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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류귀종(萬流歸宗)-7-통권91화
―촤, 촤, 촤, 촤….
울울창창(鬱鬱蒼蒼)하게 밀림의 우거진 나뭇가지를 한 자 남짓한 박도로 치며 길을 만들며 이동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휴우~! 이거 너무하네. 이거 우리가 지나왔던 그 길 맞는 거야?”
“그러게 그나저나 다음 마을은 20여 리 정도 더 가야 한다니, 하루는 꼬박 가야겠군.”
무더운 날씨에 검은빛이 감도는 두툼한 갑주를 입은 무장들은 무료한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다름 아닌 남례성 전역에 흩어져 있는 진토인 마을을 접수하는 임무를 맡은 백호영의 무인들이었다.
“신법을 전개하면 지척인 거리인데. 이거 참!”
“아서라! 오차 백인장이 날아서 진토인 마을에 들어섰다가 낭패 본 게 열흘 전이다.”
참위인 오차는 대략 1000명의 병사를 거느릴 수 있었지만 백호영의 머릿수는 1200여 명 백호십일걸 1인당 약 100명씩 배치되어 있어 통상 백인장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모석이 천인장으로 불리며 200 백호영을 통솔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는 오차는 밀림을 지나는 답답한 행군에 지쳐 하늘로 날아올라 목표로 삼은 진토인 부락을 확인하고 수십 백호영들과 함께 경공신법을 펼쳐 미리 마을에 도착해 하남천원군으로의 복속을 권고했다. 그러나 오차가 생각했던 것보다 남례성 사람들의 자존심은 강했다. 그들은 조정 무장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오차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차는 그들의 저돌적인 대응에 불에 덴 심정으로 부락을 떠났고, 대기하고 있던 하남천원군에 소속된 진토인 전사들과 함께 마을을 포위하고 재차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권고를 무시하고 죽음으로 대항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원치 않은 살육전 끝에 부락을 초토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남례성 진토인들의 관례에 따라 전사로 분류되는 사내들은 전부 참살하고, 여자들과 미처 전사가 되기에 나이가 어린 사내아이들은 전부 거세해 노예로 삼았다. 이 사건으로 남례성 진토인들의 습성 중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진토인들과 강화 내지는 복속을 하려면 처음부터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여주어 칼을 꺼내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어쭙잖게 소수의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고하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그 결의는 자신들이 전멸할지라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부터 우세한 전력으로 마을을 포위하는 종래의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이, 진토인들은 머리가 없나? 안 될 걸 알면서 왜 반항하는 거야. 그냥 미리 숙이고 들어오면 좀 좋아!”
“아니,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봐! 당장 급한 불을 끄고 대군을 피해 저 밀림 속으로 숨어들면 그들을 추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이처럼 든든하기 그지없는 부모 품속 같은 밀림이 있는데, 겨우 서너 명되는 사자(使者)의 협박에 굴복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
“하긴 그도 그렇군.”
“그러나….”
―촤! 후두둑~!
말을 하다 멈춘 대호(大豪)는 빛살같이 검을 뽑아 친구를 습격하려던 이곳 특유의 날아다니는 뱀을 서너 토막 냈다.
“이건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군. 지가 무슨 자객도 아니고….”
“휴우~! 죽을 뻔했네.”
철정산(鐵釘山)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토막난 뱀을 주워들고 반을 대호에게 내밀었다.
“자!”
“….”
그리고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한입 깨물었다. 비린내와 함께 입 안에서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독특한 식감을 느끼며 처음 생뱀을 회쳐 먹었을 때를 추억했다. 밀림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진토인들이 뱀을 생으로 씹어 먹는 것을 보고 처음에 무슨 과일을 먹나 해서 조금 얻어먹어보았는데 조금 비릿하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그러나 곧 벗겨진 뱀 껍질을 보고 자신의 입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철정산은 기겁하며 뱉어내려 했다. 그러나 음식을 뱉어내는 행위는 진토인들에게 그 음식을 준 사람을 믿지 못할 자라는 모욕이란 말에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진토인 병사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을 때마다 철정산에게 가장 먼저 내밀었고 그렇게 해서 간난아이 주먹만한 굼벵이에 살아 있는 흰개미가 득실거리는 흰개미집, 신맛이 나는 초록 개미, 가끔 대열을 습격하는 맹수의 생간을 맛보아야 했다. 먹을 것 주는데 거절하는 것도 모욕이란 말에 이것저것 맛을 보았고, 양이 많아 버거울 때면 호기심 많은 친구를 둔 죄로 대호 또한 한몫 거들어야 했다. 그러나 진토인들이 일부러 찾아다니는 간식은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인간의 적응력은 위대했고 차츰 그들이 건네주는 먹을거리에 적응이 되자 이제는 그것들을 찾아다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은 지루한 밀림 행군에 소금과 같았다. 진토인 병사들이 철정산에게 그런 선물 공세를 한 것은 사실 그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중주의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온 진토인들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먹을거리가 거의 모든 음식에 불을 사용하는 중주인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기가 되면 엄청난 호우가 내려 불을 피울 땔감이 잃을 때가 많아 이렇듯 생으로 먹는 것이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거의 강압적으로 선물 공세를 하고, 그것을 씹을 때 주름 원숭이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얼굴을 구기는 모습을 구경하며 킥킥댔다. 그러나 이내 그것들에 적응된 그들을 한솥밥 먹는 친인같이 대했다. 오랫동안 각 부족이 나뉘어 싸움을 한 남례성 사람들에겐 피를 나눈 형제보다 함께 싸우는 형제가 진정한 형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진토인 병사가 된 그들에게 백호영은 형제였고, 이젠 같은 음식을 나누어먹을 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
거대한 나무들이 있는 숲. 열댓 명의 장정들이 양팔을 벌려야 겨우 둘러쌀 만큼 두껍고 까마득한 하늘을 닿을 정도로 키가 큰, 신성(神聖)하기까지 한 나무들로 숲을 이룬 이곳은 귀왕곡 안쪽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귀왕림이다.
“세, 세상에! 저게 나무 맞아요?”
서방님의 손에 이끌려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설화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엄청난 크기의 나무들이 숲을 이룬 이곳은, 아름드리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이 부서지며 숲 전체에 골고루 비추자 그것만으로 환상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꾸어어어어어어~!
귀왕림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설화는 어디선가 들려온 괴성에 깜짝 놀라 서방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어머! 서방님…!”
“숲을 지키는 귀왕이 지르는 포효다.”
“귀왕이오?”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지축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집채만한 거인이 자기 덩치보다 더 큰 곤봉을 들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달려들자 설화는 듬직한 서방님의 등 뒤로 숨 뒤 고개만 살짝 내밀어 거인의 모습을 구경했다. 설화는 그저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 뿐, 척 보기에도 위압적인 거인이 두렵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덩치에 비해 상당히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는 거인이었지만 설화가 경공신법을 펼치면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서방님이란 든든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곁에 있었기에 설화의 눈동자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고 소녀 특유의 호기심만 가득했다.
―쿠워?
자신이 돌보는 숲에서 침입자가 감지되자 포효성과 함께 달려온 귀왕은 침입자가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알자 투기(鬪氣)를 거두었다. 그러나 주인의 곁에 있는 존재에겐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라혼은 그런 귀왕의 모습에 미소지으며 인사를 했다.
“귀왕, 오랜만이다. 여기 설화는 더 이상 경계하지 마라!”
“쿠르르르….”
라혼의 말에 귀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라혼은 신기한 듯 자신과 귀왕을 번갈아보는 설화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 팔로 휘어잡고 몸을 띄워 귀왕의 어깨에 내려섰다.
“어마!”
“가니아에게 가자!”
“쿠워,”
설화은 거인의 어깨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귀왕림을 구경했다. 그리고 가니아라는 주작의 무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알 수 없는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귀왕림을 빠져나와 아늑하게 보이는 통나무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숲과 통나무집이 들어선 공간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지점을 지나 중간쯤 되자 설화는 이른바 꽃이 떨어지는 형상의 낙화유수(落花流水) 신법을 펼쳐 땅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뎌 통나무집으로 다가갔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고아나 다름없는 설화가 최초로 자신이 이 땅에 살아 있게 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언제나 곁에 서방님이 있어주었지만 가끔 친인에 대한 생각이 날 때면 가슴이 답답해왔다. 수인 조정의 정점에 있는 친가라 할 수 있는 호황가와 외가인 강무세가는 서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였다. 비록 서방님이 자신이 떳떳하게 신분을 숨기지 않고 나설 수 있게 힘을 기르고 있지만 그것이 외가와 친가 사이에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이미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늘 만나는 사람은 호황가와도, 강무세가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통나무집의 두툼해 보이는 나무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붉은 옷에 화려한 홍발(紅髮)을 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나오며 말했다.
“네가 설화구나? 어서 오련.”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라 할미란다.”
무녀(巫女)인 가니아와 무녀의 재능을 보이는 설화는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피를 통한 가족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 같은 능력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지 설화가 가니아를 어머니라 부른 것은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가장 가까운 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영혼(靈魂)의 대화였다.
가니아는 설화가 살아온 인생을 엿보며 가느다란 손을 들어 곱디고운 설화의 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설화 예쁘기도 하지.”
“할머니….”
그리고 새삼스런 눈으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라혼을 보며 감사의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설화를 이렇게 곱고 예쁘게 자랄 때까지 돌봐주셔서.”
“그녀는 나의 하나뿐인 아내이기도 합니다.”
라혼은 가니아를 더 이상 하대하지 않고 존대했다. 설화가 아내인 이상 가니아는 서열상 윗줄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할머니뻘에, 상황에 따라서는 증조나 고조할머니일 수도 있는 그녀를 계속 하대하는 것은 설화가 보기에 아무래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얘야, 들어가자꾸나.”
“예, 할머니.”
설화는 아직도 벅찬 가슴으로 할머니 가니아의 손에 이끌려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집 안이 밖에서 보기보다 엄청 넓고 신선하고 시원한 기운이 감돌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설화는 자신과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할머니 가니아 앞에 마주 앉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인이란 것도 그렇지만, 설화는 가니아 곁에 있으면 무척 편했다. 아마도 서로 상성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자 졸지에 두 여자에게 버려진 라혼은 드워프 마을로 가서 의뢰한 것들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음? 이건 흑사의….”
라혼은 흑사가 보내는 미약한 신호를 감지하고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라혼은 그 즉시 설화에게 잠시 떠나 있겠다는 말을 하고 흑막 흑산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나쁜 일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설화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서방님의 모습을 보며 서방님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화야.”
“예, 할머니.”
“네게 할 말이 있다.”
“예, 말씀하세요.”
가니아는 설화를 자리에 앉히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일족은 대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타고났단다.”
“….”
가니아의 말에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니아가 하는 말에 더욱 집중했다.
“그러나 네 남편과 그 사람이 연관된 일에 대해선 예측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
“너를 보니 알겠다. 그 사람의 장래는 알 수 없지만, 네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은 눈에 보이는구나.”
“제 미래가요?”
“그래, 이런 것을 네게 가르쳐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무슨 일인데요.”
설화는 자꾸 뜸을 들이는 가니아를 투명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니아는 무거운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네가 여황제가 되면 그는 죽는다.”
“예?”
“아니, 그가 죽으면 여제가 된다고 할까? 전후는 분명치 않지만 네가 여제가 되는 것과 그의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한쪽이 위가 되면 한쪽은 아래가 되는 운명 같구나!”
“아니에요. 저는 여황제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요. 더욱이 서방님이, 서방님이 그런…. 흑!”
무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설화였다. 그러니 가니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가니아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흐느끼는 설화의 등을 토닥이며 한 가닥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너를 아내로 삼은 그는 나의 예지력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러니 꼭 운명이 점지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미리부터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
―휘이이이이잉~!
춥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위산에 자신이 흑사(黑師)라 부르는 존재, 강호무림의 열두 절대자 중 하나인 강시지존(彊屍至尊) 흑산자(黑山子)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라혼은 그에게 다가가 명맥을 확인했다.
“휴우~! 다행히 죽지는 않았군. 그러나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겠어.”
라혼은 즉시 흑산자의 명문혈(命門穴)과 백회혈(百會穴)에 손을 얹고 흑사가 익힌 마공의 기운과 비슷한 기운을 흘렸다. 그러자 흑사의 내부에서 이에 호응하듯 응결(凝結)된 마기(魔氣)가 꿈틀대며 반응했다. 흑산자는 이미 극마지경(極魔之境)을 넘어 마공의 극의(極意)인 현경(玄境)을 바라보는, 이른바 초극 고수였다. 이미 마공과 신공의 차이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라혼은 흑산자의 마공을 파괴하지 않으며 일부러 마기로 그의 운기를 도왔다. 이미 금동보에게 천방지축신공이라는 대기운기법을 알고 있는 라혼은 흡성대법(吸性大法)의 힘을 억누르는 흡진결(吸鎭訣)이나 공력을 일시 흩어버리는 흡진기(吸眞氣) 수법을 사용하지 않고 흡인결(吸引訣)만으로 공력을 도인(導引)하면서 흑산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미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 불리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이 타통된 흑산자라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겠지만 그 시간 동안 응결된 마기를 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혼에 의해 응결되어가던 내기가 안정되며 흑산자가 평생을 한결같이 수련한 공력은 스스로 운공을 하며 응결된 내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라혼은 흑산자의 몸에서 손을 떼고 호법을 서주었다. 이미 완성된 무공을 이룬 흑산자의 몸에 아무리 비슷한 공력이라 하나 외기인 라혼의 공력에 영향을 받으면 최상의 상태로 맞춰놓은 흑산자의 공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었기에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하는 운공이라 외부의 충격과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에 비록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산정이었지만 라혼이 직접 호법을 섰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흑산자 주변에서 흑무(黑霧)가 일며 뭉클거리는 마기와 함께 주위를 서서히 맴돌았다. 이른바 정종신공의 극의에 이른 고수가 운기조식을 할 때 머리 위에 세 개의 꽃봉오리가 피어 나타난다는 삼화취정(三花聚頂)과 비견되는 마공 고수의 마무지경(魔霧之境)이었다. 이것은 정파의 신공은 조화를 기본으로 하여 여러 기운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종극에는 평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사파(邪派)의 사공(邪功)은 편견지학(偏見之學)이라 하여 한 가지 기운에 집착하여 수련 기간을 크게 줄이고 위력은 더욱 극대화시켰다. 그러다 보니 사공은 위력은 대단하지만 어처구니없는 허점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색욕(色慾)이 강해져 욕망의 노예가 되거나 햇빛을 견디지 못하거나, 또는 피에 미쳐 생혈을 빨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극의를 이루기 힘든 사공(邪功)이라 하더라도 만 가지 흐름은 종국에는 같은 가르침이라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이란 이치에 따라 사공의 극의를 이루면 마무지경에 이른다. 각각 사공의 특성에 따라 안개의 색은 흑(黑), 혈(血), 녹(綠) 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마공(魔功)은 마기(魔氣), 마력(魔力)을 수련하는 것으로 조화(造化)의 기운과 대비되는 혼돈(混沌)의 기운이다. 오기(五氣), 태어나고(木), 성장하며(火), 결실을 맺고(金), 다시 휴식(水)을 취하는 네 가지 원리에 그것이 조화롭게 하는 것(土)을 합한 것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법(法)이라 한다. 그러나 마공은 이 법 자체를 달리 해석하여 정도(正道)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힘이었다. 그래서 정(正), 사(邪), 마(魔)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평형도, 하나의 극단도,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도 얻을 수 없었다. 인간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흑산의 하늘이 붉은 기운을 띨 무렵 흑산자를 감싸고 있던 흑무가 요동치더니 이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산자의 콧속으로 흑무가 빨려 들어가면서 흑산자의 눈이 뜨였다.
“흑사, 괜찮으시오?”
“주공, 이 늙은이가 허명을 얻어 지존이라 하니 부끄럽소이다.”
흑산자는 라혼이 명문과 백회를 토해 마력을 주입할 때 이미 깨어 있었다. 그리고 주공이 마치 자기 몸의 기운인 양 운기하는 것을 느끼고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응결되었던 내기가 풀리며 스스로 운공이 가능할 때쯤 주입되었던, 흑산자의 입장에서 불순한 기운을 모조리 가져가자 또 한 번 놀랐다. 웅랑교의 영주라 불리던 젊은 고수도 그렇고, 주공도 그렇고… 강시지존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별호가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질 수 없었다.
라혼은 허탈해하는 흑산자에게 더 이상 아무 말을 묻지 않고 기력을 찾은 흑산자와 함께 흑산자의 거처가 있는 흑부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흑부에 도착한 흑산자는 망연자실했다.
“이럴 수가!”
흑부 전역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
라혼은 내가공력이 깃들어 웬만한 고수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게 할 분노에 찬 흑산자의 대마후(大魔吼)를 귓가로 흘리며 마법 주문을 캐스팅했다.
“앱설루트 배큐엄Absolute Vacuum!”
[앱설루트 배큐엄Absolute Vacuum : 절대 진공]은 일정 공간의 공기를 없애 그 안을 진공 상태로 만드는 주문이었다. 진공 상태가 되어 더 이상 잡아먹을 공기가 없는 화마(火魔)는 한순간 ‘푹!’ 꺼져버렸고, 흑산자는 화마가 꺼지자 아직도 살이 익다 못해 태울 정도로 열을 내뿜는 마을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리고 누군간의 이름을 부르며 불에 타다 만 건물의 잔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로! 오헤이! 카흐야!”
그때 흑산자의 예민한 감각에 미약한 숨소리가 걸렸다. 이에 흑산자는 지체 없이 장력(掌力)을 뿌려 쓰러지려 하는 건물을의 뒤엎어버렸다.
―펑!
그리고 바닥의 뜨겁게 달궈진 쇠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덜컹!
“누구냐?”
“할, 할아버지….”
“수야, 수야구나!”
건물 지하의 비밀 공간에 나병(癩病)을 앓는 흔적이 역력한 여인이 화기에 당한 나머지 벌겋게 익어 진물을 흘리는 처참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흑산자는 이미 생명의 기운이 다한 여인을 붙잡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뜨, 뜨거워요.”
라혼은 여인의 처참함에 눈살을 찌푸리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콜드 에어리얼Cold Aerial!”
[콜드 에어리얼Cold Aerial : 차가운 공기]로 여인을 감싸자 그제야 화마의 공포에서 벗어났는지 흑산자의 물음에 힘없이 대답했다.
“누구냐? 누가 마을을 이렇게 만든 것이냐?”
“털가죽 옷에 갑주를 입은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저항할 틈도 없이 하늘에서 불우박이 떨어져 아헤 아저씨도, 카흐도 순식간에 재가 되어….”
―부르르르르….
흑산자는 수야가 말을 하면서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흉수(兇手)가 누구인지 이미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여인이 흑산자의 질문에 대답할 때 여인의 맥을 살폈다. 그러나 이미 기력(氣力)이 쇠하고 생기(生氣)가 흩어져 아무리 라혼이라도 어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병이 나아 흉터만 없어지면 고운 옷을 입고 시집갈 수 있는데….”
“이 불쌍한 것아, 너는 시집갈 수 있어.”
흑산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수아는 이미 죽음 직전, 정신이 맑아지는 회광반조(廻光返照)에 들어서고 있었다.
“저승에 가서도 이 모습이면 저승사자가 놀랄 거예요. 그죠!”
라혼은 수아라는 여인의 말을 듣고 흑산자에게 진기를 주입하는 것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신성력을 모아 연달아 주문을 외웠다.
“큐어 스콜드Cure scald! 큐어 스카Cure scar! 레저렉션resurrection!”
[큐어 스콜드Cure scald : 화상 치료] [큐어 스카Cure scar : 흉터 치료]에 최고위급 신성 주문 [레저렉션resurrection : 부활]이 연달아 시전되자 황금 빛무리가 수야라는 여인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라혼은 연달아 한 가지 주문을 더 캐스팅했다.
“클린 스킨Clean skin!”
피부를 깨끗하게 하는 [클린 스킨Clean skin] 주문을 마지막으로 라혼은 뒤로 물러섰다. 오랜 준비와 긴 시간이 필요한 최고위 신성 주문 [레저렉션resurrection]을 캐스팅만으로 해야 하기에 한꺼번에 너무 큰 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마법 주문은 에텔 스페이스의 무한한 힘이 있어 9서클의 최고급 마법이라도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연달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순수 신성 주문은 에텔 스페이스의 힘과는 관련성이 떨어지기에 사용하기 버거웠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라혼이 성력(聖力)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흑산자에게는 경이 그 자체였다. 그리고 주공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는지 수야의 모습은 한창 때의 아름다운 처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그러지고 뭉개진 피부는 투명하도록 하얗게 변해 있었고, 화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 수야!”
수야는 자신의 눈처럼 깨끗한 손을 보고 얼굴을 매만지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역시 실패인가?”
“주공!”
비록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지만 이미 생명력이 다한 여인을 보고 라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저렉션resurrection] 주문은 실패, 아니 이미 소용없는 주문이었다. 명운(命運)이 다했다는 말처럼 생명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목이 잘렸어도 생명력만 충만하면 멀쩡하게 되살릴 수 있는 라혼이었지만, 명운이 다한 상대에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인은 라혼의 한마디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았는지 다소곳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공자께서 천녀(賤女)의 필생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저승에서나마 은혜를 갚겠습니다.”
―화악!
“수야.”
여인의 명운(命運)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몸에 머물던 신성력이 흩어지며 찬란한 황금빛과 함께 소멸되었다.
“잘 가시오, 수야 낭자.”
“주공, 고맙습니다. 이 쓸모없는 늙은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아닙니다. 결국 수야 낭자는 살리지 못했으니….”
라혼은 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세칭 문둥이들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늘에게 벌받고, 버림받은 그들을 세상이 또다시 버리니 그들의 한(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恨)은 바로 흑산자의 한(恨)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마을에 살아 있던 사람은 수야 낭자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크음~!”
라혼은 주위를 탐색하고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흑산자는 포기하지 않고 불에 탄 잔해를 뒤척였다. 그런 다음 흑산자가 강시를 제련하는 계곡 안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계곡의 내부도 무사하진 못했다. 약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강시들도 여러 가지 집기들도 화마를 피하지는 못했다. 계곡 동굴은 금지(禁地)로 설정되어 흑산자 자신만 드나들 수 있었고 완전히 격리된 곳이건만 불길이 닿아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놈이 이곳까지 침입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흑산자는 한쪽 벽으로 가서 장력(掌力)을 뿌렸다.
―쿵!
숨겨진 밀실이었다. 다행히 이곳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밀실 안의 물건은 대부분 멀쩡했다. 거기에는 각종 주술 도구와 책자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이 투명한 얼음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전라의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흑사, 저건….”
“독종사인(毒宗邪人)이오.”
라혼은 이어지는 흑산자의 설명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독공(毒功)을 익히는 자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경지를 독종(毒宗)이라 칭했다. 그리고 독인(毒人)은 독공을 익힌 고수를 말하기도 하지만 독강시를 뜻하기도 했다. 그래서 독종독인(毒宗毒人)은 이론상으로 존재하는, 독종에 버금가는 독강시를 말했다. 숨결 하나만으로도 반경 100장 이내를 무생물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극악한 독물이었다. 그리고 흑산자의 독종사인은 거기에 초극 고수 수준의 무공까지 겸비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작입니다. 독신(毒神)이라 자처하는 친구와 수십 년 간 저것에 매달렸는데 마지막 순간 깨어나질 않으니….”
라혼은 실패한 독종사인보다 초췌한 모습의 흑산자가 너무도 담담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태도에 역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마공의 고수이나 역시 극마지경의 경지를 넘어 현경의 경지를 넘보는 고수다웠다. 라혼은 그런 흑산자를 일별하고 독종사인을 세심히 관찰하기 위해 손을 뻗어 기를 흘려 넣으며 그것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강시란 블러디 골렘이다. 골렘이란 것 자체가 생명을 연성하는 연금술사가 만들어낸 것. 아무래도 동력원이 부족한 것이 원인인 것 같은데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드래곤 하트를 박아 넣어볼까? 아서라, 겨우 이런 일에 드래곤 하트를 낭비할 순 없지.’
라혼이 독종사인을 살펴보는 사이 흑산자는 간단한 짐을 챙겼다. 그리고는 라혼에게 말했다.
“주공.”
“말씀하시오, 흑사!”
“이 늙은이가 주공의 특이한 고독에 당해 주공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아오.”
“….”
“하나 주공은 제게 무리한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깍듯한 스승의 예우로 대해주셨으니 그것에 감사드리오.”
라혼은 아무런 말없이 침묵을 지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나를 상하게 하고 마을을 불태운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나 힘이 없어 어찌할 수 없으니 주공이 이 늙은이의 친혈육과도 같은 마을 사람을 산 채로 태운 그에게 복수해주시오.”
라혼에게 복수만큼 허망한 것이 또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흉수가 누구입니까?”
“그자가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길, 웅랑교의 웅기령주 웅천패라고 했습니다.”
“웅랑교의 웅천패?”
라혼은 사실 흑산자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갑주 무림맹 1000여 명의 무림 고수들 시신으로 강시 군단을 만들려 했으나 실제로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천수교에서 흑산자가 맡기고 간 107구의 강시들을 실전에 사용했으나 지나가던 불선(佛仙) 보리대불의 개입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선맥(仙脈)의 신선(神仙)이 개입하는 것을 보고 강시를 사용하는 것은 포기했다. 게다가 귀림의 드워프 마을이 축적해놓은 지식은 흑산자와 연구하던 것보다 훨씬 풍부했다. 마법 물품에 관한 것은 아무래도 드워프들이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라혼은 흑산자를 찾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흑산자도 거의 은둔한 고인이고, 세상에 나오는 이유는 마을에 필요한 식량이나 생필품, 그리고 약재(藥材) 때문이니 그 정도만은 흑산자의 강호에서의 위치를 고려해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 힘 닿는 데까지만 도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금 1000냥은 그들이 수년간 풍족히 생활하는 데 충분했다. 라혼이 생각한 흑산자와의 인연은 그것이 다였다. 라혼은 모든 것을 잃은 노인에게 아무것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는 웅랑교와 다툴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설화를 감당할 만한 힘뿐입니다.”
“설화를 감당할 힘?”
“설화는 백호입니다.”
“흐음.”
괴팍하고 독선적이라 알려진 노강호는 라혼의 솔직한 말에 모든 사정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더 이상 복수를 부탁하진 않겠습니다. 하나 이 늙은이를 거둬줄 수는 있겠지요.”
“제 곁에 머무신다면 스승의 예우를 다하겠습니다.”
흑산자는 주공이 웅랑교와 자웅을 겨룰 것을 의심치 않았다. 설화가 백호이고 웅랑교가 원하는 것이 천하인 이상 둘이 맞붙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복수도 할 수 있으리라….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 웅천패 네놈의 몸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하늘을 저주하게 하리라!’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해 흑산자의 물건들을 모조리 챙겨들고 흑산자와 함께 남례성 귀왕림으로 돌아왔다. 마침 흑산자가 머물 만한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귀림의 원래 주인이었던 드라오디프의 동굴 레어라면 흑산자가 머물기 알맞은 곳이라 생각했다.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수백만 리 흑막 흑산에서 남례성 귀림으로 단숨에 이동하자 흑산자는 어리둥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삭막한 암회색 바위산에서 입이 떡 벌어지게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 풍경으로 바뀌었고, 살을 에는 차가운 칼바람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공기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흑산자 입장에선 자신이 지금 죽어 저승에 와 있는 느낌까지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공, 이곳은?”
“남례성 귀림에 있는 귀왕곡 귀왕림입니다.”
“남례성? 여기가 남례성이란 말이오?”
라혼은 흑사에게 자신의 임지가 현재 남례성이란 것을 설명해주었다. 흑산자는 라혼에게 배운 여러 가지 흥미로운 학문―마법, 시드그람 연금술, 마법 물품 등…―을 연구하느라 흑부에서도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러니 라혼이 아직도 앙신성에서 강무세가와 싸우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례성에서 반란이 있었고, 라혼이 하남천원군으로 남례성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지금은 남상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서해수군통제사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허허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허허허허, 괄목삼일(刮目三日)이라 해야 할까? 내가 주공과 헤어진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거늘….”
괄목삼일은 뛰어난 사람은 사흘만 보지 않아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성장한다는 말이지만 흑산자는 라혼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감탄했다. 하지만 흑산자의 상념은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 속에서 폐부를 긁는 듯한 괴성이 들려오고, 곧 거대한 거인을 보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집채만한 거인을 귀왕(鬼王)이라 부르며 마음대로 부리는 주공의 모습에 신비감만 더해졌다. 비록 허명이라 치부하나 강호 무림의 열두 절대자 중 하나인 자신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간단히 제압하는 무력에, 세상에 모르는 분야가 없는 해박한 지식, 수백만 리 떨어진 흑막과 남례성을 자유로이 오가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능력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그에게 승복하는지도 몰랐다.
“이곳에 흑사가 머물 만한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소개시켜드릴 분이 계십니다.”
“….”
라혼은 흑산자를 일단 가니아에게 소개하고 한 열흘 정도 이곳에 머물며 설화와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만약 장상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댓 자나 나온 입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지겠지만 라혼의 입장에선 더 이상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초 목표였던 서해를 장악하는 문제는 서해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결되었고, 남례성의 장악은 하남천원군의 두 장수 작도인과 상초가 알아서 잘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봄에 출진하여 남상의 서해대수영을 토벌하는 것이지만 조정의 입장에선 급할지 몰라도 라혼에게 굳이 내년에 끝낼 이유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봐도 남상의 일은 한두 해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올 봄에 남상에서 대륙으로 오가는 항로의 최대 관문인 안도(安島)만은 확실히 장악하는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원래 라혼은 수년간 남례성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했으나 고학은 라혼이 조정의 신임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200여 척의 서해수군 전체를 동원해 안도를 공략할 것을 건의했고, 라혼이 허락함으로써 일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장상이 알면 입이 천외천까지 늘어날 이야기였다. 장상은 현재 남상으로 가는 것을 상정하며 죽을 둥 살 둥 일에 치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라혼이 더 쉬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상의 최고 실권자이기 때문이었다. 최고 실권자가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따르는 자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이므로 여러 군데 얼굴을 내비치며 강건함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방님!”
“?”
라혼은 설화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살아 돌아온 남편을 반기듯 눈물을 보이며 뛰어들자 고개가 갸우뚱했다. 저녁나절 떠나서 지금이 아침이니 겨우 하룻밤 떨어져 지낸 것뿐이고, 라혼이 보기에 평생 처음 만나 죽이 잘 맞는 할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치고 반응이 매우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설화야?”
“허허허허, 주공만 괄목삼일인 줄 알았는데 설화 또한 그렇구려.”
“어머? 흑할아버지.”
설화는 그제야 계피학발(鷄皮鶴髮)의 흑산자를 알아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그 후 같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여인천궁 여인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청수(淸秀)한 모습으로 바꾸어놓았건만 그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기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미 화경(化境)을 바라보는 경지에 이른 설화가 그의 존재를 감지 못할 리 없었으니 정확히 관심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흑산자는 설화에게 서방님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고, 할아버지라 부른 유일한 존재였다.
“소녀 설화 흑할아버지께 인사드립니다.”
“허허허허허….”
흑산자에게 설화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두려움 없이 다가온 존재였다. 처음 백호나한부에 머물 때 존전까지 살벌하게 싸웠던 존재인 자신에게 다가와 할아버지라 부르며 두렵고 꺼림칙한 눈빛이 아닌 천호(天湖)의 물처럼 깊고 투명한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다가왔던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의 첫 물음은 멋있는 외모를 왜 가꾸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보기 드문 미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리 매만지고 평생 가꾸지 않았던 수염을 손질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이 계피학발의 흑산자가 아닌 선풍도골의 흑사(黑師)였던 것이다. 그래서 라혼에게는 주공이라 칭하며 깍듯이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주모인 설화는 손녀처럼 대했다.
“설화야, 장군과 손님을 모셔라!”
“예, 할머니.”
흑산자는 연방 허허 웃음을 달고 설화의 손에 이끌려 아담한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겉보기보다 넓은 집 안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붉은 머리와 붉은 홍의가 너무 잘 어울리는 설화와 쌍둥이처럼 닮은 가니아를 보고 또 놀랐다.
“설화의 할미 되는 가니아입니다.”
“가, 가루입니다.”
“와! 흑할아버지 성함이 가루였어요.”
“응? 그렇단다.”
가니아의 모습에 놀란 흑산자는 불시에 자신을 인사하는 가니아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을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말했다. 그렇게 화기가 넘치는 가운데 설화가 저번에 약속했던 대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갔고, 가니아도 설화는 어릴 적 밥 짓는 것 이외에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라혼 걱정 섞인 말에 설화가 차지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라혼은 흑산자를 그린 드래곤 드라오디프의 동굴 레어로 데려갔다. 그리고 흑산자는 그곳에서 보물을 발견했다. 바로 드라오디프가 만든 마법 물품들이었다. 라혼에게는 조잡하기(?) 그지없는 쓸모없는 물건들이지만 흑산자에겐 달랐다. 라혼에게 말로만 듣던 물건들이 실제로 있었으니 그 감흥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마법에 관한 방대한 서적까지 있었으니 흑산자에겐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외부와 차단된 넓은 공간이 마법 주문인지 원래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서늘하게 유지되어 있어 시신(屍身)의 부패를 염려할 필요가 없어 강시를 제련하기에도 그만인 곳이었다.
“대단하오. 참으로 대단하오. 별 볼일 없는 노폐물을 위해 이런 곳을 마련해두시다니,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리오. 내 주공의 기대에 부응하여 무적의 강시 군단을 만들어보겠소.”
“…?”
라혼은 흑산자의 말에 턱을 긁적였다. 단지 머물 거처를 마련한 것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드라오디프의 레어는 흑산자가 작업(?)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라혼은 이미 강시를 이용할 생각을 접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것을 솔직하게 흑산자에게 털어놓았다.
“흑사, 저는 더 이상 강시를 이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
라혼의 그 말은 흑산자를 당황하게 했다. 흑산자가 생각하기에, 강시 군단 말고는 자신이 주공에게 해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은 이미 천외천의 경지에 달하고 용호 같은 수하들이 있으니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새로운 학문―마법이나 마법 물품―는 이미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흑산자에게 호기심 이상의 것은 아니었기에 주공이 유일한 재주라 할 수 있는 강시를 거부하자 졸지에 하릴없이 소일하는 늙은이 신세가 된 셈이었다. 만일 흑부의 일이 없었다면 이곳의 학문을 다시 공부하며 소일하는 은둔자의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흑산자에게는 세상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복수’, 웅랑교에 대한 복수였다. 어차피 뇌 속에 자리잡은 고충(蠱蟲)은 흑산자 스스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물론 복수를 하겠다며 웅랑교로 찾아가 난동을 부릴 수도 있었고, 또 주공은 그것을 막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웅랑교는 너무나 거대했다. 흑부에서 주공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어 멀고 먼 남례성 일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지만 흑막에 휘몰아치는 풍운은 아무리 세상과 단절된 흑부라 하나 웬만한 소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흑산자가 알고 있는 웅랑교의 힘과 세력은 상당했다. 그 웅랑교가 흑막을 제패했으니 아무리 강호 무림의 절대자라는 흑산자도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흑산자의 곁엔 추측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그의 곁에 머물며 일을 돕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고 재주를 사용하려는데 그 재주가 필요 없다고 하니….
라혼은 아무 말 없이 상념에 잠긴 흑산자를 그대로 두고 에텔 스페이스에서 흑산자의 물건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종사인이 들어 있는 얼음 덩어리를 빙동(氷洞)의 가장 시원한 곳에 두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념에서 깨어난 흑산자와 함께 가니아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설화가 만든 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물론 식사 후 설화는 흑산자의 머리를 매만지고 수염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열흘을 한량(閑良)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설화의 태도가 그전과 사뭇 달라져 있어 라혼은 아내를 위해 큰 결심을 했다. 바로 귀왕곡에 타운 포탈(Town portal)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여인천궁의 소궁주가 되기 싫다느니 여기서 그냥 이렇게 살고 싶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결론은 언제나 ‘안 되겠죠. 제가 사라지면 그 사람들이 다시 추운 들판으로 쫓겨날 거예요’였다. 그래서 언제든 가니아가 있는 귀왕곡으로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전 대륙을 범위로 하는 타운 포탈(Town portal)을 만들었다.
타운 포탈은 물 계열 마법 주문으로 우물이나 분수가 필요했다. 동방의 오행과 다른 지수화풍의 4대 원소의 개념상 물은 이차원(異次元)으로 통하는 문을 뜻했기에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가니아의 통나무집 마당에 작은 분수를 만들게 했다. 돌을 조각해 장식하는 그런 유의 분수가 아닌,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한 작은 폭포 같은 분수는 서너 명의 드워프들이 달려들자 반나절 만에 완성되었다. 라혼은 거기에 이제 여섯 개 남은 위저드 스톤(Wizard stone)을 기본으로 초광대역 타운 포탈을 만들었다. 그리고 설화의 전환에 언제든 시동어를 외치거나 일정한 파장의 진기가 주입되면 바로 이곳으로 올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흑산자와 가니아의 전환도 만들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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