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의 난 2
그러자 노인은
여러 가지 차를 골고루 넣고달이더니
조금씩 찻잔에 따라서 지함에게 주었다.
지함은 노인이 주는 차를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조금씩 마셨다.
지함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함이없었다.
자세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노인은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차를 조금씩 더 따랐다.
그러나
역시 지함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노인은 다기를 내려놓더니
지함을 가만히바라보았다.
지함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내 차를 마시고도
그대처럼 변화가 없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
"제가 조금 치기를 부렸습니다.
차맛에 따라 제몸의 기를 스스로 조절하여
차를 중화시켰습니다."
"허!"
노인이 입을 떡 벌리면서 놀랐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오?"
"이지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줄 책이 있소
내가 죽을 날이 머지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내가 개발한 다도를 전할사람을 찾고 있었소.
그대라면 다도를 잘 쓸 수 있을것이오."
노인은 궤짝을 열더니 책을 한 권 꺼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를
소상히설명했고,
귀한 약초의 약성까지 적혀 있소.
어떻게 차를 달이는가,
어떤 차를 어떻게 만드는가도 적혀있소.
이 책을 잘 쓰면 누구나 선인이 될 수 있고,
의원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지함은 노인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 나서
그 책을받았다.
다선기(茶仙記)>였다.
하룻밤을 대흥사에서 묵은 지함과 정휴는
이튿날완도로 건너가
질 좋은 김을 거두어 용인으로올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완도에서 나룻배를 타고는
제주로 향했다.
지함은 나룻배 한 척을 얻어 네 귀퉁이에
구멍을막은 큰 바가지를 주렁주렁 달았다.
바가지가 워낙물에 잘 떠서
웬만한 풍랑에는 배가 끄떡없이 잘견뎠다.
제주도에 도착한 지함 일행은 제주 목사를찾아갔다.
제주 목사 김철순은 지함과 어려서부터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형 지번이 이조에 출입할 때
가회동 집에 몇 차례 들른 적이 있었고,
그때 서로인사가 있었다.
지함이 동헌에 들어섰을 때
뜰에는 포승에 묶인중이 무릎이 꿇고 앉아 있었고,
제주 목사 김철순이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단죄를 하고 있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명종이 들어서기 전에 중이란 종이나 노비보다
더못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명종이 왕위를받으면서부터,
더 정확하게는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의 피씻음을 하고 나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뒤바뀌었다.
이 사화를 도운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중, 백정 같은 천민들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중 보우(普雨)였다.
이를배경으로 문정왕후는 불교를 진흥하기 시작했다.
선대의 정책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종이 즉위한 지 여섯 해 만인
신해년(辛亥년, 1551)
그동안 완전히 폐지되었던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다시 두었다.
이 일이 있자홍문관과 성균관의 유생들은
연일 반대 상소를올렸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이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보우를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 都大禪師)로 임명하였다.
선과(禪科)가 다시 설치되어
중들도 과거 시험을 보기시작했으며
그동안 발급이 금지되었던 도첩이 일제히발급되었다
이때 무정은 과거에 합격하여대선(大選)이 되었고
정휴도 도첩이나마 얻을 수있었던 것이다.
몇 년 뒤부터는 승려의 잡역이 완전히 금지되어
불교로서는 조선 개국 이래 비로소 마음 놓고
수도에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유생들의반발은 더욱 심해져
승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목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목사 김철순이
중을 하나 붙잡아 동헌 뜰에 무릎 꿇리고
호통을 치고 있는 참이었다.
"시절이 바뀌었다고 하니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는구나.
한양 하늘에서는 아무리 승 보우가
조정을 좌지우지한다고 하지만
이곳 제주에서는어림없는 일이다.
게다가 가짜 중놈이 감히 양반가
내당을 몰래 드나들며 아녀자들을 겁탈해?"
김철순의 목소리는 추상 같았다.
이윽고 김철순은 벌떡 일어나더니 냅다 소리를질렀다.
저 요망한 가짜 중놈의 모가지를 당장 베어라!"
이미 대기하고 있었던 듯
망나니가 목사의 명이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나왔다.
그러고는 몇 번 칼을휘두르는 척하다가
이내 중의 목을 잘라버렸다.
포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시신을 끌고 사라졌다.
중의 시신이 관정에서 끌려나가자,
지함은김철순에게 다가갔다.
김철순도 그제서야 지함을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어서 오게나. 서찰은 벌써 받아서 준비를 해두었네.
그런데 이 중은?"
김철순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정휴를 바라보았다.
화담 산방에 함께 있던 학인입니다."
"소승 자성입니다."
정휴가 목사에게 합장을 하면서 법명을 말했다.
"흠. 좋지 않은 때 오셨구려.
한양에서 요승(妖僧)보우가 왕후의 신임을 얻어
세력을 키우니까,
이 제주에서는 도첩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짜 중놈이
양반가 아녀자들을 유혹해
도의를 땅에 떨어뜨리고있다오.
그래서 내가 직접 다스렸소."
"목사 어른, 배멀미가 심하여
일차 문안부터드리려고 왔던 것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지함이 정휴의 눈빛을 보더니 서둘러 발길을돌렸다.
"그러게. 배를 안 타본 사람이니 멀미도 있을걸세."
지함과 정휴는 동헌을 나섰다.
"정휴, 저분이 성품이 대쪽 같아서
좋고 싫은내색이 분명해서 그렇지,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분이 아니네.
한 쪽에서 세력을 키우면 그 세력을 믿고
망둥이처럼 뛰는 자들이 있게 마련…
자, 가서 쉬세."
"형님, 이곳의 지기가 어떻습니까?
아주 살기가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이곳의 이름은 원래 탐라(耽羅)인데,
양 고 부(良高夫) 세 사람이
처음에 탐진(耽津)이라는나루에 닿았고
그 뒤 신라(新羅)에 조공을 바쳤기때문에
탐진에서 탐을 따고 신라에서 라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이때부터 이 섬의 운명도기구하여
백제와 신라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공을바치곤 했지.
고려조에는 원(元)이 이곳을 차지하고
말을 놓아길렀는데,
말을 기르는 원의 목동들이 얼마나포악한지
이곳 백성들 죽이는 것을
짐승 죽이는것쯤으로 여겼다네.
심지어는 조정에서 보내는관헌까지 때려죽였다네.
또 삼별초가 마지막으로항거하다가
멸살당한 곳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죽음이많은 곳이 되고 말았다네.
한라산이 조선 제이의산이니
그만한 기개가 있는데도 말일세."
"기는 넘치는데 갇혀 있는 형국이군요."
"그렇지. 물에 갇혀 있는 것이지.
자, 나는 제주를좀 살펴보아야겠네."
지함은 제주를 두루두루 유람하면서
지리를 살피고물산을 알아보았다.
지함은 그저 제주도를 여기저기살피면서 돌아다닐 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휴 또한 별달리 일거리가 없었다.
목사 김철순이좋은 말총을 모두 거두어주는 덕분에
정휴는 어부를사서
그 물건들을 찾아다가 배에 싣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다음 지함 일행은 다시 제주를 떠나
아산앞바다로 들어갔다.
지함 일행이 아산에 도착한 때는 한겨울이었다.
아산 부두에 흰눈이 펄펄 내리는 가운데
싣고 온말총을 내려놓고, 달구지를 수소문했다.
지함은그곳에서 정휴와 말총 실은 달구지를
안 진사 집으로올려보내고는
경상도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지함은 정휴와 헤어진 지 한달 만에야
안 진사의집으로 돌아왔다.
설을 며칠 앞둔 때였다.
그를따라온 달구지에는 숯가마가 스무 개나 실려 있었다.
"아니, 무슨 숯을 이렇게 많이 사들였나?
숯도 값이나가는가?"
"아무렴요.
한양에서는 양반들이 관악산, 도봉산,북한산,
산이란 산은 죄다 사들이거나 빼앗아서
땔나무값을 올려놓고 있답니다.
그러니 숯값이 비싸지않겠습니까?
숯이야 양반들이나 쓰는 것이니
제가일부러 사모았습니다."
"그래도…"
안 진사는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함은 숯가마를 내려 역시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도록 했다.
그러고는 그 가운데 맨 밑에 있던숯가마 한 개를
사랑방으로 옮겼다.
안 진사가따라오며 의아한 눈초리로
지함이 하는 양을지켜보았다.
사랑에 들어선 지함은
안 진사, 정휴, 남궁두가보는 데서가마니를 열었다.
가마니 속에서는 옥, 금,은,
그리고 이름 모를 보석들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숯은 위장이었구만."
"예, 그렇습니다.
왜관에 가서 해상무역을 하는
왜인에게서 사들였습니다.
주상에게 가는 왜왕의진상품도
그들의 손으로 거래된다 하니
필시우리나라에서 쓰일 보석도
그들이 대는 것입니다.
웬만한 것은 다 사들였으니
더 들어오는 물건은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인들에게 거금을 주고 이것들을샀겠군."
"아닙니다.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해다주고
바꾸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도자기와 책,문방구였습니다.
그게 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보석만큼이나 값이 나가더군요."
"허허."
안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함의 지혜에 탄복했다.
"금이라든가 은은 경상도 금광에서 막 제련한 것을
사들인 것입니다.
경상도에 있는 금광을 모두돌았으니
아마도 당분간은 저자거리에서
금구경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제가하는 일이 재미나시지요?"
"웬걸. 재미가 나는 게 아니라 겁이 나네.
자넨손이 너무 커.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야."
잠시 후 사랑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을 열고들어선 사람은 남궁두와 전우치였다.
오래 전부터
이미 안 진사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두 사람은
잠시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함은 전우치를 보자 말을 잃고
천정을올려다보았다.
지함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있었다.
"선생님,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전우치도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에게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일행이 정좌하고 앉자
지함이 남궁두에게그동안겪은 일을 물었다.
"전우치 이 사람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화담 산방에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월하게 찾아 함께 올 수있었습니다."
남궁두가 송도에 도착한 것은
면앙정을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지함이 노잣돈을 두둑히 주어
역마다말을 바꾸어타면서 달린 덕분에
그렇게 빨리 갈 수있었던 것이다.
남궁두가 송도에 닿는 대로 화담 산방에 가니
전우치는 그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신유년가을이 되면
임꺽정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화담 산방에 은둔해 있으라고
지함이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다.
"임꺽정이 떠나는 자네를 붙잡지는 않던가?"
지함이 전우치에게 물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주변 사람의 충고나 의견은 듣지않고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던차에 제가 떠나겠노라고 하니까
오히려 시원하다는눈치였습니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있었는지
약탈해온 금은붙이를 한 보따리 챙겨주더군요.
그물건들은 저도 임꺽정의 흉내를 내어
가난한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지요."
"어떻던가?
자네가 임꺽정의 군사 노릇을 했다는소문이
송도에 돌던가?"
"아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이름을
철저히 숨겨왔습니다."
"잘했네. 그 어려운 일을 오차가 조금도 없이
잘해낸 자네가 장하이."
지함이 전우치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남궁두와 전우치는 화담 산방에서 만나자마자
그길로 송도를 빠져나와
곧바로 용인 안 진사댁으로내려온 것이었다.
지함과 정휴, 전우치, 남궁두 이렇게 네 사람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앉아 마음껏 술을 마시면서
임꺽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지금이야말로 임꺽정에게 전우치의 도움이
필요할시기가 아닙니까?
이 중요한 때에 왜 군사를그만두라고 하셨습니까?"
정휴가 짐작은 하면서도
한편으로 궁금증이 생겨물었다.
"임꺽정은 의기는 있으나
미래를 생각할 줄 모르는사람일세.
앞으로 얼마 더 버티지 못하네.
전우치가아니라
세상에서 병법에 제일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이
그를 돕더라도 마찬가지일세."
"왜 그렇습니까?"
"하늘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라네.
인간의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일세."
"그래서 전우치를 미리 빼내신 거로군요."
"임꺽정의 무리가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위급한 때 빠져나오면
혹 그자들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터,
그래서 이쯤 해서 미리 나오라 한 것이네.
그렇지않으면
관군의 손에 붙들려 참수를 당할지도모르고…"
난이 성공하지 못하면
임꺽정은 죄를 논할 필요도없이
참수형으로 벌할 것이 뻔했다.
결국 목이 잘려
종로 네거리의 높다란 장대에 걸릴 것이다.
전우치도그의 군사였던 만큼
그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지도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사지(死地)를벗어나
스승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