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영 묵상노트] 산상수훈(38)
마태복은 6장 22절-24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바로 앞부분에서 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보물이란 비단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종 달란트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사용하며, 또한 주님의 말씀에 따라 구제하는 것 자체가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 이해하였습니다. 따라서 좀 어려운 말이지만 “배워서 남 주자.”, “벌어서 남 주자”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이어 주님께서 22절에서 갑자기 눈(ὀφθαλμός)을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이 눈은 ‘몸의 등불’(Ὁ λύχνος τοῦ σώματός)이기에,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 하십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한 것은, 마치 캄캄한 밤에도 등불이 있으면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듯이, 밝은 눈은 길을 잘 찾아갈 수 있기에 등불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눈이 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눈이 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 “성하다”(ἁπλοῦς)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주름 없는”이란 의미이지만,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또는 ‘분명한’(clear) 이라는 뜻이며, 이차적으로는 ‘진실한’(고후 11:30) 또는 ‘관대한’(약 1:5)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은 이와 같은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 합니다. 즉, 눈을 몸의 등불로 눈이 건강하면, 달리 표현하면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이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지만, 눈이 나쁘면 사물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기에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 합니다. 자, 여기서 또 우리는 눈이 밝고 어둡다는 의미를 더 살필 필요가 있겠지만, 먼저 풀어야 할 핵심 단어가 바로 “몸”(σῶμά)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너의 ‘몸을’(τὰ σώματα)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몸이라고 사용하는 경우, 가끔은 우리의 죄악 된 육신인 육체(σὰρξ)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본 절과 같이 몸(σῶμά)을 “전인”(全人, AllMensch)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이 밝고 어둡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지 육체적인 의미에서 보면 사물을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은 이와 같은 차원을 넘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이차적으로 영적 눈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 할 때에, 육신의 눈을 넘어 영적인 눈,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또한 이렇게 ‘어둠이 더한다’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세미한 인도하심을 보지 못하는 자는, 마치 눈이 육신의 몸(σὰρξ, 육체)의 등불이 되어 앞을 밝혀주지 못한다면 길을 갈 수 없듯이, 그렇게 자신의 전체의 삶, 전인(σῶμά, 全人)을 인도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처럼 눈을 말씀하시다가 24절에서는 주인을 섬기는 말로 전환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어떻게 이어져야 할까요?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우리는 앞서 살핀바와 같이 눈이 어두우면, 특히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그의 전 삶의 바른 인도를 받을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처럼 영적인 눈이 어둡게 된다면 그이 전인의 삶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24절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과 같은 땅에 것을 섬길 것인가? 하늘에 재물을 쌓을 것인가? 땅에 재물을 쌓을 것인가? 세상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전 삶을 바칠 것인가? 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삶을 살 것인가? 나를 위해 살 것인가? 남을 위해 살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영적인 눈이 예민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적인 가치관, 재물관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기에…. 그런데 우리는 너무 세상적인 맘모니즘(mammonism)에 빠져 있지나 않는지요? 교회 안에서도…. 두 주인을 섬기지 않도록 우리 몸의 등불인 영혼의 눈을 밝힐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하는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