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태는 요리사다
마흔두 살 된 채성태는 요리사다. 서울 이태원에 해천(海川)이라는 전복요리집을 하는데, 이 집 음식이 제법 괜찮다. 일본이며 홍콩 등지에서 식도락가들이 예약을 하고 단체로 날아와 먹고 간다. 돈, 제법 많이 번다. 장안(長安)의 미식가 치고 해천 모르는 사람 없고 채성태 모르는 사람 드물다. “다른 요리사들은 정통 조리법으로 요리를 만들지만, 나는 내 맘대로 이거저거 섞다가 요리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요리가 된다”고 했다.
하나 더 있다. 채성태는 트럭이 두 대다. 트럭 이름은 ‘사랑의 밥차’. 토요일만 되면 채성태는 식당은 직원에게 맡기고선 식재료 가득 싣고서 트럭 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외식(外食) 한번 제대로 못 해보는 소외계층 수용시설로 가서 친구들과 함께 요리를 해준다. 돈까스, 회, 통닭, 전복죽 기타 등등. 요리로 번 돈, 트럭에 실려 죄다 사라진다.
채성태는 가난했다
채성태는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병이 깊어지면서 가세가 기울더니 홀딱 망했다. 그가 말했다. “어휴, 여섯 가족이 다리 밑에 산 적도 있었다. 다리 밑에 천막 치고, 어디서 보리쌀 구해다가 물에 불려놓고 며칠씩 온가족이 나눠서 밥 해먹었다.” 어릴 때도 보스 기질이 다분했던지라, 친구가 놀러오면 그 불린 보리밥을 친구에게 먹였다. 저녁 때 큰형이 돌아오면 그날 먹을 밥이 없어서 형은 굶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유도를 했다. 그래서 유도4단. 하라는 운동은 안하고 동네 친구들이랑 돌아다니며 말썽만 피워댔다. 군대 다녀와서 지도자 생활도 좀 했는데,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서” 관뒀다. 대신에 돈이 좋았다. 그래서 자동차 폐차대행업을 했다. 시골이다 보니 넉살좋고 친구 많은 채성태에게 일이 몰렸다. 자동차 번호판 제작과 인테리어도 했다. 돈, 많이 벌었다.
1996년 초, 충남 태안으로 친구들과 함께 낚시를 떠났다. 작은 고깃배 하나 사둔 게 있어서 배에 친구들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겨우 내내 세워둔 배. 갑자기 배가 확 뒤집히더니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은 두꺼운 겨울옷으로 겹겹이 싸여 있었고, 사람들은 파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채성태와 또 다른 한 사람 살고 나머지는 죽었다.
“아, 이렇게 사람 죽는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확확 스쳐가고…. 그런데 갑자기 갓 태어난 아들이 앞에 보이는 거다.”
완전히 포기했다가 채성태는 물 속에서 옷을 다 벗어던졌다. 그리고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부처님한테 기도했다. “나를 살려만 주신다면 나가서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죽을 힘 다해서 헤엄을 쳐 근처 섬에 당도했다. 바위에 있는 모래로 온몸을 문지르며 추위를 쫓았는데, 근처 양식장에서 배가 날아와 채성태를 구조했다.
자기 배 태웠다가 하늘로 간 사람들. 그 유족들과 합의하면서 있던 돈 다 날리고 채성태는 자기가 살아난 바로 그 섬에 가서 횟집을 차렸다. 싱싱한 전복에 갖은 한약재 섞어서 팔았더니 많이 팔렸다. 내친김에 홍콩, 일본 돌아다니며 요리 연구해 제대로 된 전복요리를 개발해 서울로 올라와 전복요리집을 냈다. 그게 “대박이 터졌다.” 그 사이에 자기가 죽을 뻔했던 사실도, 세상에 필요한 사람 되겠다던 서언(誓言)도 망각했다. 그냥 잘 나가는 요리집 사장이었다.
채성태, 착한 척하게 되다
1998년 어느날이었다. 친한 누님 한분이 경기도 벽제로 자원봉사를 가려하니, 전복죽 좀 협찬하라는 것이다. 막연한 생각에 50인분 준비해서 동행했다. “노인들 계신 곳이었는데, 전복죽 끓일 가스렌지도 없는 거다. 그 차가운 죽을 드리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제서야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자기가 죽어갈 때 뭘 기도했고 뭘 맹세했었는지를. “그래서 수시로 김포, 서울 후암동 같은 데 있는 복지시설에 100인분씩 전복죽 들고 찾아갔다.”
혼자서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찬 음식 대접할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요리를 직접 해드리면 어떨까.” 그러려면 이동식 주방, 그러니까 레스토랑이 필요했고, 트럭 한 대가 필요했다. 2004년이었다. “그때 집 한 채 사려고 적금 깰까 했는데, 집은 나중에 사지 뭐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돈으로 3.5톤짜리 트럭 사서 주방을 만들었다.” 2009년 현재 ‘무슨무슨 밥차’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봉사모임의 시작이다.
저돌적이고 보스 기질 강한 사내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예인 친구들을 거의 윽박질러대며 불러모았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따로 전화를 해서 “올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우기곤 했다. 정작 현장에 가 보면 그 바쁜 연예인들이 우글우글거리며 “채성태 죽인다”고 벼르곤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금은 나보다 더 열성적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청구건설이라는 기업체 회장인 이금렬(41)도 채성태에게 걸려들었다. 몇차례 봉사도 하고 사랑의 밥차를 구경하더니 어느날에는 5톤짜리 트럭 한 대를 사랑의 밥차로 내놨다. 캄보디아에 봉사를 떠났을 때도 후원을 했다. 지난번 태안 기름 유출사태 때는 채성태보다 더 채성태 같았다.
“거기 청소하는 자원봉사자들 밥 주러 갔다. 나는 하루만 있다가 오려고 했는데, 이 회장이 전화를 했다. 나더러 어디냐고 묻더라. 그래서 태안에 있는데 곧 올라갈 거라고 했지. 그랬더니 이 친구 하는 말이, ‘아, 올라오지 마시오’였다. 아니, 왜? 하고 물었더니 이 사람이 이런다. ‘아, 지금 막 통장에 1000만원 넣을 테니까 그 돈 다 쓸 때까지 올라오지 마시오.’ 그래서 꼬박 두 달 동안 태안에 있으면서 새벽6시부터 밤까지 한끼에 2000명분을 밥을 지었다. 밥차 지원자들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회원들이 몰려오더라고 했다. 지금 ‘사랑의 밥차’ 회원은 1000명이 넘는다.
“경기도 장호원에 작은평화의 집이라는 장애노인 수용시설이 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인데, 어느날 나한테 소포가 왔다. 열어봤더니 그 노인들이 100원 500원 용돈 모아서 30만원 정도를 돼지저금통에 넣어서 보냈더라. 편지에 뭐라는 지 아. 자기들도 힘든데,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 도와달라’고 적혀 있더라. 그때 정말 가슴이 찡해서….”
가난했던 유도선수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더니 제법 큰 돈을 벌어 이제는 그 돈을 세상을 위해 쓴다. 그저 착한 척하려는 게 아니라, 이제는 봉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산다. “나, 요리 좋아하고 여행 좋아한다. 시골에 텃밭 가꿀 돈만 놔두고 버스 한 대 사서 돌아다닐 거다. 정말 정말 오지에 소외된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우리 아들들한테도 말했다. 너희들한테 물려줄 거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이상, 생김새는 그리 착하지 않되 실질은 착하기 그지 없는 ‘사랑의 밥차’ 요리사 채성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