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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을 세우리라
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예레미야 31장은 이사야 53장과 더불어 구약성경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최대의 예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하십니다. 지금이 아니고 그 “날이 이르리니” 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과, 옛 언약”이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에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할 점은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는 말씀이 돌발적이거나, 임기응변적인 말씀이 절대로 아니하는 점입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세워주실 때에 이미 하나님의 의중에는 날이 이르면 “새 언약”을 세워주실 계획을 갖고 계셨음을 깨닫기를 원해서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성경을 점으로 보지 않고 선(線)으로 보는 구속사(救贖史)의 관점(觀點)인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성취해나가시는 구원계획을 확연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과 옛 언약이 어떻게 다른 것이며, 이 시점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 점을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30) 이스라엘의 회복
둘째 단원(31-40) 새 언약과 그에 대한 보증
첫째 단원(1-30) 이스라엘의 회복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1).
본 단원은 30장에서부터 시작 된 회복에 대한 말씀의 계속입니다. 이미 앞의 장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취해나가시는 구속사역의 최종목표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취될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첫 절은 31장의 명제(命題)인 셈입니다. 본 장에 많은 말씀이 있다하여도 모든 말씀은 이 한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리라는 약속을 하시면서 도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3하) 하시는 것만 보아도 이 말씀에 실려 있는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① 1-3절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2) 하십니다. 여기 “은혜와, 안식”이 있습니다.
② 그리고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3)고, “무궁한 사랑”이 있습니다. “ 옛적에 란 출애굽 때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때에도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인자, 곧 은혜를 베푸셔서 안식을 주시려 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고 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일차적으로는 가나안에 정착함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궁극적인 안식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③ 그래서 4-14절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다시 소고(미리암과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함과 같이, 출 15:20,)로 너를 장식하고,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4-5)하고 “다시, 다시” 하시면서 회복시켜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④ 그리하여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6하)하십니다.
⑤ 그러므로 “기뻐 노래하며, 찬양하며(7),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13)하십니다.
⑥ 15-16절에서는 라헬이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라헬이 자식이 없음으로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다가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 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창 30:1, 21)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얻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서, 포로 됨을 인하여 통곡하게 되나 돌아옴을 인하여 기뻐하게 될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16)하시는 것입니다.
⑦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혜(2)와 무궁한 사랑(3)을 베푸시는 때에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18상)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탄식”이란 영혼 깊은 데서 울어 나오는 회개의 탄식을 의미합니다. 그 회개의 탄식이 18-19절입니다.
⑧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 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18-19)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중심에서 회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⑨ 하나님은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20). 이것이 징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⑩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27)하십니다. 징벌로 말미암아 인구가 많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씨를 뿌려 많은 양의 곡식을 거둬드림과 같이 다시 백성이 번성케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28)하십니다. “경성하여”란 깨여 있는 다는 뜻이니 전에는 뽑고 훼파하는 데 주력을 하였으나, 이제는 세우고 심는데 전심전력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말씀입니다. 이 회복의 궁극적인 성취를 둘째 단원에서 보게 됩니다.
둘째 단원(31-40) 새 언약과 그에 대한 보증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당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31-32).
“새 언약”이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아니 하다”(32상)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같지 아니한 것일까요? 이 점을 통찰력을 가지고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①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시점부터 주목해보아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시점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입증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하고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어떻게 다를까요?
② 언약의 중보자가 같지 아니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하고 세운 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은 자기 아들을 중보자(히 9:15)로 하여 세운 언약인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고 말씀합니다.
③ 옛 언약은 돌비에 기록하였으나 세 언약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33)하리라 하십니다. 돌비에 기록되었다는 옛 언약의 특성은 처벌이 두려워서 타의에 의하여 지키려하는 것을 나타내고,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이 된다는 새 언약의 특성은 자발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원하여 지키기를 사모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④ 옛 언약의 율법은 정죄 하는 법이었으나 새 언약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34하) 하시는 이것이 같지 아니한 점입니다.
⑤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같지 아니한 점은 언약의 피가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 첫 언약 때에는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짐승의 피로 세웠으나, ㉡ 새 언약은 주님께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흘린 피”, 즉 죽음을 뜻합니다. 둘째는 “대속”, 즉 대신 죽음을 나타냅니다.
⑥ 그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히 9:18) 하고 “피”로 세운 언약임을 말씀하고 있음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이점이 어찌하여 중요하냐하면 피로 세웠다는 것은 ㉠ 첫 언약도 죄 값을 대신 담당케 하는 <대속의 원리>에 입각해서 세워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짐승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짐승의 피로 세운 첫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실 새 언약으로 개혁할 때까지(히 9:10)까지 맡겨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저 첫 언약이 무흠(無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 8:7)하고 첫 언약이 온전치 못하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⑦ 첫 언약을 일반적으로 행위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언약서를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고 서약하고 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행위언약을 준행함으로 구원을 얻었습니까? 이점에 통찰력이 필요한데 구약교회에 주어진 제사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참 것의 그림자로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구약성도들의 구원의 방도는 “유월절, 대속죄일” 등 이를 바르게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32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 행위언약이 파하여졌을까요? 저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하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던 그 때였습니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영적 간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다”, 즉 음행의 연고로 파괴되고 말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담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언약을 파함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⑧ 모세는 이를 보고 언약의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던 것입니다. “파”(破)하였다는 말은 깨뜨렸다는 뜻인데 백성들이 서약한 행위언약은 이때 파하여졌던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행위구원의 불가능성이 이미 그 때에, 시내산, 그 자리에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⑨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구약의 성도들이 행위언약으로 구원을 얻은 양 말한다면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언약 하에서는 구원 얻을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갈파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으나 다윗은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 51:15-16)하고 제사제도가 참 것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로는 가히 혁명적인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치명적인 죄를 범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고 사죄의 은총과, 죄를 가려주시는 칭의(稱義)가 있음을 깨닫고는 찬양했던 것입니다. 첫 언약은 죄를 가려주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같지 아니한 점입니다.
새 언약에 대한 보증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35-36).
⑩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다”(35)는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새 언약”의 불변성을 보증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약정, 즉 창조원리를 폐할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구속원리, 즉 “새 언약”도 폐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옛 언약은 폐하여졌으나 새 언약은 폐하여지지 않는 불변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점을 33장에서도 또다시 말씀하시는데,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33:20-21)하십니다.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이란 메시아언약, 다시 말하면 첫 언약이 아닌 “새 언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결코 파(破)하여지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파할 수도 없음을 보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⑪ 왜 그러합니까? 첫 언약은 행위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은 무조건적인 은혜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으로 안되니까 은혜언약을 세원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세워주신 것은 메시아언약, 즉 은혜언약이었던 것입니다.
⑫ 그러므로 낮과 밤의 약정이 폐하여진다면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36하)하십니다. 이는 낮과 밤의 약정이 폐하여 질 수 없듯이 절대적으로 안전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⑬ 또한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37상) 이스라엘을 버리리라 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보다도 높고, 땅의 기초보다도 깊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37하)는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으로 인하여 버리시지 않겠다는 망극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 육적 이스라엘에 국한 된 언약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이란 새 언약 하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⑭ 31장은 새 언약을 믿는 자는 “영영히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하리라”(40하)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영영히 뽑히지 않습니다. 영영히 전복되지 않습니다. 새 언약 하에 있는 자는 영영히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 하에 있는 자의 안전성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 말하고 “새 언약”을 말씀하시기 이전의 앞부분은 한 줄기 빛도 없는 먹장구름 같았습니다. 그런데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31)는 말씀과 함께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서광이 비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과 그에 대한 보증”입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