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군수공 강혜(姜徯 1424.06~1485.12)선조님의 행록(行錄) 재확인
<1443년 장인 경절공 최사강 묘표석>
<1450년 5월 장모 양성이씨 묘표석>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산1-1 소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0호인
<죽정 최유경 묘역>내에 모셔진
장인 최사강(1385~1443.4)과 장모 양성이씨( ? ~ 1450) 묘표석 후면 기록을 확인
1차 2020. 08. 23 첫 성묘시 비석의 내용과 묘표석의 내용이 상이함을 발견
2차 2020. 09. 11 묘표석 후면 글씨판독을 위해 탁본대신 색분필로 메워 전문해독
3차 2020. 11. 25 묘역 배치 현황을 사진촬영 보완
양성이씨 묘표석은 묘전에 景泰元年庚午五月(1450년 5월)에 입석(立石)된 것으로
1476년 안동권씨족보<성화보>보다 26년 앞선 가장 신뢰되는 자손록입니다
<현재까지의 모든 족보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내용>
1) 청풍군수공의 초휘(初諱)가 강순(姜循)으로 태어나서(1424년)부터 최소한 1457년 8월
(조선왕조실록)까지 사용하셨으며 청풍군수(1468~1472)로 계실 때에 강혜(姜徯)로
사용하신 기록이 분명[청풍읍지 강계(姜溪)는 비슷한 글씨 혜(徯)의 오기(誤記)]하므로
그 사이 개명(改名)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혜(姜徯)가 강순(姜循)과 동일인(同一人)이라는 것은 전주최씨족보 1745년 2수보
(재수보)를 통하여 확인되었습니다.
< 姜循 一作 徯, 后室, 晉州人, 郡守, 父 主簿 安壽 >
따라서 강순(姜循)은 생애 전반기의 강혜(姜徯)의 초휘(初諱)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행문소전직(行文昭殿直)이라는 새로운 부서의 관직을 지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1442년 제능(齊陵) 참봉(종9품)에 이어 제능직과 문소전직은 직장(종7품)의 관직
으로 장인,장모 두분의 묘표석에서 보이니 1443~1450.05까지 하급관료로 지내심
3)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회덕현감(종6품 1457.01.22 세조3년 파직)은
사가 서거정께서 지으신 청풍군수공비음기의 <현감>기록이 일치하고 회덕 지역명을
새로이 확인 할 수 있었으며, 충남 대덕군청에 역대 회덕현감 기록에 청풍군수공의
가승을 알려 상계와 하계불명을 수정하겠으며
4) 조선왕조실록(1457.08.12)에 또 한가지 중요한 행적을 새로이 확인하게 되었는데,
숙부이신 주부(主簿) 강안복(姜安福)과 휘(諱)를 나란히 하며 주부(主簿) 강순(姜循)이
세조때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신 사실입니다.
5) 묘표석과 불과 몇걸음(m)사이에 세워진 비석에도 잘못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죠
<종실 금성대군 유(瑜) 진주 강순(姜循) 판이조사(判吏曺事)>
전주최씨족보는 물론 성화보와 가정보 그리고 씨족원류등에 비석과 같이 금성대군이
청풍군수공보다 손위라 잘못 기록된 사실을 연대가 앞선 두분의 묘표석으로 확실하게
수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이조사> 장인의 최종관직이며 청풍군수공의 최종관직은 <군수>가 분명
전주최씨족보 1924년 甲子 7수보의<군수 혹 판이조사>는 <군수>로만 되어야 할
오류인 것입니다.
사위의 기록순서가 바뀐 이유는 아마도 금성대군이 결혼(세종19년1437.02.16친영)을
청풍군수공(1442 ? )보다 먼저 하신 탓으로 후손들이 착각하였다는 생각입니다.
6) 1443년 장인의 묘표석에서도 직강순(直姜循)이라 하였고,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나
1556년 문화류씨 가정보, 전주최씨족보 2수보이하 그리고 진주강씨은열공파 외손인
조종운(1607~1683)이 지은 씨족원류로 확인되는 전주최씨가 후실(後室)이라 함은
청풍군수공께서는 최소한 1443년 4월이전 재혼하신 것으로 나타나 전실(前室)이
어떤 성씨의 아버지가 누구셨는지? 등 기록이 전무하여 알 수 없었으나(씨족원류)
20세이전에 첫상처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18~19세에 두번째 장가를 가셨다는 사실은 진주강씨족보에서는 첫부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언급된 바가 없으니 놀랍지요
7) 양성이씨의 첫따님이신 전주최씨(全州崔氏 : 姜徯의 배위)는 바로 위 막내오라버니
최승종(崔承宗)이 1425생이니, 1426년생이시라 하더라도 1424년생이신 남편보다 두살
이상 나이차가 있으며, 1459년 돌아가시니 34세이하의 젊은 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주강씨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1459.01.20 년초에 돌아가시고, 아드님 강효정(姜孝貞)
의 생년이 1459년으로 이를 유추해보면, 아마도 년초 20일사이에 출산과 그 후유증
으로 강보에 쌓인 아드님과 남편을 남기시고 한많게 돌아가신 것이 확실합니다.
8) 그런데 청풍군수공께서 전주최씨 사후 즉 36세의 왕성한 연세일 때부터 1485년 향년
6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26년의 긴 세월을 과연 홀로 계셨을까? 하는 외람된 의문?
젖먹이 효정(孝貞) 아드님은 어떻게 누구의 보살핌을 받고 성장하셨을까?
세번째 부인은 취하시지 않더라도 당시 풍속으로 비첩(婢妾)문화를 정말 외면하시고
홀로 외롭게 열녀아닌 열남으로 정려라도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여담입니다.
청풍군수공의 조부이신 통계공 강회중(姜淮仲)께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솔직하신 자술기록 < 1407년 원배 의령남씨가 졸하신 후, 1413년 전주최씨(崔寧의
따님)와 재혼하셨는데, 그 사이 비첩(婢妾)을 두셨었다>고 사사로운 개인정보입니다
첫댓글 1) 항 개명의 시기와 계기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는 없으나
극진히 사랑하시던 부인 전주최씨께서 아들 효정(孝貞)을 낳고 젊은 나이에 산고(産苦)로 홀연히 돌아가시니,
당신의 두번째 연이은 상처(喪妻)의 어쩔 수 없는 운명(運命)을 매우 슬퍼하시고,
이렇게 큰 일을 당하심에 상심(傷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계기로 삼기 위하여
개명(改名)하시지 않았을까?하는 고증할 수 없는 시기적, 개인적 추론입니다.
♠♤♠ 두인변 항렬자 : 맏형 아름다울 휘(徽), 중형 이을 윤(㣧), 당신 【 돌순(循) ▶샛길혜(徯) 】
두인변 + 시내 계(溪) = 흐르는 시냇물 (세월)에 당신의 마음(傷心)을 씻음 <엉뚱한 글자합성 추측>
돌순(循) 즉 순환(循環)의 사전적 의미 / 어떤 현상이나 일련의 변화과정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거나 되풀이하여 돎
갑산재 시제 참석하러 가는 새벽 KTX에서 휘(諱)에 대한 의미 재확인
통계공 회중(淮仲)께서는 고려말 ~ 조선초기 변환기에 두 아드님께
수(壽)와 복(福)의 안착(安着)을 기리셨고
소윤공 안수(安壽)께서는 세 아드님들을 당대의 권문세가로 든든한 후덕을 받게 하심에
인천 이효지,
영천 황보인,
전주 최사강의 따님들에게 장가를 보내셨기에
오늘날 번성한 우리가 있음이로다
경절공 묘표석
묘표석의 표면이 오랜 풍화로 훼손되어 있으나 다행히 휘부분등 이 부분적으로 판독되니 다행입니다
양성이씨 묘표석
아침 햇빛으로 글씨판독이 가능하게 선명합니다
비석의 재질이 화강암으로 오랜세월 잘 버텨내고 지금도 매우 양호한 상태 입니다
묘소 좌측 최근 비석
비석의 내용중에
1) 사위순서와
2) 강순의 최종관직 판이조사(경절공의 최종관직임)는 오류입니다
강순(강혜)의 최종관직은 청풍군수 입니다
수고하셌습니다.
사실 아무리 잃어봐도 당장은 이해불가? 임에는 사실이고..
그리그리 쌓여서 훗날 어느땐가 지혜의 한 조각으로 되살아날수 있을 것이라 는 확신으로......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