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꽃병
공순해
추석날 저녁이었다. 둥싯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전화 통화 중이던 사람에게 물었다. 달 보고 뭘 빌었어요? 그는 팬데믹 동안, 혼자 있으면 치매가 온다고 매일 전화해 안부를 묻던, 배려 깊은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서 맹랑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달 보고 안 빌어요. 달도 우상이잖아요. 그 순간 한 방 먹었다 싶었다. 하긴 모세가 <신명기>에서 힘주어 말했다. 일월성신(日月星辰)도 우상이라고. 한국 풍속에 젖어 기독교인으로서 해선 안 될 말을 한 자신을 깨닫고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건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덕담이 어느 땐가부터 유행(?)을 타는지 이리 바뀌어 요즘은 세초에 흔히 듣는 말이 됐다.
어린 시절 아버지 생신날인 사월 초파일에 어머니 따라 절에 가 불공을 마치고 돌아올 때 스님은 늘 축수해 주셨다. 복 많이 지으시고 성불하세요. 그래서 내겐 복 짓다란 말이 매우 익숙하다. 복을 지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즉 회향(回向)하라는 가르침이 좋았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겐 복 짓다란 말이 교리에 어긋난다. 일용할 생명, 일용할 양식, 일용할 사랑, 일용할 축복, 등 모든 것을 지은 분으로부터 공급받아 감사로 살아가는 창조주의 자녀들이 스스로 복을 짓겠다고? (반역 아닌가?) 복 짓다(作)와 복 받다(受)가 같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그 차이가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다. 스스로 짓고 허무는 종교는 자력 종교이고 모든 것을 공급받아, 주신 분에 의해 살아가는 종교는 타력 종교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복 지으세요, 라고 말하면 지으신 분께서 ‘네 힘으로 살아가겠다고? 그럼, 어디 해 봐. 자유 의지는 내가 기본으로 준 거니. 나중에 내게 딴말 없기다.’ 하지 않으실지…
또 하나 기독교인들이 혼동하는 것은 사랑이다. 물론 예수님이 용서를 7번이 아니라 70번에 70번도 더 해야 한다 하셨으니 사랑의 종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엔 간과한 것이 있다.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이라고 무조건 덮으라는 무지몽매한 사랑을 말씀하셨겠는가. 분별없는 사랑을 말씀하신 거라면 예수님 스스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그리 노여워하셨겠는가. 사랑의 기준은 공평과 정의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됐어야만 했던 이스라엘이, 유대가 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공평과 정의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평과 정의의 모양인 십자가를 지고 오실 수밖에 없었다.
구약에선 사랑이란 단어가 거의 안 나온다. 예수님이 오신 신약에 비로소 사랑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사랑 때문에 인류에게 오신 분 아닌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대명률(大命律)이다. 그러나 시행세칙에 해당하는 사도들의 말은 조금 다르다. 신약 27권 중 13권을 쓴 사도 바울의 행동 세칙이 조금 더 현실성이 있다. 가령 <로마서>에 보면 반목을 일삼는 사람을 사랑으로 권면해 보고 정 안 되면 그로부터 떠나라고 돼 있다. 자신의 신앙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떠나라고. 그는 용기 있게 베드로의 행위를 지적했고, 의견이 다른 바나바와 결별하기도 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라는 사도 말이 실천에 옮기기가 더 쉬운가, 70번도 더 용서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 쉬운가.
그러기에 내가 두드러기 일으키는 말은 ‘아름다운 것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누군가 이 말을 써먹을 때는 늘 자기가 불리할 경우다. 이 말로 무리를 모으고, 사세 불리하니 판을 쪼개고 떨어져 나가 모임을 따로 만든 사람들을 경험했기에 나는 이 말에 트라우마까지 가지고 있다. 그 뒤치다꺼리가 내 신앙에 영향을 미칠 만큼 정말 힘들었다.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한 계명까지 어기고 자기 편리한 대로 말씀을 원용(援用), 왜곡한 무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실까. ‘얘야! 왜 날 파니? 그냥 솔직히 네 욕심껏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예화와는 분별돼야 한다.
하긴 이 분별을 잘못해서 문제가 일어난다. 분별하는 힘, 지혜를 주세요라고 믿는 자들은 늘 기도하는데 지혜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혜, 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인물은 솔로몬이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한 가지만 선택하란 말씀에 권력, 명예, 재산, 건강, 등이 아니라 지혜를 선택했다는 건 유명한 기사(記事). 여기서 이 지혜를 나는 wisdom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킹 제임스 번역을 찾아보니 understanding heart였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신발 바꿔 신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이걸 한글 번역으로 지혜라 한 것이다. 이걸 조합해 보면 지혜란 상대의 마음과 입장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것이 아닐지. 어미의 도둑맞은 자식에 대한 아픔을 공감하고 배려했기에 솔로몬은 그 유명한, 지혜로운 판결을 할 수 있었으리라. 따라서 지혜든 사랑이든 그 기본은 분별과 공감, 즉 공평과 정의가 아닐지.
심리학에서 인지적 사고를 설명할 때 덴마크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이 그린 ‘루빈의 꽃병’이란 용어를 쓴다.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꽃병으로도 보이고 두 얼굴이 마주 보는 것으로도 보인다. 관점과 심리 상태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 즉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한쪽만 보인다면 시각에 편협함이 생긴 것이다. 종합적 판단을 하게 되면 꽃병과 두 사람의 얼굴이 전경이 되든 배경이 되든 순서대로 다 보인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에 앞서 무엇이 다른가부터 분별하고 살펴봐야 온전한 사고를, 즉 지혜를 이루는 게 아닐지. 이게 진정한 배려이고 지각 있는 사랑이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진다고 상대를 비난하면 적을 만들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분별을 갖게 되면 친구가 생긴다.
이런 이성적 사고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내려주지 않으실까. 복되어라. 너희는 물길이 닿는 곳마다 씨를 뿌리고, 소나 나귀를 놓아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게 하리라. <이사야서>에 들어있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