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핵심 논리인 '임나(任那)'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강단사학의 3대 거짓말인 "단군은 신화다." "한사군은 북한평양에 있다." "임나는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이다" 의 하나로서 특히 '임나 가야설'은 일본 극우파들이 한반도 침략을 위한 정한론(征韓論)의 논리로서 이용하고 있는 것 을 현재 강단사학에서 그대로 어어받아 학계의 정설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현재 '탁순'이나 '기문' 등의 임나의 지명을 모두 한반도의 위치로 비정 하고 이를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악질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미 임나 일본부의 논리는 현재는 일본 국사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과거에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해 일제시대에도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역사 였습니다.
반도의 남부에는 한족韓族이 살고 있었는데,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卞韓을 다스리는 세 종족으로 나뉜다. 모두 수많은 소국들로 이루어졌지만, 후에 마한은 백제국이 되었고, 진한은 신라국이 되었으며, 변한은 가라加羅 등의 나라들로 되었다. 가라 등의 나라들을 가리켜 하나로 임나제국任那諸國이라고 이른다. 이상의 나라들은 모두 일본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바다를 건너 일찍부터 서로 교류했다.
조선총독부 역사서 『심상소학국사』
임나(任那)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에서도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任那者 去築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쓰꾸시(기타큐슈)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 스진 65년 조
위 내용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는 내용만으로도 일본 열도 지역이며 내륙의 '한반도 남부'가 절대로 될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민족사학계에서는 임나의 위치에 대해서 '대마도', '큐슈', '오카마야' 등의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러 주장 중에서도 '대마도'의 위치가 유력한 이유는 임나의 '삼한(三韓, 삼가라)' 에 대한 교차 기록과 실제 이와 관련 지명들이 대마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 降於日本國 密令伺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而款曰 從今以後 永稱西蕃 不絶朝貢 故因以 定內官家屯倉 是所謂之三韓也 皇后從新羅還之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도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9년 조
일본어로 한(韓)을 가라(から)로 발음하며 또한 한자로 가라(加羅)라고도 표기 합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도 임나의 삼한(三韓) 즉 삼가라(三加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 有治曰國尾城.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 任那乃對馬全稱也.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任那)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任那 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 首邑之稱也.
임나(任那)가 또 나뉘어 삼가라(三加羅)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佐護加羅屬新羅 仁位加羅屬高句麗 雞知加羅屬百濟是也.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즉 대마도는 임나로서 삼가라(三加羅), 삼한(三韓)으로 되어 있으며, 좌호가라(佐護加羅)는 신라, 인위가라(仁位加羅)는 고구려, 계지가라(雞知加羅)는 백제에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환단고기에 언급된 지명들이 대마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도 않나오지 않는 계지(雞知), 인위(仁位), 좌호(佐護)의 지명들을 어떻게 알고 책을 썼을 까요?? 이런 내용을 통해서도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또한 『일본서기』 369년에 신라를 깨뜨리고 7국을 평정했다고 되어 있는데...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 加羅 七國
(야마토에서 온 군사들이) 모두 탁순卓淳에 집결해서 신라를 공격해 깨뜨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탁국啄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조
369년은 신라는 나물왕(奈勿王),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고구려는 고국원왕(故國原王) 시대였다. 이때 가장 큰 사건은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 9월에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친 시기입니다.
二十四年, 秋九月, 髙句麗王斯由帥歩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戸.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태자는〕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을 잡았는데, 사로잡은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黄.
24년(369) 겨울 11월에 한수(漢水)의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누런색을 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조
사서의 내용을 교차 검증해도 진실이 드러나는 데도 이것을 학계에서 사실이라고 믿는 것 자체가 한심한 상황입니다. 또한 해당 시기에는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 이라는 명칭은 백제 멸망 이후 부터 존재하는 명칭입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탁순', '기문', '반파' 위치도 모두 대마도로 비정해야 정확히 해석이 되는 부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박덕규 위원님의 영상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m9cGgZIbCbE