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다녀와 쓴 글로, [작가마당]에 실렸던 것을 뒤늦게
올립니다.)
담 밑으로 흐르는 물
1. 만남
그러니까 꼬박 60년 만의 일이다. 남과 북의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 분단되기 전 우리나라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게 1945년 12월 13일이었으니, 꼭 60년 만이지 않은가.
그 때 서울에서는 ‘전국문학자대회’가 열렸다. 전국문학자대회는 해방 이후 남과 북에서 각기 다른 정치체제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분단이 굳어질 기미를 보이자, 이를 막아보자는 의미에서 북에 있던 한설야, 이기영, 김사량 등이 서울에 내려와 남쪽 작가들과 자리를 함께 한 대회였다. 그들은 이 대회에서 삼팔선 이남의 산발적인 문학 조직을 해체하고, 새롭게 남과 북을 아우를 수 있는 ‘조선문학가동맹’이란 조직을 내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남쪽은 남쪽대로 전국문학자대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하고, 북은 북대로 ‘북조선예술총연맹’이라는 조직을 내와 사실상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쪼개진 문단을 봉합하려는 시도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이렇게 흘러왔는데, 이번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작가대회’는 그동안 헤어져 살았던 남과 북의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모국어권 문학의 온전한 크기를 확인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2. 평양
아침 8시 인천공항 집결. 그 전날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예비소집이 있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버스 터미널에 전화하니 천안에서 인천 공항까지 첫차가 6시에 있다고 해서였다. 김포공항을 거쳐 인천까지 두 시간 십 분 걸린다고 했다.
쌌던 짐을 다시 꾸렸다. 가능한 간편하게. 짐은 기본적인 것들 외에 대전충남작가회의 사무국에서 마련한 5만원 상당의 의약품, 내 개인 시집 10여 권, 그리고 별도로 마련한 선물 등이었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었다. 현관문을 나서며, 드디어 가는구나, 감회가 물결쳤다.
공항에 도착, 방북증을 받아 개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출국 수속을 마쳤다. 1차 명단에 없던 도종환 시인이 보인다. 원래 가기로 했던 사람 중 김용택 김진경 시인이 빠졌는데, 그 자리를 대신해 온 것이다. 반가웠다. 몸이 안 좋아 요양한다고 산에 들어간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한 3년만이다. 어떠냐니까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4조. 조장은 신현수 시인이다. 신시인이 4조(소설가 전상국 김용만 선생님, 역시 소설 쓰는 이경자, 공지영 씨, 나 그리고 신현수) 에서 나이가 가장 적어 조장이 되었다며 새우젓 같은 눈을 찡그려 웃는다. 그는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 때 이미 평양에 한번 다녀온 바 있다고 한다.
날씨가 흐리다. 안개가 쌀뜨물처럼 자욱이 끼었다. 원래 출발이 10시인데 평양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해 언제 갈지 모른다고 한다. 가야 가는 거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갑자기 부산해진다. 집행부 사람이 모이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비행기가 도착할 것이고, 출발에 앞서 기자회견을 한다고 한다.
“남과 북의 끊어진 철길 위에도 쓴다. 조국은 하나다” 김남주 시인의 시 구절을 쓴 현수막 등이 걸린 출국장에서 염무웅 선생이 회견문을 읽었다.
예정보다 늦게 탑승. 비행기는 북에서 보낸 고려항공이다. 여승무원의 ‘반갑습니다’라는 말이 귓청을 울린다. 비행기에는 금방 틀어놓았는지 에어컨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자리에 앉자 부채가 눈에 띈다. 두 손바닥을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손부채인데 붉은 글씨로 고려항공이라 써 있고, 비행기 날아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비행기 안에 부채라니. 에어컨(에어컨의 찬 바람은 이륙 후에 나옴) 대신 부치라는 것인데, 부채를 통해 북의 경제 사정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평양까지는 50여 분. 서해의 공해 상으로 빠져 나갔다 들어온 것이니 직접 간다면 25분 남짓 걸리는 거리이다. 하긴 서울에서 광주보다 평양까지의 거리가 더 가깝다.
평양(순안)공항은 정말 한적했다. 고요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민족작가대회 참가자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햇살을 되퉁기며 짱짱하게 걸려 있다. 그 앞에서 도착 성명을 발표하고 마중 나온 북쪽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숙소인 고려호텔까지 한 20여 분 걸렸을까? 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 나 있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는데, 지나오는 동안 김주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 김일성 종합대학, 개선문, 천리마 동상, 인민대학습당과 금릉동굴, 구구절 거리 등을 지나쳤다.
듣던 대로 평양은 공원도시였다. 평양에는 70여 개의 공원이 있다고 하는데, 평양에 공원이 참 많다고 하면 평양 사람들은 평양에 공원이 있는 게 아니라 공원 속에 평양이라는 도시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대동강변부터 도로까지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또 평양은 아파트의 도시였다. 20층, 30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남쪽처럼 울긋불긋한 게 아니라 대부분 아파트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다. 환경오염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물자 부족 때문인 것 같았다. 페인트칠을 안 해 놓으니 마치 짓다만 느낌이 들어 처음에는 좀 을씨년스러웠지만 떠나올 무렵에는 그것에 오히려 익숙해졌다. 결국 디자인이나 색깔이라는 게 눈속임 아닌가.
정치적 구호는 생각보다 극성스럽지 않았다.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우리나라 사회주의 만세!’ 등이 눈에 띄었고,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가 건물 곳곳에 걸려 있었다.
숙소인 평양역 바로 옆에 있는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고려호텔의 안내원, 의례원, 요리원, 봉사원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고려호텔은 85년에 만들어진 45층짜리 쌍탑 모양으로 객실이 500개쯤 된다. 하룻밤 자는데 방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북쪽 돈으로 250원에서 300원쯤 한다. 2원이 약 1달러쯤 되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약 20만원쯤 되나? 북에서는 양강도 호텔과 더불어 가장 좋은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다.
늦게 점심을 먹고 숙소에 올라 짐을 풀었다. 나는 신현수 시인과 함께 22층 2호에 묵었다.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헌데 민족작가대회 개막식 행사가 열리기 전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북측이 처음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시키기로 한 해외 작가들을 느닷없이 해외 대표단 자격으로 격상하자고 하여 우리 측이 제동을 건 것이다. 해외 작가는 일본에서 10명 미국에서 2명이 참가했는데, 이들을 어떻게 해외 작가 대표단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우리 측 문제제기의 이유였다. 해외 작가 12명 중 10명이 일본에서 왔다면 대개 조총련 계 작가들일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혼자서 둘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판단에 따라 우리 측은 대회 무산을 감수하고라도 맞서기로 하고, 북측에서 다시 협상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북쪽에서도 짐도 내려주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결국 우리 측 안대로 해외 작가들을 참관인 자격으로 제한하기로 하고 대회를 열었다.
민족작가대회는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 UN 총회장을 연상시킬 듯한 둥근 회의장엔 의자 배열 역시 둥글게 되어 있고, 중앙 맨 앞에 의장단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높은 천장과 현대적 감각으로 세련된 벽면엔 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라의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룩하자!’는 구호가 걸려 있었다.
회의장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북쪽 문인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들이 회의장에 들어오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일어나 환영의 박수라도 칠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소 닭 보듯, 정말 아닌보살이었다. 자리도 회의장 반을 쫙 갈라 한쪽은 북의 작가들이 앉고 나머지 한쪽에 우리들이 엉거주춤 앉았다. 그러면서 시작된 기나긴 침묵. 이 어색한 침묵은 본대회가 시작될 때까지 30여 분 이상 계속되었고, 어쩌면 우리들이 북에 머물던 5박 6일 동안 우리를 계속 따라다녔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조금 지나면서 ‘쟤네들 왜 저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보지?’ 궁시렁거렸고, 조금 더 지나자 근엄하게 폼 잡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큼큼대고 긁적대고 그러다 일어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물론 남쪽 작가들의 리버럴한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북쪽 작가들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원래 대회 시작 시간인 15시부터 자리에 나와 그때까지, 그러니까 무려 네 시간 넘게 한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고 했다.
대회는 매우 건조하게 진행되었다. 작가회의 이사장인 염무웅 선생과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인 김경훈 선생의 개회사에 이어 각처에서 보내온 축사(일본의 오에 겐자부로와 독일의 권터 그라스 등) 소개, 안건 제안과 그에 대한 약정 토론으로 진행된 대회는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그러면서 세 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하나는 남과 북의 작가들이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고 매년마다 작가대회를 치른다는 것, 그리고 현재 북에서 발간되고 있는 잡지 ‘통일문학’을 남과 북이 함께 발간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남북 및 해외작가들을 대상으로 ‘6․15 통일문학상’(상금 3천만 원)을 제정한다는 것.
대회 후 우리는 3층 연회장으로 올라갔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크고 고급스런 샹델리에가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있는 연회장 정면엔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있고, 6명씩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에 술과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시중은 흰 제복을 입은 열 일고여덟 살 먹어 뵈는 소년들이 들었다. 그들은 잔이 비워지면 재빠르게 다가와 술을 채웠는데, 평양 소주는 우리나라 소주보다 훨씬 독했다.
우리 자리에는 북의 민화협(남북간 민간단체 통일사업을 총 주관하는 단체, 민족화합협력위원회의 약자)에서 나온 사람, 평양 출판사에 나온 사람, 그리고 소설 쓴다는 작가 한 사람이 앉았다. 난 주로 민화협의 김학송이란 자와 이야기했는데, 나이 30대 중반, 김일성 종합대를 나온 그야말로 인텔리였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데 가장 크게 주안점을 두는 게 뭡네까?”
“교원으로서 학생을 지도하는 데 가장 큰 문제가 뭡네까?”
그쪽에서 물어온 질문. 그물이 삼천 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다라는 속담처럼 어떤 개념, 주제, 철학 등을 중시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남쪽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가 ‘인터넷’ ‘게임’ 등에 관한 말이 나오면서 대화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에서는 엄연한 생활 현실이었지만 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대회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니 23시가 넘었다. 늦었지만 그제야 여유를 갖고 방 내부를 둘러본다. 탁자 위에 놓인 필기구가 1mm짜리 샤프 연필이다. 볼펜이 아닌 샤프라는 점이 이채로웠다.
여기서 평양의 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평양의 밤은 깜깜하다. 많지 않은 가로등에도 최소한의 불만 켜 놓았다. 거리의 교통 신호등도 없었는데 아마 전력난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웠다. 그래도 잘 보면 사람들이 다녔다. 하기야 어둡기는 해도 평양이 여성들이 걷기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지 않던가.
“저쪽으로 주체사상탑에서 밝혀놓은 봉화가 보였는데 오늘은 잘 안 보이네.”
옆에서 같이 유리창에 코를 박고 있던 신현수 시인의 말이다. 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의 밤, 남쪽의 어느 조그마한 면 단위 밤경치를 떠올릴 듯한 그 캄캄함에 북쪽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대번에 느껴진다.
평양은 평양인데 한편으로는 마치 집을 잠시 떠나 어딘가로 M․T를 떠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그 정체를 알겠다. 언어 때문이다. 동일한 언어, 모국어를 쓴다는 것, 말이 통한다는 것은 어떤 이질적 문화 요소들을 극복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됨을 깨닫는다.
평양과 관련한 이야기 몇 가지를 더 한 후 다음 행선지인 백두산으로 넘어가자.
평양은 그야말로 계획도시이다.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의해 지상 30cm 이상 되는 모든 건물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 완전 폐허 위에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러다보니 모든 도로와 건물이 철저히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대동강 변 꺾이면 꺾인 채로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그래서 평양을 유경(柳京) 이라고도 하며, 정주영씨가 세운 체육관도 ‘유경 정주영 체육관’이라고 함.)는 자연의 그윽함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고,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오가는 행인과 퇴근 후 아이의 손목을 잡고 거니는 부부의 얼굴에서 서울 시민과 다를 바 없는 인상과 세련된 풍모가 엿보였다.
교통수단은 그야말로 1960년대 식 전차에서부터 최고급 외제 차까지 공존하고 있었다. 전차와 궤도차의 레일이 일반 차도 한 가운데 나 있고, 찻길에 중앙선이나 횡단보도 표시 등도 없었다. 차가 많지 않아 교통 안내 봉사원이 일일이 지도했으며 어느 곳에서나 좌회전 우회전 U턴이 가능했다.
평양의 최중심부에 자리한 건물은 인민대학습당이다. 이는 김주석의 교시로 그렇게 지었다는데, 모든 인민들이 언제든지 들어와 책을 보고 모르는 것을 대기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물을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평양뿐만 아니라 북한에는 관광지에 서점과 그림 파는 매대(매점)가 있다. 남한에는 관광지에 기념품 가게나 음식점 술집 등이 많은데, 북엔 그러한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없고 서점과 그림 파는 곳은 반드시 있다. 고려호텔에도 3층 로비에 서점과 그림 매대가 있었는데, 서점에 들어가 보니 여러 책이 눈에 띈다. 의학 민속 등과 관련한 전문 서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체제에 관한 이론이나 선양 서적들이다. 이채로웠던 것은 북에서 발간하는 ‘통일문학(계간)’에 남측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는 점, 북으로 간 장기수 어른들의 자서전이 한 사람 당 한 권씩 나와 있었다는 점, 그리고 북의 오영재 시인이나 리호근 시인 등이 펴낸 ‘6․15 민족작가대회’에 즈음한 기념 시집이 출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곳에서 책 몇 권, 민요 테이프, 그리고 그림 매대에서 1급 화가 리광철씨가 묘향산 ‘무릉폭포’를 그린 그림을 샀다. 그림을 사며 리광철씨와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북에는 전문 화가들이 1,2,3급으로 나뉘어지며, 3년에 한번씩 ‘성과’를 중심으로 심사하여 등급을 조정한다고 한다. 그림 판매 대금은 일부는 화가 개인이 갖고 나머지는 국가에 바치는 식으로 처리되며, 기본적으로 월급을 받고 생활하며, 의료와 교육 문제만은 국가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옥류관의 냉면, 민족식당의 단고기 식사, 개선문, 김주석 생가인 만경대, 1949년 4월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 선생 등이 38선을 넘어 남북연석회의를 가졌던 곳(쑥섬)에 세워진 통일전선탑, 그리고 어린 유치원생부터 청소년까지 전문적 기예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참관, 그곳에서 보았던 공연.
북에는 각 도마다 ‘문화회관’이 있고 전국 단위에 ‘문화궁전’이 있다. 각 학교에서는 ‘소조’활동(남한의 클럽활동이나 특기적성교육 정도)을 통해 문화와 예체능에 대한 소질을 기르는데,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을 선별해 도 단위에서 교육하는 곳이 문화회관이고, 그 중에서도 국가 차원의 전문적인 특기를 길러주는 곳이 ‘문화궁전’이다. 우리는 그림, 자수, 거문고, 가야금, 성악, 체조, 수영 등을 훈련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들이 모여 하는 공연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평양의 ‘교예(서커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헌데 그 점이 우리를 서글프게 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어린 학생들을 단련시켰으면 저렇게 어른 뺨치듯 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나의 거푸집에 쇳물을 들이붓고 원하는 형태의 인간을 찍어낸 것 같았다. 나는 손세실리아 시인과 돌아오는 차 안에서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들 세대만 해도 어쨌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통일의 필요성을 심정적으로나마 인정하는데, 우리 다음 세대인 아이들의 경우, 다시 말해 남한의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경우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는 거였다. 이 점은 남한만이 아니라 북도 마찬가지. 그렇게 볼 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만으로는 부족하고, 통일을 하되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앞으로 더 중요할 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과 북의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너무 심하고, 특히 이산이나 분단의 아픔을 겪어 보지 못하고 자란 남북 학생들의 경우 통일이 되길 원치 않는 그런 학생이 점점 더 늘어가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식의 통일을 이루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평양은 한 마디로 이렇다고 말하기에 어려운 곳이다. 건물을 짓느라 배수로를 파는데 포크레인 한 대 보이지 않는다. 구릿빛 번들거리는 피부의 사내들이 웃통을 벗어부치고 삽을 든 채 달려들고 있다. 헌데 그런 나라에서 세계 최고층 빌딩인 유경빌딩을 짓다 말았다. 평양에서 남포까지 약 36km의 고속도로를 정말 삽 하나 가지고 맨손으로 놓았다고 한다. 이 무모함. 그리고 그것이 또 나름대로 통하는 이 기이함. 아파트 층층마다 화분에 심어 내놓은 김일성화(花), 김정일화. 하늘을 찌르고 있는 주체사상탑과 그 꼭대기에 타오르고 있는 붉은 봉화, 지하 1백 미터 깊이로 굴을 파서 원폭에도 끄덕없다는 지하철, 그리고 묵묵히 거리를 오가는 인민들.
“평양 정도만 돼도 그래도 사는데 괜찮겠는데, 문제는 다른 지역이겠지요.”
손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양에서 보낸 이틀 간 아쉬웠던 점은 원래 일정에 들어 있던 ‘재북인사묘’ 참관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듣기로는 그곳에 이광수나 안재홍 같은 이들의 무덤이 있다는데,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공개한다고 했는데, 우리들 중 연로하신 분을 중심으로 한 대표단에게만 공개하여 아쉬웠다.
3. 백두산
백두산 호랑이는 어떻게 우는가? ‘따웅’하고 운다. 그렇게 운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예전에 조기천의 혁명적 서사시 『백두산』을 읽으며 알았다.
그 백두산이다. 이른바 북의 사상적 모태로서 인민의 의식 속에 뿌리를 박고 틀어 앉은 혁명의 산. 백두산은 그들에게는 일제로부터 조국해방을 안아오기 위해 피 흘리며 투쟁했던 혁명의 성산이요, 해방 이후 주체사상을 확립하여 인민을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 단결시켜내기까지 그물코의 벼리와도 같이 솟아 있는 산이다.
평양에서 백두의 품에 있는 삼지연 비행장까지는 50분 남짓 걸렸다. 삼지연 비행장. 어느 시골의 한적한 역사(驛舍)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고즈넉함이 고원지대의 서늘한 바람결에 묻어나는 곳. 하늘도 바람결도 땅에 난 풀들도 여기서는 다르다. 해발 1400여 미터에 위치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김해화 시인은 벌써부터 앙증맞은 야생화 찍기에 여념이 없다. 화장실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큰일’을 보고나서는 한 삼십여 미터 떨어져 있는 물통에서 물을 퍼다 부어야 한다. 헌데 그게 전혀 이상스레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약간의 휴식 후 우리는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끝도 없이 기어들어가는 산악 길. 좌우 가지를 무성히 늘어뜨리고 있는 이깔나무 숲을 헤치며, 덜컹대며, 두 시간 이상 달렸을까, 차가 기어를 바꾸고 악셀을 다시 밟아 부릉 부르릉 진저리를 치며 그나마 달려오던 큰길을 버리고 가파른 샛길로 접어들자마자, 장대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폭풍에 버금가는 바람이 창문을 때리고 우박 쏟아지듯 빗방울이 쏟아진다. 모두들 감탄, 백두산의 일기가 험하다더니 과연, 한 마디씩 한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백두산 밀영(密營). 밀영이란 일제시대 항일투쟁 당시 혁명의 지휘부와 참모부 그리고 유격대원들의 비밀 아지트가 있던 곳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여 산악의 큰 바위에 ‘정일봉’이라는 글씨가 글자 하나에 서너 살 먹은 어린애 만하게 씌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린 저마다 우비에 우산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도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비. 잠시 후면 갤 거라고 하지만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다. 나는 신현수 시인과 같이 우비를 뒤집어쓰고 밀영의 추녀 끝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분 홍석중 선생 아냐?”
바라보니 강영주씨(성신여대 교수, 벽초 홍명희 연구의 대가)가 홍석중 선생과 우산을 나란히 하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난 개인적으로 홍석중 선생의 소설『높새바람』과 얼마 전 창비사에서 주관하는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황진이』를 읽은 터여서 더없이 반가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우린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 전에 『황진이』를 읽으면서 가졌던 의문 하나, 소설에서 자음 ‘ㄱ'을 ‘기윽’이라고 썼는데, 그게 사실인가를 물었다. 남한에서는 ‘기역’이라고 써야 맞는데, 혹 오타가 아닌가 해서였다. 선생 왈,
“이쪽에선 ‘기윽’이라고 쓰지. 그게 더 자연스러우니까.”
비는 후둑 후두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내린다. 우리는 군복을 입은 안내원 동무의 뒤를 따라다니며 항일 유격대의 밀영을 돌아보았다. 흥미로운 건 유격대 참모부의 문손잡이가 쇠로 된 문고리가 아닌 노루발쪽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온이 영하 3-40도까지 떨어지다 보니 겨울에 쇠로 된 문고리를 잡으면 손에 쩍쩍 달라붙어, 노루발을 끊어 문고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생가 앞에서 우리는 북의 홍석중, 남대현 선생(장편소설 『청춘송가』의 저자)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두산 밀영을 보고 숙소인 베개봉 호텔로 내려왔다. 베개처럼 생긴 봉우리에 지은 호텔이라 하여 베개봉 호텔인데 남쪽의 여관 급 정도 될까. 온수도 나오지 않고 TV도 나오지 않고 전구도 30촉, 다만 한 가지 백두산 속이어서 공기 하나는 끝내준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이 베게봉 호텔은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었는데, 우리에게 특별히 처음 공개하는 거라고 했다.
짐을 풀고 로비에 나왔다. 역시나 서점과 그림 파는 매대가 있고 기념품과 특산품을 팔고 있다. 거기서 부채를 샀다. 부채 하나의 가격이 우리 돈으로 250원 남짓. 북한의 물건 값은 남한과는 정 반대다. 손으로 만든 것들은 모두 값이 터무니없이 싸고, 공장에서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비싸다.
저녁 식사 전 산책을 하러 나오는데, 약간의 술렁임이 있다. 내막을 알고 보니 남쪽 작가나 기자 가운데 북으로부터 소위 ‘경고’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북의 민화협 사람들이 우리와 동행하며 이른바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주의를 촉구해온 것이다. 소설 쓰는 이 아무개는 말을 삐딱하게 한다고 해서, 모 신문사의 기자는 더럽고 후미진 곳만 골라 사진 찍는대서, 등등의 이유로 경고가 떨어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우스개 삼아 산책에 나섰다. 이깔나무 숲 사이로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산악도로. 아마도 집단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노래를 불러 제끼며 윗도리를 벗어든 채 트럭을 타고 달려 내려온다. 북의 운전사들은 웬만해서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그 울퉁불퉁한 커브가 심한 산길을 가차 없이 내달린다. 소설 『고요한 돈강』에 나오는 코작크인들 같다. 독한 화주를 입에 털어 넣고 털이 숭숭 백힌 도야지 고기를 그것도 날것으로 뭉텅뭉텅 썰어 입에 넣고 질겅거리는 북쪽 고원의 사내들인 것이다.
산길에 안개가 자욱이 깔린다.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산새의 울음에 숲의 정적이 더욱 깊어진다. 돌아오는 길 샛길 공터에 정일근 시인과 소설가 이대환이 감자를 먹고 가라며 히죽거린다. 웬 감자? 가 보니 모닥불을 피워 감자를 두 무데기 구워 놓았는데, 북의 인민 두 사람이 불을 헤쳐 꺼내준다. 백두산 감자. 십년 묵은 돼지 불알 정도 되는 크기다. 껍질을 벗겨 먹으니 이내 입술이 까매진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남쪽의 리버럴리스트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다.
그날 밤 음주는 절대 금지. 다음 날 새벽 02시 30분 기상, 늦어도 03시에는 차를 타고 천지(天池)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 백두산 일출에 맞춰 이번 작가대회의 최고 절정이라 할 ‘통일문학의 신새벽’ 행사가 있어서였다. 대충 정리하고 버스에 오른 시간이 새벽 3시 경. 하늘엔 별이 총총했고, 보름을 갓 넘긴 달이 휘엉청 떠 있다. 끝없이 이어진 검은 이깔나무 숲을 헤치며 버스가 달린다. 자작나무인지 봇나무인지 그 허연 줄기가 마치 유령처럼 나타났다 스쳐 사라진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점점 키가 낮아지던 숲이 끝나고, 펑퍼짐한 구릉이 펼쳐진다. 해발 2천 미터쯤에 형성되어 있다는 삼림분포 한계선을 지나 고산지대에 들어선 모양이다. 차창 밖으로 키 작은 야생화들이 거센 바람에 몸살을 앓고 있다. 말로만 듣던 담자리꽃, 비료용담, 물싸리, 분홍바늘꽃, 범꼬리, 하늘메발톱꽃 등이다.
그때 망망한 운해 저 멀리 지평선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바짝 조바심이 일었다. 이러다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해가 떠오르지 않을까? 차가 마지막 가파른 숨을 토해낸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 같은 구릉, 그것도 달빛 속을, 여남은 대의 차량들이 눈에 불을 켜고 줄지어 하늘로 오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게 4시 40분 경. 다행이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동쪽 운해의 끝자락은 마지막 산통을 하는 듯 한껏 붉은 빛으로 요동치고 있다. 바람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분다. 모두들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얼굴엔 환의의 빛이 흘러넘친다.
“정말 운이 좋다. 난 백두산을 지금까지 다섯 번 올랐는데 천지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시인 이근배 선생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긴 누구나 마찬가지. 정말 천지를 사이에 두고 왼쪽엔 달 오른 쪽엔 해가 똑같은 크기로 떠 있었으니까. 대단한 장관이었다. 일년에 20일 정도밖에 볼 수 없다는 그 천지를, 60년 만에 만난 남북의 작가들이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통일맞이 문학의 신새벽’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회는 북의 리호근 시인과 남의 은희경 소설가.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부는지 전날 새벽까지 술을 드셨다는 신경림 선생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 내가 곁에서 부축해드렸는데, 허, 이게 웬일? 선생의 몸이 짚단처럼 가볍다. 너무 마르셨다. 홍석중 선생은 달변이었다. 선동가였다. 마이크 앞에 서자 ‘6.15 통일시대의 문학’을 열어 나가자라는 취지의 말씀을 거침없이 쏟아놓는다. 행사의 대미는 소설 쓰는 정지아씨가 김남주 시인의 시「조국은 하나다」를 낭독하는 것으로 끝났다.
우린 너나없이 어우러져 부둥켜안고 사진을 찍었다. 향도봉과 장군봉 사이 푸른 눈을 뜨고 있는 천지를 배경으로, 이미 솟구쳐 찬란하기만 한 해를 배경으로 얼싸안고 웃고 만세 불렀다.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친다. 돌아보니 정일근 시인이다. 어깨에 멘 가방에서 평양 소주 한 병을 꺼낸다. 요리 한잔 드소, 하며 병뚜껑을 내민다. 조국통일 사업도 한 잔 하며 해야제, 장난기 서린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군락
천지(天池)를 사이에 두고
해와 달이 빛났다, 오누이 같았다
수 천 년 묵은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월이 뜬 것인데
그 사이, 새벽 세찬 바람이
우리들 머리칼 훌쳐 날려버릴 것 같았다
허걱,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동그란 눈이 짜개져 실눈이 되고 실눈의 속눈썹에 이슬 맺혔다
상류를 향해 치달아 오르는
연어 떼, 사정없이 물살을 치고 있었다
바람은 그렇게 낮은 군락 위를 휘몰아쳐 갔다
고원을 향해 천 개의 발톱을 세운 바람도
그러나 어쩌지 못했다, 한 뼘 남짓 될까 한
야생화 군락, 그 짱짱함
온몸으로 버팅기고 있었다
그 속에 소보록한 햇살의 눈부심 속에
은빛 모국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야생화의 꽃대처럼 낮게 나부꼈다
항아리의 둥근 배처럼 은은히 속삭였다
시큼한 김치에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어 끓인
김치찌개 모국어여
돌아오는 길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차창이 뚫어지도록 보고 또 바라보았다
백두산 행사를 마치고 삼지연 대기념비를 찾았다. 삼지연 대기념비는 짓푸른 삼지연 호수를 배경으로 군복 차림의 김주석 동상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항일유격대원들의 출정과 승리의 모습이 조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곳이다. 이른바 혁명의 고난과 승리의 위업을 조각 작품으로 표현해 놓은 곳인데, 북의 작가들이나 안내원들은 모두 김주석 동상 앞에서 추모의 예를 올렸다. 안내원은 조각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내력과 예술적 의미를 ‘위대한 수령님’이라는 말을 연발하며 설명했다.
날이 무더웠다. 햇볕이 머리 위에서 쨍쨍 내리쬐었다. 우리는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지급한 기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북쪽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모자를 쓴 이가 없었다.
북의 오영재 시인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연세를 묻자 일흔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고향이 전라도 장성이다. ‘김일성상’을 수상한 북의 계관시인기도 한 선생은 북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난 전에 선생이 쓴 산문 「나의 발자욱」을 읽은 터여서 고향에 대해 물었다. 말씀하시는 선생의 눈자위에 이슬이 비친다. 하얀 와이셔츠 차림에 검고 주름진 얼굴. 머리칼 새새이 땀이 배었다. 내가 모자를 벗어 권해드리자 사양하신다. 몇 번을 더 권하자 그제야 받아 머리에 올린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데, 앞서 가던 홍석중 선생이 뒤돌아보며 하시는 말씀.
“오 선생이 모자를 쓰니깐 혁명적 기운이 싹 사라졌어. 북조선 최고의 시인이 모자를 쓰면 되갔오?”
모두 다 웃었지만 속이 뜨끔했다. 오 선생도 얼른 모자를 벗어 내게 건넨다. 농담이었지만 언중유골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모자들을 안 썼구나.
일행이 같이 걸었다. 홍 선생이 다시 말한다.
“우리말에 대한 어원을 연구하는 이가 없어요. 누군가 하면 참 의미 깊을 텐데.”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추모한다고 할 때의 그 ‘추모’라는 말도 사실은 ‘춤’에서 왔다는 거야. 옛날에 사냥을 하고 나서 춤을 추면서 추모의식을 갖췄겠지.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어요.”
몇 마디 안 되는 말이었지만 대단한 지적이었다.
숙소인 베개봉 호텔로 다시 왔다. 점심 먹고 평양으로 돌아가 묘향산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호텔 기념품 매대에서 백두산 야생화 표본집을 샀다. 내 옆에서 소설가 공지영씨가 맥주를 산다. 목이 마르던 터라 우리도 맥주를 사려는데 북에서 만든 맥주는 다 떨어지고 일본산 맥주만 남았다고 한다. 일본산 맥주는 팔아주고 싶지 않아, 공지영씨에게 맥주 한 병만 넘기라고 하자, 컵을 구해주면 한 병을 주겠다고 한다. 식당으로 갔다. 여성 접대원에게 컵을 달라고 하자 컵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다시 잔이라고 하자 그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뭐야 이거? 정말 희한하군! 속으로 중얼대며 물 마시는 시늉을 하자, 그 여성 동무 그제야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며, “아, 고뿌”, 이런다. 난 순간 황당했다. ‘고뿌’보단 ‘컵’이 낫겠다, 투덜대며 컵 네 개를 얻었다. 해방 후 일제 잔재를 말끔히 청산했다는 북에서 잔을 ‘고뿌’라고 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4. 묘향산
묘향산은 우리나라 5대 명산 중 하나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금강이 수려하고 지리가 장엄하다면 묘향은 수려하고도 장엄하다고 했다. 그러나 산 밑에서만 왔다 갔다 했으니 묘향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묘향산은 평양에서 약 160km쯤 떨어져 있다. 평안도와 자강도 사이에 걸쳐 있는데, 처음에는 태백산이라고 부르다가 산에서 묘한 향기가 난다고 하여 묘향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특히 김주석이 이 산을 몹시 사랑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뒤에 이야기할 국제친선전람관을 이곳에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묘향산 가는 길에 북의 인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차창 밖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여름철의 햇빛을 흠씬 받아먹고 자란 농작물들이 성하의 짓푸름을 더해가고 있었는데, 이례적인 것은 논과 밭 사이 이 층 삼 층짜리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있다는 점이었다. 옆에 앉은 신현수 시인이 말한다. 김주석의 지시로 가능한 농민들이 일하는 일터에서 가깝게 집을 지으라고 해서 저렇게 들 한 가운데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럴 듯했다. 허나 단독주택이라기보다는 임시로 거처하기 위한 가건물 같다고 할까?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더욱 그런 인상을 주었지만 아무튼 생활 형편은 더없이 초라하고 힘겨워보였다.
어두워서야 향산호텔에 도착했다. 역시 TV는 나오지 않고 전화기는 다이얼식. 저녁식사를 마치고 공연을 관람했다. 부르는 노래들이 새로 작곡한 민요였는데 내용에 한결같이 ‘수령님’ ‘장군님’ 등의 말이 들어가 있었다. 평양에서도 그랬지만 공연을 보는 동안 불쾌감이 들었다. 꼭 저래야만 하나, 노래에서마저 저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꼬리를 물었다. 호텔 로비 매대에서 묘향산에서만 난다는 석이버섯(돌버섯)과 다른 나물을 샀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났다. 묘향산의 새벽 공기를 맡아보고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호텔 문을 나서자 이상한 한약 달이는 듯한 냄새가 난다. 산 전체가 안개와 새벽의 정적에 촉촉이 젖어 있는데, 은은히 솔향기처럼 번져오는 향기. 앞을 바라보니 수 백 년 묵었을 울창한 수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랬다. 그 빽빽한 향림(香林)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잡티 하나 섞이지 않는 신선한 새벽 공기 속에 녹아들어 바람결에 우리를 감싸고 흐르는 거였다. 향산(香山), 정말 이래서 향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돌아보니 15층짜리 우리가 묵었던 향산호텔이 거대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특이한 것은 이 호텔 역시 김주석의 지시에 따라 자연 경관을 최대한 해치지 않기 위하여 삼각추 형태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산책에 나섰다. 고요가 묻어 있는 새벽 길가에 달맞이꽃, 금계국, 개망초 등이 피어 있다. 헌데 감탄에 감탄을 자아낸 것은 산의 발등을 적시며 흐르는 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깨끗한 물을 본 적이 없다. 강원도 어랑천에서도 동강 어귀에서도 어렸을 때의 내 기억 구석 구석을 더듬어보아도 묘향산 자락을 적시며 흐르는 물처럼 깨끗한 물을 본 일이 없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바닥이 숙었으면 숙은 대로 솟았으면 솟은 대로 산세의 흐름을 따라 유연히 흐르는, 푸른 듯 하면서도 맑고 맑은 듯 하면서도 은빛 물무늬를 잔조롭게 반짝이는, 사춘기적 살 오른 오동보동한 처녀의 손등 같기도 하고 큰 구름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하늘 길을 가는 작은 애기구름 같기도 한, 그 물! 바위틈을 감돌아 혹은 굽이쳐 새벽안개를 부드럽게 감아올리며 흐르는 물!
주지하다시피 북은 그동안 금강산 일부를 관광지로 내놓았고, 이어 백두산도 그럴 것으로 현대 측과 약조하였다. 좋은 일이다. 앞으로 더 그런 구역이 넓어져야 한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는 ‘자본’이 들어가는 땅은 망한다.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묘향산이 만일 자본화의 대상이 된다면? 두고 볼 필요도 없이 하루아침에 끝장날 것이다. 향기 묻어나는 새벽공기엔 코를 찌르는 매연으로 숨쉬기조차 어려울 것이요, 쓰레기, 악취, 시궁창, 오폐수, 오, 하느님!
아침식사 후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했다. 그곳은 김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각국의 수반 들에게서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1978년에 건립된 6층짜리 본관에는 김주석이 157개국에서 받은 선물 214,093 점이 전시되어 있고, 별관에는 김위원장이 163개국으로부터 지금까지 받은 선물 53,419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 마디로 세계에서 보내온 보물이란 보물은 모두 모아놓았는데, 안내원 동무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주석님과 장군님께서 이렇게 세계 정상에 있는 유수한 정치경제 지도자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선물을 받았는데, 하나도 개인적으로 꼬불치지 않고 그 가치를 인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내놓으셨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계의 온갖 진귀한 보물이란 보물은 다 모아놓은 듯 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남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 거의 모두가 북에 선물을 했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금송아지와 자동차를, 이건희는 컴퓨터와 대형 티비 등을 보냈고, 김우중이 보낸 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치인 중에는 전두환이 보낸 선물이 가장 많았고, 하다못해 북의 문제라면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던 김종필이 보낸 선물까지 있었다. 게다가 남한의 대표적 보수 신문 중 하나인 동아일보는 자기들 신문에 났던 김주석의 보천보 전투 기사를 동판으로 떠서 선물하기도 하였다. 보천보 전투는 김주석이 항일 투쟁을 하던 당시 처음 국내로 진입한 전투였는데, 보천보 전투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북의 사상과 역사를 모두 인정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선물을 구경하다가 어떤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넓은 방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나는 잠시 숨이 멎을 뻔했다. 김주석의 밀랍 상을 모셔놓은 방이었는데 실물과 하도 똑같아서 금방이라도 김주석이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 같았다. 중국에서 만들어주었다는 이 밀랍 상은 삼지연을 배경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등신대의 크기로 안경, 양복, 구두, 넥타이까지, 어쩌면 그렇게 실물과 똑같은지 정말 놀라웠다. 듣기로는 밀랍상의 온도까지 36.5도로 맞춰져 있다는데,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북의 여성 안내원들 대부분은 밀랍상 앞에서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옛날 묘향산에는 절이 많았다고 한다. 360개나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해설 동무가 보현사 입구에서 우릴 맞아 주었다. 보현사는 서산대사와 관련한 유물이 많고 또 팔만대장경도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안내원 동무의 해설이 지루해 샛길로 빠져 어느 둥구나무 그늘에 앉았는데, 어느 새 소설가 김훈씨가 시멘트 의자에 넉장거리로 뻗어 있다. 자는 지 꿈꾸는지, 아니면 쏟아지는 매미소리에 귀를 강구는지, 숨쉬는 배가 남산 만하게 올락낼락거린다.
향산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사리, 취나물, 돌버섯, 표고버섯, 참나물 등 각종 산나물과 송어튀김 소고기 볶음 등이 나왔는데, 산나물은 호텔의 접대원이나 의례원들이 손님이 없는 날 직접 산에 올라가 채취해온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평양으로 향했다. 작가대회 폐막식이 남은 것이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여름 북녘의 들판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었고, 땅도 붉은 황토였다. 밭 가운데 한가로이 매여 있는 황소. 중국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드넓은 옥수수 밭에 엎드려 일하고 있는 인민들.
돌아오는 길, 우린 살수(청천강) 대교에서 내려 기념 촬영을 하였다. 살수는 깊이는 알 수 없으나 강폭이 넓었다. 그 옛날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침략한 수나라 군사를 몰살시켰던 곳. 옛 이야기를 안고 강은 흐르고, 일정에 쫓긴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오르고.
5. 다시 평양
작가대회 폐막식은 개막식이 열렸던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다. 폐막 연회에서 우리 자리에 북의 작가 세 분이 앉았다. 소설가 김청람 선생, 아동문학가 한 분, 또 다른 소설가 한 분. 수인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동문학 하시는 분이 언성을 높였다.
“남쪽에선 아동문학을 홀대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인즉 개막식 때 남쪽 작가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시인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 등등 모두를 말한 말미에 아동문학가를 소개했는데, 그걸 보고 속으로 분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동문학을 남에서는 꼬래비로 천대한다는 거였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북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 아래 문학은 거저 시 소설 그리고 아동문학 이렇게 세 분야가 앞뒤 없이 나란히 가고 있시오”
만나자 마자 마치 꾸지람하듯 열변을 토하는데, 은근히 밸이 꼴렸다. 하여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남쪽에서도 아동문학은 엄연한 문학의 한 영역이자 주체요, 그것을 생산해내는 작가들 역시 풍부하며 시장 또한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형성돼 있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었는데도 그는 막무가내다.
폐막식 내내 나는 김청람 선생하고 이야기했다. 김선생은 예순 다섯에 평양 토박이. 일찍이 문예창작단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집에서 창작하고 있는데, 자녀들 모두 결혼하여 큰아들 집에서 부인과 함께 산다고 했다. 기룸한 얼굴에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데, 폐가 안 좋아 병기(病氣)가 얼굴 밖에까지 나 있다.
소설작법, 그 속에 관철되는 창작 방법론으로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하여, 6․70년대의 북한 문예작품이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변모되게 되는데 그렇게 된 배경, 90년대 이후 북의 문예창작의 주류 등에 대해, 내가 묻고 그분이 답하는 형식이었다.
“조선생은 글 쓴지 얼마나 됐소?”
“올해로 등단한지 꼭 20년입니다.”
“그동안 성과는 어느 정도 냈오?”
“네? 성과요?”
“책 말이오, 책.”
이렇게 뻗어나간 문학 이야기는 술잔을 사이에 두고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서로의 집안 이야기, 남북한 교육 이야기, 생활 이야기, 등으로 가지를 쳐 나가다 다음 말에서 한 머리 돌렸다.
“지금까지 평생 글을 써 오셨는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내 말에 양볼이 옴쏙 들어가도록 담배를 빨아대며 하시는 말씀.
“작가가 글을 써야지요. 난 후회 안 해요. 조선생도 살아 있는 한 글을 써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작가들은 글로 만나야 돼요. 나중에 좋은 때가 오면 우리도 글로 만날 수 있을 거요.”
그러면서 테이블 밑으로 내 손을 꽉 잡아 쥔다.
선생이 자신의 주소를 적어준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주소를 적어달라고 한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그런 때가 되면 서로가 찾아보자고 한다. 우린 연회 후 껴안고 또 껴안았다. 포옹을 풀지 않은 채 그분을 배웅하면서, 북쪽 작가들의 대기실 문 앞까지 따라가 이별을 아쉬워했다.
5. 마치며
<장면 1>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내 옆자리에 이번 대회에 함께 했던 국정원 관계자가 앉았다. 그가 대뜸 묻는다. 이번 방북 소감이 어떠냐고. 한 마디로 말하긴 좀 어렵겠다고 했다.
실망하는 눈치이다. 북에 대한 찬양성 발언이 나오길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그렇게 시작된 그의 이야기. 고려항공을 가리키며, 이 비행기 이거 쏘련서 들여온 30 년 된 거요, 이거. 이 부채 좀 봐. 세상에 비행기 안에 부채를 놔둔 애들은 얘네들밖에 없다니까. 또 이 안전벨트는 어때요. 하나같이 다 돌돌 말려 있죠. 먹고 나서 할 일이 없는 애들이니까. 세상에 누가 비행기 안전벨트를 이렇게 손으로 말아 줍니까. (로동신문을 가리키며) 김정일이가 또 군부대를 방문했구먼. 나는 건성으로 듣는 데 저 혼자 열심히 씩둑깍둑거린다. 그러는 그의 말에 북에 대한 노골적인 천시와 적대감이 묻어난다.
<장면 2> 애초에 인천공항에서 나와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해단식을 가지려 하였다. 허나 그리 되지 못했다. 세관을 나오는데 짐 검사가 유독 심해서였다. 특히 책자는 무조건 압류했는데, 이는 통일부와 우리들 사이 처음 한 약속과 다른 처사였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구입한 책 목록만 적어내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관에서는 정반대였다. 짐 꾸러미 하나하나를 칼로 찢어 책이란 책은 이 잡듯이 찾아냈다. 여기저기서 실랑이가 벌여졌다. 나는 끝까지 싸워 결국 뺏기지 않았지만, 그러면서 나와 보니 처음 가지려 했던 해단식은 자연히 무산, 같이 갔던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기원(紀元)은 하나의 점일까, 아님 요동치는 움직임일까?
어쨌든 이번 ‘6․15 민족작가대회’는 같은 모국어를 쓰는 언어의 형제들이 서로 다른 실체를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였다. 고리끼였다. “작가는 나라와 계급의 귀이자 눈이요 감각기관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의 이번 만남은 기존의 남북교류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나, 사람과 사물, 역사를 관찰하는 고도의 감수성을 지닌 ‘작가들이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적 교류는 바로 우리 민족의 내면적 소통이요 정서의 교환이며 사상과 생활 감정의 뒤섞임이고 체제를 뛰어넘어 ‘인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깝깝한 부분도 많았다. 큰 틀의 일정은 마련되었지만 구체적인 세부사안에서는 남과 북의 의견 차이로 일정이 늦어지거나 취소되기도 하였다. 가장 아쉬운 것은 앞서 말한 ‘재북인사릉’에 가 보지 못했다는 점, 원래 계획에는 들어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한 ‘묘향산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행사 기간 내내 북의 작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부족했다는 점, 등이다.
이해하자면 못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다면 정말 말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것이 바로 남북관계의 일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그들을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그들’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리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남과 북은 하나의 몸뚱이에 달린 두 개의 머리라는 점이다. 그런 기형적인 모습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하나의 머리가 병에 걸려 신음하면 다른 머리도 몸뚱이도 결코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담벼락이 높기도 하지만 그 밑으로 흐르는 물 역시 깊고 유장하다. 이번 대회 역시 그 동안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남북 작가들의 열망이 한 지점에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하나의 디딤돌이 놓여진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오랫동안 불구 상태로 있어 왔던 ‘모국어 권’ 문학에 생살이 돋아 나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