無)한 상태인데. 만약 터의 발음(發蔭)이 승화(昇華)한다면 누가 그 복을 차지할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한다.
하늘의 보배라는 산명(山名)을 얻은 천보산(天寶山)은 웅장한 탐랑체(貪狼體)의 몸통을 위로 솟구쳐, 여기서 나온 주룡(主龍)이 위이(逶迤)와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행룡하다가 결인속기(結咽束氣)로 용진혈적(龍盡穴的)하였는데, 여자의 길다란 유방을 닮은 장유혈(長乳穴)이다. 중출룡을 호종(護從)하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는 몸통을 크게 벌려 부도 터를 다소곳하니 보듬다가, 백호자락이 입구에서 열쇠를 채우듯 관쇄(關鎖)가 되는데, 그것은 혈장의 기(氣)가 더 이상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백호자락이 만든 전방(前方)의 본신안산(本身案山)과 뒤쪽의 조산(朝山)은 일렬로 선 스님의 자태처럼 부도지에 잠든 세분 큰 스님을 조응(照應)한다.
부도지를 껴안은 회암사의 물형(物形)은 무학과 같은 위대한 큰스님을 여럿 배출한다는 노승예불형(老僧禮佛形)이다. 석산(石山) 주봉(主峰)은 스님의 머리를 닮은 까까머리 암봉(岩峰)이고, 위에서 아래로 굽이치며 흐르는 능선의 곡선(曲線)들은 스님들이 몸에 걸친 장삼(長衫)이다. 이것은 도열한 제자들을 향해서 노스님이 목청을 높여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형상이다. 또한 부도지를 빙 두르는 사격(砂格)들이 동자. 범종. 염주. 연꽃의 형상을 연출해 낸다. 그러나 이곳 터에도 흠은 있다. 즉, 혈전(穴前)의 명당이 전무(全無)하다시피 한 것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무학은 당시, 이곳과 상당한 거리를 둔, 번창한 회암사지(檜巖寺址)를 마다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곳 골짜기로 들어와 스승(지공선사)의 터를 정하였다. 어쩌면 회암사 본찰(本刹)이 훗날 폐찰이 된다는 것을 정확히 예지(預知)하였을지도 모를 무학의 혜안(慧眼)에 그저 감탄이 나온다.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산사(山寺)에서 이제 모든 간산(看山)을 접고, 산(山, 스님들이 속세에서 일을 보고 절로 들어갈 때는‘산에 들어간다’라 함)을 내려오다 이미 땅거미를 드리운 회암사지(檜巖寺址)에 발길을 멈추고, 어떤 감을 느끼려 한다. 근 6년 동안을, 단전호흡으로 갈고 닦은 육신에 기(氣)를 불어넣어 보지만, 도안(道眼)의 세계가 아닌, 속안(俗眼)의 현실만 나열(羅列)되어 간다. 해는 이미 서산(西山)을 훌쩍 넘은 시간인데도 발굴작업에 열중인 사람들의 모습이 어름거린다.
언젠가 이곳 회암사지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면 화려하고, 찬란했던 옛 영화를 다시 누릴 거라 확신하면서 서서히 귀경길을 추스린다.
-2002년 초동(初冬) -碩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