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진의 숲 카페》
### 제30화 ― 남편이 남긴 마지막 장부
한미정이 오래된 사랑과 작별한 지 열흘쯤 지난 오후였다.
소진의 숲 카페에는 초가을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솔잎 냄새가 스며들었고, 호수 위에는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소진은 창가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고 있었다.
몇 줄을 적다가 창밖을 바라보고, 다시 한 문장을 고쳐 쓰기를 반복했다. 주방에서는 신지영이 대추를 씻는 소리가 들렸다.
“소진.”
지영이 불렀다.
이제 그가 이름을 부르는 일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왜요?”
“숲길로 미정 씨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소진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미정이 양손으로 낡은 보자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열흘 전보다 얼굴은 편안해 보였지만, 걸음에는 무거운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소진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연락도 없이 또 찾아왔네요.”
“언제든 오시라고 했잖아요.”
미정은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빛바랜 남색 보자기 안에는 오래된 장부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표지는 기름때로 얼룩졌고 모서리는 여러 번 펼쳐본 듯 닳아 있었다.
“이게 무엇이에요?”
“남편이 식당에서 쓰던 마지막 장부예요.”
지영이 국화차를 가져왔다.
“지난번에 주신 보온병은 잘 씻어왔어요.”
미정이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건넸다.
“덕분에 태준 씨와 따뜻한 차를 나누어 마셨어요.”
“잘 사용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지영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미정 앞에 찻잔을 놓고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갔다.
미정은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태준 씨를 만나고 돌아온 날, 남편 생각이 많이 났어요.”
“미안한 마음 때문인가요?”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안함보다는 그리움이었어요.”
미정은 남편과 함께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남편은 주방을 맡았고 미정은 손님을 맞았다.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새벽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장사를 준비하고, 밤늦게 식당 문을 닫고 나면 두 사람은 지친 얼굴로 마주 앉아 남은 밥을 먹었다.
젊은 시절 태준과 나누었던 사랑처럼 가슴이 뛰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남편은 미정의 낡은 신발이 젖을까 봐 가게 앞에 나무판을 놓았다. 미정이 감기에 걸리면 손님에게 내놓을 국보다 먼저 아내의 죽을 끓였다.
말다툼을 한 날에도 미정이 무거운 그릇을 들면 말없이 다가와 대신 받아주었다.
그런 날들이 삼십 년 넘게 쌓여 부부의 삶이 되었다.
“남편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미정이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좋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잘하지 않았어요. 나는 가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인지, 그저 부모님이 정해준 혼처라서 함께 산 것인지 궁금했지요.”
장부 안에는 식재료를 산 날짜와 가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돼지고기 삼만 이천 원.
두부 여섯 모.
대파 두 단.
고춧가루 한 봉지.
외상으로 밥을 먹은 손님의 이름과 갚은 날짜도 적혀 있었다.
소진이 한 장씩 넘기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장부의 오른쪽 아래마다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어떤 날에는 하나, 어떤 날에는 두 개, 드물게 세 개가 그려진 날도 있었다.
“이 동그라미는 무엇이에요?”
“그걸 모르겠어요.”
미정이 대답했다.
“식당 매출과도 맞지 않고, 외상 손님 수와도 달라요. 아이들이 찾아온 날도 아니고요.”
장부의 마지막 쪽에는 계산과 관계없는 짧은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웃었다.’
‘많이 피곤해 보였다.’
‘무릎이 다시 아픈 것 같다.’
‘꽃무늬 옷이 잘 어울렸다.’
소진은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이건 미정 씨 이야기 같은데요.”
미정의 손이 멈추었다.
“꽃무늬 옷을 좋아하셨어요?”
“남편이 떠나기 전해 봄에 작은 꽃무늬 블라우스를 하나 샀어요.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미정은 다음 장을 넘겼다.
‘오늘은 밥을 반 그릇밖에 먹지 않았다.’
‘아이들 전화를 기다렸다.’
‘시장에 다녀오다 넘어질 뻔했다.’
‘앞으로는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게 해야겠다.’
미정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이 사람은 알고 있었네요.”
“무엇을요?”
“내가 아이들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요. 나는 남편이 신문만 보고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어요.”
소진은 장부에 적힌 날짜를 살펴보았다.
“동그라미도 미정 씨와 관련된 표시가 아닐까요?”
두 사람은 오래된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웃었다.’ 그 아래 동그라미 세 개.
‘몸이 좋지 않아 종일 누워 있었다.’ 동그라미 하나.
‘아이들과 통화하고 기분이 풀렸다.’ 동그라미 두 개.
‘결혼기념일을 잊었다고 화를 냈다.’ 동그라미 하나.
미정은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혼기념일.”
그녀는 두 손으로 장부를 넘겼다. 해마다 같은 날짜를 찾아보니 그날에는 빠짐없이 동그라미 세 개가 그려져 있었다.
“남편은 결혼기념일을 늘 잊어버렸어요.”
미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화를 내면 날짜를 외우는 데 소질이 없다고 했지요. 그런데 장부에는 해마다 표시해놓았어요.”
“잊은 것이 아니라 표현하지 못했던 걸까요?”
“그랬나 봐요.”
미정은 웃으려 했지만 눈물이 먼저 흘렀다.
“참 미련한 사람이에요. 알고 있었으면 꽃 한 송이라도 사오지. 이렇게 혼자 장부에만 표시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소진은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잠시 후, 주방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지영이 낡은 장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그라미의 개수가 남편분의 기분이 아니라 미정 씨의 표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미정이 눈물을 닦으며 지영을 바라보았다.
“제 표정이라고요?”
“세 개가 그려진 날의 기록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소진과 미정은 동그라미 세 개가 있는 날만 골라 읽었다.
아이들이 찾아온 날.
미정이 새 옷을 입은 날.
오랜 단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날.
식당 개업 십 주년이 되던 날.
그리고 두 사람이 장사를 쉬고 처음으로 바닷가에 다녀온 날.
모두 미정이 기뻐했을 날들이었다.
반면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진 날에는 몸이 아프거나 손님에게 속상한 말을 들은 일이 적혀 있었다.
미정은 장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맞아요. 이 사람은 날마다 제가 몇 번이나 웃었는지 적어놓은 거예요.”
“아마 정확한 웃음의 횟수는 아니었겠지요.”
지영이 조용히 말했다.
“미정 씨가 행복해 보이면 세 개, 평범한 날에는 두 개, 힘들어 보이면 하나를 표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내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요?”
소진이 대답했다.
“말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생활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남편분은 미정 씨의 웃음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아요.”
미정은 장부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다른 날보다 길게 적힌 글이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쓴 기록이었다.
‘오늘 미정이가 혼자 가게 문을 열었다. 내가 없어도 잘할 사람이다. 그래도 혼자 밥을 먹게 될까 걱정된다. 아이들 곁으로 가면 좋겠다. 식당은 미련 없이 정리하라고 말해야겠다. 이 사람은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다. 남은 날에는 자기 마음을 먼저 살폈으면 좋겠다.’
그 아래에는 동그라미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서툰 글씨로 작은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미정은 결국 장부 위로 얼굴을 숙였다.
“그때 남편은 자기 병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제 앞에서는 괜찮다고만 했어요.”
소진은 미정이 충분히 울도록 기다렸다.
한참 뒤, 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태준 씨를 만나고 돌아와서 남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장부를 읽고 나니 남편은 내게 용서를 바라지 않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남은 날에는 제 마음을 먼저 살피라고 했잖아요.”
미정은 마지막 장의 글씨를 손끝으로 따라갔다.
“그 사람은 내가 옛날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까지 막으려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그 기억 때문에 오늘의 제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겠지요.”
“미정 씨는 이제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세요?”
미정은 눈을 감았다.
“당신과 함께 살아서 고마웠다고요.”
잠시 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젊은 날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지만, 내 삶을 함께 살아준 사람은 당신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내 웃음을 세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서 미안하다고도요.”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얕은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지영은 주방으로 돌아가 따뜻한 호박죽을 데웠다. 그리고 미정 앞에 작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점심을 거르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분의 얼굴입니다.”
미정은 장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지영 씨도 소진 선생님의 표정을 날마다 살피겠군요.”
지영은 소진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장부에 적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알고 있지요?”
“조금은 압니다.”
소진이 물었다.
“오늘 내 얼굴은 동그라미가 몇 개예요?”
지영이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두 개입니다.”
“왜 세 개가 아니고요?”
“원고가 잘 풀리지 않아 아침부터 같은 문장만 고치고 계셨으니까요.”
소진은 놀란 듯 지영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이제는요?”
“세 개가 되었습니다.”
미정도 눈물을 닦으며 따라 웃었다.
잠시 뒤 그녀는 호박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따뜻하네요.”
“천천히 드세요.”
소진이 말했다.
미정은 식사를 마친 뒤 장부를 다시 남색 보자기에 쌌다. 카페를 나서기 전, 그녀는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잠시 서 있었다.
“이 장부를 남편 산소에 가져가려고 했어요.”
“두고 오시려고요?”
“네. 그런데 가져가지 않으려고요.”
미정은 보자기를 가슴에 안았다.
“남편은 이걸 저에게 남겼잖아요. 외롭거나 제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펼쳐보려고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저도 작은 수첩을 하나 사려고 해요.”
“무엇을 적으시려고요?”
“하루에 한 가지씩, 저를 웃게 한 일을 적으려고요. 남편이 세어주던 웃음을 이제는 제가 직접 세어보려고 합니다.”
미정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숲길을 내려갔다.
그녀의 품에는 낡고 무거운 장부가 안겨 있었지만, 올라올 때보다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카페 문이 닫히자 소진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영은 소진 앞에 새 대추차를 놓아주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지영 씨.”
“네.”
“정말 내 표정을 날마다 보고 있어요?”
“보고 있습니다.”
“말도 없이요?”
“말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요.”
소진은 찻잔을 감싸 쥐었다.
“앞으로는 가끔 말해주세요.”
지영의 눈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어떤 것을 말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내가 동그라미 몇 개인지요.”
“그러겠습니다.”
소진은 원고지 맨 위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사랑은 언제나 뜨거운 말로 남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랑은 평생 한 사람의 웃음을 세다가 낡은 장부 속에서 뒤늦게 발견된다.’
지영이 어깨너머로 그 문장을 읽었다.
“오늘 원고는 잘 풀릴 것 같습니다.”
“덕분에 동그라미가 세 개가 되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날 저녁, 한미정은 집으로 돌아가 작은 수첩을 꺼냈다.
첫 장에 날짜를 적고 그 아래에 조심스럽게 문장을 써 내려갔다.
‘오늘 나를 웃게 한 일.’
‘남편이 평생 내 웃음을 세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장 옆에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꽃 한 송이를 그려 넣었다.
남편이 마지막 장부에 남겼던 것과 닮은, 조금 삐뚤고 소박한 꽃이었다.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들어왔다.
그 빛 속에서 미정은 오래전의 정미도, 남편의 아내였던 자신도,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할 오늘의 자신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사랑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워야만 진실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날의 사랑은 그녀에게 그리움을 남겼고, 남편과 함께한 세월은 살아가는 법을 남겼다.
그리고 남편의 마지막 장부는 미정에게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랑의 고백이 되었다.
― 제31화 「빈 의자에 놓인 두 번째 찻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